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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홍재전서(弘齋全書) 13권, 서인 6. 翼靖公奏藁軍旅類叙, 軍制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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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3:07:59, 7232회 읽음)

군제인(軍制引)

우리나라 군사 제도가 국초에는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를 두어 친군좌위(親軍左衛), 친군우위(親軍右衛), 응양위(鷹揚衛), 금오위(金吾衛),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비순위(備巡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를 두고 위(衛) 하나가 다섯 영(領)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뒤에 곧 부병(府兵)을 두고 명칭도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고치고, 또 각위도 그 칭호를 시위사(侍衛司), 순위사(巡衛司) 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의흥친군우위를 충좌(忠佐)로, 응양위를 웅무(雄武)로, 금오위를 신무(神武)로, 좌우위를 용양(龍驤)으로, 신호위를 용기(龍騎)로, 흥위위를 용무(龍武)로, 비순위를 호분(虎賁)으로, 천우위를 호익(虎翼)으로, 감문위를 호용(虎勇)으로 각각 고치고, 사인소(舍人所)를 두어 대소 신료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의 아들, 아우, 조카, 손자, 사위 등의 이름을 거기에다 두고 문무(文武)의 기예를 익히도록 하고, 훈신(勳臣)들은 각기 사병(私兵)을 둘 수 있게 하였다. 후릉(厚陵) 때 와서는 사병을 없애 그들을 삼군부(三軍府)에다 예속시키고, 갑사(甲士) 2천 명을 선발해서 1년을 기한으로 서로 돌아가면서 각위의 직을 맡게 했다.
헌릉(獻陵) 때는 의흥삼군부를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로 바꾸고 병조(兵曹)에 예속시켜 금려(禁旅)를 거느리고 윤번제로 숙위(宿衛)를 하게 했다가, 병조에는 유신(儒臣)들이 많아서 군사(軍事)를 지휘 감독하기에는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곧 무신(武臣)을 기용하여 도진무(都鎭撫)를 삼았다. 세종(世宗) 때는 다시 의흥부(義興府)로 했다가 문종(文宗) 때 와서 그 제도를 바꾸어 오위(五衛)를 두고, 1개 위(衛)에는 오부(五部)를 두어 거기에는 통장(統將), 여수(旅帥), 대정(隊正), 오장(伍長)이라는 것을 두고 서울과 팔도(八道)를 모두 오위에 소속시켰다.
세조(世祖) 때 와서는 그것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칭하고 거기에 도총관(都摠管)과 부총관(副摠管)을 두었으며, 오위 25부(部)에는 각기 통(統) 넷씩을 두어 통이 도합 1백 통이었는데, 기병(騎兵) 2개 통이 일전일주(一戰一駐)하고 나면 보병(步兵) 2개 통이 또 일전일주한다. 그리고 각위(各衛)에는 또 유군(遊軍) 5개 령(領)이 있고, 위에 각기 소속이 있었다. 즉 팽배(彭排), 보충대(補充隊), 별시위(別侍衛), 족친위(族親衛), 충찬위(忠贊衛), 파적위(破敵衛), 충순위(忠順衛), 충무위(忠武衛), 장용위(壯勇衛)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대장(大將)은 위장(衛將)을 명령하고, 위장은 부장(部將)을 명령하고, 부장은 통장(統將)을 명령하고, 통장은 여수(旅帥)를 명령하고, 여수는 대정(隊正)을 명령하고, 대정은 오장(伍長)을 명령하게 되어 있다. 또 북관(北關) 사람 40명으로는 친군위(親軍衛)라는 것을 만들어서 호분위에 소속시켰다.
