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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고구려 축성법(築城法) 연구 - 성문을 중심으로

 이름 : 

(2006-07-05 22:56:27, 6218회 읽음)

고구려 축성법(築城法) 연구 - 성문을 중심으로

                                                  서길수(서경대)

Ⅰ. 머리말

고구려가 705년 동안 번영을 누리는 동안 소위 중국에서는 무려 35개의 나라들이 이합집산을 계속하는 혼란기였다(<표 1> 참조). 이런 주변국들의 대 혼란기에 고구려가 자기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 있었던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는 산성을 잘 쌓아 훌륭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기 612년(고구려 영양왕 23년), 수(隋)나라 군대 113만 3800명(스스로는 200만이라고 했다), 군인의 두 배나 되는 후방 지원부대, 어림잡아도 최소한 300만이 넘는 세계 최강의 군대가 쳐들어왔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 대군을 무찔렀고, 그 뒤 수나라는 몇 번 더 침략해 왔으나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만다.  

644년(보장왕 3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나라 때 고구려에 원정을 갔던 전 의주자사(宜州刺史) 정천숙(鄭天璹)에게 고구려의 실정을 묻자,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을 옮기기 어렵고, 동이(東夷 : 고구려)들은 성을 잘 수비하므로 갑자기 쳐서 함락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지금은 수나라 때와 비교할 수 없다”고 하며 쳐들어 왔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크게 패해 돌아간다. 3년 뒤(647년) 당 태종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을 때도 조정의 논의에서 대신들이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고 하였다. 수나라와 당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고구려의 수성(守城)작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라는 나라이름 자체가 성(城)이라는 말에서 나왔을 정도로 고구려와 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 보면 “구루는 구려다(溝漊者句麗)”고 하였는데. 이 문장의 주에서 “구루(溝漊)란 고구려 말로 성(城)을 일컫는다(溝漊者句麗名城也)“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란 나라이름은 성을 뜻하는 ‘구려’란 말에 ‘높다’라는 뜻을 가진 고(高)자를 붙여 만들었으며, 결국은 ‘고구려’란 ‘높은 성’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성이란 말은 적군을 막는 군사시설은 물론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였다. 구당서에 “그 나라(고구려)는 평양성에 서울을 두고 …… 60 여 개의 성(城)에 주(州)와 현(縣)을 두었다. 큰 성에는 욕살(耨薩) 1명을 임명하는데 (당나라의) 도독(都督)과 같고, 그 이외의 성에는 도사(道使)를 두었는데 (당나라의) 자사(刺史)와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 성이 바로 고구려에서 가장 큰 행정구역 단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많은 성을 쌓았다. 󰡔구당서󰡕에는 ‘고구려는 이전에 5부로 나뉘어 있었으며 178성(城)에 69만호(戶)였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기록을 가지고 고구려 당시 성을 176개라고 했으나 이 기록에서 말하는 ‘성’은 행정단위이지 성의 수는 아니다. 북한의 채희국은 176개는 고구려 멸망 당시 당나라가 점령한 지역의 성만을 집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성 189개와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성 66개를 아울러 모두 255개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손영종은 작은 보루까지 합하여 1000개가 넘을 것으로 보았으며 354개의 구체적인 성을 지역별로 표를 작성하였다. 위에서 든 성 가운데서 하고성자, 국내성, 요동성, 안학궁성, 청암동토성, 청호동토성 같은 10개 남짓한 평지성을 빼놓고는 거의 전부가 산성이다. 이로써 산성은 고구려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15년 동안 압록강 북쪽에서 130개 남짓한 산성을 직접 답사하여 10,000장 이상의 사진을 찍고, 수 십 시간의 영상자료를 만들면서 고구려 성의 분포와 축성법을 확인하였다(최근의 답사성과는 아직 지도작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1994년 작성했던 지도를 그대로 싣는다, 지도 참조).
<그림 1> 서길수, 󰡔고구려성󰡕, 1994.

