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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광개토대왕의 군사작전에 대하여 (수군을 중심으로)

 이름 : 

(2006-07-05 23:00:03, 5726회 읽음)

  광개토대왕의 군사작전에 대하여 (수군을 중심으로)

                                  尹明喆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    

1 .서언

2.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4 關彌城 전투 검토

5 丙申年 전투 검토

5 맺음말

1  서언

광개토대왕은 재위하는 동안 동서남북을 대상으로 전방위 정복활동을 하였고, 외교전을 펼쳐 고구려가 東亞地中海의 中核國家로 만드는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생애와 업적 등에 관해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고, 또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왕의 활동과 정책을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거나 군사전에 능숙한 정복군주로, 혹은 명분의 실현 등으로 평가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또한 백제 및 주변국가들과 맺은 정치 외교행위는 물론이고, 군사적인 행동도 국제적인 질서의 재편과정이라는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군사작전과 행동을 한반도 내부에서 통상적으로 활용되던 보병적 관점의 전략 전술이 아니라, 기동성이 강한 기마군단을 활용하였고, 심지어는 수군작전도 병행한 총체적인 전략과 전술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을 통해서 고구려가 수군을 보유하고 대외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을 유일하게 남기고 있다. 병신년 조항은 '王躬率水軍 討伐殘國'에서 '水' 자리의 글자에 대해서 약간의 이론이 있음에도 대체적으로 수군으로 석문하고 있다. 따라서 대왕이 재위 년간에 시행한 수군작전의 분석을 통해서 고구려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고구려가 국제질서의 전개과정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주도적인 역할과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해양활동을 어떻게 추진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북진정책과 동시에 추진해온 남진정책을 계승하면서 왜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만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방전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고대국가들이 해양방어체제를 얼마나 중요시했고, 어떤 식으로 구축했는가를 확인하며 아울러 海洋力이 역사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도 인식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시대 고구려의 해양활동에 대하여 실체, 의미, 수군작전의 실상 및 해양방어체제에 대하여 글을 발표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주제와 소재를 압축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기록된 丙申年의 수군작전을 중심으로 전략의 구체적인 실상을 이해하는데 주력하고 한다. 이를 위해서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일반을 전쟁의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어 병신년의 수군작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미성 전투의 실상과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어 병신년 전투의 전개과정과 수군의 진격로 및 그와 관련이 있는 해양방어체제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2 장.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고구려는 초기에 만주 내부를 흐르는  鴨綠江·松花江·渾江 등 큰 강을 활용하는 江上水軍과 수상활동은 있었다.태조대왕 시대에는 황해로 나가는 出海口를 확보하려고 西安平을 공격하였다. 또한 초기부터 동해가에 있는 東濊·沃沮 등과 교섭하고 통제하에 두었던 사실은 해양활동 능력을 흡수했음을 의미한다. 3세기 전반인 동천왕때 강남에 있었던 손권의 吳나라와 황해를 종단하여 외교는 물론 軍馬와 貂皮를 수출하는 등 교역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압록강 하구의 西安平을 점령하여 黃海로의 出路를 확보하였다.4 세기에 들어서서 美川王은 요동과 남진정책을 취하는 남북동시전략을 취했다. 3년(302)9월에 3 만 명의 군사로서 玄兎郡을 공격하고, 이때 사로잡은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12년(311)에 서안평을 점령한 후에 완전히 서해안에 진출한다. 압록강의 하구지역과 황해북부의 해상권, 황해북부의 연근해항로의 물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3년(313)에 낙랑을 완전히 구축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다음해인 314년에는 대방을 멸망시켰다.낙랑과 대방이 가졌던 해양능력을 흡수했으며 대동강 하구 및 예성강 유역의 일부를 영향권 아래에 넣었다. 이로서 고구려는 명실공히 황해중부이북의 해상권과 연근해항로를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낙랑 대방을 둘러싼 대결은 한반도뿐 만 아니라 倭까지 연결한 동아지중해 동방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중국세력과 중국세력의 협공에서 벗어나며 교역상의 이익은 물론 남부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고구려 사이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기본구도 상으로는 朝漢戰爭과 유사하며, 영토 팽창전 보다는 교역권의 싸움, 그리고 해양질서의 대결이란 성격이 강했다. 특이한 성장과 경험을 했던 美川王은 국제질서의 본질을 인식하고, 해양질서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인 잇점 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녔다. 그는 남북 동시전략을 추진했고, 남진에 비중을 두어 고구려가 실제적으로 남쪽에 뿌리를 내리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처럼 고구려가 전기에 추진한 해양활동은 주로 국가전략 및 국제관계의 추이 속에서 상황의 전개를 고려하면서 이루어졌다. 즉 황해로의 出海口를 확보한 다음에 낙랑 및 대방의 구축, 남진의 교두보 확보 등 주로 국가정책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백제는 해양활동이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국가의 발전과는 어떠한 함수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또 고구려와 백제 양국은 왜 경기만에서 충돌을 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사실들을 해양질서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백제는 지정학적 조건과 三韓의 경험 등 先占한 집단의 전통을 기반으로 일찍부터 해양활동의 능력을 가졌다. 沸流와 溫祖는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연안 및 근해항로를 통해서 경기만으로 상륙한 다음, 현재의 인천 또는 서울 지역에 정착하였다. 특히 비류가 정착한 지역은 인천인 彌鄒忽로 추정하고 있고, 때문에 비류집단은 초기부터 해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백제는 마한을 병합하면서,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던 소국들이 지닌 해양활동능력과 범위도 흡수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古爾王 3년(236) 기사에서 西海大島 사냥은 해양활동에 대한 왕의 관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성황 속에서 4세기에 들어와 백제와 고구려의 팽팽한 대결로 한반도의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낙랑과 대방의 잔재세력들은 해양능력을 가지고, 대외교역과 정치적 활동에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의 정치적인 공백을 메꾸고, 대외교섭에서 발생하는 정치·외교·경제적인 잇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진출을 시도했다.한편 백제는 북쪽으로는 樂浪·帶方 등과 대결하면서 성장하였으며, 304년에는 낙랑군의 西縣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한강유역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중부 해안이 가진 경제·외교적인 잇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4세기에 이르러 近肖古王이 등장하면서 화북지역과의 외교관계는 물론 교역망을 확충하려는 경제적 필요가 강했을 것이다. 대방지역을 확보하면 일본열도에서 화북지방까지 연결시키는 황해연안 교역권의 일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東晉은 建康(현 南京)에 수도가 있었으므로 대방과 樂浪이 사용하던 항로를 탈취하고, 황해중부항로를 사용하기 위한 해양교두보를 확보하는 일이 필요했다. 여기서 평양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원주의 法川里 등 한강유역과 그 水系에서 발견된 東晉系 陶磁器의 존재는 한강유역의 백제세력이 동진과 교섭하고, 교역을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황해도의 황주지역에서는 백제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對高句麗戰을 과감히 수행하는 일이 근초고왕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고국원왕의 남방진출 기도와 북방진출을 하는 백제 近肖古王의 의도는 황해중부에서 '해양영역의 확보와 탈취'라는 공동의 목표로 인하여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이는 주로 경기만 쟁탈전의 양상을 띄웠다.  
