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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 정조 054 부록 / 정조 대왕 천릉 지문(遷陵誌文)②

 이름 : 

(2005-12-06 23:23:05, 6032회 읽음)

정조 054 부록 / 정조 대왕 천릉 지문(遷陵誌文)②

왕은 타고난 용지(勇智)와 세상에 없는 신무(神武)로 수많은 어려운 고비를 겪으면서 뭇 흉물들을 소탕하고 태아(太阿)를 손에 들고 왕강(王綱)을 총지휘하면서 남이 그 속을 감히 엿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건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적재 적소 처리해 나갔다. 그리하여 궁부(宮府)가 한 덩어리가 되고 표리(表裏)가 훤하여 안으로 조정에서부터 골짝 마을과 먼 지방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이 나를 보고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선천 금려(宣薦禁旅)를 두어 무신들 발신의 길을 열어주고 수어청[守禦]과 경영(京營)을 혁파하고, 북관(北關)에 두 진(鎭)을 설치하여 용병(冗兵)을 도태하고 변경을 개척했으며, 《병학통(兵學通)》·《무예도보(武藝圖譜)》를 저술하여 대진법·병기 사용법 등을 소상히 밝혀두고 여가만 있으면 내원(內苑)에 나아가 대진법을 익히게 하고 구경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지휘하면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었는데 그것은 다 우리 영릉(寧陵)이 척뇌당(滌惱堂)에서 말달리기 시험을 보였던 그러한 뜻이었던 것이다.
활쏘기에 있어서는 또 타고난 천분이어서 50발 중에 49발을 쏘았는데, 이때 왕은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가득차면 못쓰는 것이다.”
했었다.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했는데 그것은 숙위(宿衛)에 대비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외적에 대한 경계의 뜻이 있었다. 왕은 균역법(均役法)에 대해 감포(減布)를 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선왕의 지극한 뜻이 담겨져있는 일인데 그 일을 맡아 하는 신하가 선왕의 뜻이 드러나게 못하고 있으므로 거의가 구차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하여 그를 혁파하고 제도를 다시 고칠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정밀한 계산하에 한 일이어서 그냥 더듬어 계산하고 생각없이 논의하는 자들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 외영(外營)에도 옛날처럼 위부(衛部) 제도를 두었는데 그것 역시 깊은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아, 그런데 이제 그만 아닌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성스러운 무위를 떨치니 만민이 진심으로 믿고 따랐다.”
했는데, 그게 왕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병신년에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최석항(崔錫恒)의 관작을 추탈(追奪)했는데 왕은, 신축·임인년에 있었던 일의 옳고 그름을 우선 밝혀야 한다고 하여 을해년 처분을 따르도록 명하였고, 신축년에는 사충사(四忠祠)에 제를 내리고 고 학생(學生) 서덕수(徐德修)에게 관직을 추증했으며, 갑진년에는 사대신(四大臣)·삼장신(三將臣)·사절도(四節度) 및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齊)에게 제를 내렸다. 그리고 증 판서 이정숙(李廷), 증 판서 조성복(趙聖復), 증 참판 김성행(金省行)에게는 정려를 내렸다. 무신년 3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바로 우리 선왕께서 무위를 선양하여 난리를 평정한 해요 달이다. 옛날 그해와 달은 돌아왔건만 보이는 것이라곤 산은 높고 물은 맑은 것 뿐이니 그 옛날을 회상하고 세월의 허무함을 느끼는 이 소자의 마음 어찌 그때 그들의 충절과 노고를 수답함으로써 우리 선왕이 받으셨던 아름다움에 유종의 미가 있도록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당시 순절(殉節), 근사(勤事)했던 신하들에게 술을 부어 제사하고 또 각도에 명하여 당시 종정(從征)했던 장사로서 아직 생존해 있는 자를 찾아 수록(收錄)하게 했으며 또 임오년 이전에 신하된 직분을 다했던 자들까지 추념(追念)하여 그들 모두에게도 포미(褒美)를 가했다.
