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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지] 武藝圖譜通志』「雙手刀」「倭劒」の背景にあるもの

 이름 : 

(2006-03-25 19:26:54, 5629회 읽음)

武藝圖譜通志』「雙手刀」「倭劒」の背景にあるもの
무예도보통지의 쌍수도와 왜검의 배경은 어느 것인가


                   大石純子(目白大學)
오이시 준코 (매지로대학)


1. 머리말

일본의 도검기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수없이 행해져 왔다. 그러나 주변 여러 국가와의 관계사에 입각하여 살펴볼 수 있었던 연구는 적었다고 생각된다.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섬나라로서 고립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예전부터 주변국가와 접촉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도검기에 대해서도 어느 경우에는 외국에서 영향을 받았거나, 다른 경우에는 외국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것은 충분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와 같은 상호의 영향 중에, 현 단계에 있어서는, 특히 일본의 도검기가 외국에 미치게 한 영향으로 주목하고자 한다.

  주변 여러 지역 중에서도 조선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14세기부터 16세기경에 ‘왜구倭寇’라고 하는 일본인을 포함하는 해적이 조선의 연안을 휩쓸었고, 16세기말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는 일본 군대의 조선으로의 상륙, 침공과 같은 무기에 의한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무기와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에도 시대에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오고, 문화교류도 행해졌다. 게다가 문헌적 측면으로 보아도 조선조에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고 하는 무예서가 간행되었고, 그 안에는 몇 가지의 도검에 관한 기법이 실려있다. 이것들은 도검의 운용을 두 손으로 하고 있어, 일본의 도검기의 기법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또 사용하고 있는 도검도 그림에서 보건데 일본의 도검과 같은 한 쪽 날의 칼이다. 게다가 왜검이라 칭하는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법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일본의 도검기가 조선의 도검기 즉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도검기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배경으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본론에서는 이러한 사항에 대하여 검토해 나가기로 한다.


2.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일본의 도검기가 전해지는 양상

여기에서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이라고 하는 16세기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어난 전란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일본의 도검기가 조선에 영향을 준 배경을 검토해 나간다.

⑴ 당시의 조선의 도검 기술 상황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있어서, 많은 일본의 무장과 병졸들이 조선에 상륙하고, 전투를 전개했지만, 이 상황을 ‘루이스 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조선인은 머리위에서 휘둘러지는 일본인의 태도太刀의 위력에 대항할 수 없었고…

○ 일본군은 극히 계획적으로 침략하여, 총포류와 더불어, 태도의 위력을 가지고 아주 다양하게 습격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전장을 포기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앞 다투어 도주했다.


이러한 서술로부터, 일본이 총포류나 도검기를 구사해 침공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조선쪽의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서문」중에는, 조선에서는 활과 화살만을 중시하고, 창검의 무기에 관한 것은 중요시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기예질의」중에

ꡒ왜적과 대진하면 왜적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돌진하게 된다. 아군은 손에 창을 들고 검을 차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칼은 검집을 나올 틈이 없고, 창은 공격하여 부딪치기도 전에 부러져버린다. 전부 (창이나 검의) 습법이 전하여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즉, 조선에서는 도검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술 수준에 있어서 일본의 것에 대항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조선에서는, 당연히 양병의 책략 중 하나로 도검기를 도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다음에서 그에 대한 검토를 하기로 한다.

⑵ 조선의 도검기 도입
여기에서는, 선조실록 등에 보이는 도검기 도입과 관련한 기사에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


