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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려실기술] 과거제도(科擧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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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4 20:15:08, 5731회 읽음)

연려실기술 별집 제10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제도(科擧制度)
Ⅳ. 무거(武擧)



○ 고려 예종(睿宗)이 무학(武學)을 설치하여, 강예재(講藝齋)라 일컫고, 무사를 시험하여 선발하였다. 그 뒤에 무학의 재생(齋生)이 응시하는 자가 적어서 대책(對策)은 비록 합격되지 못하여도 점수에 따라 선발하니, 급제하기가 매우 쉬워서 과거에 응시할 자들이 다투어 무학에 몰려드는지라, 무학이 점점 성하게 되어 문학하는 사람들과 대립하고 불화할 조짐이 있었다. 조정에서 이를 심히 우려하여, 인종(仁宗)이 명하여 무학재생의 무과 선발 및 재호(齋號)를 폐지하도록 명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생원 이색(李穡)이 글을 올려 무과를 보여 궁궐의 숙위(宿衛)에 충당할 것을 청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문무(文武)의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음을 아뢰었다. 본조(本朝)에서는 다만 문과만을 뽑고 무과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예에 능한 인재가 적으므로,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년에 무과를 실시하여 병서에 통하고, 무예에 익숙한 자를 뽑을 것을 영구책으로 삼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
○ 태조(太祖) 2년에 무과를 설치하였다.
○ 태종(太宗) 8년에 무과를 설치하여 용호방(龍虎榜 용은 문과(文科)를, 호는 무과(武科)를 말한다)을 갖추니, 국조(國朝)의 무과가 이에서 비롯하였다.
○ 고려조의 무과 제도는 비록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식년(式年)의 법규는 인ㆍ신ㆍ사ㆍ해년에 문과와 함께 같이 서울과 각 도에서 초시를 실시하며 배정된 일정한 정원이 있는데, 그 거자가 과녁을 맞춘 화살 수효에 따라 방(榜)을 내붙이고, 다음 해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초시에 입격한 사람을 모아서 육량 편전(六兩片箭)과 기창(騎槍 기병이 쓰는 긴 창)을 시험하여 입격한 연후에 《장감(將鑑)》 《동래박의(東萊博議)》 《무경(武經)》중에서 하나, 사서 중에서 하나와 《대전(大典)》을 강하게 하여,조(粗)ㆍ통(通) 이상에 입격한 자를 과녁에 맞친 화살 수효와 글을 강한 점수를 합계하여 등급을 나누어 28명만을 뽑는 것을 회시(會試)라 이르고, 다시 회시에 응한 사람을 모아 임금이 친히 임어하여 그 재예를 시험하여 그 석차를 정하는 것을 전시(殿試)라 하였다. 《송와잡기》
○ 옛날에는 무과가 없던 것을 태종 때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문ㆍ무과의 방을 게시하던 날, 홍패(紅牌)와 어사화(御史花)와 술을 하사하였으며, 문ㆍ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을 하사하였다. 세조 때에 이르러 문과에는 일산을 주었고, 무과에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 어리석은 아이들이나 부녀자도 모두 문ㆍ무과를 분별할 수 있어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얼마 안가서 폐지하고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필원잡기》
○ 세조 6년 경진에 사방을 순행하여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무과를 베풀었는데, 초시를 보이지 않고, 규정의 제한도 없이 그 응시자의 다과(多寡)에 따라 선발하니, 1년의 통계가 1천 8백여 명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도 무사가 말[馬]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나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자를 반드시 ‘경진년 무과’라고 기롱한다. 이로부터 무과(武科) 또한 경시되었다. 《송와잡기》
○ 세조 12년에 임금이 강릉(江陵)오대산(五臺山)에 행차하여 어림대(御林臺)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무사를 뽑았다.