처음에 세조(世祖)가 대제학 신숙주(申叔舟)를 명하여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 4조(朝)의 《보감(寶鑑)》을 찬하도록 했고, 그후로는 이단하(李端夏)가 편찬한 《선묘보감(宣廟寶鑑)》과 이덕수(李德壽)가 편찬한 《숙묘보감(肅廟寶鑑)》이 있을 뿐이었는데 《영종실록(英宗實錄)》이 완성되고 나자 왕은 이어 보감을 편찬하도록 명했고 또 12조에는 아직 보감이 없다 하여 아울러 편찬하게 했던 바 모두 68권에 달했다. 이에 하교하기를,
“열성조의 옥책(玉冊)·금보(金寶)는 주(周)나라 종묘에 보기(寶器)를 진열해 둔 제도를 모방하여 입묘(入廟) 때 다 함께 봉안했으나 보감으로 말하면 그것이 공덕(功德)을 펴내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기는 것으로서 그 규모가 사실 서서(西序)의 대훈(大訓)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소중하기로 말하면 신분을 나타내는 완염(琬琰)이나 법도를 소명하는 새장(璽章)보다도 오히려 더한 점이 있는 것이다.”
하고, 친히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으로 가 각 실(室)에다 나누어 간직했다.
왕은 영종(英宗)을 높여 세실(世室)로 모시고 또 영종이 편찬한 《갱장록(羹墻錄)》을 보고는 이르기를,
“열성조의 치법(治法) 정모(征謨)가 다 이 속에 들어있다. 보감은 편년체이고 이 갱장록은 부류별로 모은 것이기 때문에 보기에도 더 편리하고 더욱 긴요하고 절실한 것들이 있다.”
하고, 각신을 명해 속집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왕은 그날 하루 한 일들을 모두 기록하고 남겼는데 기거주(起居注)가 착오와 누락이 많다 하여 내각에 명해 별도로 편록(編錄)을 하게 하고 증자(曾子)의 일삼성(日三省) 뜻을 취하여 《일성록(日省錄)》이라고 명명했고 각신이 또 경연에서 들은 성어(聖語)를 초록하여 그것은 《일득록(日得錄)》이라고 했다. 왕이 이에 유시하기를,
“그 녹(錄)의, 경의(經義)에 관한 문답이나 시정(時政)에 대해 주고 받은 것들을 관성(觀省)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만약 지나치게 미화하여 겉치레만 해 놓는다면 뒷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지금을 뭐라고 평가하겠는가.”
하였다.
단묘(端廟) 당시의 일에 대해 늘 금할 수 없는 감회를 가지고서 친히 제문을 써 육신(六臣) 앞에 잔을 따르고 순의(殉義)한 많은 신하들을 찾아내었는데 그 수가 2백 30명에 달했다. 그들에 대해서도 장릉(莊陵)곁에다 단을 쌓고 춘추 제향 때 배식(配食)하게 했으며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이라는 것이 있다.
왕은 또 늘 황단(皇壇)에다 망배하고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를 봉심하게 했으며 이 제독(李提督)에 대하여는 세대에 관계없이 영원히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고, 용만(龍灣)의 현충사(顯忠祠)·기충사(紀忠祠)에는 선액(宣額)을 했으며, 칠의사(七義士)도 거기에 함께 철향하였다. 그리고 임인관(林寅觀) 등 95명에 대해서도 단을 쌓고 제를 드리게 하여 끝까지 의(義)를 지켰던 중국의 유민들을 위로하고, 척화(斥和)했던 신하들 모두도 표장(表奬)하고 기록으로 남겨두었으며, 충신(忠臣) 의사(義士)의 단을 세우고 정충(旌忠) 상무(常武)의 비문도 찬했다. 그리고 또 《존주록(尊周錄)》도 있었다.
왕은 삼황(三皇)의 기신(忌辰)이면 언제나 소선(素膳)을 들면서 이르기를,
“근고(近古) 이전만 해도 공식 석상에서 회식할 때면 쇠고기를 먹지 않았었고 국기(國忌) 때도 조정 신료들 모두가 이틀 동안 소식을 했다. 그것은 선왕조 초년까지도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동쪽 적전에 가 벼 수확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술을 내려 농부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윤음을 내려 권농(勸農)도 하였다. 왕은 언제나 정월이면 반드시 윤음을 내려 권농하였고 수확 때면 또 한 번 하였던 것이다.