1592년 10월 7일의 기사에 의하면, “정예의 무사를 뽑아, 명나라 참장인 낙상지에게 취하여 검술을 배웠다.”고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최초의 도검기 도입에 관한 것이고, 명나라(당시 중국의 왕조)의 참장參將에 의해 지도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기타, 1594년 1월 8일, 1593년 3월 20일의 가사에는, ‘명장낙상지막하 명연병교사’에게 도검기의 지도를 하게 했으면 하는 바와 같이, 역시 명나라 군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592년 10월 15일의 기록에는 “생포한 왜군 포로의 일을 품하다” 라는 게 보이고, “검술을 아는 자에게 물어 전습시키는 것이 어떤지 논의케 하다” 라 하였다. 그 후 1592년 2월 7일의 기록에는 “지금부터 생포한 왜군을 죽이지 말고… 이런 연유로 타국의 기술을 전습시킬 수 있다” 라고 하고 있다. 이 타국의 기술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인이 장기로 사용한 조총이나 도검기술에 해당되는 것일 것이다. 그 후의 기록을 보면 1594년 2월 29일, 7월 9일, 12월 27일에 ‘항왜降倭’, ‘왜장倭將’ 등의 용어가 보인다. 명나라 군대의 지도뿐만 아니라 일본인에 의한 도검기술의 지도도 있었음을 엿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명군이나 항복한 왜군에 의해 지도된 도검기술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항왜에 의한 도검기의 지도에 관해서는 문헌의 기사만으로는 그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다만 ‘倭人의 劒術’, ‘倭人의 劒槍法’ 이란 용어로 표기한 사실은 역시 일본의 독특한 기술이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무사양성기관인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는 명군明軍이 가지고 온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명군이 지도하고 있던 도검기술도 『기효신서紀效新書』(명의 무장 척계광이 1582-1587 지음)에 기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도검기의 항목에는 ‘장도長刀’ 라고 하는 길이 6자 5치(칼날 5자, 자루 1자5치)의 그림이 실려 있고, 이에 관한 기법이 게재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장도는 왜구가 중국을 침범하였을 때 처음 경험하였다.

“그들은 장도를 가지고 섬광처럼 뛰어들므로 우리 병사들은 겁에 질린다. 왜구는 잘 뛰어드는데 한 발에 일장을 뛴다. 칼의 길이가 5자이니 1丈 5尺을 일거에 나아가는 것이 된다. 우리 병사의 短器로 대적하기가 어려우며, 장기를 들면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장도에 마주치면 일도양단 되어 버린다. 그것은 무기가 예리할 뿐만 아니라 두 손을 써서 무거운 힘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왜구의 도법은 칼을 두 손으로 조작하면서 상대를 한 칼에 두 조각을 내는 것이었다. 『기효신서紀效新書』에는 「影流之目錄」이 그림으로 실려 있다. 그 뒤에는 習法으로 중국식 복장을 한 인물화에 의해 도검(일본도와 비슷함)을 조작하는 방법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두 손으로 칼을 조작하고 있다. 이에 관해 『기효신서紀效新書』보다 나중에 나온 중국의 무술서 『무비지武備志』에는 척계광이 신유辛酉년인 1561년에 전쟁터에서 「영류지목록」을 얻게된 사연과 그것을 기초로 척계광이 습법을 실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보이는 장도의 기법은 왜구의 도법이나 「영류지목록」을 근본으로 하여 짜여진 것으로 보인다. 「영류지목록」에 관해 ꡐ도미나가ꡑ씨는 “류는 아이스이코우(愛주이향)가 휴가의 제도신궁에 참롱하여 신탁에 의해 연 유파로 규슈가 연고지이다.”고 주장하였다.
이 검술이 일본의 한 유파임을 밝히고 있다. 장도의 기법은 일본 도검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쌍수도’라고 하는 도검기가 보이지만, 이것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성립경위에 의하면, 1598년에 『기효신서紀效新書』로부터 채용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쌍수도를 설명한 글에 “본래 이름은 장도인데 지금은 쌍수도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보이는 장도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보이는 쌍수도를 비교 검토해 보면 양자의 기법이 많은 점에 공통된 것이 보인다. 이를 보건데, 쌍수도는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장도로부터 그 수련법을 채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도검기 도입 과정에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장도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쌍수도로 정착한 것 같다. 이 같이 생각하면 이 시기에 조선에 도입된 도검기는 항왜들의 지도를 통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명군에 의한 지도를 통해서도 중국을 경유한 일본의 도검기(ꡐ왜구의 도법ꡑ이나 ꡐ영류의 목록ꡑ)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⑶ 조선 통신사와 일본 도검기에 관하여
조선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전술한 바와 같이 왜검이란 도검 기법이 기록되어 있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검술이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왜검의 서두부분을 보면, 상세하게 일본도日本刀의 그림을 올리고 있으며, 본문의 도보圖譜를 보아도 일본도와 비슷한 칼을 두 손으로 조작하는 그림이 실려 있다. 왜검의 기법을 ‘○○流’ 라고 표기하고 4개의 류파流波로 나누고 있다.

