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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 정조 028 13/10/07(기미) / 어제 장헌 대왕 지문③

 이름 : 

(2005-12-06 23:42:25, 5410회 읽음)

정조 028 13/10/07(기미) / 어제 장헌 대왕 지문③

이 해에 훈국(訓局)에 《무기신식(武技新式)》을 반포하였다. 《궁중기문》을 살펴보면, 세자는 유년 시절부터 지도(志度)가 이미 뛰어나 놀이를 할 때면 반드시 병위(兵威)를 진설하곤 하였다. 상이 시험삼아 그의 소질을 떠보려고 물어보면 조목조목 대답을 해내곤 하였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일체의 행동 거지와 임기 응변하는 방도를 모두 손으로 그리고 입으로 대면서 혹시라도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병가(兵家)의 서적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당한 수법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묘리(妙理)를 은연중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 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또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을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확히 맞췄으며, 고삐를 잡으면 나는 듯이 능숙하게 말을 몰았고,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 그러자 궁중에서 서로들 말하기를 ‘풍원군(豊原君)이 연석(筵席)에서 효묘(孝廟)를 빼닮았다고 한 말에는 과연 선견 지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 장신(將臣)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책 하나를 엮어 이름을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고 달아 반포하였다. 이는 대체로 척계광(戚繼光)의 책에 실려 전하는 무예가 단지 여섯 가지 기예뿐으로서 곤봉(棍捧)·등패(牌)·낭선(狼)·장창(長槍)·당파()·쌍수도(雙手刀)인데, 연습하는 규정에 그 방법이 대부분 잘못되었으므로, 옛책을 가지고 모조리 고증하여 바로잡았다. 또 죽장창(竹長槍)·기창(旗槍)·예도(銳刀)·왜검(倭劒)·교전 월도(交戰月刀)·협도(挾刀)·쌍검(雙劒)·제독검(提督劒)·본국검(本國劒)·권법(拳法)·편곤(鞭棍) 등 열두 가지 무예를 새로 만들어 도식을 그려가지고, 찌르고 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 책을 전서(全書)로 편찬하여 훈국(訓局)에 주어 연습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倭)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이웃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이니, 바로 옛날의 중원(中原)인 셈이다. 지금은 비록 변경에 경보가 없지만, 마땅히 위험에 대비하는 태세를 구축하여야 한다. 더구나 효묘(孝廟)께서 뜻하신 일을 실현할 데가 없는 데다가, 북쪽 동산[北]의 한 자 되는 단(壇)은 나를 자다가도 탄식하게 한다. 아, 병기(兵器)는 비록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편안한 시기라고 하더라도, 성인들은 오히려 만들어 둠으로써 갑작스런 외적을 대처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에는 효묘께서 결심하신 일까지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도간(陶侃)이 매일 벽돌 1백 장씩을 날랐다는 말을 외울 때마다 고요한 밤 한가한 때이면, 문득 스스로 시험하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술이라는 것은 의심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장부(臟)와 심장·간장을 비록 모조리 알기는 어렵지만, 모색(摸索)하고 유추(類推)하면 역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 나라를 치료하는 수법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진실로 약재(藥材)의 성질을 대강 알고 맥(脈)의 이치를 약간 안다면, 하루에 한 사람을 고치고 이틀에 두 사람을 고치면서 점차 숙련되어 자연히 한때의 명의가 될 것이다. 선비들의 학문도 의심을 가지는 데로부터 의심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인데, 더구나 의원이 의심을 가지고 의심을 풀어나가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처방만 내리면 당장 효험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하찮은 재주라고 하여 유의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옛날에는 의복 제도가 각기 상징하는 것이 있었다. 지금 말하는 창옷[衣]과 소매가 둥근 옷[圓袂衣]을 나는 일찍부터 싫어했다. 