왕은 늘, 요순(堯舜)을 본받으려면 당연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해왔는데, 왕으로 말하면 도량이 넓기는 태조(太祖)를 닮았고, 찬란한 문장은 세종(世宗)을 닮았으며, 영무(英武)하기는 광묘(光廟)와 같고, 지극한 행실은 효릉(孝陵) 같았으며, 자나깨나 국운이 기운 것을 슬피 여겨 대의(大義)를 늘 앞세웠던 것은 효묘(孝廟)와 같았다. 현자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몰아내는 데 위엄과 용단이 있었던 것은 숙조(肅祖)의 그것이었으며, 만민이 우러러보는 표준을 세우고 세신(世臣)들을 잘 보호했던 것은 영고(英考)의 마음 그대로 였었다. 《서경》에 이르기를,
“위대하여라 문왕의 교훈이여, 잘도 계승하였다 무왕의 빛남이여.”
했는데, 그것은 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선왕 혼전(魂殿)에 빈소 문을 열었을 때 왕이 이르기를,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의하면, 혼상(魂箱)을 모시고 조조(朝祖)를 행한다고 했는데 원래 상례(喪禮)란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는 법이어서 단궁(檀弓)편에 보면 부하(負夏) 고을 상주가 널을 싣고 제자리를 떠났다가 다시 밀고 제자리로 돌아오자, 자유(子游)가 그것이 실례임을 비난했었다. 같은 호정(戶庭) 안에서 거기서 거기인 제자리로 돌아온 것도 실례라고 비난했거늘 하물며 혼상을 모시고 나가 태묘(太廟)에 하직을 고하고 다시 돌아와 빈전(殯殿)에다 모신다는 말인가. 그리고 ‘넋은 실당(室堂)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바로 선유(先儒)들 말인데, 조조 때 재궁(梓宮)을 모시고 하지 않고 혼상을 모시고 하는 그 자체가 원 예의 뜻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고례(古禮)대로 하자면 또 예와 지금이 서로 다른 점도 있어 무작정 논의할 일이 못 된다.”
하고,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하도록 명했다.
우리 나라 제도에 담제(祭) 날은 악기를 매달고 풍악을 울려왔는데, 이에 대해 왕이 이르기를,
“대상(大祥)을 치르고는 호관(縞冠)을 쓰고, 그달이 담제였으면 한 달 건너서 악기를 다루는 법이다. 그러나 맹헌자(孟獻子)는 담제 때 악기를 매달아 두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자, 부자(夫子)가 말씀하기를 ‘보통사람보다 한 등급 더 높은 인물이다.’ 하였는데 슬프고 허전한 나머지에 어떻게 차마 금방 종고(鍾鼓) 소리를 들을 것인가.”
하여, 담제가 있는 그달은 크고 작은 법악(法樂)을 매달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는 것으로 격식을 정했었다.
태묘(太廟)에 체제[]를 올리고, 특명으로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을 영종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효종 묘정에 추배(追配)하게 하였다. 처음에 정부가 영종 묘정에 배향할 신하들을 논의하여 올리면서 김창집은 영종을 직접 섬기지 않았다 하여 논의 대상에서 제외했었는데, 이에 대해 왕이 이르기를,
“송(宋)나라 장준(張浚)이 효종(孝宗) 건책(建策) 때 공로가 있었는데 당시 논의하는 자들이, 같은 조정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하여 묘정 배향에 난색을 보였지만 양만리(楊萬里)가 단독으로, 당연히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고 상신의 국가 대책을 결정한 의리와 나라 위해 몸바친 충성이야 장준의 일을 원용하기에 꼭 알맞은 인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효묘(孝廟)와 선정(先正)과는 지기 상합하고 왕을 돕는 데 비밀이 없는 사이로 바로 춘추 대의(春秋大義)가 그 속에 있는데 배향을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안 될 일이다. 하늘에 계시는 영령께서도 제향에 임하실 때면 그에 대한 기대를 하고 계실지 어떻게 알겠는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도 세종 묘종에 추배되고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도 인종 묘정에 추배되었는데 문정공이라고 추배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환조(桓祖) 탄강의 팔회갑(八回甲)인 을묘년에는 대신을 보내 함흥(咸興) 본궁(本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했는데 함흥 유생들이 영흥(永興) 본궁의 전사청(典祀廳) 고적에 관해 상소한 자가 있어 왕은 그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조정 신료들 의견을 물은 다음 대신과 예관(禮官)을 보내 환조 대왕(桓祖大王)과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영흥 본궁으로 올려 모셨던 것이다. 그런데 두 본궁에다 선왕(先王) 선후(先后)의 위판(位版)을 모신 것은 그것이 원묘(原廟) 제도를 뜻한 것이다. 옛날에는 내사(內司)에서 별도로 차출된 전사관[典祠]을 시켜 제향을 모시게 했으므로 예에 맞지 않는 일들이 많았었는데 왕은 그 의식 절차를 모두 새로 정하고 세시로 의폐(衣幣)를 봉할 때도 꼭 전날부터 재계하고 친히 임하였다.