이상과 같은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필자는 지금까지 고구려 축성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5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고구려 축성법 연구 - 석성의 체성(體城) 축조법을 중심으로-」, 󰡔고구려연구 The Journal of Koguryo Studies󰡕 제8집, 서울, 1999
  「성가퀴와 성벽 위 기둥구덩이」, 󰡔정영호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서울, 2000.
  「치성, 적대, 각대」, 󰡔고구려연구󰡕 제12집, 서울, 2001.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성과 축성술」, 󰡔고구려연구󰡕 제17집, 서울, 2004.
  「축성법을 통해서 본 고구려의 정체성」, 󰡔고구려연구󰡕 제18집, 서울, 2004
  「오녀산성․국내성․환도산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 󰡔고구려연구회 2004 추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4. 11. 27
  「고구려 축성법(築城法) 연구 - 성문을 중심으로」, 󰡔하바드 고구려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5. 4. 5~7

이번 논문은 축성법에 관한 6번째 논문으로 성문의 축조법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성문을 연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겠지만 이 논문에서는 성문의 축성법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옹성의 형태를 분류해 보고자 한다.
2, 3장에서는 전체적인 축성법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까지 쓴 논문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축성법의 전체적인 것을 간추려 보고, 이 논문의 주제인 옹성에 대해서는 4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Ⅱ.  성벽 몸체의 축조법
            
1. 튼튼한 굽도리 조성을 위한 특수 공법

  고구려의 성벽이 10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비밀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튼튼한 기초공사에 있었다. 평지도 아닌 산의 꼭대기나 비탈에 9m 높이 이상씩 무거운 돌로 쌓아 올린 석성들이 천 수 백년 씩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기초를 튼튼히 했기 때문이다. 굽도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수공법을 개발했다.  

1) 맨 아래 기단은 큰돌로 받친다

땅을 파고 기초를 한 뒤 먼저 큰돌을 한 두 층 쌓아 굽도리를 만든 뒤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위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하였다.

2) 굽도리 부분의 들여쌓기(퇴물려쌓기, 물려쌓기)

성벽을 쌓아 올리며 한 단을 쌓을 때마다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는 축조방식을 말한다. 튼튼한 굽도리를 위한 공법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공법이다. 이와 같은 공법은 여러 고구려 성에서 볼 수 있는데, 치성에는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3) 굽도리 부분의 내쌓기

들여쌓기가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서 쌓은 것이라면, 내쌓기는 성벽 밑에 굽도리를 마치 네모난 상자로 받쳐 놓은 것처럼 내 쌓은 것을 말한다. 최근 발굴된 심양 근방에 있는 석대자산성의 치에서 이러한 축성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굽도리를 계단식으로 들여쌓기 하는 것은 치를 쌓을 때 가장 많이 활용하였다. 이에 관한 것은 뒤에서 치를 다룰 때 자세히 보려고 한다.

4) 그렝이 공법

성벽을 쌓아가다 나타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아가는 돌들을 그 바위가 생긴 모양대로 그려 쪼아내고 다듬어서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것이 그렝이 공법이라고 한다. 이와같은 공법은 장수왕릉이나 태왕릉에서도 볼 수 있다. 원리는 간단하나 이 기법을 구사하는 기능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그렝이공법은 주변국에도 영양을 주었다. 신라의 불국사를 비롯한 사찰이나 일본의 신사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사찰이나 신사들은 주춧돌을 반듯이 다듬지 않고 강가에서 주어온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 위에 기둥을 돌의 굴곡에 맞게 깎아 맞추어 세운다. 이처럼 울퉁불퉁한 주춧돌에다 기둥을 깎아 맞추는 반듯한 돌을 쓰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축성법에서 출발한 공법이 당시 신라나 백제는 물론 일본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성벽(城牆) 쌓는 구조 - 겉쌓기와 속쌓기

1) 가지런한 겉쌓기  

(1) 겉쌓기의 구조와 석재의 생김새  

겉쌓기란 돌로 성벽을 쌓을 때 바깥면(墻皮)을 쌓는 일을 말한다. 경사가 진 곳을 파내고 바깥쪽만 쌓을 때는(외면쌓기) 한 면만 쌓지만, 평지에 담을 쌓듯이 쌓아올린 성벽은 양면 모두 겉쌓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양면쌓기).
겉쌓기 할 때 쓰는 돌은 여가가지 생김새가 있지만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쐐기꼴 돌이다. 마치 쐐기처럼 돌을 깎은 것인데 산성을 쌓는 성돌의 제조 방법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이다.

