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무예 자료     사학 자료     이미지 자료     기사모음     박사논문

 [갑주] 4~5세기 동아시아의 갑주

 이름 : 

(2005-11-13 21:30:51, 6484회 읽음)



송계현(부산복천박물관)

Ⅰ. 머리말

철제갑주가 고대국가 형성기에 있어서 군사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철제갑주의 출현이 본격적인 정복전쟁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갑주가 개인의 방어용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권력의 중요한 상징물로 이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은주부터 갑주가 사용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기원후 4세기대 이후 철제갑주가 등장한다. 철제갑주의 등장은 단순히 우수한 방어구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철제갑주의 생산을 위해서는 철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뛰어난 단조 기술이 요구된다. 이의 구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금속학적인 분석과 형식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실물자료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한다.

일본의 고분시대에는 많은 갑주자료가 출토되어 다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철제갑주자료가 증가하고 있으나 영남지역 특히 가야에 한정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실물자료는 매우 적으나 4~5세기대의 생활풍속을 묘사한 벽화에 비교적 상세하게 갑주가 묘사되어 있다. 자료가 가장 영세한 지역은 백제다. 중국에서는 漢代의 철제갑주 실물자료가 비교적 많은 편이고 그 이후는 陶俑이나 壁畵, 畵像磚에 묘사된 갑주가 있어 어느 정도의 변화상을 알 수 있다.

각지역의 갑주양상에 대한 비교 검토를 위해서는 실물자료의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료의 한계가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갑주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4~5세기대를 중심으로 전술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갑주양상의 변화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Ⅱ. 중국의 갑주

중국고대갑주의 이른 시기 실물자료는 殷代에서 戰國時代에 이르는 皮甲과 殷周의 靑銅冑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湖北省隨縣 曾候乙墓의 피갑을 들 수 있다. 전국시대 철제무기가 출현하게 되고 철제갑주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전국시대후기며 河北省易縣 燕下都44호묘의 소찰주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후 철제갑주가 어느정도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秦代에는 실물자료가 없고 秦始皇陵 동쪽의 俑坑에서 陶俑에 묘사된 다양한 형태의 갑주자료가 출토되었다. 漢代가 되면 철제갑주의 출토량이 많아진다. 洛陽西郊3023號前漢晩期墓의 小札, 內蒙古自治區呼和呼特市十二家子漢代城址의 철갑, 河北省滿城前漢1號墓의 철갑, 吉林楡樹老河深 M57, M67, M97號墓의 철제갑주 등을 들 수가 있다. 漢代의 찰갑의 소찰로 제작되기는 하였으나 신갑부분은 상하의 유동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유동성이 없는 갑주는 기마전술에 적합하지 않다. 이러한 漢代의 갑주는 삼국시대에 그대로 이어진다. 甘肅省嘉峪關 新城公社3號 魏晋代 畵像磚墓에 갑주를 착장한 전사는 모두 보병이며, 기마무사는 갑주를 착장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직 중장기마전술이 도입되지 않은 시기라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한대의 갑주 또한 보병용으로서 신갑의 유동성이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철제갑주의 출현시기와 유사한 시기는 西晋代과 五胡十六國時代다. 서진의 도용에 한대의 찰갑과 유사한 찰갑이 묘사되어 있으며 雲南省昭通縣 東晋 霍承嗣墓의 벽화에도 동일한 형태의 갑주자료가 묘사되어 있다. 단 霍承嗣墓의 벽화 중에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중장기마무사가 묘사되어 있어 갑주에 있어서의 기능상 변화가 인정된다. 甘肅省嘉峪關畵像磚墓와 비교해 보아 3세기말부터 4세기말사이의 어느 시점에 중장기마전술이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중장기병은 남북조시대인 5~6세기대의 도용과 벽화, 磚畵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장기병이 착장한 갑주는 대부분 소찰로 이루어진 찰갑이다. 실물자료가 아니므로 명확하지는 않으나 漢代의 찰갑과는 달리 상하의 유동성이 고려된 찰갑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6세기대를 중심으로 裲襠鎧와 明光鎧가 있다.

중국 고대 갑주의 변화는 크게 4단계로 나눌 수가 있다. 제1단계는 피갑과 청동갑이 사용된 은대에서 전국시대까지다. 제2단계는 철제 갑주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전국시대후기부터 삼국시대까지다. 다양한 소찰을 이용한 철제갑주는 신갑에 있어서 유동성이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제3단계는 서진대부터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는 시기로 중장기마전술이 도입된 시기다. 중장기마전술의 도입과 함께 찰갑에 있어 유동성이 어느 정도 고려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중장기마전술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갑주의 제작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공통성이 있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제4단계는 6세기 이후 裲襠鎧와 明光鎧 등이 개발되어 수당으로 이어지며 중요한 갑주체제가 이루어지는 시기다. 이중 우리나라와 갑주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시기는 제3단계와 4단계라 할 수 있다.




