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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騎射)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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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22:58:16, 5394회 읽음)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騎射)에 관해

                                                    이 진 수 (한양대 체육학과)

1. 서론
이 연구의 목적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보이는 무예 그 중에서도 기사에 관한 것을 밝히는 데에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우리는 弓馬, 槍劍에 관한 것은 물론 오늘 날 우리가 도수무예라고 부르는 수박, 민속경기의 대명사로 인기를 끌고 있는 씨름 등을 볼 수 있다. 이들 벽화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무용총의 수렵도이다. 이 수렵도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사도(騎射圖)라고 할 수 있다.
기사란 말 그대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신체운동이다.  기사는 승마술과 궁술이 복합된 어려운 신체운동이다. 이 어려운 운동에 숙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연습이 필요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림1을 보자. 두 사람의 기마 무인(武人)이 각각 호랑이와 사슴을 쫓고 있다. 새 깃으로 장식한 절풍(折風)을 쓰고 각궁(角弓)에 명적(鳴鏑)을 걸어 질주하는 말 위에서 힘껏 당기어 사냥감을 겨누고 있다. 그들은 동녕과 옷자락에 단을 단 짧은 소매의 긴 상의에 통이 큰 바지를 입고 있다. 팔에는 활쏘기에 편리하게 토시를 끼었으며 긴 장화를 신고 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짐승들, 질주하는 말 위에서 지금 바로 짐승을 겨누어 바야흐로 화살을 날릴 것 같은 사수(射手)의 넘치는 기백과 힘찬 움직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2. 고구려의 騎馬術

기사에 능숙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 승마술에 능하여야 한다. 무용총의 축조 년대를 4-5세기로 본다면 이미 당시의 승마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인들의 이 탁월한 승마술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 문제에 관해 학자들의 일부는 고구려 인들이 원래부터 騎馬民族이었다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이 기원전 1세기 경에 만주지방이나 요동반도에 있던 부여, 오환, 선비의 일종으로 원래부터 기마의 유목민족이며 고대 중국인들이 흉노라고 부른 인종이라 한다. 그리고 그 문화의 흐름은 중국보다 오히려 북방의 시베리아나 스키타이문화 계통에 속하며 그들의 기마문화와 같다고 주장한다.(賀茂儀一,1973;307)
스키타이는 문자가 없는데다가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물은 흑해 연안으로부터 몽고, 올토스까지의 아시아지역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분포를 보인다. 때문에 이것을 정리하여 체계화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鈴木治,1974;2) 그들이 인도 아리안 계통의 인종이란 사실도 기록상으로는 증명할 수가 없다. 그들이 남긴 회화, 부조 등으로부터 그들이 유럽인의 용모를 가진 수염 텁석부리의 인종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스키타이인의 유물 가운데에서 가장 저명한 것은 동물의 모습이 붙은 대금구(帶金鉤)이다.