2) 겉쌓기법

잘 다듬어진 쐐기꼴 돌을 우선 머리가 큰 부분을 벽 바깥쪽으로, 머리가 작거나 뾰족한 쪽을 벽 안쪽으로 놓이도록 놓는다. 이 때 성벽의 경사에 따라 뒷부분의 두께를 조절한다. 즉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뒷부분의 두께가 엷어지고 경사가 없는 곳은 앞 뒤 양쪽의 두께가 같아진다.
성벽을 쌓아올릴 때는 이음선이 가로로 평행선을 이루도록 정연하게 선을 맞추고, 성돌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6합(六合)으로 물리고 뿌리를 성심에 깊이 박아 쌓았다. 6합이란 성벽을 쌓는데 같은 줄 양 옆에 2개를 놓고, 윗줄 2개와 아랫줄 2개는 반씩 물리도록 쌓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면 성돌 하나에 아래위에 각각 2개, 좌우로 한 개씩 접하게 되므로 6개가 단단히 물리게 된다. 6합으로 물린 성돌은 2합이나 4합으로 쌓은 것보다 훨씬 더 든든하다.

2) 꽉 물린 속쌓기

겉쌓기한 돌이 쐐기꼴이기 때문에 자연히 안쪽은 3각형의 틈이 생긴다. 이 3각 틈에다 마름모꼴(북꼴)돌을 꽉 끼우고 안쪽은 조약돌과 진흙을 다져가면서 겹겹이 쌓아올렸다. 쐐기꼴 돌의 꼬리부분을 길게 하여 속에 있는 돌과 서로 꽉 맞물리게 한 것은 성벽 안에 속쌓기한 돌도 성벽 겉의 쐐기꼴돌과 거의 같은 힘을 받게 한 것이다. 이것은 건축역학상으로 볼 때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이렇게 쌓은 성벽은 비록 일부 성벽 돌이 자연히 뽑아지거나 성 밑에서 성돌을 뽑아내도 손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녀산성이나 백암성에서 겉쌓기한 돌이 일부 또는 모두가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도 속쌓기 한 성벽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Ⅲ. 성벽에 설치한 부속시설

1. 성가퀴

성가퀴란 성벽 위에 설치한 시설로 사격할 때 몸을 숨기는 장벽으로 치와 함께 성벽의 기본 방어 시설의 하나이다. 화살을 막는 곳이라는 뜻에서 ‘살받이터’라고도 한다. 한문으로는 ‘성가퀴 첩(堞)’, ‘살받이터 타(垜)’자를 써서 첩(堞) 또는 타(垜)라고 하며, 여장(女墻)․여첩(女堞)․여원(女垣)․성첩(城堞)․첩원(堞垣)․희장(姬牆)․치비(寘陴)같은 여러 가지 표현을 쓴다.
성가퀴는 성벽 맨 위쪽 바깥쪽에 성벽보다 더 엷게 쌓기 때문에 거의 훼손되었고 남아있는 곳이 많지 않다.