경기만은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로서 동아지중해에서 가장 의미있는 역학관계의 核이고, 실제로 힘의 충돌과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다. 고대의 항해는 연안항해와 근해항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경기만은  이른바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遼東半島를 경유하여 山東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의 중간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結節点으로서 한중교통의 요지로써 후대에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경기만은 한반도 내부에서도 地政學的·地經學的·地文化的 입장에서 보아 필연적으로 각 국간의 질서와 힘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경기만은 平壤을 중심으로 淸川江이 있고, 특히 남쪽으로는 禮成江·臨津江·漢江이 河系網을 구성하면서 서해중부로 흘러 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다. 특히 강화도 북부는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으로서 예성강뿐 만 아니라 延安郡 등을 통하면 載寧江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하계망과 內陸水路를 통해서 내륙통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물류체계를 원활하게 하여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잇점이 탁월한 경기만을 가운데 두고 양국간의 대결은 본격화되었다.
故國原王은 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고, 13년에는 燕나라 慕容 의 침입을 받았을 때 東皇城에 머무른다. 369년에는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雉壤전투에서 패배하였다. 371년에는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쳐들어온 근초고왕의 백제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그후 고구려와 백제는 경기만 북부지역과 해역을 놓고 대결을 시작되었고, 각 나라들은 존속기간 내내 생존을 걸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상륙작전 등 해양을 통한 침투를 시도하고, 해안선 근처에서 적극적인 공방전을 펼쳤다. 이렇게 경기만과 그 하계망들을 사이에 두고 격돌한 사실들은 지정학적인 조건과 전략상으로 보아 경기만 북부의 해상권 쟁탈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려준다. 특히 백제의 입장에서는 적 수군의 침입방어와 국토의 보존이라는 원론적인 목적 이외에 수도방어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고, 또한 외교통로 및 교역로를 보호한다는 다종의 의미를 가졌다.
경기만 유역의 북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양국의 충돌은 주로 浿河(예성강)일대에서 벌어졌다. 백제는 漢水 以北으로 진출하고 한강유역을 개발할 목적으로 서해안의 관방시설을 확충했다. 373년에 청목령에 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즉 백제의 세력권은 동쪽은 북으로 水谷城(新溪), 중간에는 靑木嶺(開城) 윗쪽인 예성강, 그리고 서쪽은 경기만에 접해있는 황해도 남부지역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375년에 水谷城을 점령하고 백제는 반격을 가하지만 탈환하지 못한다. 다시 376년에는 백제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아마도 수곡성 아래이면서 청목령 윗쪽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386년 봄에 백제의 辰斯王은 靑木嶺에서 八坤城,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長城을 축조한다. 이렇게 해서 황해도 지역, 특히 해안에 방어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 양국간에 벌어진 싸움은 水谷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해안선에서 100km 이내의 내륙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해양전의 발발이 예상되고 있었고,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양쪽 모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가 황해중부의 해상권 확보와 해양활동을 놓고 격동적으로 갈등을 벌일 때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고, 그로 인하여 경기만은 역사적으로 질적인 변신을 했다.
廣開土大王은 제19대 왕으로 즉위하여 22년의 재위기간에 정치 군사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남과 북으로 군사적인 진출을 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된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켰으며, 또한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능동적인 대처를 통해서 고구려의 국제적 위치를 크게 향상시킨 데 있다. 4세기 초에 동아시아 국가 간에 형성되었던 역학관계는 4 세기 말에 들어오면서 변동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서 해양활동의 질에도 변화가 왔다. 이때 廣開土大王은 군사적인 우위성을 활용하여 강공책을 구사하면서 동서남북의 전방위 정복활동을 감행했다. 군사전을 중시하는 대외정책은 재위년간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대왕은 명멸하는 북방국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하고 화전양면정책을 구사한 것은 自主的이며, 탄력성있는 외교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남방에서, 광개토대왕은 2년(392) 7월에 4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石峴 등 10縣을 함락하고 10월에는 백제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또 大王 2, 3, 4년에도 백제와 수 차례 전투를 벌리는 등 초기에는 주로 백제와의 전투에 임했다. 물론 이는 고국원왕 말년에 상실한 예성강 유역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조치이다.광개토대왕은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 396년에는 다시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를 쳐서 58城 700餘 村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8년에는 帛愼을 치고, 또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 倭 聯合軍을 격파한다. 한편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었다.
대왕은 군사적으로 全方位 攻略을, 외교적으로는 全方位 外交를 펼쳤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릉비문의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면 남쪽을 향한 외교활동과 군사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남진정책을 펼친 한 배경으로서 농경지의 확보를 통한 생산력 증대를 들고 있다.또한 육지의 영토확대나 전략적 거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동아시아 세계는 질서의 측면에서 장기 지속성을 가진 외교전략을 토대로 정책집행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양이 중요한 활동무대로 등장했고, 남북조의 分立은 주변 각국들로 하여금 외교활동의 통로로서 해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대외관계의 측면, 특히 본고의 목적상 해양활동의 측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남진정책은 한반도의 정세와 백제와의 구원으로 볼 때 선차적으로 남부전선을 안정시키고, 백제를 제압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의 팽창정책 이후에도 광개토대왕의 즉위하기 직전인 389년 390년에도 연속적으로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것은 백제의 북진의도가 존재하고, 그만큼 군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장 관미성 전투 검토  

광개토대왕은 元年에 漢水 以北을 점령하고, 關彌城을 공함하면서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大王 17년(407)의 정벌 때까지 예성강 및 한강유역의 백제 활동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결국 광개토대왕은 수도인 한성의 攻滅과 더불어 西海沿岸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당시 전쟁이 해양질서와 관련이 있음은 첫째, 국내적이고 경제적인 측면과 국제적이면서 정치 외교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며, 해양활동능력의 확대, 황해해상권 확보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과 전술에서도 수군작전 등 해양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루어진 해양활동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기록된 辛卯年 조항, 丙申年 조항, 甲辰年 조항,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원년조의 關彌城 공함 조항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고구려가 주체가 되었으며, 직접 수군활동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군사작전은 병신년간의 상황이다.