중국에서 동물의장은 살마트式이라 불리고 있는데, 이것도 스키타이의 전통에 근거한 것으로, 북부 중국의 올토스 사막 및 그 주변에 퍼져 있다. 중국 고대의 주(周)를 위시하여 진(秦), 한(漢)을 끊임없이 북방과 서남으로부터 위협하던 흉노의 말 문화는 아시아 북방의 이 스키타이의 말 문화를 직접 받아들인 기마 인이었다.(Phillips(勝藤猛譯),1971;62)
스키타이의 주요한 무기는 뿔로 만든 2단으로 구부러진 강한 활이었다. 물론 그것은 마상에서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짧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활시위가 대단히 강해 귀에까지 힘껒 당겨야 하였으며 지상에서 활을 쏘면 최대 사정거리가 500야드나 되었고 말 위에서 쏘아도 그 최대 유효사정거리는 100야드나 되었다. 전쟁터에서 그들은 마상에서 활을 쏘았으므로 손으로 말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말고삐로 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遊牧民式의 승마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말을 넓은 초원에서 마음껏 구보시키고 최대의 속력으로 달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승마법을 익히기 위해 평시에도 자주 수렵을 행하였다. 사냥할 짐승이 많은 초원을 질주하는 사냥꾼이었던 그들은 완강한 작은 말을 타고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을 쫓았다. 그들은 그물이라든지 함정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말을 쉬지 않고 질주시켜 활로 사냥감을 쏘았던 것이다.(賀茂儀一.1981;151)
이와 같이 스키타이의 기사법은 무용총의 수렵도에서 보는 그것과 비슷하다. 고구려 인들도 각궁을 사용하고 있으며, 질주하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은 체 활시위를 귀까지 당기어 사슴과 호랑이를 쫓고 있으며, 3월의 제일(祭日)에는 낙랑의 언덕에 집합하여 전국 규모의 수렵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초기 철기문화의 유물로 생각되고 있는 경주 입실리, 영천 어은동의 유물에 약간의 마구(馬具) 혹은 스키타이係의 영향을 받은 동물형 대금구 등이 있어 상당히 오랜 옛날에 말문화가 전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개마총의 기마벽화는 시베리아 예니세이 지방에 영향을 준 살마트족 기마상과 대단히 유사한 친근성을 나타내고 있다. 고분 벽화로부터도 원환형(圓環形)의 말 재갈을 직접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살마트係이다.(鈴木治,1974;163) 살마트인들은 스키타이를 압도하여 그들을 세계사로부터 소멸시킨 종족으로 인도유럽계이며 고전시대에는 흑해 동북연안의 초원지대에 살던 기마 유목민족으로 그 문화는 스키타이와 비슷하다. 그들의 기마병은 가벼운 차림의 사수였던 스키타이의 기마병과는 달리 중무장을 하였다. 그들의 주요한 무기는 창으로 그것도 아주 무거운 장창이었다. 그들은 길이가 긴 갑주를 입고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혔다. 중무장에 창을 들고 더구나 이 창은 투창식으로 된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두 손으로 들거나 아니면 겨드랑이에 끼어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개마총에 묘사된 고구려의 중장기병의 모습은 살마트의 그것과 일치한다.
천관우는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에 해당되는 3-5세기 경 흉노, 선비, 오환, 부여, 고구려 등에 의해 스키타이 기마민족과는 다른 문화 소위 중국화 한 호족(胡族)문화가 나타나는데, 그 특색은 기사전법과 기사에 필요한 마구, 도검, 궁시, 복장, 갑주 등에서 특히 눈에 띈다고 말한다.(千寬宇,1977;130)  에가미는 이 호족문화가 기원전 6세기로부터 활약한 세계최초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계와는 상당히 다른 문화라 하고 이것을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호한(胡漢)문화라고 한다.(江上波夫,1973;218) 호족은 기마민족이기 때문에 말을 타고 활로 싸우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기사를 위한 도구, 궁시가 발달할 것은 당연하며 복장도 승마하기에 편리한 것으로 되며, 갑옷도 기마용으로 변한다.