Ⅲ. 우리나라의 갑주

1. 고구려

고구려의 갑주자료는 실물자료가 매우 적다. 북창군 대평리유적의 찰갑과 길림 집안 우산하 41호 고분의 소찰이 대표적이다. 북창군 대평리유적에서 출토된 소찰은 모두 5개이며 기원후 3∼4세기에 해당하는 최상층에서 鐵刀子, 鐵鏃, 鐵鋸, 鐵斧와 함께 출토되었다. 우산하 41호고분은  5세기 중엽의 고구려고분으로 일부 도굴되긴 하였으나 馬具類 및 札甲의 소찰이 출토되었다. 115점의 小札은 대부분 좁고 긴 舌形이며, 전체 7종류가 보고되었다. 실물자료의 수가 적고 매우 단편적이므로 실물자료를 통해 갑주의 구조나 변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이 외 4~5세기대의 자료는 아니지만 아차산 제4보루에서 鐵製小札冑와 札甲의 小札이 출토되었으며, 농오리산성과 고이산성에서도 鐵製冑가 출토되었다.

고구려갑주의 실물자료는 매우 적은 반면 압록강유역과 대동강유역의 고구려고분 벽화에 갑주가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압록강유역인 통구에서는 삼실총과 통구12호분, 장천1호분, 마선구1호분 등 4기의 벽화에 갑주가 묘사되어 있으며, 대동강유역에서는 안악3호분, 안악2호분, 덕흥리벽화고분, 개마총, 쌍영총, 약수리벽화고분, 팔청리벽화고분, 대안리1호분, 감신총 등 9기의 벽화에 갑주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고분의 연대는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4세기대 고분은 안악3호분, 감신총이며, 개마총은 6세기대 고분이다. 나머지는 대체로 5세기대 고분이다.

고구려지역에서 갑주자료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현재로 자료로 보는 한 4세기대 이후다. 평양지역에서 기원전 1세기대의 유구인 정백동1호분(부조예군묘)와 석암리219호분에서 각각 철제 소찰과 흑칠피제 소찰이 출토되긴 하였으나, 시기차가 너무 커 실물자료나 벽화에 묘사된 고구려의 갑주자료와 직접 연결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초기의 갑주자료로서는 4세기 전반의 고분인 감신총의 갑주를 들 수 있다. 감신총에는 전실서벽의 龕內 좌측 옆벽과 후실 남벽의 행렬도에 갑옷을 입은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것이 감내좌측의 환두대도를 들고 서 있는 무사다. 縱長板冑와 斜線과 橫線으로 표현된 갑옷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므로 구체적인 갑주의 재질은 알 수 없으나 사선과 횡선으로 표현된 갑옷은 布製 또는 革製 갑옷일 가능성이 크다. 철제갑주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의 갑옷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주의 재질은 명확하지 않으나 종장판이 뚜렷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바깥에 희미하게 묘사된 것이 있어 철제일 가능성이 있다. 안악3호분 이후 4~5세기대의 주에는 복발이 표현되어 있으나 감신총의 주에는 복발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초기갑주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갑주는 그 형식이 명확하지 않아 세부적인 특징은 유출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갑주에 있어 몇가지의 종류를 상정할 수 있다.

주는 종장판주, 만곡종장판주, 소찰주로 구분될 수 있다. 감신총, 안악3호분, 안악2호분, 약수리벽화고분의 주가 종장판주며, 쌍영총의 개마무사가 착장한 주는 명확하게 만곡종장판주다. 이와같은 종장판계주와는 다른 형식의 주가 삼실총 2실 서벽의 무사와 통구12호분의 무사가 착장하고 있다. 소찰로 표현된 주로서 시기는 다르나 아차산 제4보루에서 출토된 소찰주와 동일한 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찰주는 합천 磻溪堤가A號墳, 玉田M3號墳 등 가야지역의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벽화에 묘사된 양상으로만 판단하면 압록강유역의 주는 소찰주, 대동강유역의 주는 종장판주로 구분되어진다. 그러나 한강유역의 아차산 제4보루에서도 소찰주가 출토되었고, 우산하41호고분에서 종장판주의 장찰로 보이는 소찰이 있으므로 지역적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벽화에 묘사된 고구려의 주가 종장판주, 만곡종장판주, 소찰주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시기적으로도 변화가 있다. 감신총, 안악3호분, 약수리벽화고분, 덕흥리벽화고분 등 4세기~5세기초의 주에는 뿔과 같은 것이 묘사되어있지 않으나 통구12호분, 삼실총, 쌍영총, 안악2호분 등의 주에는 주체에 뿔과 같은 것이 묘사되어 있어 소찰주, 만곡종장판주 등의 새로운 형식의 주가 제작되면서 주에 있어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할 수 없다. 벽화에 묘사된 기마전사단의 양상에서 5세기초에 변화가 있으며, 이는 중장기병의 역할 변화 즉 호위병적 성격에서 전사단적 성격으로 변화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어느정도 고려될 수 있다. 고구려에서 실물자료가 매우 희소하므로 타지역 특히 가야지역의 종장판주나 소찰주를 중심으로 비교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갑옷은 대부분 찰갑이다. 감신총의 포제 또는 혁제 갑옷과 함께 덕흥리벽화고분의 개마무사가 착장한 갑옷은 갈색의 저고리 모양인데 小札이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으므로 板甲으로 볼 수 있으며 갈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유기질 즉 가죽 또는 나무로 만든 판갑으로 생각된다. 갑옷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鎧馬武士의 특징은 重裝騎馬戰士다. 벽화자료로 보는 한 고구려에서는 중장기마전사단이 4세기 중엽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중장기마전술은 중국의 중원을 침입한 기마민족이 종래의 경장기마전투를 버리고 중장기마전술을 채용하였으며 이것이 부여나 고구려 등 인근지역으로 급격히 파급되었던 것이다. 안악3호분의 행렬도는 이러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신총의 갑옷이 기마전술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서 4세기 전반대의 어느 시점이 중장기마전술이 급격히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입증하는 것으로서 甘肅省嘉峪關 新城公社3號 畵像磚墓에 묘사된 전사를 들 수 있다. 위진대의 이 화상전묘에 묘사된 전사단은 보병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명확하지는 않으나 기마무사는 갑주를 착장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악3호분의 개마무사와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반면 4세기 말에 雲南省昭通縣 東晋 霍承嗣墓에 묘사된 기마무사는 간략하기는 하지만 중무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중장기마전술의 확산은 특정 민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상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중장기마전술의 확산과 함께 특정 갑주가 보급되기도 하였으나 재지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생산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세기 전반대인 北燕馮素弗墓의 마갑 및 찰갑의 소찰과 신라나 가야지역의 동시기의 마갑 및 찰갑의 소찰이 다르므로 고구려에는 실물자료가 적으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백제