○ 세조 때에 무과 1천 명을 선발했는데, 임금이 말석으로 합격한 자를 불러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재예가 너보다 떨어지는 자가 있느냐?” 하니, 답하기를, “다음 방(榜)의 장원은 그 재예가 곧 신의 아래에 있는 자일 것 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웃고 그 사람을 썼는데, 뒤에 과연 그 직무에 합당하였다 한다. 《지봉유설》
○ 중종(中宗) 경진년에 과거를 설치하여 무사 1천 명을 선발할 때, 호사자(好事者)가 말하기를, “무사가 소를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았으나 맞지 않았으므로, 소를 멈추고, 그 화살을 빼어 다시 쏘니, 시관이 소리지르기를, ‘저 거자(擧子)는 어째서 소를 멈추고 있느냐?’ 하니, 거자가 답하기를, ‘소가 방금 오줌을 누고 있습니다.’ 하였다.” 한다. 《어우야담》
○ 성종ㆍ중종 두 임금 때, 특별 과거의 법규는 반드시 육량(六兩)의 화살로써 20보 밖에서 말을 달리며 쏘아 네 번 맞추고, 강(講)에서 조(粗)ㆍ통(通)에 입격한 연후에 방에 참여시켰기 때문에, 선발된 무사는 모두 뛰어나 쓸 만했었다. 만력(萬曆) 계미년에 니탕개(尼湯介)가 변방을 침입하니,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국경을 방비하고 전장에 나가게 하기 위한 계책을 건의하여, 드디어 특별 과거를 설치하여 무사 6백여 명을 선발하였더니 매년 선발한 자가 각기 수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조종조의 과거 법규가 이에 이르러 여지없이 무너져 잡색 군병 중에 약간의 궁술(弓術)을 아는 자면 모두 과거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왕궁을 시위(侍衛)하는 갑사(甲士)ㆍ별시위(別試衛)ㆍ정로위(定虜衛)의 부류 및 외방 각 진영의 기병ㆍ보병ㆍ수군에 새로 선발할 정원이 많이 비게 되었다. 임진년에 임금이 서쪽으로 행차하여 관서(關西 평안도)와 해서(海西 황해도)에서 연년이 무과를 설시하였고, 계사년 가을에 전주(全州)무군소(撫軍所)ㆍ영남 원수부(元帥府)와 각 도에서 선발한 인원이 매우 많았다. 계사년 환도로부터 정유년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에 여러 차례의 과거를 설시하였는데, 글을 강(講)하지 않고, 다만 화살 한 개를 맞춘 사람까지도 모두 선발하였으니, 명칭이 과거이지 실상은 군적(軍籍)과 같았다. 방을 게시하던 날에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홍패(紅牌)를 손에 든 사람이 미투리를 신고 도보로 가는 자 또한 많않으니, 뽑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는데도 장수 재목은 더욱 모자랐던 것이다. 《송와잡기》
○ 선조 계사년에 영유(永柔)행재소(行在所)에서 무사 2백 명을 뽑았는데 이때에 국가의 법금이 엄하지 않아 공사 노비들도 시험장에 나가 과거를 도둑질한 일이 있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손[客]과 마주 앉아 종을 불렀으나 응답이 없으므로, 항복이 말하기를, “이 고얀 놈이 필시 과거보러 간 것이로구나.” 하니 만당의 손님들이 크게 웃었다. 《어우야담》
○ 선조가 평안도로부터 연을 돌려 오는 길에 연안(延安) 관사에 들려 성을 지키는 장사들을 시험하여 친림한 가운데 방방(放榜)하였다.
○ 군병들에게 조총(鳥銃)을 학습시키고 이를 무과의 여러 기예 종목 중에 넣도록 명하였다.
○ 성혼(成渾)이 소를 올리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거를 가장 중히 여기오니, 마땅히 각 도에 특히 무과를 보이되, 방비가 가장 긴요한 곳에는 2~3개 장소에 나누어 설치, 널리 평안도의 예와 같이 선발하여, 숨어 있는 자들도 모두 나아가 입격하도록 하면 정병이 될 것이요, 그 나머지도 맞힌 살의 수효를 각기 성명 아래 거주하는 향리와 함께 기록하여 전과 같이 누락됨이 없도록 하면 또한 징발할 수 있는 군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 계사년 겨울에 광해군(光海君)이 동궁(東宮)으로서 전주(全州)에 머물러 무사 5백 명을 뽑았다. 이때, 전국적으로 기근이 심하여 굶에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였는데, 남쪽 지방으로부터 과거에 응시한 자들은 쌀 닷되[五升]로 급제를 사기까지 하였다. 《어우야담》
이때, 전주에서 알성과(謁聖科)를 베풀어 문신 11명과 무신 1천 6백 명을 뽑았고, 권율(權慄)도 명을 받들어 합천(陜川)에 가서 무과를 실시하여 무사 9백 명을 선발하였다. 《일월록》