창옷은 세 면이 막히고 뒤폭만 터졌는데, 그 형상이 음에 속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은 양에 속하고 이적(夷狄)은 음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창옷 제도가 나오자 비로소 북쪽으로 건주위(建州衛)와 통하는 조짐이 발생하였다. 둥근 소매 옷은, 앞면은 두 폭을 겹치고 뒤에는 한 폭을 늘어뜨렸으니, 이 역시 남쪽을 향하고 음을 등지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한가롭게 지낼 때이면, 반드시 와룡관(臥龍冠)을 쓰고 학창의(鶴敞衣)를 입는데, 학창의는 사마광(司馬光)의 심의(深衣)를 모방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정복(正服)은 깃이 둥근 옷[團領]과 철닉[帖裏]인데, 깃이 둥근 옷은 바로 제왕들이 회동(會同)할 때 입는 옷이고, 철닉은 바로 황제(黃帝)의 의복 제도이다. 군복(軍服)의 경우, 소매가 좁은 것은 모두 옛 제도를 숭상한 것이고 싸울 때에 입는 옷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의 습속(習俗)에서는 미리 마련해두는 계책과 근검 절약하는 도리를 모른다. 미리 마련해두면 걱정이 없어지고, 검박하게 지내면 재물이 넉넉해진다. 지금의 의복과 그릇들 가운데, 화려하여 사치스런 감이 있거나 산뜻하여 몸에 편리한 것들을 나는 가까이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궁궐 안의 사람들 가운데 자기네들의 잘못을 나에게 와서 알려주는 사람이 있기에, 고발한 사람과 고발당한 사람을 서로 대질시켜, 만약 증거가 없을 경우 고발한 사람을 죄주고, 설령 그런 사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양쪽을 다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남의 허물을 고자질하는 일이 조금 가라앉았다.’라고 하였다.
사직(司直) 박치원(朴致遠)이 글을 올려 힘쓸 것을 진언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답하였다. 후에 중신(重臣) 서지수(徐志修)가 연석(筵席)에서 진계(陳戒)한 것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전후로 세자의 덕(德)에 관련된 말을 한 자들은 다들 장려하는 말씀을 받았다.
일찍이 계방(桂坊)의 나삼(羅蔘)이 전에 서연(書筵)에서 입바르고 강직한 말이 많았다 하여 후에 궁료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안부를 묻곤 하였다. 하루는 궁관(宮官)이 시사의 염려스러운 것에 대하여 물어보는 자가 있자, 매우 엄하게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두 궁(宮)을 이간시키는 것이다. 도적이란 지목은 바로 이런 무리들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주(記注)에 의하면, 이때에 대궐 하인들 중에 영(令)이 내렸다는 핑계하에 민간에 나가 횡포를 부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일이 드러나자 즉시 유사(有司)에게 넘기게 하고는, 이어 영지(令旨)를 내리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는데, 이후로도 이런 폐단이 없을지 알 수 없다.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사(法司)가 곧장 스스로 판단하여 잡아다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진년 가을에 상이 경희궁(慶熙宮)에 이어(移御)하였다. 7월에 온천에 행행하였다가 8월에 환궁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이때에 세자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으므로 영묘께서 온천에 가서 목욕하라고 명하였다. 행차가 강가에 이르니 물이 불어나서 뱃길이 안전하지 않으므로, 날이 저문 후에야 비로소 건넜다.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李壽鳳) 등과 함께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는 설(說)을 강론하였다. 그 이튿날 수원부(水原府)에 이르렀다. 부의 소재지 북쪽에 화산(花山)이 있었는데, 바로 기해년에 영릉(寧陵)을 표지해 둔 곳이었다. 거기에 올라가서 두루 둘러보고 좋은 곳이라고 감탄을 한참 하다가 처소에 돌아왔다. 산성에서 무예를 열병하였다. 행차가 지나는 길가에서, 부로들이 에워싸고 막아서서 다투어 바라보면, 번번이 행차를 멈추고 질고를 물어보고는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하였으므로, 일로가 크게 기뻐하였다. 어느 호위 군사의 말이 달아나 콩밭에 들어가서 마구 짓밟고 뜯어먹었는데, 지방관을 불러 밭 주인에게 값을 후하게 갚아주라고 하였으며, 호위 군사의 죄를 다스렸다. 고을 안의 나이 많은 자들을 돌봐주었으며, 시골에 파묻혀 있는 선비들을 간곡히 불렀다. 온천에 도착하여서는 날마다 강론하는 자리를 열었는데, 역대 임금들이 온천에 갔을 때에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던 옛 일을 따른 것이었다. 절구시(絶句詩) 1수를 내리어 궁관에게 화답하라고 지시하였다.