고구려 복식의 특징은 대개 서북방 기마민족이 입던 호복(胡服)계통의 의복이다. 호복은 양팔을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좁은 소매통의 웃옷인 습(褶)과 양다리를 민첩하게 활동할 수 있는 좁은 바지인 고(袴)로 구성되어 있어서 말타고 사냥하는데 편리한 체형형(體型形)이다.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한사군과 수나라를 격퇴시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은 활동적이고 무풍적(武風的)인 고구려인들의 체형형 복식에 기인한다고 본다. 평상시에 입고 있는 옷이 무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말을 타고 사냥을 하엿으니 몇배가 넘는 큰 나라 대군이 전쟁을 걸어와도 분연히 결전의 태도를 가지고 겁내지 않고 싸워 이겼다. 이와 같이 고구려 복식은 평상시에 입으면 평상복이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복이 된 셈이다. 또 말위에서 의복이 흩트러지지 않도록하기 위해 띠를 맺는데 그 띠에는 금구(金鉤)를 달았다. 신발도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는 등 모든 것이 승마에 적합한 복장이다. (劉頌玉,1993;212)
화살은 명적이 특이하다. 이것은 화살의 첨단에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을 뚫은 골재(骨材)의 깍지가 붙어 있어 넓은 초원에서 말을 달리며 전투할 때 돌격의 시간과 방향을 지시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말에 얹는 안장은 서양식처럼 안교가 낮고 평면적이며 여유있게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안교가 똑바로 세워져 잇어 입체적이며 앉기에는 좁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신체를 말의 탄성으로부터 피하게 하여 상하의 진동을 적게 하고 표적을 쏘아 맞추기 위해 말 등으로부터 허리를 띄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자에 발을 꼭 딛고 신체를 세워 두 손으로 활을 당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장이 좁고 입체적인 편이 더 편리하다. 우리가 보는 고구려 벽화의 승마술은 스키타이, 살마트, 흉노 등의 대륙계의 것으로 그 승마법, 마구, 기사법에 공통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어떤 종류의 말을 탔을까? 고분벽화에 보이는 그들의 말은 결코 크지는 않다.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의 고구려 조에는 ‘ 그 말들이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데에 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같은 책의 부여 조에서는 ‘ 명마가 난다.’고 하였다. ‘키가 작은 말’과 ‘명마’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비교된다. 사실 당시의 고구려에 어떤 말들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은 말과 아라비아계통의 큰 말이 있었을 것이다.(南都永,1954;63)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젊었을 때에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주몽은 준마를 골라 감식(減食)시켜, 비루먹은 말로 만들었다. 그 대신 노마(駑馬)는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비루먹은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당시에 이미 말을 기르는 사육사가 있어 준마를 식별하는 지식과 기술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책의 ‘온달’ 전에는 ‘처음 말을 살 때 왕녀는 온달에게, 주의할 것은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말고 나라에 속했든 말이지만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 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 바꾸라고 하였다. 왕녀가 열심히 말을 사육하였으므로 말은 날이 갈수록 살이 찌고 커갔다.’라고 보인다. 왕녀가 말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말을 사육하는 실제적인 기술까지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은 문헌의 기록과 앞에서의 고고학적 자료 등을 종합하여 보면 고구려 인들의 기마술이 한층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마를 기본으로 하는 무술로는 기사 외에도 기창, 기검 등이 있다. 이들 무술은 기마술을 기초로 하여 궁술, 창술, 검술의 각각과 결합하여 하나의 신체운동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 무기로서의 기마술은 삼국으로 나뉘어 다투던 당시의 고대 한국의 상황에서 대단히 중시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고구려는 그 뛰어난 기마병들에 활약에 의해 ‘기구(騎寇)’라 불릴 정도로 중국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삼국지]의 동이전 고구려 조에 ‘ 말을 잘 타고, 사냥에 능하다.’고 기록된 대로 그들의 기사 실력은 인근의 나라들에 잘 알려진 존재였다. [삼국사기] 온달 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 고구려는 매년 3월 3일에는 낙랑의 언덕에 모여 수렵을 하였다. 그래서 돼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의 신에 제사하였다. 이때에 온달은 제가 기른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언제나 선두에서 달렸으며(其馳騁常在前), 잡은 것도 제일 많았다(所獲亦多).”