백제의 갑주자료는 매우 단편적이다. 夢村土城 85-4號 貯藏孔의 骨製小札, 河南 渼沙里 B3號 住居址의 鐵製小札, 龍仁 水枝 Ⅱ-1號住居址의 小札, 坡州 舟月里遺蹟의 小札과 三角板 鐵板, 扶餘 松菊里 ’76-58地區의 鐵製 小札 등 주거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있으며, 扶安 竹幕洞遺蹟의 板甲石製模造品과 札甲 小札과 같이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것도 있다. 분묘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淸州 新鳳洞 B지구 1호 널무덤의 삼각판정결판갑, 경갑, 견갑, 淸州 新鳳洞 92-2號 石室墳의 縱長板冑, 咸平 新德古墳의 縱長板冑와 札甲, 화성 백곡리 1호분의 찰갑, 전 장성 만무리 출토의 횡장판정결판갑 등 이 있으며, 산성인 扶蘇山城에서도 札甲이 출토되었다. 이 외 한남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전 부여 출토 金銅裝方形板小札冑가 있다.

백제지역의 갑주자료 출토양상의 특징 중 하나는 생활유적에서 출토된다는 점이다.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는 갑주자료는 매우 단편적이며 무장의 목적보다는 철편의 재활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백제의 갑주 중 주는 종장판주 뿐이다. 한남대학교박물관 소장의 금동장소찰주는 부여에서 출토되었다고는 하나 方形板小札冑가 출토되는 시기는 5세기후반대~6세기전반대에 한정되어 있고, 가야지역과 고구려지역에서 출토례가 있으며, 그 시기의 백제 중심지는 公州며 夫餘에서 金銅裝冑가 출토될 만한 古墳의 調査例가 없다. 그러므로 加耶地域 또는 고구려지역 出土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종장판주 또한 시기적으로 6세기 또는 6세기에 가까운 시기므로 4~5세기대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 없다.

백제는 낙랑 멸망 이후 직접적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면서 일찍부터 고구려와 접전이 많았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갑주를 신라나 가야보다 빨리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전술 또한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갑주자료들이 신라나 가야의 실물자료와 차이가 없다. 단 河南 渼沙里 B3號 住居址의 鐵製小札은 다른 찰갑의 소찰과 뚜렷이 구분된다. 두 개의 구멍이 한쌍을 이루는 일반적인 소찰과 달리 독립된 1개씩의 구멍이 뚫려 있다. 소찰과 소찰을 직접 연결하여 갑옷을 구성하는 방식보다는 피혁이나 포에 부착하는 방법으로 갑옷을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坡州 舟月里遺蹟의 三角板 鐵板은 일반적인 혁철판갑의 삼각판과는 구멍에서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혁철판갑의 삼각판에는 철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1개씩의 구멍이 뚫려 있으나 주월리의 삼각판에는 2개의 구멍이 한조를 이룬다. 이러한 점들은 갑주의 형식이나 제작기술이 공유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갑주의 형식과 제작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전쟁과정에서 고구려의 중장기마전술을 수용하고, 갑주의 제작기술도 받아 들였으나 곧 독자적인 갑주생산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3. 신라․가야

우리나라에서 갑주의 출토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 가야다. 그러나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지역에서도 경주 황남동 109호3․4곽, 황오리 54호을총, 인왕동C구1호분, 월성로가29호분, 가12호분, 구어리고분, 구정동제3관, 포항옥성리가35호분, 나17호분, 나29호분, 경산임당 G5호분, 7B호분, 경산 조영ⅠB60호분, CⅡ-2호분, EⅢ-2호분, 울산 중산리 ⅠA74호, ⅠA100호, ⅠB17호 등에서 갑주자료가 출토된다. 가야지역에서는 낙동강 하류역의 동래복천동고분군과 김해대성동고분군에서 4세기대의 갑주가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5세기대 이후 합천 옥전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등의 각 가야의 중심지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의 김해지역에서는 김해 삼계동두곡고분군, 부산 생곡동가달고분군 등 중소고분에도 갑주가 매납된다.

1) 4세기대의 갑주

신라․가야지역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4세기대의 갑주는 지금까지 낙동강하류역인 동래복천동고분군과 김해대성동고분군에 한정된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최근 울산중산리유적, 경산임당유적 등에서도 4세기 전반대의 갑주자료가 출토되어 그 지역은 확산되어간다.