그런데 병신년 작전을 실시하기 위한 예비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관미성 전투이다. 더구나 관미성 전투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수군작전의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먼저 관미성 전투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황해 중부해상과 對中國交通路를 고구려와 공유하면서 대치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백제의 수군활동은 常時體制로 운영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렇다면 사료의 기록과 전쟁 과정을 고려할 때 관미성 같은 성은 해양활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동시에 수도를 방비하고, 외교와 교역을 보호하는 전략적 가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고구려의 해양위협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기능을 위해 서해중부의 선대 등 수군력이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 조건을 고려한다면 백제의 북변 요충지이며, 고구려의 1차 공격목표가 되었고, 백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탈환하고자 했던 關彌城은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는 백제의 해양활동을 분쇄하고 경기만 등 漢水 以北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관미성의 함락과 필사적인 守城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전투 이후인 병신년에 백제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가능했고, 그것이 해안지대에 국한되어 있었음은 관미성의 전략적 기능을 잘 알려주고 있다.
관미성은 백제가 대외교섭을 추진하는 發進基地와 적군의 水路侵入을 방어하는 1차 關門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한강수계와 직접 연관되고 고구려의 해양접근을 광범위하게 차단하기에 적합한 요충지에 있어야 한다. 더우기 관미성이 백제수군활동의 본거지였고 수군이 전투에 참여했을 경우에는 양 국 간에 海戰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가 수군활동을 했고 전쟁에서 수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광개토대왕릉비 14년  甲辰조에 나타난 왜의 대방계 침입 기사에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왜군은 백제군을 주력으로 하면서 수군을 활용하여 공격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관미성을 공격했던 병력은 육군 외에 수군이 병력의 이동이란 보조차원을 넘어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미성은 가능한 한 水系가 끝나거나 육지와 근접한 島嶼에 위치해야 타당하다.
관미성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강수계와 이어진다는 조건에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지역에 관해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기존의 주장들에 이의를 제기하며 주목을 받은 견해는 김윤우 尹日寧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타당성을 인정받는 烏(鰲)頭山城說이다. 윤일녕은 관미성의 위치를 고구려 수군이 기동한 禮成江- 西海(喬桐島 延安 및 江華一帶를 포함)-祖江- 臨江 漢江交會地點-漢江-麻浦 등을 잇는 수로상에 있다고 하면서 烏頭山城의 주위지역을 치밀하게 답사하여 그 곳이 삼국사기의 기록에 합당한 부분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두산성은 임진강 하구를 이용하는 적을 방어하는 데에 적합한 지형이다. 반면에 예성강 하구를 통해서 내려오거나, 수군을 이용하여 경기만 이북지역에서 내려와 남진할 경우에는 전방의 防禦線으로서의 주요기능은 상실한다. 이미 적은 강화수로를 이용하여 진입하는 도중에 상륙하여 강화도와 김포반도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한 후에 서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강화도에서 안정적으로 교두보를 구축한 다음에 여러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전면적으로 한성을 공격할 수도 있다. 또한 예성강 이남과 임진강 사이의 내륙지역과 해안지방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방어망을 구축하기에 힘이 든다. 더구나 관미성 전투가 일어날 무렵에 국경선은 임진강이 아닌 예성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없다.
한편 李丙燾는 喬桐島의 자연지리를 약술하고, 그곳을 관미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양국의 수군활동을 전제로 하는 설로서 타당성이 있으나, 관미성이 백제의 북변 방어진지로 구축된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경기만 전체를 군사적으로 총괄하고, 수군까지도 관리해야 하는 사령부를 설치할 조건으로서는 불리하다. 예성강 하구 남쪽지역에서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로 들어오는 船團, 강화도와 황해도 사이의 수로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리고 江華水路와 한강하류를 따라서 海岸防禦施設이 미비할 경우에는 오히려 배후에서 공격받을 전략적 취약성이 높다. 손영종은 관미성을 개풍군의 백마산 부근으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 江華島를 관미성으로 보는 설도 있다. 이 說은 강화도라는 지역을 선정한데서 1차적으로 타당성을 가진다. 강화도는 이러한 해양지리적인 잇점 때문에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나 대방으로 出入하는 해양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검문소의 구실을 할 만한 지역이다. 백제의 10성과 관미성은 광개토대왕 원년에 고구려에게 넘어갔으며, 다음 해에 시도된 백제의 '관미성 탈환작전'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내륙에선 백제의 공격이 浿河線까지 올라갔다. 이러한 사실들은 광개토대왕의 초년공격이 海岸線一帶와 海岸地帶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大王 6년에 이르러 비로소 고구려의 수군은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50여 성을 취하고 수도를 공략한다. 그 때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彌鄒城 등이 공함된 것은 그 이전까지, 즉 원년과 2년 전투에선 고구려의 공격대상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관미성은 丙申條에 공취된 성 이외의 성이고, 해안지역이면서 방어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은 강화도의 해안북부가 가장 적합하다.  
필자는 강화도 북부의 봉천대가 있는 河陰山城을 주목한다. 이 지역은 강화도의 최북단이면서 제일 서쪽에 있고, 실질적으로 강화도와 황해도가 만나는 해역으로서 한강입구에 해당되고, 동시에 바다로 나가는 海口이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의 예성강과 경기도의 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른바 해륙교통의 결절점이다. 이러한 조건때문에 4세기 후반 내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지 지역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전술적인 유리함 때문에 이 지역과 교동도만 장악하면 경기도 황해도, 즉 경기만의 북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만의 북부지역을 감싸고 있는 황해도의 개풍군 연백군 해주군 등 등 까지도 영향권 아래에 둘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예성강과 개성 등을 잇는 선에서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해양진출이 필요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 지점에는 진출거점이며 해양방어의 요새로서 전력이 강한 산성의 구축이 필요하다.
그러면  관미성 전투에 고구려의 수군이 참여했을 경우에 수군의 발진기지는 어디였을까?