고구려에서의 수렵이 기사라는 신체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의 기마술은 스피드에 더 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하였다는 데에 특징이 있었다. 이것은 위의 기록에 보이는 ‘언제나 선두’라는 문구로 분명하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명중률이 될 것이다. 그 것은 앞의 기록에 ‘잡은 것이 많다’ 고 한 대목에서 들어난다. 말을 질주해 달려 선두를 유지하며 사냥감을 쏘아 명중시키는 것으로 그 날의 영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결국 고구려 바보들의 대표격이었던 온달이 이 날의 성과로 가장 똑똑한 영웅으로 현실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최남선은 제천행사를 동반하는 이 수렵대회가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제도 같은 것으로 기사에 탁월한 사람을 등용한 것이라 한다.(崔南善,1974;524) 고구려의 무인이 산악에서도 질주하는 말 위에서 두 손으로 활을 힘껏 당기어 짐승들을 잡을 수 있었음은 기사술의 탁월성을 입증한 셈이다. 중국의 역사가가 ‘참 활을 잘 쏜다’하고 고구려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은 이런 사실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말 위에서 강한 활을 당기었으므로 동시에 손으로 말고삐를 제어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여기에 적합한 기마법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법 즉 말을 마음껏 질주시켜 최대의 속도로 달리게 하는 방법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전면적의 75%가 산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산에 잘 오를 수 있는 독특한 기마법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며 북방 유목민 식의 그것보다 더욱 발달된 기마술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인들도 놀란 독특한 ‘고구려 식 승마술’의 존재하였음에 틀림없다.

3. 고구려의 射法

이렇게 뛰어난 승마술의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사법(射法)을 구사하고 있었을까?
기사라는 신체운동이 승마술과 사법의 복합운동이기 때문에 승마에만 능하고 사법이 졸렬하다면 완전한 기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활을 어떻게 쏘았을까?
다시 무용총의 수렵도로 되돌아와 활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언급한 그대로 고구려의 활은 그 구조가 단순하지 않으며 몇  개의 궁재(弓材)를 합쳐 만든 각궁(角弓)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 할 수 있다. 화살은 명적(鳴鏑)이다. 고구려의 각궁은 두터우면서도 짧아 당기기만 하는 데도 상당한 완력이 필요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명적에 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형식상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촉신 부분과 명향(鳴響)부분이 분리된 것으로, 경상남도 양산 부부총에서 출토된 것이 있고,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된 것이 있다. 명적부의 크기는 3-4cm 폭 2cm 정도이다. 시베리아에서도 6-7세기 경의 적석총에서 발굴된 명적은 이것과 같아 명향부와 축신부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데 촉살은 쇠, 명향부는 뼈로 되었다. 제2의 형식은 수원동기(綏遠銅器) 가운데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촉과 명향부가 하나로 되어 있다. 중국의 수원지방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모두 청동제품이다.
제1종의 명적을 사용하던 지역은 시베리아, 만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이다. 그 사용 년대는 중국의 육조시대 이후 늦어도 후한시대 이후이다. Hirth는 동아시아에서 명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장자]의 재유편(宰有篇)에 보이는 ‘효시(嚆矢)’라 하고 명적의 중국 기원설을 주장하였으나 에가미는 이를 부정하고 명적이 흉노의 화살로 알려진 것처럼 원래는 북아시아 유목민족 고유의 무기로, 그들 사이에 신호용으로 쓰인 특별한 살촉이라 밝히고 있다(江上波夫,1951;57-58).
명적은 무용총의 벽화고분 뿐만 아니라 약수리와 덕흥리의 고분벽화에서도 보인다. 고구려에서 명적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말을 질주하여 달리면서 각궁을 귀에까지 바짝 당기어 명적전으로 짐승을 겨눈 고구려 무인의 활 쏘는 폼은 잘 통일된 운동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이 활 쏘는 자세가 이미 사법으로 통일되고 체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활 쏘는 이는 모두 안장에 앉은 체 상체만을 틀어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고 있다. 이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서도 보인다. 집 짓는 데 쓰이는 기와에 두 마리의 사슴을 쫓는 무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경주박물관편, 국립박물관명품선,no.58) 말을 질주하면서 활을 당기는 기사의 자세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고구려 벽화의 사법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사법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경, 이란의 북동부에서 로마와 대전하여 크게 위세를 떨친 파르티아(Pharthia)에서 이다. 다음의 그림은 파르티아 사람들이 중국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인데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사법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파르티아 왕국을 멸망시킨 사산(Sasan)왕조의 은접시에도 같은 사법이 보인다. 다음의 그림이 그것이다.