사직단에 기곡제[祈穀]를 올리고 대사(大祀)로 승격시켰으며 각 지방에도 사단(社壇)을 개수하고 금호(禁護)하도록 경계를 내렸다. 그리고 매월 종백(宗伯)에 보고하여 근면 태만을 고과하게 하였다. 황단(皇壇) 제향에도 처음으로 생기(牲器)를 친히 살피는 법을 정했고,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성무(聖)에 종사(從祀)하면서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고쳤으며, 여주(驪州)에 있는 문정공 송시열 사당을 대로사(大老祠)라고 사액하고 어제 어필의 비를 만들어 뜰에다 세웠다. 그리고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 그리고 고려(高麗)의 시조와 여러 왕릉들을 수선하고 온조왕(溫祚王) 사당은 숭렬전(崇烈殿)이라고 이름했다. 환관 시어들을 감히 외신(外臣)과 접촉하거나 대화하지 못하게 하고 무당들은 전부 강 밖으로 내쫓았으며 승려들은 도성 안 출입을 못하게 했다. 각도에 윤음을 내려 향음주례(鄕飮禮)를 강습하게 하고 또 늙은이를 봉양하고 농부들을 위로하는 등 공경을 넓히고 근본을 지키는 의(義)에 대해서도 강조했으며 농서(農書)를 구하기도 하여 성지에 응해 농서를 올려온 자가 매우 많았었다. 우리 나라 경제(經制)에 관한 서적으로는 세종조의 《육전(六典)》을 시작으로 하여 세조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만들어지고 성종 때 《속록(續錄)》이 있었고 숙종 때 《집록통고(輯錄通考)》가 있었고 선왕조 때 《속대전(續大典)》이 있었는데 왕은 그 원전(原典)과 속전(續典)이 각기 따로따로 되어 있어 참고에 불편하다 하여 2전(典) 및 속전과 그후의 선왕(先王)의 교령(敎令) 또는 당저(當)의 수교(受敎) 등 하나의 법령이 될 만한 것들을 통틀어 한 책으로 만들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대전통편(大典通編)》으로서 중외에 반포 시행하였다.
대정(大政)을 실시하면서 하교하기를,
“서한(西漢) 시대에는 관리 선임을 가장 중히 여겼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인재 등용을 과목(科目)에 의하여 하기 때문에 문관 시종(侍從)이라는 것이 도리어 음관·무관만도 못하다. 그리하여 안에 있어서는 장부(掌賦)의 관리도 못되고 밖에 나가서는 자목(子牧)의 책임도 맡지 못하여 금곡(金穀)이건 갑병(甲兵)이건 모두가 깜깜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새로 들어온 문신(文臣)을 변방 고을로 내려보내 거기에서 관리의 일을 습득하면서 민생들의 질고(疾苦)도 잘 알게 했다가 다음에 일소(馹召)를 받고 올라왔을 때 나와서 말을 하고 물러가서는 글을 올려 이폐(利弊)를 낱낱이 아뢴다면 구중 궁궐이 비록 깊다고 해도 사방이 훤할 것이니, 그야말로 나라와 백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 날마다 수의 어사를 파견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고, 문관·음관·무관을 호차(互差)하는 제도를 강구하도록 했다.