분명히 일본의 도검 기법(검술 류파)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본의 도검 기법의 영향 배경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검 속에는 “肅廟朝嘗隨使臣入日本得劒譜學其術而來” 이란 문장이 보여,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와 ꡐ검보劒譜ꡑ를 얻어 그 기술을 배운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신이란 조선통신사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① 조선 통신사의 일본 검술의 입수 가능성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수권首卷에 보이는 병기총서 가운데에 “숙종 16년 11월 내원에서 훈국에서 왜검수의 기예를 시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숙종 16년은 1690년으로, 이 때에 왜검의 기법이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 검보를 얻고 그 기술을 배웠다” 한 것처럼 조선통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검술 기법서(劒術傳書) 같은 것이 전해졌거나 기법을 배웠다고 한다면, 이것은 1690년 이전의 조선통신사가 왕래할 때에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682년에는 조선통신사를 환영하는 무예시합이 행해졌다. 『조선유수기』, 『조선국기』 속에서 당시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를 대표하여 일본주재 사무관이었고, 후에 사법의회의 의원이 된 ꡐ안드레아스 크레이엘ꡑ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1682년 내가 에도에 체재하고 있을 때 코리아의 사절이 천황에 대한 관례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다. 폐하는 그들에 대해 최대한의 경의를 나타냈으며, 향응을 다하였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수많은 무예시합이 개최되었다.”


이 같은 경우는 하나의 무예교류를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의 도검 조작의 기법을 이런 곳에서 구경하고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천화2년(1682년)의 조선통신사에 유학자로 동행한 대마도對馬藩의 ꡐ陶山庄右衛門ꡑ이란 인물은 ꡐ東軍流ꡑ의 개조 ꡐ幾度六右衛門ꡑ의 고제의 한 사람으로 그 면허를 얻은 사람이었다.


또 ꡐ야규우신가케류ꡑ의 ꡐ야규우무에노리ꡑ도 ꡐ덕천가ꡑ의 검술사범으로 근무하였으며 막부의 정치에서도 요직에 있어 관영 20년의 조선통신사를 접대할 때에는 총감독으로 직접 통신사와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처럼 일본의 도검기에 정통한 인물들이 조선통신사와 접촉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1711년의 조선통신사의부사로 내일한 ‘임수간’은 ‘아라이’와 다음과 같은 필담을 나누고 있다.

“귀국은 검과 총을 장기로 삼는다 하니 검술이 보고 싶소. 고명한 사람을 불러 보여주시면 우리나라의 궁마술을 보여드리리다. 아라이가 검술에 관한 것은 이미 명령을 받았으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라고 주고받고 있다. 여기에서 조선측이 일본의 검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왜검倭劒으로부터 파생된 교전보가 실려있다. 이것은 대인 형식으로 도검 조작 기법이 나타내진 것이다. (덧붙여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보이는 다른 기법은 대인형식이 아닌 한 사람의 동작만 연속적으로 보여주는데 비해 이것은 대인형식으로 도검조작의 기법을 기록한 것이다.) 그에 관한 기록에는,

“두 사람이 교전하는 자세를 연습한다. 그 찌름을 오로지 한다. 가죽으로 싼 수척의 나무를 요도에 대신하는데 속칭 ꡐ목검ꡑ이라 한다.”