두 발굽을 가지런히 번쩍 든 체 날듯이 달리는 말-이것을 푸라잉 갤로프(flying gallop)라 한다- 위에 앉아 등을 돌려 사자를 쏘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 사법은 파르티안 샷(Phartian shot)으로  불리어진다.
이 독특한 사법이 어떤 경로로 고구려에까지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문화가 서로 교류되는 속에서 전래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長澤和俊,1983;126). 그러나 전래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각 민족이 수렵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 할 수만은 없다. 라우펠과 로스토프체프는 중국 한대(漢代)의 수렵도- 파르티안 샷이 묘사된-가 시베리아, 이란 등지의 것을 모방하여 이를 답습한 것이라 주장한 데 대해 에가미는 마상에서 뒤로 돌아 동물을 쏘는 그림도 있지만 정면에서 쏘는 그림도 존재하므로 이들 자세는 실제의 수렵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江上波夫,1973;238).
일본의 경우 이 사법은 압렬사(押렬射)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18세기에 성립한 [貞丈雜記]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伊勢貞丈,1928;471).
“ 오늘날의 기사는 8代 장군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방식은 야부사메(流鏑馬)와 비슷하다. 땅을 파 그 사이로 말을 달리며 세워 놓은 얇은 송판을 쏘아 맞추는 것이다.---쏘는 모습은 앉은 체 앞으로 몸을 숙이고 가슴을 뒤로 젖혀 말을 달리다가 몸을 뒤로 틀어 살을 날린다. 옛날의 야부사메, 가사가께(笠懸), 이누오이모노(犬追物)등은 안장 위에서 쏘고 다만 활 당기는 것이 늦었을 경우에만 압렬하여 쏘았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압렬사라는 사법이 18세기 이전의 일본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의 파르티안 숏은 18세기의 8대 장군 요시무네에 의해 돌연 창조된 것인가? [有德園實記]에는 당시의 장군 요시무네가 취상(吹上)이라는 곳에 조선 마장(馬場)을 세우고 기사하는 것을 보았다고 보인다.
“ 향보 4년(1720) 10월 15일, 대신들과 함께 吹上에 행차하여, 조선 마장에서 기사협물(騎射挾物)을 구경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기사협물’의 협물이란 일본어로 ‘하사미모노’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과녁 혹은 표적을 말한다. 원래 일본의 표적은 종이, 나뭇잎, 감자 잎 등을 끼어놓고 쏘았기 때문에 하사미모노(사이에 끼운 것)라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마장에서는 송판으로 변화되며, 이것을 말을 타고 달리며 쏘아 쪼개는 것을 기사협물이라 하였던 것이다. 요시무네가 조선마장에서 기사를 구경하는 행사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그의 在世時에만도 60여 회에 달하고 있다.(今村嘉雄,1970;314-318)
그 때로부터 28년이 지난 1748년에 조선은 예조참의 조엄을 정사로 삼아 다시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일본의 9代 장군 이에시게(家重)의 襲職을 경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엄이 쓴 <해사일기>에는 기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인다(박기동, 1994;94).