왕은 세상에 드문 자품으로 큰 뜻을 가지고서 백관들을 올바르게 지도 감독하고 문(文)과 질(質)을 적당히 썼으며 길·흉·군·빈(吉凶軍賓)의 모든 절문 제도에 있어서도 경례 곡례를 다 참작하고 고금을 통틀어 참고했기에 예악(禮樂)과 물채(物采)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 관부(官府)나 군현(郡縣)에도 지(志)가 없는 곳이 없고 도량형들도 일정한 법칙이 다 있었으며 주모(籌謨)·전주(銓注)·군실(軍實)·옥결(獄決)·방용(邦用)·민수(民數) 등도 모두 상고할 데가 있었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이 대전(大典)이라는 한 책 속에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야말로 한 왕조의 성헌(成憲)이었으니 《시경》에 이른바 “백성 편하게 하길 바라다가 그 일 크게 성공 거두었네.”라는 말이 바로 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왕은 근엄하면서도 공순하고 두려워할 줄 알았으며 하늘을 깍듯이 섬겨 해가 비치는 곳이면 자세를 흐뜨리지 않았고 옷을 갈아입거나 소변을 볼 때도 북신(北辰)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북을 향하지 않았으며, 비바람이 세거나 천둥이 일면 반드시 일어나 표정을 고쳤다. 종묘에 친히 제사하고 문 밖을 나서면서는 근엄하고 경건한 태도였고 오르내리며 술잔을 올릴 때는 민첩하기 날아갈 듯하여 일을 돕는 백관들도 모두 엄숙하였다. 그리고 혹시 섭행(攝行)을 명했을 때면 근신(近臣)을 보내 일을 살피게 하고 재전(齋殿)에 나아가 기다리다가 제례가 끝나야 쉬었고 능(陵)이나 원(園)의 제사에도 과일·떡 등 제사 음식을 올려오면 반드시 꿇어앉아서 맛보았다.
언젠가 몹시 더울 때 빈연(賓筵)에 납시어 하교하기를,
“오늘은 더워서 경들을 일찍 물러가도록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그것은 나태한 마음이었다.”
하고, 하루를 다 마치고 파했으며, 한가한 시기에 접견할 때면 까다로운 예절을 다 생략하고 늘 웃는 얼굴로 대하여 따스하기가 마치 한집안 부자(父子) 사이 같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법전(法殿)에 나오면 뭇 신하들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리고 일찍이 양방(兩坊)의 빈객(賓客)을 지낸 사람이면 그가 비록 음관(蔭官)이라도 직명을 부르지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았으며, 아무리 내부 사석에서라도 척원(戚)은 감히 조정 정사를 간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연(中涓)의 무리들은 공사(公事)가 아니면 감히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왕은 이르기를,
“사대부를 접할 때가 많고 환관 궁첩을 접할 때는 적은 그것만은 내 별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였다.
김귀주(金龜柱) 같은 이도 주연(胄筵)에서 있었던 말로 홍봉한(洪鳳漢)을 대조(大朝) 앞에서 논하자 그를 섬에다 위리 안치하였고, 홍낙임(洪樂任)을 반력(頒曆) 단자 속에 넣고 홍수영(洪守榮)을 향관(享官)으로 차출했다 하여 병판(兵判)과 전관(銓官)을 귀양보냈듯이 무슨 처분이든지 두 쪽이 다 분명하게 엄정을 기했다. 정사에 부지런하여 조참(朝參)·상참(常參)·빈대(賓對)·윤대(輪對) 등을 꼭꼭 다 시행했고,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와 중외에서 들어온 장독(狀牘)에 있어서도 그 가부를 즉석에서 알리고 하나도 지체한 일이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신료들을 인접하면서 밤까지 이어진 적이 허다하고 자물쇠가 열리기도 전에 명령이 하달되는 등 심지어 해가 기울도록 끼니를 거르는 때도 있었으므로 혹 너무 근고(勤苦)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신하가 있으면, 왕은 이르기를,
“나 자신은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수성(守成)의 임금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그것이나 해야지 그도 않하면 어디에다 마음을 쓸 것인가.”