달이 바뀌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는 것의 당부(當否)를 궁료에게 묻고, 이어 말하기를 ‘오랫동안 서울 궁궐을 떠나 있자니, 그리운 심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날 드디어 행차를 돌렸으며 곧바로 경희궁에 나아가 문안 인사를 올리려 하였는데, 영묘가 지신(知申)을 보내어 성밖에서 마중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앓고 난 뒤에 말을 달려 왔으니 마땅히 바로 돌아가서 몸조리를 하고, 조금 지난 후에 차차 와서 만나도록 하라.’고 하였다. 상신(相臣)이 나아가 뵙고 아뢰기를 ‘학어(鶴御)가 한 번 임하자, 호중(湖中)의 인사들이 비로소 세자의 덕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부로나 서인들치고 덕의를 찬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야말로 신민의 행복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번 행차 때 궁궐에서 나갈 때부터 행차가 돌아올 때까지 번번이 수봉(壽鳳)으로 하여금 경과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농사에 손상을 입힌 것을 살피도록 하였다. 또 날씨가 몹시 무더운 때였으므로 약원(藥院)에 명하여 약을 조제하여 도중에서 더위를 먹은 장수와 병졸들을 구료하게 한 결과 돌아온 뒤에 한 사람도 앓는 자가 없었다.
신사년에, 당시에 조치해야 될 계책에 대해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대신들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관서(關西)의 고을에 행차하게 되었는데, 이는 상에게 명을 청하여 도적들의 모의를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신(賊臣) 홍계희(洪啓禧)가 내부에서 변란을 저지르려 하자, 세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재촉하여 곧장 돌아왔다. 이때 한 승지가, 상에게 아뢰어 조정 신하가 세자에게 올린 글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는데, 세자가 몸소 임금 앞에 나아가, 변란을 처리하려 했던 본의를 빠짐없이 고하니, 상이 그제서야 의심이 풀렸다. 후에 세자가 빈연(賓筵)에 임어하였을 때 상이 말하기를 ‘세자 또한 임금이다. 명색은 신하로서 섬긴다고 하면서 간악한 음모를 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역적 계희(啓禧)가 무엄하다는 내용의 하교를 잇따라 내리어 한 무제(漢武帝) 때의 간신 강충(江充)에게 비기었다. 이때로부터 음모가 더욱 긴박해졌다.
임오년 5월에 적인(賊人) 나경언(羅景彦)이 복주(伏誅)되었다. 기주(記注)와 《궁중기문(宮中記聞)》에 의하면, 경언이 형조에 글 한 통을 투서하였는데, 그 글에는 ‘전하의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불충한 생각을 품고 있어 변란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형조의 관리가 본조의 좌석으로부터 그 글을 소매 속에 넣고 청대를 하였는데, 이때 역적 계희는 기백(畿伯)으로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이 모두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고, 이어 형조의 관리가 그 글을 상에게 고하자, 상이 크게 놀라서 내시에게 묻기를 ‘경언은 대궐 하인 나상언(羅尙彦)의 족속인가?’라고 하니, 내시가 대답하기를 ‘상언의 형으로서 전에 대궐 하인으로 있던 자입니다.’고 하였다. 상이 역적 계희에게 묻기를 ‘궁성을 호위해야 하겠는가?’라고 하니, 역적 계희가 앞에 나와서 아뢰기를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궁성을 호위하는 일은 무신년에도 이미 행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즉시 성문을 닫고 군사를 동원하여 궁문을 파수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사복시에 나아가 경언을 국문하자 경언이 옷의 솔기 안에서 또 하나의 봉서를 꺼냈는데, 길이는 5치를 넘고 둘레는 한 줌이 차는 것이었다. 그것을 올리니, 상이 보고 나서 좌상(左相)에게 보였는데, 좌상이 겨우 두어 줄을 보자마자 소리를 내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먼저 죽어야 하겠습니다. 동궁이 만약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신이 가서 위로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판의금부사 한익모(韓翼謨) 등이 말하기를 ‘경언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상을 속여 세자를 핍박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 죽여야 마땅합니다. 엄하게 국문하여 법대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니, 상이 비로소 형장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사서(司書) 임성(任珹)이 분연히 나서서 익모에게 말하기를 ‘흉악한 말을, 어찌 경언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겠는가.’라고 하니, 익모가 또 사주한 자를 한시바삐 사핵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노하여 익모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대사간 이심원(李心源)이 익모를 두둔하자, 그도 파직시켰다.