고 보인다. 즉, 교전보의 연습에 있어서, 가죽으로 수척의 나무를 들고 행한다 라고 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문장으로부터 판단하건데, 이것은 일본 검술의 수련방법, 특히 ꡐ야규우신가케류ꡑ에 보이는 ‘袋시나이’와 매우 비슷하다. 조선통신사의 왕래는 일본 ꡐ도꾸까와ꡑ 막부 기간에 행해졌지만 역대의 장군 중에서도 3대 장군 ꡐ이에미쯔ꡑ는 검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해 특히 ꡐ야규우신가케류ꡑ를 열심히 수련하였다고 한다. ꡐ이마무라ꡑ씨는 ꡐ이에미쯔ꡑ가 '劒術上覽', '劒術自演'을 여러 번 개최하였으며 '시나이'를 가지고 치고 받는 도법을 시험하였다고 주장한다.


ꡐ이에미쯔ꡑ가 조선통신사 앞에서도 이 같은 도검 기술을 피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재위시에 1624년, 1636년, 1643년 3번이나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통신사가 '袋시나이'를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겉으로 관찰하기에도 가죽으로 싼 것이 대나무인지 일반 나무대기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② 조선통신사의 일본 검술 관찰
여기에서는, 조선통신사가 남긴 「사행록使行錄」 중에는 일본에 대한 관찰 기록을 살펴보고 가기로 한다. 앞에 말하였다시피 통신사에 의한 일본도검기법의 입수라고 하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도검에 관련이 있는 몇몇 기사를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일본인의 칼을 차는 것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면,

○ 남자는 항상 大中小의 세개의 칼을 찬다. 큰 칼은 죽이는 것이요, 가운데 것은 방어하는 칼이요, 작은 것은 자살용이다. 나라의 풍속이 용감한 것을 높이 친다. 검과 창을 모두 잘 씀으로써 싸움터에 나가 한 몫을 한다
.
慶七松의 「海槎錄」(1607)

여기에서는 일본인이 항상 대중소의 3개의 칼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 대중소의 도검이 각기 사용목적이 다른 것, 싸우기 위해 항시 창과 검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이 언급되어 있다.

○ 항상 띠를 매는데 두 개의 칼을 앉거나 누었어도 차고 풀지 않는다. 비록 어린아이라도 단검을 항상 차며 스스로 연습한다.

姜弘重의 「東槎錄」(1624)
○ 남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칼은 차고 있다. 어떤 사람은 3-4개를 찬 사람도 있다. 앉으나 누울 때도 풀지 않는다. 원한이 있으면 스스로 배에 十字를 찔러 표시한다. 원수를 만나면 반드시 칼을 뽑아 갚는다. 나이 적은 아이라도 반드시 단검을 찼다. 사쓰마 사람들은 성질이 흉폭한데 장검을 잘 쓴다.

金東溟의 「海槎錄」(1636)
○ 그 성질이 칼 차는 것을 좋아한다. 上下의 두 가지 검이 있다. … 부귀한 자는 칼을 3개나 찬다. 가난한 이는 하나만 찬다.

南壺谷의 「聞見別錄」(1655)
○ 그 병기는 검과 총을 제일로 친다. 검을 찬 자는 반드시 크고 작은칼을 찬다. 큰 것은 베거나 찌르는 것에 쓰고 작은 것은 던져 마치는 것이다.

申維翰의 「海槎錄」(1719)
○ 어떻든 한 나라의 왜인은 모두 쌍검을 찼다.

曹蘭谷의 「奉使日本時聞見錄」(1748)

인데, 칼을 차는 습성이 지적되어 있다. 또한,

○ 병기를 씀에 칼과 창 조총을 상으로 치며 궁시와 마기는 끝으로 친다.

慶七松의 「海槎錄」
○ 병기 중에서도 총과 검은 정교하고 예리하다는 평이 있었고, 그 수식도 교묘해 금으로 장식한 검집도 있다.