했다. 또 아주 검소하여 의복도 여러 번 빨아서 입을 뿐 아니라 곤복(袞服) 말고는 비단을 입지 않았으며 어선(御膳) 역시 특별한 진수 성찬이 아니었고 침전(寢殿)도 너무 소박하여 창이나 벽이 매연을 발라놓은 듯 그을린 곳이 있어 유사가 수리할 것을 청하면, 왕은 이르기를,
“그것은 무슨 비용이 많이 들어서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누추하지가 않아서이다.”
하였다.
어좌(御座) 곁에는 도서와 기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일정한 곳에 놓여져 있었고, 방안 구석구석도 선을 그은 듯이 정리 정돈이 되어 있어 혼자 계신 곳에서도 처신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전(傳)에 이르기를,
“정제 장엄하고 중정(中正)한 것이 공경을 일으키기에 족하다.”
했는데, 그게 왕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날이 가물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려 할 적에 지제교(知製敎)가 제문을 지어 올리자, 왕이 이르기를,
“책축(冊祝)에 자신의 죄를 말한 곳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다시 쓰도록 명하고는 드디어 윤음을 내려 자신을 책하는 열 가지 조항을 들었다. 또 언젠가 대우(大雩)에서 기우제를 올리면서는 뜨거운 햇살이 쨍쨍한데 일산을 제거한 보여(步輿)를 타고 단에 이르러 노상에 앉아서 하루를 마치고 제례가 끝난 후 환궁하여서도 곤면(袞冕)을 벗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후 과연 비가 내린 일도 있었다.
왕은 항상 하늘의 명령을 생각하고 상제(上帝)를 받들었으며 늘 이르기를,
“하늘이 어디 멀다던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하였고, 혹시 천재 지변이라도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워하고 반성하고 점검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성지(聖知)하여 백대의 치란(治亂), 구류(九流)의 예술, 인물의 성정(性情), 귀신의 변화 등에 관해 그 모두를 다 마음속으로 터득하고 뜻을 이해하였다. 그렇기에 왕은, 이치는 하나뿐인 것이라고 늘 말하였다. 이 세상 온갖 것을 모두 범위 속에 넣고 갖가지 일들도 적의 적절하게 수응하여 언제나 법연에 임하면 계주(啓奏)가 쉴새없이 올라오고 묘모(廟謨)·대장(臺章)·형옥(刑獄)·재부(財賦) 등등이 한꺼번에 들이닥쳐도 그것들을 다 사리와 형평에 맞게 수응하면서 오히려 여유를 보였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이면 그와 사이가 멀거나 그의 신분이 비천하다 하여 취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신하들이 나아와 뵐 때면 반드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들이 마음놓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그들 말이 혹 뜻에 거슬려도 위노(威怒)를 가하는 일이라곤 없었다. 구언(求言)의 하교를 전후 늘 내렸으며 일찍이 이르기를,
“선왕조 만년까지만 해도 바른 말 격한 논쟁들을 많이 했었는데 요즈음에는 감언(敢言)하는 자가 없으니 아마 과인(寡人)이 과실 지적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해서 그러는 것인가?”
하기도 하였다.
현자 찾기를 목마른 듯이 했기에 경술(經術)로 발신한 자도 있었고, 문학(文學)으로 발신한 자도 있었고, 재유(才猷)로 발신한 자도 있었고, 세록(世錄)이나 훈구(勳舊)로 하여 발신한 자도 있었는가 하면 혹은 뭇 사람이 다 버린 속에서 발탁하기도 하고, 혹은 죄인 속에서 추려내기도 하여 조금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그가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침전(寢殿)에다는 편액을 ‘탕탕 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달고 또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서(序)를 써서 자신의 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은 덕(德)을 숭고히 하고 업(業)을 광대하게 한다. 숭고는 하늘을 본받음이요 낮음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했는데, 왕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14년 경술년에 수빈(綏嬪) 가순궁(嘉順宮)이 우리 전하를 탄생하자, 왕은 왕비로 하여금 그를 친자로 삼도록 하고 대사(大赦)를 하였으며 기민(耆民)에게는 관작을 내리고 백세 노인에게는 미육(米肉)을 더해주고 각도의 해묵은 적곡을 면제해주고 각종 조세도 감제했는데 그해에는 대풍이 들었다.
