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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 정조 037 17/01/12(병오) / 장용청 설치 연혁

 이름 : 

(2005-12-06 23:31:10, 5404회 읽음)

정조 037 17/01/12(병오) / 장용청 설치 연혁

앞서 임인년에 명하여 무예 출신(武藝出身)과 무예 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사람 30명을 가려서【숙묘(肅廟) 을축년에 무예 별감 30명을 훈련 도감의 국출신(局出身)의 3개 번(番)에 번갈아 임명한 제도를 따른 것이다.】 번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회랑에 입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을사년에 장용위라 호칭하고 20명을 늘리니 이것이 장용영이 설치된 시초이다. 이때부터 해마다 인원을 늘려 왔는데, 척씨(戚氏)의 남군(南軍) 제도를 본받아 5사(司)에 각기 5초(哨)를 두는 것으로 규례를 삼고 3초는 초마다 1백 15명으로 하였다.【정규 군인 90명, 기총(旗摠) 3명, 대장(隊長) 9명, 서자적(書字的) 1명, 패두(牌頭) 1명, 고수(鼓手) 1명, 인기수(認旗手) 1명, 화병(火兵) 9명이다.】 정미년에 처음으로 27명을 두기 시작해서 무신년에 88명을 증원하여 좌초(左哨)를 만들었고, 신해년에 우초(右哨)를 늘렸으며, 계축년에 중초(中哨)를 늘렸다.
5초는 서울에 있었으니 초마다 1백 23명이었다.【정규 군인·기총·대장은 위와 같고, 복마군(卜馬軍) 9명이 많았다.】 정미년에 전초(前哨)를 처음으로 두고 무신년에 중초와 후초를 늘렸으며 계축년에 좌초와 우초를 늘렸다. 5초는 수원에 있었는데, 기유년에 5초를 처음으로 창설하였는바 전초는 진위(振威)에 있고, 좌초는 양성(陽城)에 있고, 중초는 용인(龍仁)에 있고, 우초와 후초는 광주(廣州)에 있다.
2초는 무신년에 창설했는데, 우초는 고양(高陽)에 있고 후초는 파주(坡州)에 있으며, 3초는 을묘년에 증설했는데, 전초는 안산(安山)에 있고 좌초는 과천(果川)에 있고 중초는 시흥(始興)에 있다. 3초는 무신년에 창설했는데, 전초는 지평(砥平)에 있고 좌초는 양근(楊根)과 가평(加平)에 나뉘어 있고 중초는 양주(楊州)에 있다. 우초와 후초는 을묘년에 증설했는데, 우초는 양주에 후초는 장단(長湍)에 있다.【초마다 정규 군인 90명, 기총 5명, 대장 9명, 서기(書記) 1명, 능마아(能兒) 1명, 고수 1명, 인기수 1명, 사후(伺候) 2명, 부엌일하는 사람 1명, 화병 9명, 복마군 9명이다.】 96명은 임인년에 훈국 기예군(訓局技藝軍) 15명이 이속된 것을 비롯하여 을사년에 15명을 증원하고, 무신년에 17명을 증원하고, 기유년에 5명을 증원하고, 경술년에 9명을 증원하고, 신해년에 5명을 증원하고, 임자년에 9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21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元軍)이 85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5명, 회자수(子手) 4명이다.】
92명은 임인년에 훈국 기예군 15명이 이속된 것을 비롯하여 을사년에 15명을 증원하고, 무신년에 13명을 증원하고, 기유년에 5명을 증원하고, 경술년에 9명을 증원하고, 신해년에 5명을 증원하고, 임자년에 9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21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 이하는 위와 같고 회자수가 없다.】
95명은 정미년에 25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5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은 88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1백 명은 정미년에 28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3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은 93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65명은 무신년에 16명으로 창설하여 신해년에 7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2명을 증원한 것이다.【원군 51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2명, 원역(員役) 10명이다.】
45명·50명·57명이 있다.【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잇군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績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원전】 46 집 372 면

【분류】 *군사(軍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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