4세기대 신라․가야지역의 갑주는 札甲, 縱長板板甲, 縱長板冑가 있다. 복천동56호와 38호분에서는 판갑, 종장판주, 찰갑이 모두 출토되는 반면 김해대성동10, 18호분, 울산 중산리 ⅠA100호, ⅠB17호에서는 종장판주만, 울산 중산리 ⅠA74호, 동래 복천동 73호, 경주 구정동제3관에서는 종장판 판갑만, 경산 조영ⅠB60호분에서는 찰갑만 출토되었다. 이 중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이 울산중산리 ⅠA100호의 종장판주와 울산중산리ⅠA74호의 종장판판갑이다.

종장판주는 울산 중산리ⅠA100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출현초기부터 철제복발이 있었으며 만곡종장판주가 주류를 이루면서 종장판주와 함께 두 계통으로 변화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세기대와 5세기대의 종장판주의 차이는 세부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크게는 볼가리개의 차이다.

최근 이러한 종장판주의 직접적인 원류를 길림 유수노하심유적의 M56, M67, M97호분의 종장판주와 연계시키는 견해가 있다. 유수노하심유적의 M56, M67, M97호분에서는 종장판주와 함께 찰갑과 동경이 출토되었다. 동경은 갑주가 출토된 3기의 분묘에서 각각 1면씩 3면이 출토되었다. 3면의 경은 七乳七獸紋鏡, 四乳四蟠紋鏡, 四乳八鳥紋鏡으로 낙양소구한묘에서 모두 서한말부터 동한초기에 매납된 것이다. 갑주출토고분의 연대는 기원후 1세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후 중국동북지방에서 갑주자료가 없어 4세기대의 영남지역의 종장판주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실물자료는 출토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4세기전반대의 벽화고분인 감신총에 종장판주가 묘사되어 있어 어느정도 직접적인 연관의 가능성이 있다. 단 제품의 직접적인 유입보다는 제작기술의 유입이 있었으며 그 기술은 생산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곧 재지화하여 5세기대의 종장판주와는 달리 1~3매의 철판을 이용한 삼각형의 볼가리개를 특징으로 하는 종장판주가 제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기의 종장판주와 함께 출토되는 갑옷은 찰갑과 종장판판갑이다.

종장판판갑은 출현초기부터 정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초기의 것으로 울산 중산리 ⅠA74호와 복천동 56호분의 판갑을 들 수 있다. 복천동56호의 판갑은 그 구조가 명확하지 않으나, 중산리ⅠA74호의 판갑은 종장판과 함께 도련판, 후동상부의 경갑, 후동좌우의 돌출부 등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이후 종장판판갑의 기본적인 형태가 된 것이다. 단 구정동 제3관에서 출토된 2령의 종장판판갑에는 정형성이 보이지 않는다. 종장판의 좌우 累重方法이 반대며, 후동상부의 경갑이 나팔모양이다. 이러한 종장판판갑은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모두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종장판판갑이 대성동고분군과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되어 낙동강하류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정동제3관의 종장판판갑과 함께 월성로 가29호분에서도 그 형식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판갑이 출토되었으므로 중산리ⅠA74호분의 종장판판갑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지역에서도 종장판판갑의 계보가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기의 찰갑으로는 복천동38호분, 56호분, 조영ⅠB60호분의 찰갑이 있다. 복천동56호분의 찰갑은 소찰이 출토되었다고만 하므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 없다. 조영Ⅰ60호분의 찰갑은 복천동38호분의 찰갑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것이다. 5세기대 찰갑의 소찰에 비해 대형의 소찰이 사용된 점과 경갑 등의 부속구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 漢代이전의 상하의 유동성이 없는 찰갑과 동일한 형태일 가능성도 있으나 구체적인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찰갑은 김해예안리150호분의 종장판주의 소찰과 월성로가29호분의 소찰로 볼 때 4세기후반대까지 그 계보가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해대성동고분군에서는 3호분, 23호분, 39호분 등에서 찰갑이 출토되었으나 경갑이 함께 출토된 고분은 39호분 뿐이다. 찰갑은 종장판주와 함께 중장기병의 중요한 갑주로 인식되고 있다. 4세기대 찰갑이 출토된 고분 중 마구가 출토된 고분은 3, 39호분으로 3호분에서는 행엽만 출토되었다. 복천동38호분에서는 轡가 출토되었으나 56호분에서는 마구가 출토되지 않았다. 복천동56호분과 조영ⅠB60호분과 같이 초기의 찰갑이 마구와 함께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은 초기찰갑이 騎乘用 重裝甲冑가 아닐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4세기전반대의 종장판주 출토고분인 대성동10, 18호분, 울산 중산리ⅠA100호분 등에서도 마구가 전혀 출토되지 않아 종장판주가 찰갑과 함께 기승용갑주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4세기대 철제갑주의 출현은 기승문화의 전래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 및 무기체계와 전술의 변화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3세기후반대에서 4세기전반대에 걸치는 시기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격변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西晋의 통일과 몰락, 五胡十六國時代의 개막 등의 정세변화가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낙랑의 몰락과 고구려의 성장이 중요한 변화였다. 특히 고구려에 의한 낙랑의 정복은 압록강유역을 세력의 중심으로 하였던 고구려가 우리나라 남부지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외적인 정세변화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2세기 후반 목곽묘의 등장과 함께 무구류에 있어 변화를 보인다. 새로운 무기로서 環頭大刀가 등장하여 청동기시대 이후의 劍을 대신하게 된다. 철촉도 무경식에서 변하여 살상력과 관통력이 증대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3세기후반대에서 4세기 전반대에 걸친 공격용무기인 철모의 변화다. 3세기 후반대에 철모는 실용철모와는 별도로 실용성이 없는 의장용 철모가 대량으로 나타난다. 의장용 철모와는 별도로 3세기대까지의 모신의 폭이 넓고 단면이 볼록렌즈형인 철모와는 달리 모신의 폭이 좁고 단면 능형의 철모가 나타난다. 새로운 철모는 前代의 철모에 비해 공격력이 향상된 철모다. 이러한 공격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철제갑주가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벽화에 묘사된 중장기마전사의 주된 무기가 철모이기는 하나 모두 4세기 중엽 이후의 상황이다. 甘肅省嘉峪關畵像磚墓의 갑주를 착장한 전사와 같이 3세기대 중국에 있어서의 보병의 주된 무기 또한 철모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4세기 후반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장기마전술의 본격적인 도입은 騎乘用制御具인 재갈보다는 안정구인 안장과 등자의 출현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영남지역의 초기등자는 4세기후반대의 복천동48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주부곽식목곽묘로 갑주는 출토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중장기마전술 도입이전의 마구라 할 수 있겠다.