일단 현 평양성 이남지역은 제외된다. 平壤지역은 南浦灣 등의 良港이 있고, 大同江 水系로 인해 보급로 등 내륙과 연결하는 일이 원활하다. 지리적 조건을 보면, 장수산성 지역에서 나아 남쪽으로 내려오면 해주만과 연결된다. 해주만은 경기만의 일부로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황해중부의 큰 강이 모여드는 곳이며, 어떤 지역으로도 접근과 상륙이 가능하다. 분만 아니라 강령만 옹진반도의 옹진만, 장연군과 옹진군 사이의 대동만 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로 연결된다.  더욱이 재령천을 거쳐서는 남포만과 연결되어 대동강과 만나고, 그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 평양까지도 쉽게 물길로 연결된다. 또한 이 지역의 만은 모두가 해양교통의 요지임은 물론 깊숙한 만과 만을 감추어주는 섬들이 앞을 막아주고 있어 해양군사활동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그러니까 장수산성 지역은 황해도 중부 한복판에 있으면서 경기만은 물론 황해도 연안의 모든 만들을 연결시키면서 이 지역의 해상 활동권을 하나로 연결하고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해양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군사체제로서는 매우 유용한 지역이다. 이와 관련하여 손영종이 내세운 남평양설의 장수산성 지역은 의미가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에는 고구려의 水軍이 활동하기에 위험 가능성이 많았다. 故國原王이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보면(평양이 장수산성 지역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평양지역은 백제의 영향력이 미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었고, 남포만과 대동만, 강령만, 옹진만, 해주만 등의 황해도 지역은 취약지구였다. 小獸林王 7년인 377년에 백제가 평양을 공격하고, 故國壤王 6년인 389년에 생긴 백제의 공격 등은 평양지역을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됐고 전선이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대규모 수군함대가 대동강 유역이나 그 이남 주변에서 發進할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
그러면 그 이북에서 적합한 해역을 찾을 경우에 청천강 하구와 압록강 하구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압록강 유역은 수도인 국내성과 비교적 가까워서 兵力의 이동과 관리가 자유롭고, 對中交涉에 유리하다. 더우기 하구인 서한만에는 큰 섬들이 있어 선박의 정박과 수리, 그리고 造船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반면에 主戰線인 경기만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군사작전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 淸川江 유역은 西韓灣을 가로막는 여러 섬들이 있고, 만 밖에는 身彌島가 있어 방파제 구실을 한다. 또한 고구려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지구인 평양지구에서 가까우면서도 안전한 지역이므로 전략거점으로서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전략적으로 백제 북변과의 거리가 압록강 지역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짧다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가 기습공격을 감행할 경우,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것은 전략상의 차질을 가져온다. 관미성 전투가 20일이나 걸렸던 경험은 이미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그 같은 난이성이 충분히 반영됐을 것이다. 그리고 수륙양면 작전을 감행할 경우에 육군과 수군의 이동속도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해야 하므로 수군의 발진기지는 가능한 한 전선과 가까운 곳이어야 합리적이다. 따라서 관미성을 공격하기 위한 발진기지는 청천강 유역이었으며, 중간거점으로서 비교적 안전성이 확보된 대동강 水系의 한 灣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광개토대왕의 초기에 고구려의 수군작전은 남포만 이북이나 압록강 하구인 서한만을 주요한 發進基地로 하였고, 관미성 함락이후에는, 즉 大王 6년(丙申)조에 전개된 수로군이 공격할 때에는 甕津, 海州灣, 혹은 禮成江口를 최종발진기지로 하여 경기만에 집결한 다음에 그 전에 탈취한 關彌城을 중간거점으로 삼는 형태였다.

4장 병신년 작전 검토

광개토왕릉비문에는 '--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至 南首攻取壹八城---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라고 하여 광개토대왕이 大王 6년(396)에 대규모의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의 58城과 700村을 탈취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해의 기사와는 달리 步騎를 사용한 사실과 海戰이 발생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水陸兩面作戰으로 공격을 했건, 군사를 운송했건 수군을 동반한 작전임은 틀림없다.
해양작전은 보병을 동원하여 면과 선 위에서 한정된 작전을 펼 수밖에 전과는 다른 특성들이 있다. 수군작전은 潛行性이 있다. 적군의 관측범위나 방어체제와는 무관하게 아군의 작전능력과 의도에 따라서 잠행한 다음에 적의 배후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선단은 전방지대 멀리 우회한 다음에 후방 깊숙하게 상륙할 수 있다. 특히 야간작전을 즐겨 구사하면서 이른바 點의 작전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둘째, 機動性이 있다. 선단은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리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기마군단 보다도 유리한 점은 야간에도 계속 움직일 수 있고, 전투의 주력인 병사들의 동력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보병의 기동성과는 전혀 비교의 대상이 안될 정도이다. 셋째, 反轉性을 갖고 있다. 즉 전투의 일반적인 흐름과 전세에 강한 변화 내지는 극적인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원거리이동 후방 상륙작전은 수군작전의 백미로서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다.
광개토대왕은 당시의 상황과 경기만의 정치 외교적인 가치, 그리고 효율적인 전략과 전술을 고려하여 수륙양면작전을 전광석화처럼 실행하였다. 그런데 50여 城을 공파하고,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兵力과 運送船이 상당히 많거나, 척 당 승선인원이 대량인 큰 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6년 조의 기사는 고구려가 海洋活動 능력이 뛰어났으며, 본격적인 水戰과 대규모 군사작전의 감행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고구려 수군의  편제, 군사력, 수송을 포함한 해전능력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과 해양전략의 특성, 몇몇 기록을 통하여 그 윤곽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병신년 수군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규모의 兵船과 군사가 집결되었던 발진장소와 지역은 어디였을까? 다수의 병력을 운송시키고, 전투에 필요한 군수품을 보급하고, 적재하는데 적합한 장소이어야 한다. 또한 良港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많은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하는 灣이 있으며, 목적지까지 최단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漢水 이북에서 이러한 조건을 비교적 갖춘 곳은 해주만과 예성강 하구 및 대동강 하구이다. 廣開土大王 元年의 전투로 인하여 漢水 이북의 10여 城을 점령하고 북변의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했다면, 이 시기에는 이미 예성강 이북 및 북부 경기만은 안전성이 확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릉비문 14년조는 王健群 석문을 보면 '十四年 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王躬率往討 從平壤□□□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殺無數.'비문을 판독한 결과에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해석하면, 백제와 왜의 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왜연합군은 대방계를 침입하였는데 이때 倭와 百濟 사이의 주도권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문장의 주어가 倭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비문 작성자는 倭를 주체로 인식하고 있다 王健群도 동일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명분상으로도 왜의 침입과 역할을 강조했고, 수군을 동원한 대방계 습격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역할 상으로는 왜가 주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역학구도와 전황을 보아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방계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이 무렵에는 고구려로서는 어느 정도 안정성이 확보된 장소이며, 해안과 가까운 장소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수군활동과도 관련이 있었고, 병신년에 수군이 발진할 수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병선과 군대를 어떤 방향으로 이동시켰을까?
