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전통무예연구소     무예24기 해설     Muye 24ki(ENG)     華城과 무예24기

수원 화성(華城)의 문화.역사적 의의

화성(華城)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근대초기의 군사건축으로서 동서양의 과학을 통합해 발전시킨 건축물'로 평가되어 우리 나라에서 다섯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조는 화산 아래 원래의 수원을 팔달산 아래 현재의 수원으로 옮긴 후,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천하명당 화산에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겨 쓰고, 그 5년 후인 1794년부터 현재의 수원에 사도세자의 묘소를 옹위하는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하였다.


▲ 은은한 조명 속에 살포시 앉아 있는 화서문. 한국전쟁 때에도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고 화성을 지켰다.

이때 정조는 사도세자 묘소가 있는 화산(花山)의 화(花)자를 따다가 같은 의미의 글자 화(華)로 바꾸어 이 신도시를 화성(華城)이라 명명하게 된다. 화성(華城)은 정조대왕의 강력한 의지와 그를 돕는 조정 재재다사(才才多士)들의 지혜가 결집되었고, 중흥기였던 조선의 튼튼한 국력이 뒷받침되어 화성(華城) 건설 공사는 신속히 진행되어서 원래 10년 예정이었던 공사는 2년여 만인 정조 20년(1796) 9월에 완료되었다. 정조의 지속적인 관심과 여러 실학자들의 참여로 화성은 당시 하이테크(Hi-tech) 기술의 집약체로 건설되었는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설계한 거중기(擧重機)가 동원되어 거대한 바윗돌이 움직여졌고, 성의 핵심부(核心部)에는 파손시 복구가 쉬운 벽돌이 사용되는 등, 기존의 축성술에 청조(淸朝)로부터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결합되어 당시로서는 최신의 공법 으로 최대의 효율성을 구현하였다. 그리하여 둘레 약 6Km(5,743미터)의 장대한 성곽 남북에는 팔달문(八達門), 장안문(長安門)이 웅장하게 서고, 팔달산(八達山) 꼭대기에는 전쟁시 전체 성곽을 통제하는 서장대(西將臺)가 섰으며, 산기슭에는 임금의 임시거처인 행궁(行宮)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화성은 이후 일제식민시대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는 2백여년 전 화성 건설공사의 모든 과정 및 소요자원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하여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완벽한 공사보고서를 남겨놓아서 훼손된 화성의 완전한 복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성(華城)은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효(孝)정신의 발로(發露)이며, 조선조 당시 건축기술의 집약체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 화성의 중심인 서장대

 

수원 화성(華城)의 무예사적 의의

화성(華城)은 앞서 설명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무예24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1784년에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이며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경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를 별시(別試)의 형태로 실시하여 많은 무사를 입격시켰다. 이듬해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국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별시에 합격한 무사들 중 무예에 출중한 자들을 뽑아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였다. 이후 장용위는 1793에 장용영(壯勇營)으로 개칭하면서 명실상부한 하나의 군영(軍營)으로 자리 잡았으며, 도성(都城) 중심의 내영(內營)과 그 외곽인 수원 화성(華城) 중심의 외영(外營)으로 확대 편제하여 기존 오군영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조의 막강한 친위 군부세력인 장용영은 주 수련과목으로 무예24기를 채택하여 전투력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였다.


▲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24기를 수련했던 연무대와 동북공심돈. 여름밤에는 더위를 피해 시민들이 자주 놀러 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당시 최고의 무예가 수련된 곳이 장용영이었으며, 그 중 선침(仙寢; 사도세자의 무덤)을 호위하고 행궁(行宮)을 보호하고자 축성하였던 수원 화성(華城)은 장용영 외영의 존재로 무예24기가 가장 활발하게 수련되고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장용영은 정조가 죽고 나서 1802년 외척세력에 의해 17년이라는 짧지만 영원한 족적을 남겨 놓으며 폐지되었다.

결론적으로 수원 화성(華城)은 단순한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정조의 효(孝)정신과 실학사상 및 자주국방의 상징인 무예도보통지 무예24기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공간, 즉 우리의 내세울만한 전통문화산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연무대에서 마상무예를 연습중인 <무예24기 조선검 마상무예단> 최형국 단장. 조선의 마상무예가 이곳 화성에서 다시 부활한다

 

※ '수원 화성의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마케팅 전략' 가운데 일부 옮김 (2002.12. 최형국 석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