선조(宣祖) 임진왜란 이후에는 또 오위 제도를 없애고 총관(摠管)은 시위(侍衛)만을 맡게 하고, 위장과 부장은 경(更)을 나누어 순행(巡行)하게 했으며, 용양ㆍ충좌ㆍ충무 세 위는 군함(軍銜)에 소속시키고, 충의위는 맹부(盟府)에 소속시키고, 족친위는 종부시(宗簿寺)에 소속시키고, 충찬과 충순 두 위와 보충대는 병조에 소속시키고, 별시위ㆍ친군위ㆍ팽배ㆍ파적 등은 모두 없앴는데, 이것이 오위의 연혁이다. 그런데 오위 때는 병(兵)이 농(農)에 붙어 있었으나 만약 성을 쌓는다거나 변방 수비의 일이 있을 때는 기병과 보병이 각기 식량을 싸 들고 멀리까지 가야 하는 노고를 특별히 진념하는 뜻에서 신포를 바쳐 역군을 고용하도록 했는데, 애당초 징포법(徵布法)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용호영(龍虎營)이라는 명칭은 선왕 때 처음 붙인 명칭이고, 세종 때는 내금위(內禁衛)와 사자위(獅子衛)를 두었으며, 중종(中宗) 때는 정로위(定虜衛)를 두어 겸사복장(兼司僕將)에게 소속되게 했다. 그런데 그 인원은 총 1천5백 명이었고, 내금위는 미리 차출된 자까지 합쳐서 총 2백50명이었다. 효종(孝宗) 때는 금군(禁軍)을 1천 명으로 증원하고, 좌우 별장(別將)을 두어 이름을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이라고 하고, 본병(本兵)의 장에게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때는 그것을 7백 명으로 감축하고 7개 번(番)으로 나누어 번마다 각기 장(將) 하나씩을 두고 좌우 별장도 없애고 단 한 사람만을 두어 영솔하게 하였으며, 금군으로는 겸선전관(兼宣傳官), 겸습독(兼習讀), 겸훈련봉사(兼訓鍊奉事), 겸포도군관(兼捕盜軍官), 별초무사(別抄武士), 사지(事知)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다가 효종 때는 겸선전관과 별초무사를 없애고 겸훈련봉사도 그후 곧 따라서 없앴으며, 그 나머지 지금까지 있는 것은 사지(事知) 7명뿐이다.
효종 때는 선천(宣薦) 출신들은 전원 금려(禁旅)에 소속시키도록 하고, 금려에 소속된 뒤에야 비로소 선전관에 의망하였다. 만약 금려에 자리가 없으면 액외(額外)라는 명칭으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채워 넣었다. 그후 병조 판서 이인엽(李寅燁)이, 옛 제도에 따라 내삼청(內三廳)에서 취재(取才)한 자들을 모두 금군으로 차출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후 병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선천 출신이 정원 외에 너무나 많아 만약 그들을 다 금군으로 차출하게 되면 취재자들이 적체될 수밖에 없으니 취재자를 우선 금군으로 차출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그대로 따랐다. 선왕 때 와서는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옛날에는 사부(士夫)가 모두 금군에 들어왔는데 지금의 훈장(訓將)이 그들입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금군들 사기가 날로 꺾이고 있으니 사부로 충원하시기 바랍니다.” 하여, 선왕이 그대로 따르시면서 묘당에 명하여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천으로 취재된 출신 40명과 부장(部將)으로 취재된 출신 또는 수문장(守門將)으로 취재된 출신 각각 15명씩 하여 도합 70명을 7개 번으로 배부하고, 또 당상군관(堂上軍官) 10명, 금위영 초관(禁衛營哨官) 5명, 교련관(敎鍊官) 3명을 금군 중에서 취재된 자로 차출하여 임명하게 하고는 이어 금군 구전식(禁軍口傳式)을 정했었다. 금군(禁軍) 모양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내가 정유년에, 내금위(內禁衛) 1개 번을 선천(宣薦)의 자리로 정하면서 선천 무관 중의 한산(閒散) 및 전직이 참하(參下)인 출신 또는 한량(閒良)에서 취재(取才)하여 입속(入屬)하도록 하고, 처음 출사(出仕)한 자의 천전(遷轉) 기간은 6개월로 했으며, 금군을 거치지 아니한 자는 자격을 주지 않았다. 선전관(宣傳官), 내승(內乘), 비변랑(備邊郞), 참군(參軍), 권관(權管) 및 부장(部將), 수문장(守門將) 그리고 각 군문의 초관(哨官)들은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한 자리를 놓고 특별 취재하여 거기에 합격된 자를 임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유년에는 용기(龍旗), 표기(標旗), 봉지(奉持)를 15명으로 정하여 7개 번에 나누어 배속시키고, 또 병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의 말에 따라 금군 350명을 미리 차출하고 겨울철 3개월 치로 받은 무명베 1400필을 마부(馬夫)의 계미(契米)와 바꿔서 그들 급료를 주게 했다. 신해년에는 금군 1개 번을 줄였고, 을묘년에는 내삼청(內三廳)에 명하여 참하 제도(參下制度)를 다시 복원하고 장용위(壯勇衛)에다 붙이도록 했으며, 금군의 녹과(祿窠)는 실직(實職)으로 하고, 내삼청의 녹과는 다 겸직으로 하도록 했다.