광개토대왕은 일차적으로 백제의 북진을 저지해야 한다. 그리고 대외교통의 출해구를 막고,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 상태에 빠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양능력을 강화하고, 본격적인 남진정책의 예비단계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기본목표는 경기만을 장악하고, 궁성을 함락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대외교섭창구를 탈취하는 일이다. 이 목표를 완수하는 효율적인 전략이 바로 경기만 상륙작전과 한강수로 직공작전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기본목적과 당시의 전략전술 및 이 해에 점령한 성들의 위치를 고려하면 수군의 작전범위를 재구성할 수 있다. 陵碑文의 永樂 6 년 조에는 공파된 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성들의 위치와 남방한계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대체적으로 이병도의 주장 이후에 천관우를 거쳐 이들 성들이 한수 이북에 있었으며, 수군의 작전반경범위는 임진강 유역 및 한강 하류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58성700촌의 위치를 보다 남쪽, 예를 들면 충청도 내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酒井改藏를 비롯하여 박성봉은 이들 성들의 다수가 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손영종은 충청도 지역을 중요시하여 396년에 수군을 동원하여 한강하류 이북뿐 아니라 그 이남지역에도 적지 않게 진출하였으며, 또 충청북도, 충청남도 일부지역에서도 군사작전을 벌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물론 이 작전은 한강유역의 서부 및 이남의 해안지대에서 벌어졌다. 당시의 전략과 전황으로 보아 한강 이남을 공격하지 않고서는 백제의 해양능력을 약화시킬 수 없으며, 백제의 해안공격에 서부해안지대가 노출될 우려가 있다. 또한 한강 이남을 공취하지 못하고 水軍을 이용해 한강수계와 수도만을 점령하였을 경우에 백제수군의 공격으로 퇴로가 끊길 가능성이 많았다. 고구려는 394년(광개토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하였는데,이는 황해도의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이면서 동시에 백제수군의 기습에 대한 고구려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이 지방에는 배천의 치악산성, 연안의 봉세산성, 해주의 수양산성, 옹진의 고성 등 고구려 산성들이 있고, 그 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해양방어체제의 성격을 지닌 성들이다.
그런데 릉비문에 기록된 점령된 성 가운데에 비교적 정확하게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일치되는 성들이 沸城(통진), 阿旦城(아차산성), 彌鄒城(인천), 牟盧城(용인) 등이다. 나머지 기록된 성들은 이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은 해양 전략적으로 보아 고구려군의 상륙지점 및 한성공격 방향에 아주 적합한 위치에 있다. 즉 백제가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의 한 부분들이었다. 그 시대는 이미 해양전이 전개됬고, 국가의 방어를 위해서는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해양방어체제들은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즉 일개 단위의 해양방어체제 속에서는 소규모의 전술적인 방어망 외에 전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中心城이 있다. 이 성은 비교적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육지의 군사력과 공동작전을 펼 수 있는 지역에 있다. 중심성을 둘러싸고 규모가 작은 周邊城들이 포진해 있다. 해안 가까이에는 일종의 방어와 관측의 기능을 하는 前衛城들이 있다. 그리고 해안선과 섬에는 일종의 堡壘인 소규모 방어체제들이 있다. 그 외에 필자가 甕路라고 명명한 보조시설물들과 海岸烽燧들이 있다. 그런데 고대 해양방어체제들은 삼국이 교대로 점령하였으므로 역사적인 상황과 용도, 전략에 따라 존속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하였다. 또한 보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으므로 축성양식이 혼재해 있고, 발견되는 유물도 섞여 있으며, 심지어는 축성의 주체 및 시대에 대한 사실기록에도 혼란이 있다. 특히 경기만 지역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가면서 점령을 했고, 특히 백제와 고구려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기 때문에 이러한 혼재현상이 심하다.
경기만 지역에 광범위하게 구축된 해양방어체제의 연구와 당시에 전개된 전황 및 국제질서, 그리고 릉비문에 기록된 몇 몇 성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광개토대왕이 거느린 수군은 대략 3 개로를 택해서 상륙하여 백제의 전방지역과 한성을 공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 1로는 대동강 유역에서 출발하여 예성강 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 강화도는 古爾王 때 전렵을 한 서해대도이므로 백제의 세력권 아래에 놓여 있었다. 만약 관미성이 강화도에 있었다면 고구려는 이미 원년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통제권을 확보하였으므로 수군작전을 수립하기에 적합하다. 남북한강이 만나 최종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또한 연천, 파주 등 경기 이북을 흐르는 임진강이 김포반도에서 한강과 합쳐져 다시 내려오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도 강화도이다. 특히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도 강화도 북부이다. 예성강뿐 만 아니라 延安郡 등을 통하면 載寧江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강화도로 직접·간접으로 이어진 한강의 河系網을 활용하면 한반도 중부 지역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한강은 경기만을 통해서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이다. 백제는 한강하류의 河岸都市國家로서 출발하였고, 수도를 내륙 쪽으로 이동시킨 후에도 역시 한강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수군의 한강수로직공은 한성을 공략하는데 가장 효율적이고,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수도방어라는 차원에서 한강하류 방어체제를 구축해야할 필요성이 강한데, 이는 해양방어체제와 유기적인 시스템을 이루어야 한다. 백제는 責稽王 때에 한강강변방어체제를 쌓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책계왕은 대방을 공격하는 고구려를 저지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그 후에 보복이 두려워 阿且城을 쌓고, 蛇城을 고쳐 쌓았다. 이 두 성은 현재 워커힐 뒷산의 아차산성과 건너편의 龜山토성 혹은 風納토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물론 수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강변방어체제이다. 그 이외에 외곽이나 한강수로 입구 부근의 강변에도 방어제제를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강수계의 하류에는 시대가 불분명한 河岸防禦體制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특히 한강과 면한 김포반도에는 산성은 물론 얕은 구릉 등을 이용한 방어시설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전략적인 환경과 백제의 방어체제를 고려하면서 제 1 로인 한강수로를 직공하기 위하여 주력군은 강화도에 상륙한 다음에 통과하여 김포반도의 북동쪽, 즉 한강 수로변으로 진입하고, 다른 군대는 직접 김포반도로 상륙하여 육로를 이용하여 한성으로 진격해야 한다. 이 때에 점령당한 성으로 릉비문에 나타난 沸城은 통진으로 추정된다. 한강 수로 주변의 즁요한 지점에 구축된 하안방어체제들 가운데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고, 공격수군이 제일 먼저 돌파해야할 방어선이 童城山城 지역과 烏(鰲)頭山城 지역이다. 