2. 성벽 위 성가퀴 안쪽의 돌구덩이

  이 돌구덩이는 고구려 성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설이다. 같은 시대인 신라, 백제의 유적에서 이러한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고구려의 치나 옹성 같은 시설은 후대에 많이 응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돌구덩이는 아직 그 예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특징적 시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문헌에도 이러한 시설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이 구덩이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다.
지금까지 논의된 기둥구덩이의 쓰임새는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1. 굴림통나무(滾木)를 매다는 기둥구덩이(柱洞)
  2. 쇠뇌(弩砲)를 설치하는 기둥구덩이
  3. 성가퀴의 높이와 보호력을 높이는 목책기둥의 구덩이
  4. 깃대자리

이 네 가지를 분석해 본 결과 1번인 굴림통나무를 매다는 기둥구덩이라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1번이 타당성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바른 답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발굴을 통해 획기적인 증거가 나와 분명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3. 치성(雉城)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死角)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밖에 공격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성벽에서 접근하는 적을 일찍 관측하고, 전투를 할 때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양쪽 측면, 즉 3면에서 공격하여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내 쌓은 것이 치(雉, 또는 雉城)이다.
치성은 간단히 치(雉)라고도 하는데 ‘꿩치(雉)’자를 쓰는 것은 꿩이 몸을 감추고 적을 잘 엿보는 데서 온 말이라고 한다. 대개 각(角)을 이루고 있는 것을 치성(雉城), 둥근 것을 곡성(曲城)이라 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주로 마면(馬面)이라고 하는데 한국 기록에도 오래 전부터 쓰이는 낱말이다. 치나 치성이라는 용어는 주로 조선시대에 나온 용어이고, 그 이전 고려에서는 성두(城頭)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구려 때는 어떻게 불렀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여기서는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치나 치성이란 용어를 썼다. 치와 성가퀴를 아울러 치첩(雉堞)이라고 부른다.

1) 고구려 치 분류
1) 기능에 따른 분류
    치(雉) - 성벽에 밖으로 설치한 시.
    각대(角臺) - 성벽 귀퉁이에 설치한 치.
    적대(敵臺) - 성문 밖에 설치하여 성문의 방어력을 높여주는 치.
2) 인공 치와 자연 치
3) 굽도리(臺基) 쌓는 공법에 따른 분류
    민굽도리 - 굽도리가 없는 치.
    계단식 굽도리 - 굽도리 부분을 계단식으로 들여쌓기를 한 치.
    상자식 굽도리 - 마치 상자 위에 치를 쌓은 것처럼 굽도리가 4각으로 튀어나온 것.
2. 치성의 설치 목적
1)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
2) 효과적인 경계
3) 벽체를 보호하는 받침대
4) 전투할 때 아군의 활동공간 극대화
3. 고구려 치의 특징
1) 시야가 좁은 모서리는 치와 치의 사이가 가깝고, 시야가 넓은 곳은 사이가 멀다.
2) 모서리가 휘는 각대와 장대가 있는 곳의 치는 특별히 튼튼하고 크게 쌓았다.
3) 경사가 심한 곳은 민굽도리로 쌓고, 경사가 어느 정도 완만한 곳에 계단식 굽도리를 쌓았다.  
4) 민굽도리 치는 계단식 굽도리 치보다 너비를 더 넓게 하였다.
5) 각대는 양쪽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치보다 길이가 길다.  
6) 성문 가까이에 치를 쌓아 적대(敵臺)로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성문을 방어하였다.

Ⅳ. 옹성(瓮城)

성문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관문일 뿐 아니라 전투할 때 적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된다. 성문이 함락되면 곧 그 성 전체가 함락된 것과 같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성문을 보호하고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수한 시설을 하게 되는데 가장 발달한 것이 옹성이다. 옹성이란 성문이 적군의 공격에 직접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성문 바깥에 방어용 성벽을 하나 더 붙여 쌓아 성벽을 이중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옹성이란 문자 그대로 한 번 적군이 이 곳에 들어오면 독(甕) 안에 든 쥐처럼 사면에서 공격을 받고 밖으로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옹성은 처음부터 독과 같은 생김새가 아니고 초기에는 단순한 모양으로 시작하여 점차 다양한 꼴로 발전하였다. 고구려 옹성의 형태는 크게 다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Ⅰ꼴 : 요자골(凹字型) 옹성
  Ⅰ-1꼴 : 대형 요(凹)자꼴 옹성
  Ⅰ-2꼴 : 소형 요(凹)자꼴 옹성
  Ⅰ-3꼴 : 적대(敵臺)를 사용한 요(凹)자꼴 옹성
Ⅱ꼴 : 이중벽 옹성(전형적인 옹성)
  Ⅱ-1꼴 : ㄱ자꼴 옹성
  Ⅱ-2꼴 : 반동그라미(半圓)꼴 옹성
  Ⅱ-3꼴 : 성벽 안쪽에 설치한 옹성
Ⅲ꼴 : 어긋문꼴 옹성문
  Ⅲ-1 : 평행 어긋문
  Ⅲ-2 : 변형 어긋문
Ⅳ꼴 : 복합형 옹성
   1. 위패산성 동북 옹성문
   2. 후성산산성 남문