24년 경신년 정월 초하룻날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그달에 현륭원(顯隆園) 배알을 하면서 땅에 엎드려 목이 쉬도록 오열하고는 이르기를,
“오늘 어떻게 또 원을 하직하고 돌아갈까.”
했는데, 막상 환궁하고서는 그것이 더욱 마음에 병이 되어 그때부터 편찮을 때가 빈번하였다. 2월 을유일에 우리 전하의 관례를 행하고 왕 세자 책봉을 한 다음 현종(顯宗) 때의 고사대로 그해에 가례(嘉禮)까지 함께 치르기 위해 빈궁(嬪宮)을 초간(初揀)했는데 지금의 곤전(坤殿)이 응선(膺選)하였으니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안동(安東)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었다. 그날 본댁으로 돌아갈 때 삼간(三揀)을 마친 것과 똑같이 의위(儀衛)를 갖추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6월 초에 와서 부스럼 증세가 점점 심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농사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여 승지에게 계주(啓奏)를 유체시키지 말도록 하교했었는데 28일 기묘일에 병이 크게 더하여 대신(大臣)·각신(閣臣)이 병후를 살피기 위해 와내(瓦內)에 들어갔을 때는 왕은 이미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다만 가느다란 목소리로 수정전(壽靜殿)이라고만 들먹이고 있었는데 수정전은 바로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거처하는 곳으로 자성(慈聖)께 무엇인가 고할 말이 있다는 뜻 같았지만 그길로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고 말았으며 당시 춘추는 49세였다. 대상(大喪)의 말에 도성 안 사서(士庶)들은 엎어지고 넘어지며 통곡하였고, 심 산궁곡의 백성들도 마치 부모를 여읜 듯이 슬퍼 호곡하지 않은 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 슬픈 일이었다.
우리 전하께서 대소 신료들과 옛 시법(諡法)을 상고하여 삼가 존시(尊諡) 올리기를,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고, 묘호(廟號)는 정종(正宗)이라고 했는데 왜 왕이 ‘바름[正]’이냐 하면 광대(廣大)를 다하고 정미(精微)를 다하고 최고로 고명(高明)하고 중용(中庸)의 이치를 통달한 것은 도학(道學)의 바름이었고, 천지 사이에다 내놓아도 위패될 것이 없고 백세 후에 성인이 다시 보아도 의혹될 것이 없었던 것은 의리(義理)의 바름이며,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朝廷)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萬民)을 바르게 한 것은 나라 다스리는 법도와 교훈의 바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시호란 행위의 자취이며 호(號)란 공덕의 표상인 것으로 그 시호 그 묘호이면 왕의 자취와 공덕을 대강은 그려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덕(大德)으로서 이름만 얻고 수(壽)는 얻지 못했으니, 하늘이 보우하고 명한다는 옛말을 과연 무엇을 근거로 믿겠는가. 그것도 아마 이른바 기수(氣數)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문왕(文王)의 법을 본받아 날이 갈수록 사방을 안정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받고 자손을 보전하여 만세를 두고 그것이 힘이 되게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믿을 수 있는 큰 증거인 것이다.
왕비는 김씨(金氏)인데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충익공(忠翼公) 휘 우명(佑明)이 현종(顯宗)조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로서 후에게는 5세(世)조가 되고, 좌참찬 증 영의정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휘 시묵(時默)과 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후의 고비(考)이다. 영종 계유년 12월 13일 서울 사제에서 후가 탄생했는데 정원의 도리(桃李)가 금방 다 졌다가 다시 핀 일이 있어 가족들이 그를 이상하게 여겼던 바 얼마 후 후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후는 타고난 덕스러운 용모에 정숙 단아하고 아리땁고 행동거지가 법칙이 있었다. 9세 때 간선(揀選)에 응했는데 영종이 매우 가상히 여겨, 오세계석 식위종국(五世繼昔寔爲宗國)이라는 여덟 글자를 손수 써서 하사했다가 10세 되던 해 2월에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고 병신년에 중곤(中) 자리를 맡고 경신년 우리 전하가 왕위를 이은 후 왕대비(王大妃)가 되신 것이다. 존호(尊號)를 올리려고 하자, 후가 이르기를,
“선왕이 존호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 마음속에 지통(至慟)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미망인으로서 그것을 받는다면 선왕의 정의(精義)에 어떻게 되겠는가?”