황해도의 내륙을 흘러 내려온 예성강과 남 북한강, 서해가 만나는 강화도 서북부를 통과하는 물길은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좁고 조류가 빠른 江華水路를 지나서 북상하는 물길과 만난다. 그 지점이 바로 현재 문수산이 있는 지역이다. 그 곳을 거슬러 올라가면 김포반도 쪽으로 애기봉과 祖江里가 있다. 이 좁은 물목은 한강의 양 안 간의 도강지점으로 사용되며, 수로로 직공하는 선단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원년(392년) 10월에 실현한 관미성 점령 당시에도 주요한 전장이었을 것이다. 丙申年에 감행된 수군작전에서 김포북부는 당연히 공격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건너편인 현재 황해남도의 백마산성은 豊德, 延白, 교동도, 강화도 등이 둘러싸고 있는 禮成江 하구를 거쳐 한강 하구인 祖江으로 들어오는 물목을 지키던 중요한 강변 방어성이다. 둘레가 7,5km에 불과하나 건너편 강화 북부지역과 애기봉, 동성산 지역 등을 샅샅이 볼 수 있다. 강 양쪽의 산성들이 세트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손영종은 관미성을 이곳으로 비정한 사실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東城山城은 김포시 霞城面의 童城山의 정상부(113m)를 감싼 석축 산성이다. {大東地志}에는 '通津 本百濟平淮押(一云 別史波衣)'라고 하였다. 동성은 본디 백제의 童子忽 또는 仇斯波衣幢山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 16년 12월 童城으로 고쳐 長堤郡의 令縣으로 삼았다고 한다. {韓國의 城郭과 烽燧} 上에는 삼국시대 초기 유적이라 하고 백제시대의 성이라고 하였다.근래에 조사한 육사박물관보고서는 이 성이 백제성임을 시사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와있는 沸城을 이 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동성산에서는 동북으로 성동리의 오두산성과 그 옆의 검단산 봉수대가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강변 방어체제답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合水지점도 훤히 조망된다. 건너편에는 파주군 교하면의 深岳山(尋鶴山)이 있고, 현재 고양군일대의 들판과 한강변이 잘 조망된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한강수로, 한강 건너의 평야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동시에 공동작전을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런데 동성산 아래이면서 건너편의 두 지역과 마주보면서 삼각점을 이루는 한강변인 楊澤里에서는 회백색 연질토기의 구연부 등 각종의 토기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건너편의 烏頭山城은 한강과 조강 임진강이 만나고 또한 曲陵川이 흘러드는 삼각 꼭지점에 해당하는 일종의 串城이다. 북쪽에서 돌출한 오두산(148m) 위에 쌓여져 있는 것으로 서울이나 개성의 입구를 지키는 요충지인데 석축의 길이가 약 500m 정도로 북문과 서문이 있다. 주변에서 붉은색 고구려계통의 기와가 수습되고 있다. 백제의 최전방 방어성이며 광개토대왕이 원년에 공격하여 점령한 관미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될 만큼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金正浩를 비롯하여 근래에 尹日寧, 金侖禹가 주장하고 있다. 임진강 쪽 건너편인 성안지역과 함께 임진강 하구지역을 방어하고, 한강 쪽으로는 동성산과 함께 한강을 통해서 선박들이 오고가는 것을 관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 특히 임진강 수로를 이용하는 세력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강변방어체제이다. 하지만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이곳을 함락 당하면 한성까지는 거의 거칠 것 없이 적군이 진공해 들어올 수 있다. 일산의 고봉산성, 심악산성, 행주산성, 기타 한강변의 방어체제 등, 그리고 몇 개의 보루성들이 일시적으로 저지는 할 수 있겠지만 대군의 공격을 전면적으로 막아내기는 이미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전방에 위치한 중심성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지역을 통과해 상류로 더 거슬러오면 奉城山城과 深岳(尋鶴)山城이 한강 수로를 방어하고 있다. 봉성산성은 임진강과의 합수머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자면 남으로 오다가 동쪽으로 진행하는 좁은 길목의 강가 남쪽에 있다. 한강 건너편의 심악산성과 마주보며 함께 수로를 통과하는 적을 지키는 강변의 방어체제이다. 한강하류와 임진강을 통해서 한강수로를 직공 해 오는 선단을 관측하고, 차단하면서, 한편으로는 양 지역간의 도강을 저지하던 보루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한편 그 뿐만 아니라 김포반도 내부에 있는 가현산 및 수안산, 양릉포성 등과 시인거리에 있으므로 서해의 경기만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외에 김포에 있는 北城山城은 한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교하의 深岳山城, 일산의 高峰山城 등은 물론 선박들의 움직임을 샅샅이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다. 즉 검단 지역을 통해 들어온 적이 김포의 깊숙이 혹은 한강으로 붙는 것을 저지하고, 김포북단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강변방어체제이다. 이 지역을 지나면 강 양안의 주변지역에 있는 군소의 방어체제들을 공파하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중심에 있으면서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은 계양산성 지역이다. 桂陽山城은 부평의 계양산에 있는 석성이다. 富平은 {大東地志}에는 '本百濟主夫吐'였으나 新羅 景德王 16년에 長堤郡으로 바꾸었다. 라고 되어있다.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三國史記} 지리지 고구려편이나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主夫吐郡 으로 되어있다. 인천·서울·김포 등과 연결되는 중심에 있고, 바다와는 서쪽으로 14리밖에 안 된다. 이규보의『望海誌』에는 이 곳이 삼면이 물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도 해양방어체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전망이 훌륭하여 仁州(인천)나 통진을 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강서구의 開花山, 양천구 일대, 김포평야 일대가 보이고, 한강 너머로는 一山, 高陽, 幸州山城 등이 보이고, 마포구의 일대는 물론 북한산성도 보인다. 따라서 한강과 이 지역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으로서 경기만의 광범위한 해안지역에서 한성을 향하여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고, 해안 진성들을 지휘하는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이 백제 및 고구려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가를 더욱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 그 외에도 한강에는 현재 고양시의 멱절산 보루, 행주산성 및 강서구의 宮山토성 등을 비롯한 소규모 보루들, 그리고 상류 쪽으로도 더 많은 군소의 하안방어체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강변에는 사람과 배가 건너다니는 나루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현재 김포시의 검암나루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甘岩津은 북쪽 8리에 있으며, 바로 고양 任意津의 小路이다. 라고 하였다. 양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강 건너 二山浦(巳浦임)와 연결되는 이 나루는 꽤 빈번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강강변방어체제는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도강지점이나 수군의 상륙지점을 막기에 효율적인 장소를 택하였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짝을 이루는 형태로 구축하였다. 또한 주변의 다른 방어체제와의 관계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강변에 설치하였던 한계로 인하여 대성이 아닌 전술적인 소성이나 보루의 형태가 많았다.