1. Ⅰ꼴 : 요자꼴(凹字型) 옹성

凹자골 옹성은 후대에 형성된 완전한 옹성 꼴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성문을 방어하는 시설로서 옹성과 똑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옹성꼴로 분류하였다.
  
1) Ⅰ-1꼴 : 대형 요(凹)자꼴 옹성

이 옹성은 산성의 성문에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주로 산 계곡의 안쪽에 문을 만들어 문 양쪽 성벽이 U자꼴을 되도록 해 방어력을 높인 것이다. 성벽이 직선으로 된 것 보다 U자꼴인 경우 적군이 성문을 공격할 때 성문과 양쪽 성벽 3면에서 협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예 :  龍潭山城 서문, 催陣堡山城 남문, 得利寺山城 동문, 娘娘山城 남문, 大黑山山城 서문

<그림 2> 용담산성
   서문 평면도

2)Ⅰ-2꼴 : 소형 요(凹)자꼴 옹성

이 꼴은 Ⅰ-1처럼 넓은 성벽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성문을 구성하는 성벽 크기만큼 요(凹)자꼴로 안으로 들여쌓은 것이다. 이 경우 옹성 안으로 들어온 적군은 모두 유효사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방어력이 배가 된다.
예 : 五女山城 서문, 丸都山城 남문, 太子城 북문

가) 오녀산성 서문

아래 보는 오녀산성 서문 평면도는 성벽 쌓은 부분만 그린 것이다. 그러나 남쪽 절벽이 자연적으로 성벽을 이루어 이 문은 서쪽을 바라보는 요(凹)자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녀산성 서문(󰡔오녀산성󰡕 34쪽)

나) 환도산성 남문

환도산성 남쪽 골짜기 입구의 자연지리 형태를 따라서 쌓았다. 남벽에서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凹자꼴이 되었다. 평면도는 현재 남아있는 성벽만 그린것이라 완벽한 凹자꼴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남벽과 연결하여 보면 전형적인 凹자꼴 옹성이라고 할 수 있다..




3)Ⅰ-3꼴 : 적대(敵臺)를 사용한 요(凹)자꼴 옹성

산성이 아닌 평지성에서는 지형을 이용하여 凹자꼴을 만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 바깥 양쪽에 적대를 쌓아 같은 凹자 꼴을 만들었다. 적대란 치(雉)와 같은 것으로 특히 성문의 방위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밖에 설치하는 것을 적대라고 한다.
예 : 국내성 북벽

가) 국내성 북벽 서문

아래 그림은 2003년 발굴한 국내성 북벽 서문의 평면도이다. 이 평면도에서 북쪽이 성밖이다. 여기서 보면 성문 밖 양족에 적대를 설치하여 성문 앞을 凹자꼴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국내성 북벽 가운데 문(中門)

이 평면도에는 문이 나타나 있지 않다. 현재 길로 사용하고 있어 모두 훼손되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문 밖으로 튀어 나온 두 개의 적대 사이 성벽에 성문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 두 개의 적대는 위에서 본 북벽 서문과 똑 같이 凹자꼴 옹성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Ⅱ꼴 : 이중벽(二重壁) 옹성(전형적인 옹성)
   1) Ⅱ-1꼴 : ㄱ자꼴 옹성