하여, 우리 전하의 효성스런 마음에는 비록 꺼림칙한 바가 있었으나 그러나 뭇 신하들로서는 더욱 그에 감복하였었다. 경진년 겨울에 대신과 예관이 아뢰기를,
“내후년이면 자전의 연세가 칠순이 되므로 예로 보아서는 그때 칭경(稱慶)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해는 무오년이므로 간선에 응한 지 일주갑이 되는 명년에 하례를 올리게 하소서.”
하여, 바로 정월 초하룻날 전하께서 세자(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전(箋)을 받들어 하례를 올리고 또 장차 영종(英宗) 병자년에 인원 대비(仁元大妃) 전에 하례를 올렸던 것처럼 하기 위해 그에 관한 경희(慶喜)의 전례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후는 그것이 더욱 마음의 병이 되었던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던 병이 달을 넘기면서 점점 더하여 같은 궁의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하였다. 아,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후는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공순하고 검소하였는데 궁중에 들어온 초두부터 어려운 고비를 누차 겪고 임오년 윤월에는 혜빈(惠嬪)과 후를 각기 사제로 돌아가게 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으나 후는 혜빈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갈 것을 원하여 그 소식을 들은 영종은 그를 잘한 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장헌 세자 섬기기를 반년도 채 못했기에 그렇게 얼마 못 섬겼던 것을 죽을 때까지의 슬픔으로 삼았었고, 혜경궁을 받들면서는 화한 얼굴 조심스런 마음으로 항상 옷을 이기지 못한 듯이 했으며 경신년 이후에는 또 왕이 섬기던 그대로 섬겼다. 그리고 정순 대비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섬겼었다. 두 군주(君主)와도 우애가 대단했고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러워 했으며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척속(戚屬)이 잘못이 있으면 그를 꾸짖지는 않고 다만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는데 그리하면 그들이 더 부끄러워하고 황공해 했다고 한다. 사가(私家)에 관한 은택 같은 것은 더욱 조심하여 혹 무슨 물건을 주더라도 그것을 사사로이 주는 일이 없었고 자신을 봉양함은 매우 검소하여 복식(服飾)·기용(器用) 등을 겨우 쓸 수 있을 정도만을 취했었다.
중년에 후가 갑자기 임신을 한 것 같자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산실(産室)을 서둘러 차리도록 했었으나 해가 넘도록 자식은 없었고 경술년에 와서 대륜(大倫)이 정해졌는데 그를 사랑하고 돌보기를 자신이 난 것 이상으로 하였으며 우리 전하께서도 사랑과 존경을 다하여 두 분의 자효(慈孝)가 옛날 그대로였다. 지난 무술년 정순(貞純)이 언문 교서를 내려, 곤전(坤殿)의 병환이 자식 두기에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을 때 대신(臺臣) 박재원(朴在源)이, 훌륭한 의원을 구해 조치할 것을 청했다 하여 홍국영(洪國榮)이 크게 화내 공식석상에서 재원에게 욕설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후로서 홍빈(洪嬪)을 대하기가 얼마나 난처했을지 알 만한 일이다. 왕은 결국 재원의 충절을 알고 그에게 특별히 좋은 관직을 추증하여 정표했고 양전(兩殿) 또한 그렇게 아무런 틈이 없었으니 그 모두가 왕이 현명하고 후가 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장구한 환락만을 누렸더라면 마치 소리없이 조화를 이루는 하늘처럼 그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더욱 형용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 그 덕의 지극함이여!


【원전】 47 집 318 면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어문학(語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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