중장기마전술에 필요한 갑주는 찰갑이며, 안악3호분의 개마무사에 표현된 갑주로 보아 경갑 등의 부속구가 구비된 찰갑이다. 대성동39호분과 경주 구어리1호분에서 경갑이 출토되어 4세기대에 중장기마전술에 필요한 갑주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안정구인 안장과 등자가 출토되지 않아 본격적인 중장기마전술은 구사되지 않았으며, 5세기대에 이르러 마주, 마갑 등의 출현과 함께 안정구인 등자와 안장이 출토되므로 중장기마전술이 본격적으로 구사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 5세기대의 갑주

5세기대의 영남지역 갑주양상은 크게 변화한다. 종장판판갑이 급격히 줄어들고 중장기마전술용 갑주인 찰갑이 확산된다.

신라지역의 경우 경주의 중심부에서는 경주 황남동 109호3․4곽, 황오리 54호을총, 인왕동C구1호분 등 극히 한정된 고분에서만 갑주가 출토되고, 경산, 포항 등의 주변지역에서 출토례가 많다. 5세기 이후 신라는 백제, 고구려, 가야와의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더욱 많아지면서 갑주의 필요성과 효용성은 더욱 증가되나 갑주의 부장량은 줄어든다. 이는 갑주에 부장에 대한 관념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황남동109호3․4곽은 5세기 전반대의 대표적인 고분으로 부곽에서 출토된 갑주는 종장판주, 찰갑, 마갑주 등이며 안장, 재갈, 등자 등의 마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중장기마전술용 갑주의 요건을 모두 갖춘 것이다. 이러한 갑주의 양상은 4세기대의 갑주양상에서 일변한 것이며 낙동강하류역의 가야 양상과 동일한 것이다. 가야와 신라 공히 동시에 중장기마전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갑주는 황오리 54호을총, 인왕동C구1호분 등 소형분에 매납되며 대형분의 갑주는 금공품으로 변화한다. 5세기 중엽이후 대형적석목곽묘에서 갑주가 출토된다 하더라도 금동제, 은제의 부분적인 부속구로서 나타나며 거의 굉갑에 한정된다. 이러한 금동제, 은제의 갑주는 장식성이 강한 것으로 방어용무기로서의 갑주라기 보다는 화려한 장신구로서 파악된다. 신라의 대형적석목곽묘에서 철제갑주자료가 출토되지 않은 것은 신라에서 철제갑주류가 사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야와는 달리 권력의 상징물로서 이용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야지역에서는 4세기대 낙동강하류역에 한정되었던 갑주가 가야전역으로 확산되며 출토량이 급증한다. 4세기대 철제 갑옷의 주류를 이루었던 종장판판갑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중장기마전술용 갑옷인 찰갑이 급격히 증가한다. 마갑주와 함께 제어구인 재갈을 비롯하여 안정구인 안장과 등자가 모두 출토되어 중장기마전술이 본격적으로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장기마전술의 도입과 함께 갑주부장의 관념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복천동고분군의 4~5세기대 갑주부장양상의 변화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복천동고분군의 경우 4세기대 갑주출토고분은 총14기로 주부곽식목곽묘와 단독목곽묘로 나누어진다. 묘제의 변화와 함께 토기의 형식변화, 조합상 등을 통해 56․38․89→86․73․43․42․64→57․71․69․46․44→54順으로 편년되어지며 각각 4세기전엽, 중엽, 후엽, 말로 볼 수 있다.