직선으로 이어지는 성벽을 잘라 문을 내고 문 밖으로 ㄱ자 성벽을 더 쌓아 이중벽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운 적군은 정면에서 쳐들어오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서 들어와야 하는데, 이 경우 이중벽 안으로 들어온 적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 : 국내성 서벽 북쪽문과 동문

가) 국내성 서벽 북쪽문

정형적인 옹성이 국내성에 보이는데 현재는 모두 훼손되고 남아있지 않다. 1913년 조사한 평면도에는 ㄱ자 이중벽 옹성이 서벽 북쪽문과 동문에 명확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옹성이 명확하게 남아 있다. 옹성이 정직각은 아니지만 반원도 아니기 때문에 ㄱ자꼴로 분류하였다.


<그림 3> 1913년 당시 국내성의 평면도


서벽 북쪽문은 상당히 발전된 옹성형태를 취하고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쌓은 성벽 밖에 튀어나온 치를 쌓고 남쪽 성벽을 치 밖으로 에워싸게 하여 2중문을 만들었다. 적군이 이 문을 공격하려면 좁은 문을 통해 북쪽에서 남으로 들어와야 하고 들어와도 사방에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 공격하기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옹성이 되는 것이다.  


<그림 4> 국내성 서벽 북문 옹성 평면도

나) 국내성 동문 옹성

동문은 서벽 북문과 같은 생김새이다. 동남 각대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성벽에 치를 설치하고, 그 치 바깥을 에워싸 옹성문을 만들었다. 이 옹성문은 남쪽에 적대 북쪽에 치를 설치하여 옹성의 방어력을 한층 높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복합형 옹성으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 5> 국내성 동문 평면도

2) Ⅱ-2꼴 : 반동그라미(半圓)꼴 옹성

Ⅱ-1과 같은 꼴이지만 ㄱ자가 둥그렇게 되어 반동그라미 꼴로 되는 옹성을 말한다.

  예 : 득리산산성 서문, 환도산성 서남문

가) 득리사산성의 서문 옹성

득리사산성 서문은 전형적인 옹성꼴을 하고 있다. 서벽은 가파른 언덕 위에 쌓여 있고 성문에 다다르면 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방어하기에 대단히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림 6> 득리사산성 서문 옹성 평면도


나) 환도산성 서남문

남벽 서쪽 끝에 있다. 현재 발굴중에 있는 성문이다. 옹성은 문길의 바깥쪽에 있다. 옹성 전체는 자루(袋) 같은 꼴을 하고 있다. 옹성 밖에 다시 성벽이 겹쳐 있는데 이 성벽에서는 ‘건륭통보’ ‘도광통보’ 같은 청나라 유물이 나온 것으로 보아 후대에 덧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덧쌓은 부분을 제외하고 원래 고구려 때의 성문만 보면 상당히 전형적인 옹서이 된다.  
<그림 7> 환도산성 서남문 평면도


3) Ⅱ-3꼴 : 성안에 설치한 옹성

Ⅱ-1과 같은 꼴이지만 옹성이 성벽 안으로 설치된 경우를 말한다. 성벽은 직선이고 그 직선을 자르고 문을 냈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ㄱ자꼴 옹성이 있는 생김새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옹성은 遼寧省 盖州市 高麗城子山山城 서벽 북문에서 본 것이 유일하다. 이 옹성은 급경사인 밖에 설치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안쪽에 이중벽을 쌓아 다고 볼 수 있는데 성의 크기에 비해 규모가 작은 셈이다. 한편 적군에 포위당했을 때 아군이 다른 성과 연락을 하기 위해 쓰인 암문(暗門)일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밖에서는 문을 쉽게 분별할 수 없도록 옹성을 안에다 쌓았을 수도 있다.
<그림 8> 서문 평면도 <그림 9> 서벽 암문

