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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무예단     한국의 마상무예     마상무예 훈련     조선의 무과시험

인류의 역사 발전 흐름은 힘에 관한 의식과 통제를 통해 진행되어 왔다. 다시 말해 인간이 통제 가능한 자신의 힘을 이해하고 자신이 통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며 인류역사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러한 힘에 대한 고민 중 무예는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과 결합되어 오랜 세월 인류에게 전승되어 왔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말(馬)이라는 동물을 길들이고, 전쟁에 사용하며 진화된 마상무예는 역사 이래로 수 천년간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전투무예로 인식되었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가깝고도 먼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도 마상무예는 전투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화약병기의 발달과 함께 전략 전술의 개념이 진화하면서 마상무예 또한 이와 함께 소멸되었는데 1800년대 후반까지도 조선의 마상무예는 면면히 맥을 이어 왔다.


▲ 17세기 함경도 지역에서 열린 문무과 시험의 광경을 담은 북색선은도(北塞宣恩圖) 그림의 일부이다. 무과응시자가 말을 타고 달리며 짚 인형에 활을 쏘는 장면이다. 이처럼 달리는 말에서 활을 쏘는 것을 기사(騎射)하며, 특히 좀 더 효과적인 훈련을 위하여 짚 인형을 쏠 때는 기추(騎芻)라 한다. 한국의 미 19편, 중앙일보1985, 북색선은도 中 일부

조선초기 마상무예는 주로 기사(騎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기사(騎射)라는 것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으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우리 나라 마상무예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의 관료선출에 대한 가장 큰 특징은 무과시험을 실시한 것이다. 이는 문(文)과 무(武)를 새의 양 날개처럼 생각하고 그것의 대칭적인 발전으로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무과시험 과목 중에서 실기과목은 궁술(弓術)과 기마술(騎馬術)이 핵심이었는데, 특히 이 두 가지의 결합인 기사(騎射)는 합격여부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이렇게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은 조선초기 군사제도였던 오위(五衛)체제에 편입되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였다.

특히 조선초기 군사전략의 핵심은 선진후기(先陣後技)로 일단 상대방과 맞서 진을 짜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부대의 진법 운용을 통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진법에서 기마병(騎馬兵)은 진의 최선봉에서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리며 활을 쏘고 창을 휘둘러 적을 제압하는 선봉부대로 위상을 떨쳤다.


▲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 장면이다. 기사 시에는 일반 각궁보다 작은 동개궁이라는 작은 활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말 위에서 자유롭게 활을 쏘기 위함이다. 또한 화살은 시복이라는 부착용 화살집을 이용하여 고정하였다. 사진은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 진경표 사범의 기사 시범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전쟁개념은 큰 변화를 보인다. 일본에게 어이없이 20여일 만에 한양을 내주고 의주로 피난간 조선조정은 전쟁방식 변화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적의 탁월한 단병접전(칼과 창으로 무장하여 백병전을 치르는 것)과 조총의 화력적 압도에 의한 조선 군사 편제의 변화로 나타났다.

즉,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의 삼수병 체제로 전군의 편제를 빠르게 변화시켰는데, 이들 중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기마병은 각 군영의 전위부대로 늘 최전방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 그리고 평상시에 도성 안에서는 용호영(龍虎營)이 약 600여 명의 기마부대로 번(番)을 서며 도성을 방위하였다. 특히 기마부대로 중국대륙을 평정한 청나라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기마병의 강화는 국가방위를 위한 시급한 요구로 부상하게 되었다.


▲ 1777년(정조 l)에 장지항(張志恒)이 왕명으로 편찬한 병학통 중 마군(馬兵)들의 진법인 마병 학익진 그림이다. 이처럼 학이 날개를 펴듯이 도열한 후 좌군이 먼저 공격하고 우군, 중군의 순서로 돌진한다. 병학통은 무예도보통지와 씨줄과 날줄처럼 짝을 이루는데, 단체진법 훈련을 위하여 편찬된 책이다.

이후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리우는 정조시대를 거치며 조선의 마상무예는 완전한 모습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790년 4월 정조대왕의 명으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조선군사들이 익힌 지상무예 열 여덟 가지와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합한 조선무예의 최고 결정판 '무예24기(武藝二十四技)'를 그림과 설명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실학사상의 표상이었던 ‘금(今)’과 ‘용(用)’의 정신이 발현된 군사 무예서이다. 즉 오늘날(今) 우리에게 진실 되게 필요한 것을 만들고, 우리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사용(用)할 수 있도록 무예를 정리한 것이 바로 무예24기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다.


▲ 조선의 군사무예인 무예24기가 수록된<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무예 그림이다. 맨 위부터 기창, 마상쌍검, 격구, 마상월도, 마상편곤, 마상재 그림이다. 당시 궁중 화원들에 의해 세심한 필치로 그려진 무예그림이다.