익모 등이 이미 쫓겨난 다음, 경언이 세자를 무함하였다고 자복을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이구 동성으로 극률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동의금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여느 사람을 무함해도 오히려 역적이 되는데, 더구나 세자를 무함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흉악한 말은 이미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고 죄인이 이미 자복을 하였으니, 이러한 역적과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앞으로 나서서 극력 말하였는데, 책망하는 하교가 누차 내렸건만 말은 갈수록 강직하여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세자가 대궐문 밖에 걸어가서 대명(待命)하고 있다가, 상이 들어오라고 명하자 드디어 대궐 뜰에 나아와 엎드렸는데, 흐르는 눈물이 도포자락을 적시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정휘량(鄭良)이 비로소 접견을 청하여 아뢰기를 ‘죄인이 이미 세자를 무함했다는 네 글자를 가지고 자복한 이상 그 죄를 단 하루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에 경언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세자가 환궁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지극하신 자애심 덕분에 함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윤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궁묘(宮墓)의 호칭을 ‘수은(垂恩)’이라고 내려주었다. 7월 23일에 양주(楊州)의 배봉산(拜峰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장사 지내는 날에 상이 광중(壙中)에 임어하여 어필로 신주를 썼다. 그 다음달에 조재호(趙載浩)를 북쪽 변방에 귀양보내었고 또 그의 조카인 조유진(趙維鎭)이 죄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대신(臺臣)이 법대로 처단하자고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저 동룡(銅龍)을 쳐다보면 나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여러 신하들로서는, 마땅히 차마 말하지 못하는 나의 심정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그 일을 그만두라고 명하였고, 이어 말한 자에게 죄를 주었다. 유진은 여러 번 고문을 받았으나 항언을 하면서 두말을 하지 않았고, 원지(遠地)에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죽었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윤 5월 13일에 검열 윤숙(尹塾)이 대궐 뜰에 내려가 이마를 두드리니 피가 흘러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호위 구역 밖으로 뚫고 나가 의관(醫官)을 불러 약을 구해 가지고는 소조께 올렸다. 이때에 여러 대신들이 합문(閤門) 밖에 있으면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윤숙이 호위 군사들을 꾸짖고 몸을 빼어 뛰쳐나가서는 대신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왔다. 윤숙이 신만(申晩) 등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처럼 위급한 시기에 대신들이 대궐 섬돌에 머리를 찧고 죽기로 작정하면서 힘껏 간하지 않는다면, 장차 대신을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적신(賊臣) 구선복(具善復)과 홍인한(洪麟漢) 등이 각기 음흉한 꾀를 부리는 바람에, 윤숙은 마침내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상은 오히려 이 사람이 아깝다고 연신 말을 하였다.
분사(分司)의 한림 임덕제(林德)가 뒤이어 뜰 아래에 엎드린 채 곁에서 떠나지 않으니, 상이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도 땅에 버티어 앉은 채 일어나지 않자 호위 군사가 끌어내려 했는데, 덕제는 꾸짖어 말하기를 ‘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잘릴지언정 끌릴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의현(旌義縣)에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윤숙과 덕제를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후에 덕제를 등용하였다.
궁관 임성(任珹)·권정침(權正) 등은 한사코 나가지 않았으며, 분주서(分注書) 이광현(李光鉉)도 몸을 빼어 뛰쳐나가 의관을 데리고 들어왔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사코 간쟁을 하니, 상이 노하여 군문(軍門)에 넘겨 효수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일단 나갔다가 다시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자, 울면서 말하기를 ‘신은 마땅히 죽어야 하겠습니다. 감히 명을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나가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패초(牌招)를 명하였으나 끝내 나아오지 않았다. 후에 묘소의 공사를 감독하는 직임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는데, 송영중(宋瑩中) 등이 대간(臺諫)으로서 다른 말을 꾸며 규탄을 하니, 상이 영중 등을 엄하게 배척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그의 아들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며, ‘나라가 어지러우니 어진 정승이 생각난다.’는 하교가 있었다.