3. Ⅲ꼴 : 어긋문꼴 옹성문

1) Ⅲ-1 : 평행 어긋문

일반적으로 문 양쪽의 성벽이 일직선이지만, 이 경우는 성문 좌우의 성벽이 서로 어긋나게 진행이 되어 문이 있는 곳에서 성벽과 직각을 이룬 틈이 생긴다. 이 틈에다 성문을 세우므로 해서 옹성과 같은 효과를 낸 것이 어긋문이다.
예 : 용담산성 서벽 남문, 국내성 서벽 남쪽문, 개현 고려성산산성 남문

가) 용담산성의 서벽 남문의 옹성

길림시 용담산성 서벽에는 문이 2개가 있다. 북쪽에 있는 큰문이 현재 정문으로 드나들고 있는 것이고, 그 문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와 마치 암문처럼 크지 않는 문이 있는데 어긋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완전한 옹성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문을 들어오는 적군을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옹성의 한 형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 용담산성 옹성 평면도              <그림 10> 용담산성 서문 옹성

나) 국내성 서벽 남쪽문  
  
전형적인 어긋문 형태이다. 성벽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남쪽과 북쪽의 성벽이 서로 어긋나게 하여 끝이 서로 겹치게 만든다. 끝이 겹치는 곳에서는 양쪽에 치를 설치하여 가운데 문을 내었다. 문 밖에 남쪽으로 24.5m 쯤 떨어진 곳에 다시 치를 하나 쌓아 적대를 만들었다. 이 성문은 2003년 완벽하게 발굴하여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이 문은 전형적인 어긋문 형태로 고구려 성 가운데 어긋문의 형태를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발굴이라고 할만 하다.  <그림 11>국내성 서벽 남쪽문 평면도

<그림 12> 국내성 서벽 발굴 평면도

2) Ⅲ-2 : 변형 어긋문

성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어긋나게 쌓게 되면 직선이 되지 않기 때문에 네모난 성을 만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서 성벽을 직선으로 쌓다가 성문 근방에서만 어긋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변형 어긋문이라고 이름한다.  
      
가) 오녀산성 동문

아래 평면도는 성문 주변만 그렸기 때문에 어긋문과 달라 보이지만 성벽 전체적으로 볼 때는 변형 어긋문에 속한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일직선으로 쌓아가던 동벽은 성문에 이르러 문길을 비워두고 동쪽으로 직각을 구부러진다. 그리고 성문은 동서가 아닌 남북방향으로 축조한다. 직각으로 구부러진 성벽은 다시 구부러지면서 직선으로 달리게 된다. 결국 성문 부근에서 어긋문을 만들기 위해 변형시킨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이러한 어긋문을 옹성의 초기형태(雛形)라고 보았다.  
오녀산성 동문 평면도,


4. Ⅳ꼴 : 복합형 옹성

위에서 나온 세 가지 꼴과는 달리 여러 가지 옹성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접합하여 쌓은 옹성을 말한다.
예 : 위패산성 동북 옹성문, 후성산산성 남문, 고려성산산성(고구려 건안성)의 옹성

가) 위패산성 동북 모서리 옹성문

매우 특이한 옹성 꼴을 하고 있다. 동북 모서리 안쪽에 이 성의 최고 수장이 거주하던 내성(牙城)이 있기 때문에 아군이나 적군이나 모두 이 지점이 공수의 요점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서리에 있는 성문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특별한 설계가 필요했다.
동쪽 능선을 따라 쳐들어오는 적군은 남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공략하기 힘들고 성문에서는 여덟팔자(八) 안에 들어가 동벽과 옹성 바깥벽 양쪽에서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결국 적군은 좁은 공간을 많지 않는 군사들이 들어오고 Ƨ자 모양으로 돌고 돌아 성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아군은 양쪽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성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성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오른쪽은 북쪽 성벽이 쌓인 절벽이고 왼쪽은 다시 성벽이 이어져 마치 터널 안에 갇힌 것처럼 된다. 이 문 안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독(甕) 안에 든 쥐’가 되는 것이다.
<그림 13> 위패산성 동북 옹성문