제 2로는 황해와 이어진 김포의 守安山 지역, 인천의 여러 지역 특히 孔村洞·한진·제물포·소래 등의 해안을 통해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부평의 계양산성이나 문학산성으로 추정되는 인천의 미추성을 점령한다. 이는 백제의 중요한 대외교통로 끊어 고립시키려는 목적 외에 수군을 격멸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 전력을 강화시킨 다음에 현재의 서울 서부지역으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상륙군은 현재 김포의 서해안 지역인 대명, 검단의 오류동 등에 접안 한 다음에 인천지역에 상륙한 군대와 합세하거나 한강 수로를 직공해 올라오는 수군과 연합작전을 벌였을 것이다. 김포지역에는 역시 삼국시대의 축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해양방어체제들이 있었는데, 이는 대체적으로 한강강변방어체제의 가능을 겸하고있었다. 다만 수안산성, 계양산성 등은 인천지역의 해양방어체제와 더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廣開土大王陵碑文}에는 병신년에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인천시 남구 문학동과 청학동의 경계인 문학산 위의 문학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仁川府邑誌}에는 '彌趨忽古城이라고 하였다. 문학산 근처에는 沸流井이 있었고, {仁川府邑誌} 墳墓條에 따르면 이 근처에 彌鄒王陵으로 전해진 고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광개토왕군은 인천지역에 상륙한 것이 틀림없다.
인천만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한 곳으로서 약 8,2m에 달하기도 한다.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인천만의 안쪽에는 月尾島 芍藥島 등이 있고, 바깥에는 永宗島 靈興島 등 큰 섬이 있어 파도의 흐름을 안정시키고, 항구로서의 양호한 조건을 갖추게 한다. 반면에 물길이 매우 복잡하여 현지의 해양민들이 아니면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인천은 외부세력이 들어오는 해구의 기능을 하였다.  
고조선의 末王인 準王은 남천할 때 서해연안을 따라서 航進하다가 남부에 상륙하였는데, 그때 인천만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백제가 점차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중국지역과 교섭할 때 인천지역은 교통로로서 중요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는 彌鄒忽에서 건국하였다.미추홀을 인천으로 비정한 것은 삼국사기의 지리지이다. 즉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 慶原 買召一作彌鄒)이라 하였다. 그런데 본디 고구려였음을 밝히고 있다. {大東地志}에는 仁川은 本百濟買召忽(一云彌鄒忽國)라고 하여 본디 백제였다고 하여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미추홀인 인천지역은 백제의 영토였다가 후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백제는 초기부터 해양교셥을 활발하게 하였는데, 4세기에 들어와 근초고왕은 고구려전을 과감히 수행하여 북쪽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는 황해중부 해상권 혹은 對中航路의 확보와도 관련이 있다. 이 시대에 바다를 건너 建康(현 南京)에 수도를 둔 동진과 교섭하였다. 그 때 사용한 주요한 항구는 항로나 해양환경으로 보아 2개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강화도 지역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천지역이다. 현재 인천시 남구의 玉蓮洞에 있는 凌虛臺밑인 한진(大津)이 백제인들이 중국을 향하여 배를 출발시켰다는 곳이었다.
이렇게 대외 교통로로서 중요한 인천지역에는 해양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린 외부침입자가 상륙하기에 적합한 곳이 몇 군데 있다. 인천만에는 濟物浦,월미도, 永宗浦鎭 등 진과 토축의 고성이 있는데, 이 군사시설은 주안 등 내륙과 연결되면서 일련의 유기적인 방어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그러한 군사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개토대왕의 수군은 인천만의 여러 지역으로 상륙하여 해안방어체제들을 점령한 후에 彌鄒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구려군은 이곳을 전지기지로 삼고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였는데, 한성에 접근하는데는 몇 개의 군사통로가 있다.
하나는 인천시 延壽洞과 安山 사이의 만으로 진입하여 내륙으로 들어가는 蘇來浦口를 이용하는 길이다. 현재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소래산 바로 밑에까지 蛇川(대동여지도, 현지에서는 뱀내천으로 부름)이 이어졌다. 蘇定方이 상륙해서 '蘇來'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대외교통의 요지였고, 해양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이곳에 상륙하면 安養 혹은 始興을 통과하여 한강 주변의 서울권으로 진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인천만에서 朱安으로 상륙하여 시흥과 부천사이로 빠져나가 光明을 지나 한강 이남의 서부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하는 방어시설들이 문학산성을 비롯한 인천지역의 성들이다. 세 번째는 북부에 해당하는 통로로서 검단과 가까운 孔村洞 지역에 상륙하여 '장명이 고개'를 지나 현재의 강서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통로를 막기 위한 방어체제가 許岩山城, 桂陽山城, 지양산성, 新亭洞土城 등이다.
고구려군은 이러한 통로들을 동시에 활용하였거나, 전술적으로 필요한 정도로 선택하여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천지역에서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관측하며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는 곳이 문학산성이다. 미추성으로 추정되는 문학산성은 해안 가까이 있으면서도 중앙에 있었으므로 삼국시대부터 인천지역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으로서 군소 海岸防衛城과 주변에 부평의 桂陽山城 孔村洞의 許巖山城(시대불명), 黔壇의 노고산성(시대불명) 및 기타 永宗島 등 다른 섬방어체제를 거느렸다. 또한 해안방어 뿐 만 아니라 내륙을 방어하기 위한 전초성의 역할도 하였으며, 특히 공동작전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는 한성에서 인천해안으로 통과하는 길목을 방어하는 역할을 한데서도 확인된다. 인천지역은 병신년 이후에 계속 고구려에 점령당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장수왕 시대부터는 한동안 고구려의 영토였다. {三國史記}에는 齊次巴衣縣, 買召忽縣을 각각 一云 彌鄒忽이라고 하였다.
제 3로는 비교적 원거리를 항해하여 안산만과 남양만 등으로 상륙한 후에 현재의 수원·용인·과천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기습하는 것이다.
남양은 조선시대에는 부의 서쪽 54리 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 쪽으로 남양반도와 朝岩반도(현재 雨汀面)를 끼고 있어 경기도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남북이 좁고 동서 폭이 넓은 지형이다. 특히 남양반도는 해양교통을 고려할 때 경기만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가장 중요하고 넓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내부에 몇 개의 작은 만과 串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안산만, 남쪽으로는 평택만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을 오고가는 교통로로서 중요했고, 삼국이 접전을 벌였던 경기만의 남부에 속했다. 남양만은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는 물론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성곽, 봉수 등 방어시설물이 많이 있으며, 그것을 축성한 나라와 시대 역시 다양하고 복잡하다. {東與備考}의 [新羅百濟高句麗肇造區域之圖]에 남양만은 현재 남양읍으로 들어가는 물길만을 가리키고 있다. 중요한 포구와 항로가 상임만이 아니고, 개죽포 일대가 도착 항구였음을 의미한다.