“關白이 활쏘는 기예를 관람코자 청하는 것은 규례이다. 기해년(1719), 무진년(1748)에는 연속 여덟 사람을 보냈다. 그러므로 營將인 김상옥, 유달원, 都事인 임홀 장사, 군관인 조신, 임춘홍, 마상재인 정도행, 박성우를 정해 보내고, 명무중에는 마침 아픈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副房伴人이며 전 萬戶인 김응석으로 수를 채워 보냈더니 그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射場에 같이 들어간 자나 좌우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모두 훌륭한 騎射라고 칭찬하고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하니 또한 무료함을 면할 만 하였다”
일본측 자료인 [돈신원일기]에 의하면 1748년 6월 동예산에서 행한 한국인의 보사(步射), 騎射 때에는 궁궐의 호위들까지도 모두 나와 견학하였다고 한다. 히도미의 [한객수구록(韓客手口錄)]에는 1681-1684년 사이에 일본에 온 조선통신사절단과의 수담(手談)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바장 정태석, 형서정 홍금의 전복을 입고 말을 달린다. 안장에서 일어나고 혹은 물구나무서며, 안장을 붙들고 땅에 닿을 듯 매달리며, 혹은 누어서 말을 힘차게 몬다. 말을 몰며 서로 웨치는 데 그 소리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꾸짖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말을 달리면서 웨치는 소리는 웃는 것인가? 꾸짖는 것인가?’ 고 물으니 ‘이것은 포효니 기(氣)를 돋우는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마상재(馬上材)의 시범을 당시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따라간 무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보여 준 것을 배운 당시의 일본인의 기록이다. 마상재에서 말을 몰 때 기수들이 지르는 포효를 일본인이 모르고 질문한 것이다. 당시의 일본 승마술에는 이 같은 포효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이세는 앞의 [정장잡기]에서 기사를 설명한 대목에서 ‘馬長의 처음서부터 끝까지 웨치 듯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쏜다.’고 하고 이런 일이 일본의 고대에는 없었다고 하였다. 장군 요시무네는 기사를 장려하기 위해 일본 전통의 야부사메를 피하고 이를 기사협물로 대신 부르게 할 정도였다. 야부사메에서는 전통에 화살을 넣고, 안장에서 허리를 세우고 말을 달리는데, 하사미모노에서는 화살을 허리에 2대 꽂을 뿐 전통에 넣지 않는다. (今村嘉雄,1970;183)
이상의 자료만을 보드라도 일본인의 파르티안 숏이 한국인에 의해 전래되었음을 인정할 것이지만, 이 사실을 분명히 한 일본인은 없다. 이세(伊勢)는 ‘장군가에서 이 제도를 만들어 고가사하라에게 주어 여러 사무라이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고 하였을 뿐이다.
18세기의 조선에서는 그 때까지도 고구려 식의 사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통신사절단의 문화요소가 되어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끼친 문화적 영향은 대단히 컸다. 더구나 근세 일본의 승마술 특히 騎射法은 조선의 사법을 모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기사법이 1천 수백 년의 흐름을 통해 조선조에까지 전수되어 내려온 사실은 강한 문화의 동질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다른 사법보다 그 효율성이 높은 이상적인 사법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문화로 계승될 수 있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샌 듯한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고구려의 벽화를 보기로 하자. 이 사법에 숙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였으리라 짐작되는데, 과연 고구려 사람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이 사법을 연습하였을까?
다음의 벽화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이 벽화는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기슭에 축조된 고분에서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덕흥리 고분벽화라 부른다. 고분의 축조 년대는 408년이며, 그 이듬해인 409년 3월 4일 돌문을 닫아 폐쇄한 것으로 묘안의 벽면에 기록되어 있다. 묘지명에 의하면 고분의 주인은 그 이름이 진(鎭)으로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등을 역임하고 77세에 사망하여 영낙 18년 12월 25일(408년, 1월 26일) 묘를 만들어 영구를 이곳에 옮겼다고 되어 있다.(金基雄,1980;180) 고구려에서 이 시기는 광개토대왕 재세기(392-413)로 국력이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사법을 연습하는 그림은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말을 탄 4명의 무인, 평복 차림의 인물이 3명이 그려져 있다. 표적은 5개이다. 그림의 오른 쪽에 ‘이것은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馬射戱)를 하는 것이다.’ 라는 설명문이 씌어져 있다. 이 외에도 문자는 마장(馬場)중앙에 있는 3명 중 가장 왼편에 ‘사희주기인(射戱主記人)’ 이라 보인다. 그림만을 보아서는 이 3사람이 모두 사희에 관한 것을 기록하는 것인지, 붓을 든 사람만 기록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이들은 말탄 무인들의 성적을 심사하고 기록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희주기인’ 이란 사희를 기록하는 것을 주재하는 사람이란 뜻이니 가장 왼편에 서서 붓을 든 사람은 ‘주기인’이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희를 구경하는 팔자 수염의 2사람은 묘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선수는 4명이다. 2사람은 말을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겨누고 있다. 나머지 2사람은 한 순을 돌아 나왔거나 아니면 준비자세를 취하는 중이다. 과녁은 5개의 장대 위에 송판을 붙인 것 같은데 2개는 누가 쏘아 맞혔는지 두 동강이가 난 체 땅위에 떨어져 있다. 이 그림 중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선수는 과녁을 겨눈 체 말을 달려나가는 왼쪽 무인이다. 완전한 폼의 파르티안-샷을 구사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자기가 쏠 과녁을 지나쳐버려 부랴부랴 몸을 돌려 황급하게 사격하는 실수한 폼이 아니다.