국초에는 서울에 기병(騎兵) 1천 호(戶)를 두고 호마다 삼보(三保)를 두었는데, 보는 시골에 있지만 보와 호에서 각각 베 두 필을 받아서 그것으로 고립(雇立)의 밑천으로 삼았다. 그후 숙종(肅宗) 때 병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인원을 5백 명으로 줄였고, 선왕 때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베를 또 한 필로 줄였으며, 기미년에 와서는 서울의 기병을 없애 버렸다. 병조(兵曹)에서 육도(六道)에다 기병과 보병을 둔 것은 그 역사가 오래인데, 대체로 번(番)을 징집해서는 위소(衛所)에다 나누어 예속시키고, 베는 받아서 고립의 값으로 썼던 것이다. 기병(騎兵)이 1만 6049호인데 3보(保)까지 아울러서 1개 호로 친 것이고, 보병(步兵)은 1만 2411호인데 여기서는 2보(保)를 아울러 1개 호로 친 것이다. 그리고 기병 1500명을 6개 번으로 나누어 1개 번의 각 250명이 2개월씩 근무하고 교체하는 것으로 하였다. 선왕 을해년에는 또 금위영을 나누어 오영(五營)의 제도처럼 만들고 병조 판서가 대중군(大中軍)이 되어 그를 다 통솔하도록 했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것은 《병장속도설(兵將續圖說)》에 나와 있다. 이것이 바로 병조 용호영(兵曹龍虎營)의 제도인 것이다.
선조 때 왜란을 겨우 평정하고는,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70여 명을 모집하여 절장(浙將) 낙상지(駱尙志) 휘하에 있는 장육삼(張六三) 등에게서 창ㆍ검술과 낭선창[狼筅] 쓰는 법 등을 익히게 하여 드디어 도감(都監)을 두어 재상 윤두수(尹斗壽)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했다가 곧 또 유성룡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수천 명을 더 모집하여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을 두어 영도하게 하고, 또 마군(馬軍) 2초(哨), 보군(步軍) 25초를 편성하여 이덕형(李德馨)을 병조 판서로 하고 도감의 일까지 관리하도록 했으며, 조경(趙儆)을 대장(大將)으로, 한교(韓嶠)를 낭(郞)으로 삼았다. 그리고 삼수(三手) 교련법은 동정유격(東征遊擊) 허국위(許國威)에게 물어서 부(部)로 나누어 연습시켜 군제를 모두 절병(浙兵) 제도를 모방했다. 그리고 유격(遊擊) 호대수(胡大受)가 직접 나와서 교습을 시켰다. 뒤따라 삼수량(三手糧), 포보(砲保), 군향보(軍餉保)의 제도를 두어 미포(米布)를 거두어 군대 양성에 필요한 수요에 충당하고, 6개 도에 명하여 매 식년(式年)마다 용사(勇士) 190명씩을 뽑아 올리게 하여 이름을 승호(陞戶)라고 하였다. 그후 인조(仁祖) 때는 마군 3초와 보군 5초를 더 뽑았고, 효종 때는 마군 1초와 보군 전부(前部) 10초를 더 뽑았다. 현종 때는 대장 유혁연(柳赫然)의 청에 의해 전부(前部) 10초를 없애고 그 대신 경기민을 뽑아 별대(別隊)로 4부(部)에 1백 초를 신설하여 10초씩 돌아가며 상번(上番)하도록 했다가, 숙종 때 와서는 또 별대와 정초청(精抄廳)을 없애고 또 중부(中部) 10초까지도 없애고는 따로 금위영(禁衛營)이라는 것을 두었다. 그리고 남은 병력으로는 중사(中司) 6초와 난후(攔後) 1초를 편성했었다.
인조 때는 남한산성에서 무과(武科)를 보이면서 훈국(訓局)과 어영(御營) 및 경기 각군(各郡)의 군병들이 호가(扈駕)와 성 지키기에 노고했다 하여 그중에서 시취(試取)한 병력으로 7개 국(局)을 편성하고, 그들을 금중(禁中)에다 분속 배치하고는 이름하여 국출신(局出身) 혹은 무용청(武勇廳)이라고 하였다. 효종 때 와서 3개 국을 줄이고, 현종 때 또 1개 국을 줄였다. 숙종 때는 훈국의 포수(砲手)로서 만과(萬科)를 치른 자를 골라 편성하고 1개 국에 50명을 정원으로 했으며, 별장(別將) 3명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통솔하게 했었다.
선왕 무신년에는 출전했던 마보군(馬步軍)으로서 무과에 오른 자 1백 명을 뽑아 별기대(別騎隊)를 만들었고, 을유년에는 화포(火砲)의 매 자리마다 3명씩으로 편성하는 법을 따라 26개 초 및 표하군(標下軍) 중에서 1백 명을 골라 별파진(別破陣)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훈련도감(訓鍊都監) 제도가 된 것이다.