먼저 4세기전엽의 갑주 출토분묘 중 56호분은 주부곽에서 각각 갑주가 출토되었는데, 주곽에서는 伏鉢冑와 甲片이, 부곽에서는 小札이 출토되었다. 38호분에서는 札甲, 縱長板冑, 板甲이 主槨에서 출토되었는데 부곽에서는 전혀 갑주가 출토되지 않았다. 부곽의 파괴가 매우 심하여 잔존상태가 나빠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철제갑주가 부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초기의 대형분묘에서는 모든 종류의 갑주가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의 갑주 중에는 札甲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분묘의 규모나 위치로 보아 38, 56호분은 4세기전엽의 최상층에 해당된다. 모든 종류의 갑주가 최상층의 분묘에서 출토된다는 점은 방어용 무기의 특정신분에의 집중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甲冑의 出現初期에는 최상의 신분에 의해 독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4세기 중엽의 분묘 중 42, 43호분은 주곽에서, 73․86호분은 부곽에서 갑주가 출토되었다. 갑주의 종류는 42호분이 縱長板冑 2, 板甲 2, 43호분이 板甲 1, 73호분이 板甲 1, 86호분이 縱長板冑 3, 縱長板板甲 3 등이다. 단독목곽묘인 64호분에서는 方形板革綴板甲과 縱長板冑가 출토되었다. 주능선의 73호분에서는 부곽에서 갑주가 출토되어 주곽에 갑주가 부장되는 전 단계의 부장양상과는 대조를 이룬다. 주능선에서 벗어난 42호분과 86호분에서는 冑와 板甲이 복수 부장된다. 주변분묘에서는 주곽에 부장되고 중심분묘에서는 부곽에 부장되며 전 시기와는 달리 동일형식 갑주의 복수 부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갑주 구성에 있어서 札甲이 사라지고 冑와 板甲으로 劃一化된다. 이러한 사실은 최상위층에서는 철제갑주의 의미가 전 단계에 비해 축소되어 간다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갑주의 보유계층이 최상층에서 다음 계층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4세기 전엽의 철제갑주 도입기와 4세기 중엽의 철제갑주의 확산 및 정착기에 있어서의 차이로 볼 수 있다.

4세기 후엽의 갑주 출토분묘는 57, 71, 69, 46호분 등의 주부곽식목곽묘와 44호분의 단독목곽묘다. 모두 고분군의 중심선에서 벗어난 분묘들이다. 주부곽식목곽묘에서는 57호분을 제외하면 부곽에서만 철제갑주가 출토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57호분에서는 주가 출토되지 않았다. 4세기 후엽에는 정형화된 갑주 부장 즉 冑와 板甲을 모두 갖춘 갑주는 부곽에 부장되고 57호분과 같이 주곽에 부장될 경우는 板甲만 부장되었던 것이다. 갑주의 보유에 있어 冑와 板甲을 보유한 경우와 冑 또는 板甲 중 하나만을 보유한 경우와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4세기말의 54호분에도 연결된다. 54호분에서는 부곽에서 縱長板冑만 출토되었다. 복천동고분군 내에서는 중심분묘이면서 갑주의 부장은 부곽에 주만 한정된 것이다. 4세기 후엽의 분묘에서는 板甲의 단독부장이 주곽에 이루어지던 것이 4세기말에는 주만의 단독부장이 부곽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천동고분군내에서의 4세기대 갑주 양상은 4세기 전엽의 최상층 보유, 4세기 중엽이후의 보유층 확산이라는 현상과 함께 부장위치의 변화로 보아 그 보유의미가 달라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장위치가 최상층의 주부곽 또는 주곽에서 다음 계층의 주곽, 다음 계층의 부곽으로 변화하고, 부장 갑주 자체도 札甲․板甲․ 冑에서 板甲과 冑, 板甲 또는 冑의 憺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즉 4세기대 전엽의 일인 집중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계층의 출현이라기 보다는 무장을 통한 지배계층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무장의 범위가 4세기 중엽이 되면서 확대되어가는 것이다. 무장범위의 확대는 지배계층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과 함께 최상층 계급에 있어서의 철제갑주의 의미는 축소되어 가는 것이다.

5세기대의 주부곽식고분에 있어서 갑주부장의 특징은 주부곽 모두에 갑주가 부장된 것과 부곽에만 갑주가 부장된 것으로 나누어진다. 주부곽에 모두 갑주가 부장된 분묘는 21․22, 鶴巢臺2․3, 10․11호분이다. 21․22호분에는 주곽에 경갑이, 부곽에 종장판주와 요찰이 부장되어 부곽에 갑주 1습이 부장되었다. 반면 鶴巢臺2․3과 10․11호분에는 주곽에 철제 찰갑 1습이 부장되어 21․22호분과는 차이를 보인다. 鶴巢臺2․3호분의 경우 주곽에 찰갑과 종장판주가, 부곽에 마갑이 부장되었지만, 10․11호분의 경우는 주곽에 종장판주와 경갑과 肱甲을 포함하는 찰갑의 완전한 1습이, 부곽에 종장판주, 판갑, 마주 등이 부장되었다. 소형목곽묘의 경우 34호분에서는 札甲과 縱長板冑가, 16호분에서는 경갑이 출토되었으며, 대형단독수혈식석곽묘인 47호분에서는 유물의 주부장처에서 札甲 2벌과 冑가 출토되었다. 동2호분과 동8호분에서는 석곽의 중앙부 즉 주피장자의 위치에서 출토되었다. 소형단독목곽묘의 경우 4호분에서 三角板革綴板甲이, 112호분에서 橫長板釘結板甲과 冑가, 140호분에서 小札과 頸甲이 출토되었다.