갑오년에 이순신(李舜臣)의 장계로 무과 백 명을 뽑으니, 이를 주사 급제(舟師及第)라 이름하였다. 《일월록》
○ 임진란 후에 무과를 시취함이 매우 넓어서 한 방에 뽑은 숫자가 많은 것은 수천에 달하여, 혹 활을 잡을 줄 모르면서도 참여한 자가 있고, 혹 천한 신분이면서도 참여한 자가 있어, 통털어 수만 명이나 되었다.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의욕을 북돋우기 위함이었으나, 실용에는 도움이 없었으니 과거의 명목이 또한 너무 천했었다. 《지봉유설》
왜놈의 머리 하나를 베어오는 자는, 공천ㆍ사천을 막론하고 과거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니, 혹 굶어 죽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왜놈의 머리로 속여 상을 요구하는 자도 있었다. 영남에서 어느 한 사람이 머리를 베어 급제한 것을 그 고을 원이 잔치를 베풀어 그의 영광을 축하하니, 어느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굶주린 백성의 머리 위에 계화(桂花)가 떠 있고 / 飢民頭上桂花浮
쌓인 홍패 속엔 원한의 피 흘렀네 / 紅紙群中怨血流
태수(太守)의 축하연 술이 있을 것이니 / 太守慶筵知有洒
원컨대, 남은 찌거기로 죽은 넋 위로하오 / 願分殘瀝慰啾啾

하였다. 《지봉유설》
○ 병신년에 시종의 신하를 한산도(閒山島)로 보내어 과거를 베풀어 수자리 사는 군졸을 응시하게 했으니, 이순신(李舜臣)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 임인년에 조정 논의가 수군이 고생한다고 하여,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거제(巨濟), 전라도의 경도(鯨島)와 고금도(古今島)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1만 7천여 명을 뽑았는데, 겨울에 조정 논의가 내지 사람도 많이 혼입되어 있다 하여, 초시의 시행을 청하므로, 다시 수군에게 과거를 실시하여 1천 6백여 명을 뽑았다.
○ 을사년에 외방 무사로 활쏘기에 응시하여 회시(會試)에 바로 나가게 된 자들을 북방 변경의 방위에 충당코자 따로 정시(庭試)를 실시하였다.
○ 광해 초년에 특히 함경도에서 무과를 설시하였는데, 문과는 베풀지 않고 무과만으로 방을 발표하였다.
○ 11년에 변경 사정이 날로 급박하므로 승지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널리 무사를 뽑았다. 모두 서울로 모아 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모두 합하여 1만여 명을 뽑으니 당시에 이를 만과(萬科)라 일컬었다.
○ 인조 병자년에 평안도에 무과를 설시하고 싸움터에 나가기를 자원하는 자는 어느 도를 막론하고 모두 응시하게 하여 1만여 명을 뽑았다.
○ 정축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지켰던 사람과 호종한 사람은 물론이요, 공천ㆍ사천까지도 각기 한 기예로써 정시(庭試)에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 구인후(具仁垕)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이후로 무과에 활쏘기와 말타기만을 취하였기 때문에, 병법에 통달한 자가 도리어 참여하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 약간 옛 법규를 변경하여 글을 강(講)하는 것까지 겸하여 사람을 뽑도록 할 것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무사를 많이 뽑는 것이 국가의 막대한 폐단이 되고 있으니, 군사의 수효가 날로 줄어드는 것이 그 첫째요, 벼슬을 여러 사람에게 고루 주지 못하여 그 원망이 조정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 둘째요, 관직이 날로 가벼워져 사람들이 그 본분을 지키지 못함이 그 셋째입니다. 근일에 일을 논하는 자가 한갓 부방(赴防 국경을 방위하러 가는 것)의 중요성만을 알고, 뒷날의 폐단을 생각지 않고서 매양 널리 선발하고자 하니, 서로(西路 평안도)에서 과거를 설시한 것도 오히려 너무 지나쳤다는 한탄이 있사온데, 또 삼남에서 교생(校生)을 깨우쳐 그 무예를 전형하여 다가오는 별시와 방을 합하려고 하니, 막중한 과거를 어찌 한번의 시험으로써 그 참방(參榜)을 허용하오리까.” 하였다. 《지천집》
○ 인조 병인년의 대간의 계청으로 별시의 방을 파했으나, 무과는 파하지 않고 정시(庭試)에 합쳤다.
○ 현종 을사년에 대신의 내삼청(內三廳)에 무변의 적임자가 적다 하여 과거를 설시할 것을 계청하므로, 대거(對擧) 문과 정시를 실시하였다.