南壺谷의 「聞見別錄」

이에 의하면, 弓矢나 馬技보다는 칼이나 창 조총의 기술을 득의로 하고 있다는 점과 도검의 정교함과 예리함 그리고 장식의 교묘함에 관한 기록도 눈에 띈다.
그리고,

○ 備前에서 예리한 칼이 생산된다.

李石門의 「扶桑錄」(1617)
○ 기타의 장창과 예리한 검은 備前에서 난다.

曹蘭谷의 「奉使日本時聞見錄」

이처럼,ꡐ비젠ꡑ의 도검이 특히 뛰어난 것 등을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조선통신사가 기록한 사행록 가운데에는 佩刀의 습성과 도검 그 자체의 정교함과 예리함 같은 외관적인 측면에 관한 기록이 있음을 알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왜검 조에는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일본도의 각 부위의 명칭을 기입한 상세한 그림이 실려 있다. 그리고 패도의 습성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이 같은 언급은 통신사의 관찰 결과에 근거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4. 끝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및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을 분석하고 일본의 도검기가 조선의 검술에 미친 영향과 그 배경이나 경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통항일람通航一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관문 년간에 나가사끼의 상인이 비밀리에 많은 量의 무기를 조선에 팔았다. … 그러므로 저 나라의 무기가 우리 나라에 많아졌는데 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버린 무기, 저들이 들고 온 남은 무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만들어 쓴 무기가 많다.”


위의 기사에 보이는 관문년간의 밀수 행위가 발각된 배 가운데에는 ‘장도와 칼’, ‘脇差 十箱’
등이 선적되어 있었으며 도검류가 상당수 밀수를 통해 조선에 건너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통항일람』, 「兩國書儀物 信使御暇等」의 기록에

○ 경장 12년 4월(1607) “조선사람이 내조할 때에 국왕으로부터 공경들에게 준 물건은 있으나 공경들이 조선국왕에게 드리는 물건이 없다. 세 사람의 사신에게 長太刀 15벌, 백은 600냥을 주기로 하였다.”

○ 관영 20년 8월 3일(1643) “조선국왕에게 바칠 살금초태도 열 자루, 갑옷 10 벌, 당직 50단. 이상의 것을 보냅니다. 日本國源監國”

○ 명력 원년 10월(1655) “조선국왕에 보내는 물건, 太刀 20자루, 長刀 20 자루, 갑옷 20벌, 병풍 20쌍 …. ”

○ 정덕 원년(1711) “조선국왕에 보내는 물건, 具足 20벌, 太刀 20자루”


등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기록은 조선통신사가 지참하는 물건에 대해 일본측이 返禮의 뜻으로 조선에 보낸 物目이다. 도검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통신사를 통해 도검의 수입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통항일람』 중에는 「異本朝鮮物語」라 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관리로부터 하천민에 이르기까지 의복은 다르고 칼도 차지 않는다. 다만 무관이나 군관들은 근무할 때에 한해 칼이나 무기를 등이나 허리에 찬다. 등에 맨 칼을 보니 검이 아니고 우리나라(일본)의 도와 같았다. 만든 것도 우리(일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36).'

전후의 사정을 판단하건대 이것은 1660년경의 조선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도의 영향이 조선반도에 정착하고 있음을 엿 보게 한다.

이상에서, 16세기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및 17세기의 조선통신사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도검기법과 칼이 조선반도에 전파되고 영향을 미쳤음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 같은 일본 도검의 충격은 조선반도의 무예 역사상 주목되지 않았던 도검기법에 대한 재인식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속에 여러 종류의 도검기가 게재되어 있는 것도 이 같은 계기가 구현된 것은 아닐는지…

현재 무도武道는 일본 국외의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무도문화의 한 형태인 검도경기에 몰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같은 무도의 국제화는 현대 특유의 현실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만 본 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이미 16세기경부터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도의 국제화를 생각할 때에는 현상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하지 말고 과거의 역사도 고려해 가면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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