4세기대의 갑주 양상 즉 4세기대 후엽이 되면 갑주의 무장 범위가 확대되면서 최상층 계급에 있어서 철제갑주의 의미가 축소되어 가는 것이 5세기대에 들어서도 새로운 갑주 즉 札甲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계속 이어진다. 최상계층의 분묘인 35․36호분의 예와 같이 부곽에만 마갑이 부장되기도 하고 소형목곽묘인 34호분에는 주를 포함한 찰갑 1습이 부장되는 것이다. 또한 4세기대에 있어서 주부곽식목곽묘에는 모두 철제갑주가 부장되는 반면, 5세기대의 분묘에는 31․32호분, 25․26호분 등과 같은 중심선상에 있는 분묘에 갑주가 부장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중심선상의 분묘에 갑주가 부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최상층의 지배계층 아래에 최상계층 전문전사집단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5세기 전엽에 부곽과 소형분에 갑주가 부장되었지만 다음 시기인 21․22호분 단계부터 갑주소유의 관념이 변화하면서 주곽에 갑주의 부분부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부곽에 갑주 일습이 부장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갑주양상의 변화는 10․11호분 단계에서는 최상층 분묘의 주곽에 1습이 부장되면서 갑주 부장의 양상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21․22호분의 칠두령과 10․11호분의 금동관에서도 대비가 된다. 칠두령과 금동관의 소유는 주술적 성격과 정치적 성격의 대비인 것이다. 5세기 중엽 금동관의 출현은 주술적 권력에서 탈피한 정치적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며, 복천동 10․11호분과 같이 주곽에 갑주 일습이 부장되었다는 것은 정치적 권력이 중장기마전술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 부곽에 주로 부장되던 갑주가 주곽이 중심이 되어 부장되고 갑주 일습이 하나의 분묘 즉 중심 분묘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입증될 수 있다.

대형고분에의 갑주 집중과 소형고분에의 갑주 부장 확산은 여러 가지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대형고분에의 갑주 집중은 군사적 힘에 의한 권력의 장악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에서는 관이 권력의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하는 시기에 가야지역에서는 철제갑주가 권력의 상징물이 된다. 신라는 무력보다는 통치력에 의한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가야에서는 무력에 의한 권력의 집중이 나타나는 것이다. 신라와는 달리 가야에서는 5세기대 갑주문화가 전역에 확산되어가면서 갑주가 주요한 권력의 상징물이 되었던 것이다. 소형고분에의 갑주부장 확산은 전문전사집단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4세기대 지배계층에 집중되었던 갑주의 양상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중장기마전술용 갑주인 찰갑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7단구성의 판갑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7단구성의 판갑은 백제지역의 淸州 新鳳洞 B지구 1호분의 삼각판정결판갑과 전 장성만무리 출토의 횡장판정결판갑을 포함하여 총 16령이다. 부산, 김해, 창녕, 합천, 함안, 고령 등 가야의 전역에서 소량이지만 출토된다. 그 중 낙동강하류역인 부산․김해지역에서 8령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7단구성의 판갑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미비부주와 충각부주다. 미비부주는 부산연산동고분군과 고령지산동고분군, 김해삼계동두곡고분군에서 출토되었으며, 충각부주는 고령지산동고분군, 함양호생원1호분, 부산오륜대고분에서 출토되었다.

7단구성의 판갑과 미비부주, 충각부주는 일본에서 5세기대 이후 일본에서 다량 출토되며, 일본의 특징적인 갑주라 할 수 있다. 영남지역에서 출토되는 7단구성의 판갑과 충각부주, 미비부주가 일본에서 공급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 주장이 있다. 영남지역에서 출토되는 7단구성의 판갑 중에는 일본에서 일반화되지 않은 몇가지 요소들이 있다. 합천옥전68호분 삼각판혁철판갑의 정결기법, 생곡동가달4호분, 고령지산동32호분, 전연산동고분출토의 판갑에 사용된 長釣壺蝶番, 복천동4호분 판갑 겨드랑이 부분의 소형철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7단구성판갑의 제작지가 우리나라의 어느 지역임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단구성의 판갑은 비교적 소형고분에서 출토되거나 대형고분에서 출토되는 경우에는 찰갑과 함께 출토된다. 갑주형식에 있어 위계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갑이 보병용갑주로서 인식되고 있으나 복천동4호분, 옥전68호분, 도항리13호분 등에서 마구와 함께 출토된다. 중장기마전술의 본격적인 도입과 함께 나타나는 판갑이 기승용으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Ⅳ. 일본의 갑주

일본의 철제갑주는 고분시대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弥生時代에 목제갑옷이 있었으나 계보적으로 고분시대의 철제갑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는 어렵다.

고분시대 전기의 판갑은 종장판혁철판갑, 방형판혁철판갑이며, 주는 소찰혁철주다. 종장판혁철판갑과 방형판혁철판갑은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고분시대 중기가 되면 단갑에 대금이 채용되어 정형화와 양산화의 양상이 나타난다. 중기초두의 판갑은 장방판혁철판갑과 소형삼각판혁철판갑이며, 주는 삼각판혁철충각부주다. 중기전엽의 판갑은 삼각판혁철판갑이며, 주는 삼각판혁철충각부주가 계속 이어진다. 중기중엽에는 정결기법의 도입과 함께 단갑에는 개폐장치가 도입되며 삼각판정결판갑이 주류를 이룬다. 충각부주에 정결기법이 채용되는 것과 함께 새로운 형식의 주인 미비부주가 등장한다. 갑옷에 있어서도 새로운 형식인 찰갑이 나타난다. 중기후엽에는 주와 판갑에 횡장판이 사용되는데, 미비부주는 횡장판정결형식이 많지 않다. 고분시대후기가 되면 판갑의 출토례가 거의 없으며, 찰갑이 충각부주와 함께 부장된다.