남양만 지역에는 많은 산성이 있는데, 특히 당성은 전략적으로 남양반도 전체, 안산 등의 지역, 남양 치소와 그 멀리 까지도 작전반경 속에 편입시켜 놓고 경기만 하단부의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성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높고 험준하며 폭이 넓은 지역으로서 즉 포구의 진성(鎭城)이 아닌 남양반도의 中心城이며, 일종의 해양방어사령부의 역할을 한 곳이다. 唐城, 古唐城, 黨項城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다. 옛 지형을 보면 당성은 해안가에 있었으며, 남양반도의 전해안과 가장 짧은 거리로 연결되고, 어느 지역과도 한 번에 연결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바다와 4개의 만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전략적으로 남양반도 전체, 安山 등의 지역, 남양 치소와 그 멀리 까지도 작전반경 속에 편입시켜 놓고 경기만 하단부의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당성은 해안군사 수비성으로서 몇 가지 한계도 있다. 성목쟁이 지역만 막히거나 점령당하면 완전히 포위가 될 수 있는 허점이 있다. 유일한 육로에 적이 있고, 바다에는 포위된 삼면에서 선단이 압박을 가하고, 군사 등을 상륙시켜 공격을 가한다면 방어에는 치명적으로 불리하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성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성들과 길게 펼쳐진 장성, 소규모의 초소 등 방어시설이 축차시스템을 이루면서 포진하고 있다.  바깥바다에는 濟扶島가 있는데 해양 전략적인 위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해안가에는 장성으로서 南陽長城이 있고, 청명산, 백곡리토성, 성목쟁이성 등이 연결되어 방어체제를 형성되었을 것이다. 백곡리성(白谷里城)이 있는 백곡리에는 백제 고분군이 있는데 4세기대의 것들이다. 때문에 이 지역의 성들이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해안 전위성(浦·津城)들이 포진되어 있다.
고구려의 수군은 경기만의 제해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안산 인천지역을 남방에서 압박하며, 한성을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지역을 공격해야 했다. 이때 백제의 해양방어체제들은 상륙작전을 방어하는 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당시의 전황으로 보아 고구려는 그 방어체제들을 공파한 후에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점령기간 동안에 고구려의 전략전술과 축성법, 그리고 남양반도에 대한 국가적 활용전략에 맞춰 해양방어체제들을 개축하거나 신축하였을 것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南陽都護府 古跡條에는 이곳을 古唐城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구려 때 당의 학자 8인이 건너와 머물렀다.는 기록처럼 당성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高麗史}에서 고구려의 당성군이라고 언급한 이후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 당성을 고구려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다. 명칭도 당성현(唐城縣), 당성군(唐城郡)으로 되어있다. 한편 백제는 남양만을 빼앗기면서 해양활동은 물론 대중국 교통로를 잃어버려 정치 외교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경제적으로도 심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蓋鹵王의 죽음과 한성을 상실한 이후에 백제는 熊津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의 병신년 수군작전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향을 통해서 이루어지면서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왕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경기만의 북쪽은 물론이고 남양, 서산, 당진 등 남부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상당한 기간동안 점령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릉비문에 기록된 50여 성은 山城 내지 治所 등 지역중심이었을 것이고, 700여 촌은 주변의 영농생산지였을 것이나 군사적, 정치적 요충지로서 海岸防衛와도 관련된 시설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98년에 阿莘王이 반격을 가하고 漢山北柵에 도달했다는 기사를보면 396년의 전투 때에 적어도 내륙지방은 한강선을 경계로 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한 이렇게 전개된 상황 속에서 볼 때 이보다 5년 전에 벌어진 관미성 전투는 성 자체의 함락과 함께, 백제가 가진 황해중부의 수군활동을 무력화시킨 의미를 갖고 있다. 만약 관미성의 함락이 실패했었다면 6년에 발진한 고구려의 水軍은 백제의 해양방어망과 수군을 배후에 둔 상태에서 후방 깊숙한 해안으로 상륙할 수가 없었다.
경기만은 해상교통 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 고구려는 百濟를 韓半島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해야 했다. 때문에 水軍을 동원하여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병신년 전투 이후에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백제를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뜨린다. 광개토대왕의 海洋封鎖를 통한 연결고리 차단전략이 현실성이 있음은 백제의 대외정책이 변화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폭풍같은 공격에 대하여 백제는 계속해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아신왕은 雙峴城을, 뒤를 이은 전지왕은 沙口城을 축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들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가 되버렸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추진한 수군작전을 통하여 그 당시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질서의 재편과정과 해양활동 전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광개토대왕은 꾸준하게 추진되어온 남진정책을 계승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기존의 경계선이 아닌 그 이남지역은 물론 해양이라는 새로운 역사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북진해오는 백제의 예봉을 분쇄하고, 남진하여 영토를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경기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악하여 황해중부 해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아울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거시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에 의해 추진된 남진정책 및 경기만 공격은 고구려의 북진정책 및 국제질서의 재편 전략과 유기적 관련을 맺으면서 추진된 것이다.
대왕은 공격 및 점령 대상이 해양과 관련이 있으므로 수군을 직접 간접으로 활용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보다 확실한 작전은 병신년의 수군 공격이고, 아울러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관미성 전투이다. 백제의 최전방 방어선이며, 수군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관미성은 강화도 북부의 봉천산 지역으로  추정된다. 대왕은 해양활동을 활용한 본격적인 백제공격을 위하여 예비단계로서 난공불락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어 6년에 수군을 친히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때 수군은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쳤으며,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기본복표, 해양작전의 특성, 경기만의 해양전략적 환경, 그리고 해양방어체제의 배치와 구조들을 고려할 때 고구려군은 경기만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외곽포위작전을 펼쳤다. 수군은 3개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다음에 해안의 중심지역을 점령하고 일부는 한성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제 1로는 강화도에 상륙한 다음에 관미성을 선대의 출발기지로 삼아 한강수로를 직공하여 왕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제 2로는 인천만을 중심으로 김포 소래 등의 해안지대에 상륙한 다음에 현재 문학산성으로 추정하는 미추성을 점령한 다음에 한성의 서부지역을 경유하여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제 3로는  남양만을 중심으로 안산만 평택만 등의 해안으로 상륙한 다음에 당성 등 몇 개의 중심성을 근거지로 삼고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에서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전개된 병신년 전투는 삼국시대 한반도 내부의 역학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였으며, 고구려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발언권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해양력이 직접 이용되고,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 후에 장수왕 시대에 들어와 427년에 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천도한 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한강 중부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남진정책의 성공과 경기만의 장악을 토대로 동아지중해 중핵국가의 위치를 획득하고,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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