분사(分司)의 제조 한광조(韓光肇)는 대궐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와서 관을 벗고 울부짖으니, 상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광조가 말하기를 ‘신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신이 한 마디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또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광조는 통곡을 하면서 기어나갔다. 그의 아비는 말하기를 ‘머리를 부딪쳐 죽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조신(朝臣)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반교(頒敎)하는 데에 불참하였다. 광조는 대정현(大靜縣)에 귀양갔다가 곧이어 석방되었다. 후에 상이 말하기를 ‘얼마 전의 처분을 내 자신이 뉘우친다.’라고 하였다. 광조가 세상을 떠나자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그 제문에는 ‘부자가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뜨거운 충성을 다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어 그의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승지 조중회(趙重晦)는 눈물을 흘리면서 극력 진술하니, 섬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가 곧이어 도로 취소하였다. 중회는 또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어 항언하며 굽히지 않다가, 원지(遠地)에 귀양을 당하였다. 후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야 꺾이지 않는 굳센 풀을 알 수 있다.’는 하교가 있었으며, 누차 승진을 시키어 이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제학 한익모는 소명을 다섯 번이나 어기면서 교문(敎文)을 짓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명분과 의리상 그럴 수 있는 것이니,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또 치사(致詞)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으나, 소패(召牌)가 모두 여덟 번이나 내렸어도 끝까지 나아오지 않고, 의금부에서 짚자리를 깔고 대죄하다가 삭직을 당하였다. 후에 누차 그를 칭찬하였으며, 발탁하여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승지 이익원(李翼元)은 극력 항거하면서 전교를 쓰지 않았으며, 승지 정순검(鄭純儉)은 전각(殿閣)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을 죽여 주소서. 신이 비록 죽을지언정, 감히 이 하교를 반포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총관 이태화(李泰和)는 관을 벗고 머리를 부딪치면서 극력 간하였는데, 후에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였다.
갑신년 가을에 입묘례(入廟禮)를 행하였는데, 상이 임어하여 살펴보았다. 을유년 5월에 제삿날을 하루 앞두고 시사(視事)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조정 신하들에게 윤음을 내리기를 ‘작년 이후 처음으로 이날을 맞는다. 경연을 정지하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편함을 위한 것이겠는가. 아, 마음이 이와 같지 않다면 부모가 아닐 것이고, 또 어떻게 영혼을 위로하겠는가. 아, 신하들이 80을 바라보는 자기 임금의 오늘 심정을 알고 신하로서의 분수를 지킨다면, 부산을 떨고 세력 다툼을 벌이는 마음은 마치 봄눈이나 봄얼음과 같이 저절로 풀릴 것이다.’고 하였다. 대신 등이 정섭(靜攝) 중에 계신 만큼 즉시 상선(常膳)을 드시라고 청하였다. 그 이튿날 또 수은묘(垂恩墓)의 헌관 홍낙인(洪樂仁)에게 명하여, 제사를 행한 후에 국내(局內)를 간심하고 돌아와 아뢰도록 하였다. 낙인이 연석(筵席)에 오르자,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상세하게 물었다.
가을이 되자, 상이 어의궁(於義宮)에 행차하여 세손(世孫)더러 사당에 가서 참배하라고 명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보내고는 옛일을 추억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이어 후원의 기슭에 걸어 올라가서, 담장에 기대어 한동안 멀리 바라보았다. 이후로는 매일 밤중에 번번이 문지방을 두드리면서 한탄하기를 ‘옛적에 사자궁(思子宮)과 망사대(望思臺)가 있었는데 내가 어찌 스스로 이런 처지를 당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그때의 조정 신하들 가운데 과연 안금장(安金藏)과 같은 충성심을 가진 자가 있었던가. 이제 와서 협잡하여 다시 제기하는 것은 억하 심정인가.’라고 하였다.