일본에 있어서의 철제갑주의 출현은 시기적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그러나 갑주 형식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4세기대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철제갑주가 도입되기는 하나 우리나라와 일본은 독자적인 갑주생산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분시대 중기중엽 정결기법의 도입시기에 마구와 찰갑이 도입되어 기마술과 함께 중장기마전술용 갑주가 보급되었으나 본격적인 중장기마전술은 수용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Ⅴ. 맺음말

이상 개략적으로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과 일본의 갑주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철제 갑주의 출현은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급격한 정세변화에서 기인하며, 정세변화와 함께 전술상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3세말에서 4세기 초에 걸쳐 보병중심의 전술과 경장기마전술이 중장기마전술로 변화하는 것이다. 중장기마전술은 주변지역으로 파급되며 고구려에서도 4세기 전반 어느 시점에 받아들이게 된다. 백제는 자료가 빈약하여 명확하지는 않으나 독자적인 갑주 문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남지역의 신라가야에서는 4세기대 철제갑주의 출현, 기승문화의 도입 등이 계기적으로 일어나지만 중장기마전술은 5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수용된다. 중장기마전술의 도입과 함께 전문전사집단도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우리나라와 거의 동시기에 철제갑주가 출현하며 고분시대 중기 이후에 기승문화와 찰갑이 도입되기는 하나 중장기마전술은 수용되지 않은 것이다.

중장기마전술 파급의 지역적인 차이는 중장기마전술용 갑주 제작을 위한 철생산력과 기술적 차이에 의한 것도 있으나 각 지역의 사회적 정황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과 갑주 파급 및 수용을 밝히기 위해서는 갑주 자체의 세부적인 분석뿐 아니라 다른 무기체계와의 연계성, 고분군내에서의 갑주 출토고분의 성격, 고분군간의 상관성 등이 구체적으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金斗喆, 2000, 「韓國古代馬具의 硏究」 동의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金亨坤, 1997, 「新羅式土壙木槨墓의 檢討-中山里遺蹟을 中心으로-」 ꡔ昌原史學ꡕ第3輯

宋桂鉉, 1993, 「韓國出土甲冑の變遷-加耶出土の甲冑を中心として」, ꡔ甲冑出土古墳にみる武器⋅武具の變遷ꡕ 第33回 埋藏文化財硏究集會

宋桂鉉, 1995, 「伽倻甲冑文化의 變化」 ꡔ伽倻古墳의 編年 Ⅲ-甲冑와 馬具-ꡕ 제4회 영남고고학회학술발표회

申敬澈, 1997, 「福泉洞古墳群의 馬具와 甲冑」, ꡔ가야사 복원을 위한 복천동고분군의 재조명ꡕ 제1회 부산광역시립복천박물관 학술발표대회

申敬澈, 2000, 「嶺南의 古代甲冑」 ꡔ韓國 古代史와 考古學ꡕ 鶴山金廷鶴博士頌壽紀念論叢

楊泓, 1980, ꡔ中國古兵器論叢ꡕ, 北京, 文物出版社

張京淑, 1999, 「영남지역 출토 縱長板冑에 대한 硏究」 ꡔ嶺南考古學ꡕ 25

穴澤口禾光, 1988, 「‘蒙古鉢形’冑と4∼7世紀の軍事技術」, ꡔ考古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읽음

134

  [2005 실학축전] 탈놀이 정리 [1]

탈놀이_정리.hwp

2005/09/04

5075

133

  [2005 실학축전] 설장고 정리

설장고_쌍검_정리.hwp

2005/09/04

5201

132

  [2005 실학축전] 북 정리(1차수정)

북_월도_정리[1].hwp

2005/09/04

5234

131

최형국

  [마상무예] 선기대 수원 화성 시범 기획안 준비

마상무예_공연_준비.hwp

2005/09/08

5383

130

  [2005 실학축전] 교부금 관련 서류

실학축전_교부금_명목.hwp

2005/09/08

5641

129

  [2005 실학축전] 넌버벌 타악공연 연출 기획안

깨비공연계획서_최종.hwp

2005/09/08

5655

128

  [2005] 조선시대 야간 군사 훈련 야조 기획안

야조_기획안.hwp

2005/09/11

5821

127

최형국

  [2005 야조] 시나리오 -1차 수정본-

야조시나리오.hwp

2005/09/25

5666

126

  [2005 야조] 요약서

야조_요약서.hwp

2005/09/26

5559

125

  [실록 기사] 장용영 철파 별단과 외영의 군제 개정 별단 [3]

2005/11/03

6055

124

  조선전기 개인 무기운용에 관한 기사 [3]

2005/11/09

7649

123

  [재인용] 항왜병에 관한 난중일기 자료

2005/11/09

6262

  [갑주] 4~5세기 동아시아의 갑주 [3]

2005/11/13

6484

121

  [일성록] 정조 01년 정유(1777, 건륭 42) 9월 10일 (임신) 기사 [1]

2005/11/19

6213

120

  [Martialarts] History and Heritage [8]

2005/11/25

7402

119

  [조선] 병자호란

2005/11/29

5987

118

  [조선왕조실록] 정조 030 14/04/29(기묘) /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다

2005/12/06

5888

117

  [조선왕조실록] 병조가 진법과 군졸의 기예에 대해 아뢰다

2005/12/06

5901

 

 

1 [2][3][4][5][6][7][8]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랄라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