나) 후성산산성의 옹성

성산산성에서 북쪽으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후성산산성은 동문과 서문 두 개의 문이 있다. 그 가운데 서문은 계곡의 지세를 이용하여 U자꼴로 안으로 들어가게 쌓은 뒤 이중문(二重門)을 쌓아 옹성을 만들었다. 이 옹성에서 특이한 것은 옹성 서쪽 밖에 다시 적대를 쌓아 방어력을 높였다는 것이다.
<그림 14> 후성산산성 옹성

  
다) 고려성산산성(고구려 건안성)의 서문 옹성

고려성산산성은 성문을 흙으로 쌓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산 위에 있는 이 산성의 동문과 서문의 옹성도 대단히 특이한 꼴을 하고 있다.
서문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어긋문 형식을 취하고 거기다 대형 적대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그림 15> 서문 평면도 <그림 16> 서벽 옹성

라) 고려성산산성(고구려 건안성)의 서문 옹성

동문도 다른 곳에서는 사례를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새이다. 넓은 문 가운데 높은 흙더미를 쌓아 적군이 양쪽으로 나누어 들어오도록 하고 안에 들어오면 양쪽에 옹성이 되도록 하는 이중옹성을 만들었다.


<그림 17> 동문 옹성

이상에서 고구려의 옹성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옹성은 고구려 초기 도읍지역부터 요동지역까지 전 시대 전 지역에 널리 퍼져 사용되었으며 석성은 물론 토성에도 많이 채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옹성의 형태도 대단히 다양하다. 그것은 고구려는 산성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산세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 발전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Ⅴ. 맺는말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는 매우 수준 높은 축성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축성법은 고구려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이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고구려 서쪽인 중국의 각 시대와 비교해 보아도 중국은 주로 흙을 판축해 쌓는 토성이고 평지에 쌓은 평지성인데 반해 고구려는 주로 돌을 잘 다듬어 쌓은 석성이고 험준한 산 위에 쌓은 산성이 주를 이룬다.  
고구려 축성법에서 가장 선진 기술로 평가받는 치성과 옹성도 고구려가 가장 먼저 발명한 시설이었다. 일찍이 북한의 채희국은 “옹성이나 치는 당시 다른 나라의 성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옹성과 치는 고구려 사람들의 창안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후세 우리나라 성들에 치나 옹성이 생기고 또 이웃나라들의 성에도 그런 것들이 생긴 것은 고구려 성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중국 학자는 “고구려의 비교적 늦은 시기 산성 구조에서 채용한 옹성, 치와 치첩(雉堞) 같은 시설은 모두 중원지구의 한식(漢式) 건축에서 온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그 근거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이 문제는 필자가 2004년 쓴 논문에서 고구려의 치성과 옹성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중국보다 더 이른 시기에 독창적으로 창안한 축성법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산성 축성법은 후대에도 계속 한국의 중요한 전통으로 내려왔다. 조선시대 유성룡의 산성론을 보면 이러한 방어체계는 한국의 전통으로 전해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적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여러 신하들에게 계책을 물으니 모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難猝拔)’ 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거란이 고려를 치려고 할 때도 신하들이 ‘고려 사람들은 산성의 새들처럼 산성에 깃들기 때문에 대군이 가서 공격해도 성공할 수 없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제대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예부터 국토를 보호하고 적을 방어하는데 모두 산성을 가장 유리하게 이용하였고 적들이 두려워 한 것도 역시 산성에 있었다. 병법에 ‘높은 곳을 먼저 차지한 자가 이긴다’고 하였고 손자도 ‘적이 높은 곳에 있거든 피하고 공격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군읍에서 무릇 산세가 약간이라도 험준한 곳 치고 옛 성터가 없는 데가 없으며, 한 개 읍에 어떤 곳은 2·3개소 많은 데는 5·6개소나 된다.”
이처럼 7세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는 완벽한 산성 축조술을 간직하였으며, 그러한 축성법은 남으로는 백제, 신라는 물론 일본의 조선식 산성에까지 전파되었으며, 서북으로는 요(遼), 금(金)을 거쳐 중국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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