무자년에 상이 전각 뜰에서 향 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는데, 효장묘(孝章廟) 이하 각묘의 향축(香祝)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압존(壓尊)이라는 이유로 즉시 몸을 굽히지 않자, 상이 성난 소리로 배참(陪參)한 신하들을 파직시키라고 명하고, 이어 병조 판서와 시위(侍衛)한 신하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한 모퉁이의 푸른 언덕[靑丘]은 바로 조선이다. 세자의 신령을 맞이하는 의식을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감히 하지 아니하는가. 아, 수은(垂恩)아. 오늘의 여러 신하들 중에는 10년 동안 신하로서 섬기던 자가 많으니, 세자가 죽어서 무심하다고 말하지 말라. 무심 두 글자를 이런 경우에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자정전(資政殿)에 돌아와 대신과 제신들을 전각 앞에 불러놓고, 칙유(飭諭)를 내리어 10년 동안 신하로서 섬긴 의리를 알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에 대정(大政)을 행하였는데, 또 대소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아, 임오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자질(姿質)이 훌륭하였건만, 내가 정말 인자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인년에 왕부(王府)에 임어하여 하교하기를 ‘지난 일을 새삼스레 제기하여 나에게 들리도록 하는 것은 반역하는 심보이다.’라고 하였다.
갑오년 여름에 가뭄이 들었는데 친히 묘소에 나아가 제문을 친제(親製)하고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세손(世孫)이 뒤를 따라갔다.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오늘 단비가 내릴 것이다.’고 말하고는, 이어 찬례(贊禮) 이하 행차를 따라간 근신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병신년 봄에 이르러 《정원일기(政院日記)》와 공가(公家)의 문적 중 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의 차마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 내용은 모두 세초(洗草)하라고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세손(世孫)의 이 상소문을 보고 특별히 그의 청을 허락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마음은 슬픔을 견딜 수 없다.’라고 하고는, 옥루(玉淚)를 비오듯이 떨구었다. 또 전교를 쓰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내가 밤낮으로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조종(祖宗)이 물려준 나라에 있다. 금번의 이 조처는 실로 나이 어린 아들을 위한 것이다. 아, 임오년 윤5월의 일기에 대하여 사도(思悼)가 까마득한 저승에서나마 아는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눈물을 삼키면서 「내가 장차 여한이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 때의 일기를 실록의 규례에 따라 승지와 주서가 함께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하도록 하라. 아, 내가 덕이 없는 탓에 만고에 없는 일을 당하였는데 말세의 인심이 수선을 떨고 있다. 비록 일기를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문자(文字)를 다시 제기하고 나선다면, 마땅히 무신년 못된 무리들의 잔당으로 쳐서 엄하게 징치할 것이다. 더구나 훗날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 임오년의 일을 언급할 경우, 마땅히 역률로 논죄할 것이니, 모두가 이것을 듣고 나라의 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어린 아들이 이미 면유(面諭)를 받들었으니, 내 이제는 마음놓고 편한 잠을 자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또 세손(世孫)에게 명하여, 묘소에 가서 전배(展拜)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누워서 세손의 오늘날 심정을 생각해 보건대, 어찌 다만 어린 자식의 심정뿐이겠는가. 나의 심정 또한 어떻겠는가. 오늘날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라 하였다.
《궁원의(宮園儀)》를 살펴보면, 병신년에 ‘장헌(莊獻)’이라는 시호(諡號)를 소급하여 올리고, 궁호(宮號)를 ‘경모(景慕)’, 원호(園號)를 ‘영우(永祐)’라고 고치었다. 계묘년에 존호를 소급하여 올려 ‘수덕 돈경(綏德敦慶)’이라고 하였으며, 갑진년에 또 존호를 소급하여 올려 ‘홍인 경지(弘仁景祉)’라고 하였다. 사당 내의 제례(祭禮)는 태묘(太廟)보다 한 등급 낮추었으며, 원의(園儀) 또한 이에 준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소세손(懿昭世孫)으로서 휘(諱)가 이정(李)이고, 차남은 바로 소자로서 이름은 이산(李)이다. 딸들은 광산(光山) 김기성(金箕性)과 오천(烏川) 정재화(鄭在和)에게 출가하였다. 서자가 3명 있는데 이인(李), 이진(李), 이찬(李)이고, 서녀 하나는 당성(唐城) 홍익돈(洪益惇)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자손들에 대한 기록은 우선 옛 행장을 따라 간략히 쓰니, 오르내리는 신령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원전】 46 집 59 면

【분류】 *왕실(王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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