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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패(藤牌)


척계광이 말하기를, "늙은 등나무(『본초습유(本草拾遺)』에 이르기를 성등[省藤]은 남방 심산에서 나고, 껍질은 붉으며, 크기는 손가락만 하며, 물건을 묶을 만하다. 『제민요술(濟民要術)』에 이르기를 과등을 둘레가 몇 치되고 무게가 대나무만 하여, 가히 대나무 껍질에 대체하여 선박을 묶거나 자리를 만든다) 손가락만한 것을 사용하여 골등(骨藤)으로 하고, 대나무 껍질을 촘촘히 감아 중심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안을 비우면 모든 화살이 들어와도 손이나 팔에 이르지 못한다. 둘레는 처마처럼 높이 솟아나서 화살이 이르러도 매끄러져 새거나 사람에 미치지 않는다. 안에는 등나무로 상하 두 개의 고리를 만들어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각 병사마다 하나의 요도와 하나의 방패를 잡고, 칼을 손과 팔에 싣고 한 손으로 표창을 잡아 던지면 상대는 반드시 [칼을 빼어들고] 급히 응한다. 방패를 따라 뚫고 들어가게 하려면 반드시 낭선으로 하여야 한다. 만일 낭선이 없으면 긴 무기로 하여야 한다."

또 말하기를, "북방에는 등나무가 없어서 버드나무에 가죽을 대서 대신한다. 호마가 빨리 달리고 또 회갑(투구와 갑옷)이 있으므로 반드시 표창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등패는 직경이 3자 7치로, 앉으면 은신하기 부족하여 조금 넓혀 중국식과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지금의 등패는 잡는 곳을 부드러운 뽕나무로 하여 중국식과는 다르다.

모원의가 말하기를, "근세에 조선인이 방패로써 조총을 막는데, 타당한 방법이다"라 하였다.

『병장기(兵仗記)』에 이르기를, "등패는 무게가 가볍고 단단하여 비와 습기를 두려워 할 것이 없고, 보병에게는 간편하다"고 하였다.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이르기를, "간과(干戈: 창과 방패)라는 이름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방패와 창이 서로 연관되어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개 오른손으로 단도를 잡은 즉 왼손으로 방패를 잡느다. 세속에서 방패라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염곡자록』에 이르되, "방배는 팽배(彭排: 彭은 방이다. 이는 방배는 적을 막고 공격하는데 있다)인데, 보졸용은 우륵배(牛肋排: 소 겨드랑이 뼈), 마군(기병)은 주칠배(朱漆排)를 사용한다."

척계광이 말하기를, "요도는 칼 길이가 3자 2치이고 무게는 1근 10량이다. 칼 자루의 길이는 3자이고, 칼날은 순강(純鋼)을 쓴다. 칼자루는 짧아야 하고 모양은 굽어야 한다. 여러 가지 완전패(宛轉牌: 작고 둥근패)에는 거리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표창 머리는 크고 길이는 5치이며, 무게는 4냥, 머리 직경 6푼, 길이 7자, 끝 직경 2 ~3푼, 주목(단단한 나무)이나 대나무 모두 된다. 철봉(鐵鋒: 쇠끝)은 무겁고 커야 한다. 자루의 앞이 무겁고 뒤가 가벼워야 한다."

『습유기(拾遺記)』에는 포희가 방패를 만들었다 하고, 『사기(史記)』에는 황제(黃帝)가 간과(干戈)를 만들 었다고 했으며, 『우서(虞書)』에는 양쪽 계단에서 간우(干羽: 깃으로된 방패)로 춤을 추었다고 하였다. 『시경(詩經)』「소융(小戎:兵車)」편에 용순지합(龍盾之合)의 집(集)은 '순간(盾干)으로 전한다. 몽고족이 유원(有苑)을 정벌할 때 중간(中干)으로 정벌 했다고 전한다.

정강성(鄭康成)이 말하기를, "몽(蒙)은 크다는 뜻이다. 또한 노(방패)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육도삼략(六韜三略)』의 「무익(武翼)」편에 '대로'라는 구절이 있다. 노는 큰 방패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적사미가 큰 수레를 만들어서 껍데기를 입혀 노(방패)로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부소(扶蘇)는 『주례(周禮)』「하관(夏官)」에 번순주(藩盾注)를 설했는데, 지금의 부소용어(扶蘇龍魚)와 같다"고 하였다.