○ 숙종 병진년에 정시(庭試)ㆍ초시는 도로 나누어 시행하여 전시(殿試)를 와서 보도록 하고, 관서ㆍ관북과 영남엔 따로 중신을 보내어 시행하여 그곳에서 방을 발표하도록 하였는데, 합해서 모두 1만 9천여 명을 뽑았다.
이때, 무과에 급제한 자가 1만 4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방을 부를 때에 대궐 뜰이 협착하여 정축ㆍ신묘년의 예에 의거하여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거행하였다. 《비국등록》
○ 송시열(宋時烈)이 소를 올리기를, “무인의 만과(萬科)는 오늘의 난처한 폐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 수효가 2만에 가까운데, 모두 서울로 몰려와 벼슬에 등용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나라를 원망하니, 서울의 쌀이 귀한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며, 농민도 점점 감소되어 가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자(程子)의 ‘정원 없앤 것을 삭제하여 이익으로 꾀는 것을 제거한다.’ 는 말에 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재예를 전형하여 그 중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병사(兵使)에게 올리면, 병사는 다시 모아서 전형하여 그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병조에서 또 전형하여 뽑아 가지고, 차례대로 관직에 보직시키면 곧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각기 그 시골로 돌아가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또 한편으로는 무예를 익히게 될 것이오니, 공사(公私)와 경향이 모두 그 편리함을 얻을 것이요, 그 천한 품계 중에도 반드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우암집》
○ 숙종 병인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 무과 초시의 방을 보면, 사대부의 자제로서 참여한 자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쓸 만한 자는 극히 드무니, 어찌 장래의 임용을 바라리오. 조정에서 인재를 씀에 있어 문ㆍ무를 가리지 않으니, 입시한 제신 중에 만약 자제를 여럿 둔 자가 있거던 권고하여 무예를 배우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지사(知事)신여철(申汝哲)이 아뢰기를, “신이 매양 전교를 듣자옵고 나아가 친구들에게 말하여 자제들에게 무예를 배우게 하도록 권고하였사온데, 한번 만과(萬科)를 설시한 뒤로부터 벼슬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 헛되이 늙은 자 많사옵고, 또 무변이라고 일컬으며 음관까지도 또한 모두 그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이것이 곧 사대부의 자제로서 차라리 궁한 선비가 될지언정, 즐겨 무변으로 나가지 않는 까닭이옵니다.” 하였다. 우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중국의 과거 제도에는 무진사(武進士)라는 것이 있사온데, 몇 가지 무예 이외에 평변론(平邊論)과 치안책(治安策)으로써 전형하여 뽑기 때문에 입격하는 자는 적사오나 쓸 만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글을 강하는 제도가 있사오나 다만 음석(音釋 한문(漢文)을 음(音)으로 읽고 언해(諺解)로 새기는 것)만 강하여도 모두 참여하게 되니, 사대부의 자제는 비록 글을 강하는 데는 능하오나 무예가 부족하기 때문에, 상놈들이 방에 드는 자가 많사옵니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고치려고 한다면, 과거의 규식을 약간 높이고 선발하는 사람의 수효를 줄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비국등록》
○ 경오년에 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는 데에 있어 문ㆍ무가 어찌 다르랴. 근래 무과 방목(榜目) 속에 사대부의 자제가 전혀 없으니, 사족들이 무업(武業)에 종사하지 않음을 가히 알겠도다. 청(廳)을 설치하여 무학을 권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임진년에 비로소 평안도 별무사 도시(平安道別武士都試)를 설치하였고, 정유년에 강화부 장려 의려 도시(江華府壯旅義旅都試)를 설치하였으며, 무술년에는 황해도 별무사 도시ㆍ동래부 별기위 도시(東萊府別騎衛都試)를 설치하였고, 기해년에는 의주(義州)ㆍ강계(江界)ㆍ선천(宣川)ㆍ창성(昌城)ㆍ삼화(三和)에는 별무사 도시를 설치하였다.
○ 영종 기유년에 강원도 별무사 권무 군관 도시(江原道別武士勸武軍官都試)를 설치하였고, 병진년에 황해도 추포 무사 도시(黃海道追捕武士都試)를 설치하였으며, 병진년에 경상도 별무사 도시를 설치하였고, 신미년에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 등 각 도에 선무 군관 도시(選武軍官都試) 및 황해도 향기사 도시(黃海道鄕騎士都試)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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