“ 이렇게 쏘아야만 제 점수를 다 받을 수 있읍니다요!”
하고 시범이라도 보이고 있는 듯한 멋진 폼이다. 아마도 이 3명의 심판은 이 선수의 승리를 선언할 것만 같다.
덕흥리 고분벽화를 통해 우리는 5세기 초의 고구려에 기사가 마사희란 이름으로 이미 체계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사희를 오늘의 말로 바꾼다면 ‘말타고 활쏘는 경기’ 가 될 것이다. 이 번역이 5세기의 고구려 상황에 합치될 것인지의 여부는 지금에 와서 알 수 없으나 최무장은 이 해석을 채택하고 있다(최무장, 임연철,1990;308).
놀이를 통한 인재 등용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우리는 신라의 화랑제도를 드는데, 고구려에서도 이미 마사희를 통한 인재 등용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과 산천의 여러 신들에게 제사하는 3월의 낙랑언덕에서 행하던 수렵대회- [삼국사기]의 원문에는 ‘회렵낙랑지구(會獵樂浪之丘)’로 되어 있음- 가 공개적인 인재 등용의 한 방법이었다면, 마사희는 고분 주인의 집 서쪽 마당에서 비공개로 자주 실시되던 귀족계층의 단순한 놀이였을  수도 있다. 묘지의 주인을 위로하고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생전에 즐기던 마사희를 개최하고 화가로 하여금 이를 그리게 하여 벽화로 남겼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각저총의 씨름 벽화가 장례경기대회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과도 일맥 상통한다.
최광식은 장천 1호 분의 놀이벽화까지도 제사지내는 모습이라고 주장한다.(崔光植,1994) 놀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지만 어떻든 제사에 이 같은 경기와 놀이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사실은 고대의 한국에 그리스의 올림픽과는 또 다른 제전경기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준다.

   4. 결론

한국에서는 무예로서의 활쏘기가 삼국 시대로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신라에서는 ‘궁전법(弓箭法)’이란 제도로 인재를 뽑았던 사례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원성왕 4년(788) 봄에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정하고 독서력을 시험하여 상, 중, 하로 등급을 매겨 인재를 등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동명성왕의 이름이 주몽으로, 이 이름이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활 잘 쏘는 사람의 별명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거듭 언급한 바 있다. 동명왕이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되어 이웃 나라의 왕 松讓과 왕으로서의 자격을 걸고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시합의 발단은 송양이 그에게 ‘속국이 되라고’ 권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시합에서 승리한 주몽은 송양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익년에는 송양으로부터 나라를 이양 받는다. 이양 받은 땅을 ‘다물(多勿)’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옛 땅을 다시 찾았다는 고구려 말이다.(김부식,1983;130-131)
고구려 같이 부여, 말갈, 숙신 등의 여러 부족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것은 신체능력의 탁월성이었을 것이다. 기사는 지도자 계급층의 신체적 탁월성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말을 달려 무리의 선두를 달린다는 것은 그대로 그의 용감한 통솔력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더구나 활을 잘 쏘아 당할 사람이 없다면 그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는 더욱 쉬웠을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馬射戱를 통해 그들의 기사술을 더욱 연마하였고 이 같은 전통은 조선조에까지 이어져 내려와 섬나라인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그들의 馬文化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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