『하도(河圖)』에 이르기를, "방패란 이름은 스스로 막는 것이다. 좌사(左思: 자는 태중[太中]이며 진[晉]나라 임치인으로 관직은 비서랑이다)의 부(賦)에, 집에는 학슬(鶴膝)이 있고, 집집마다 서거주(犀渠注)가 있다 했는데, 거(渠)는 순(楯: 방패)이다."

모원의가 말하기를, "『무경(武經)』에 실려 있는 방패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보병용인데 길고, 또 하나는 기마용인데 둥글다. 근세 남방에서는 대개 둥근 방패를 쓰는데, 이 둥근 방패는 등패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붉은 등갑이다"라 했다.

『도설(圖設)』에 이르기를, "붉은 등나무 50근을 석조(石槽)에 넣고 물에 담그어 보름만에 꺼내서 3일 말리고, 다시 석조에 넣어 물을 부어 이렇게 담그기를 1년간 하다가 햇볕에 바짝 말린다. 말려서 만드는 방식은 짜서 뚫고 모두 20번을 쪼개어 그 겉에 오동나무 기름을 바르면 그 껍데기는 가볍고 견고하여 능히 화살과 칼날을 막아낸다. 또한 삿갓을 만들기도 하고, 적과 대진하는 투구를 만들기도 한다. 또한 부드러운 등나무로 둥근 방패를 짜서 만들기도 한다. 가운데가 볼록 나오고 가장자리가 일어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송사(宋史)』「곽자(郭諮: 평주인으로 벼슬은 전중승[展中丞]이었다)전」에는 "곽자가 교묘한 생각이 있어서 스스로 무기를 만들었다. 조칙으로 각루(刻漏), 원순(圓楯), 독원노(獨轅弩), 생피갑(生皮甲) 등을 만들어 오게 하여 상감께서 칭찬 하였다. 이는 반드시 곽자가 창안하여 만든 보병용 둥근 방패이다. 대개 병용 둥근 방패는 옛날에 역시 이러한 법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옥해(玉海)』에 이르기를, "함평(咸平) 2년(999) 광첩군(廣捷軍)에 오지휘(五指揮)를 설치하였다. 황제께서 먼저 남방에서는 표창과 방패로 병기를 삼는다는 것을 들으시고 유사에게 명하여 만들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병장기(兵仗記)』에 이르기를, "송 태종(太宗)께서 남방에서는 표창과 방패로 병기를 한다는 말을 듣고 광덕군(廣德軍)에게 연습 하도록 명하였다. 표창을 사용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고 하였다. 남방을 이야기 하였고, 둥근방패를 이야기 하였은즉, 이는 반드시 등패법이 이미 송나라 초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무편(武編)』에 이르기를, "북적(北狄)을 제압하려면 먼저 그 기마법을 제압하여야 하고, 동이족을 제압하려면 먼저 선박법을 제압하여야 하고, 남만을 제압하려 하면 먼저 그 표창과 방패법을 제압해야 한다"고 한즉, 방패가 만(蠻)으로부터 나왔음을 알게 한다.

협도(挾刀)


1. 처음에 기수세 를 취하고 칼로써 머리 위를 쫓아 한번 휘두르고


2. 즉시 약보세 를 취하고


3. 그대로 칼로써 패를 쫓아 한번 휘둘러 저평세 를 하고 일어서서 금계반두세 를 하고 그대로 칼로써 패를 쫓아 한번 휘두르고 한걸음 나아가서 저평세 를 취하고


4. 일어서서 약보세를 취하고 칼로써 패를 쫓아 한번 휘두르고 한걸음 나아가 저평세를 취하고


5. 일어서서 몸을 뒤집어 곤패세를 취하고


6. 칼로써 패를 쫓아한번 휘둘러 한걸음 나아가 저평세를 취하고 일어서서 선인지로세를 하라.


7. 뛰어 한걸음 물러가서 매복세를 하고 또 한걸음 물러가서 매복세를 취하고 일어서서 몸을 뒤집어 곤패세를 취하고 또 칼로써 방패를 쫓아 한번 휘두르고 한걸음 물러 가서 매복세를 취하고 일어서서 선인지로세를 취하고 한걸음 물러 가서 매복세을 취하고 일어서서 몸을 뒤집에 곤패세를 취하고 또 칼로써 패를 쫓아 한번 휘두르고 한걸음 물러나서 매복세를 취하고 일어서서 약보세를 취하고 한발을 들고 한발을 둘러 칼을 휘두르고


8. 오른 편으로 향하여 한걸음 옮겨 사행세를 하고 마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