이 중 지상무예 열 여덟 가지는 군사들의 단병접전을 위한 무예였으며, 여섯 가지는 기마병이 익혀야만 할 기창(騎槍),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편곤(馬上鞭棍), 마상월도(馬上月刀),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였다. [무예도보통지]에 기사가 제외된 이유는 이미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예는 굳이 교본이 없을지라도 누구나 쉽게 익혀온 터라 함께 수록되지 않았다. 이러한 마상무예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창(騎槍)은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 기예을 말하며, 조선 초기부터 무과 시험의 주요한 과목이었다. 주요한 기법으로는 말 위에서 전후좌우로 창을 휘둘러 적을 찌르는 기법인데, 조선건국 초기 여진족을 비롯한 북방의 오랑캐들을 방어하고 공격하기 위해 중점적으로 연마되었던 기예이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갑을창(甲乙槍)이라 하여, 두 사람이 짝이 되어 교전하는 방식이 그리고 삼갑창(三甲槍)이라 하여, 세 사람 혹은 세 대오가 둥근 원을 그리며 서로 겨루는 방식의 실제 전투방식과 흡사한 무예를 연습하였다.

마상쌍검(馬上雙劍)은 말 위에서 검 두 개를 사용하는 기예을 말하며, 특히 항우도강세, 손책정강동세, 환고환패상세, 운장도패수세 처럼 중국 무장들(항우,손책,유방,관우)의 이름이 자세에 사용되었다. 특히, 마상쌍검은 정면에 말 머리가 있으므로, 몸을 좌우로 많이 비틀어 양 옆의 적을 신속히 베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마상편곤(馬上鞭棍)은 말 위에서 편곤(일종의 쇠도리깨로 타격병기의 일종)을 사용하는 법으로 자루를 약간 짧게 하여 기병들이 항시 착용하였던 기본 무기였다. 보통 때의 연습은 편추(鞭芻)라 하여 짚으로 만든 인형을 세워두고 말을 타고 달리다가 편곤으로 내려치는 연습을 하였다.


▲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월도 그림 중 일부이다. 이처럼 달리는 말 위에서 거대한 월도를 휘두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병의 위용을 드높이는 기예로 평가되었다. 그림처럼 마상월도를 할 때도 활과 편곤은 늘 함께 패용하며 마상무예를 수련하였다.

마상월도(馬上月刀)는 말 위에서 월도를 사용하는 기법으로, 조선의 기병들이 필수로 익혔던 기예이다. 특히 월도의 무게와 길이 문제로 월도, 중월도, 청룡도 등으로 다양하게 무기를 변형하여 익혔다. [무예도보통지]의 그림 중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장수의 모습이 남겨진 것으로 보아, 실제 작업에 참여 했던 백동수(장용영 초관)의 초상일 가능성이 높다.

격구(擊毬)는 서양의 폴로(polo)와 비슷하며, 고려의 귀족들이 즐겨하였고, 여인들 또한 그 기술을 익혀 널리 말을 활용한 기마민족의 전통을 경기로써 이어지게 하는 기예이다. 그러나 1725년 이후 부터는 무과의 실기시험에서 제외되어 이후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격방(擊棒)이라는 놀이가 모든 계층에서 행해졌는데,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평민들까지 즐겨 행하였다. 여기서의 격구는 말 위가 아닌, 평지에서 걸으며 하는 일종의 골프형태의 보격구였다.


▲ [유영비감탈루]는 1700년대 조선 통신사일행의 날짜별 행적과 마상무예공연 기록을 담고 있다. 특히 제 9권에 실린 마상재 그림은 간단한 스케치 형태로 실제 공연을 보면서 급하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마상재 자세 중 마상도립으로 신기에 가까운 자세를 보며 많은 일본인들이 극찬하였다.

마상재(馬上才)는 말 위에서 일종의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정조 시대에는 조선의 모든 기병들이 필히 익혀야만 했던 기예이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적의 창칼을 이리저리 피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상도립이라 하여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는 자세가 인상적이다. 특히 일본의 통신사 일행으로 가서 시연을 보였던 기병들은 일본열도를 뒤흔들 정도의 칭송을 받았다.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된 후 오군영을 비롯한 지방의 군영에서는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기를 수련하였는데, 특히 정조의 친위군영이었던 장용영은 마상무예를 전담으로 하는 선기대와 지상무예를 담당하였던 능기군을 별도로 구성하기도 했다. 당시 선기대의 실력은 얼음이 언 좁은 논두렁 길을 쏜살같이 달리며 마상무예를 펼칠 정도의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였다.


▲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마상요도 장면이다. 말을 타고 가며 칼을 쓸 때에는 주로 기병대 기병이 서로 혼전할 경우 효과적으로 사용한 기예이다. 사진은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 최형국 단장의 마상요도 시범이다.

이후 정조의 급작스런 서거와 왕권의 급격한 약화로 조선 군사력의 선봉부대였던 마상무예는 점차 사라져 갔으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완전 소멸하기에 이른다.

현재에는 몇몇 무예단체에서 마상무예를 복원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 재정적 한계와 마상무예 중 낙마 위험성 때문에서 보급과 수련이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