숙종 때는 금위영(禁衛營)을 두었는데, 그보다 앞서 총융청(摠戎廳) 속오군(束伍軍) 중에 정초군(精抄軍)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인조 때는 또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이 기병(騎兵) 중에서 날쌔고 용감한 자들을 골라 훈국에다 소속시켰으며, 현종 때는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鍊兵實紀)》 등을 올려 정초군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그것을 병조 판서가 관리하도록 했다. 그후로 홍중보(洪重普)와 김만기(金萬基)가 병조 판서를 지내면서 더욱 손질을 가하여 비로소 완전한 국(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이름하여 정초청(精抄廳)이라고 했다.
숙종 때는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胄)가, 훈국에서 정초군 25개 초(哨)와 별대(別隊) 1백 초를 뽑아내어 금위영(禁衛營)을 둘 것을 청하고, 또 중부(中部)에서 707명을 뽑아 서울의 표하군(標下軍)으로 삼고는 병조 판서가 대장(大將)을 겸임하면서 그들을 영솔할 것도 건의했다. 숙종 10년에는 별파진(別破陣) 150명을 두었고, 15년에는 향군(鄕軍)이 있는 읍의 수령(守令)이 파총(把摠)을 겸임하고 대신 영장(營將)이 관리하던 제도를 없앴으며, 보군(步軍)을 25개 번으로 편성하여 돌아가면서 번을 들되 두 달에 한 번씩 바꾸게 하였다. 그리고 거둥 때면 앞뒤의 창군(槍軍)을 시위(侍衛)에서 뽑았고, 29년에 와서는 군의 정원 수를 줄였다.
선왕 무신년에는 출전했던 장사로서 무과에 오른 자들을 골라 요과(料窠) 32개 자리를 별도로 두고 그것을 금영(禁營)에다 소속시키고는 별기위(別騎衛)를 삼았으며, 22년에는 병조 판서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융무(戎務)가 점점 소홀해진다 하여 판서가 대장을 예겸(例兼)하는 제도를 없애고 대장을 별도로 두었다. 그러다가 계축년에 와서 내가 창검군(槍劒軍)을 장용영(壯勇營)으로 옮겼는데, 그것이 금위영(禁衛營) 제도가 된 것이다. 인조 때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송경(松京)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군사 260여 명을 모집하여 그중에서 용감하고 건장한 자들을 골라 그들에게 화포(火砲)를 가르치고 이름하여 어영군(御營軍)이라고 하고는 호위를 맡게 하였다. 이어 어영(御營)을 만들어 조존성(趙存性)을 부장으로, 전대방(田大方)을 참모관(參謀官)으로 삼았다. 그리고 수를 더 모집했었는데, 2년에 이괄(李适)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친정(親征)을 하려면서 김신국(金藎國)과 유순익(柳舜翼)을 어영찬획사(御營贊畫使)로 삼고, 최내길(崔來吉)을 찬리사(贊理使)로, 한교(韓嶠)를 호위부장(護衛副將)으로 삼아 연평군 휘하에다 소속시켰다. 그리고 또 공주로 호가(扈駕)할 때는 그 근방 각군의 포수를 업으로 하는 산민(山民)들을 뽑아 총융청(摠戎廳)에다 소속시켰다. 5년에는 다시 어영을 두고 이서(李曙)를 제조(提調)로, 구인후(具仁垕)를 대장으로 삼아 그들 교련을 전담하게 했다. 효종 때는 이완(李浣)을 대장으로 삼고 군영 제도를 비로소 완비했으며, 보(保)를 정해 베를 거두고 어영청(御營廳)이라고 칭했는데, 부대별로 별중초(別中哨), 별삼사(別三司)라는 명칭이 있었다. 숙종 때는 기구를 1영(營) 5부(部)로 고치고 금영처럼 보군(步軍)들이 번 들게 했으며, 인조 때는 또 사냥하는 포수들의 남은 인원과 항복한 왜구의 자손들을 거기에 예속시켜 그들을 별초무사(別抄武士)라고 하였다. 효종 때는 60명으로 증원했다가 뒤에 8명을 줄여 가전(駕前)에다 소속시키고는 그를 일러 가전별초(駕前別抄)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영청 제도가 있게 된 것이다.
인조 때는 또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대장 이서(李曙)를 명해 도첩(度帖)으로 중들을 관리하고 지역을 나누어 부공(賦功)을 하게 하면서 행궁(行宮)까지 설치했다가 병인년에 수어사(守禦使)를 두어 산성 관리와 함께 기좌(畿左) 각군의 군병까지 겸하여 영솔하도록 했었다. 정축년 이후로는 대신(大臣)을 상사(上使)로 하고, 또 부사(副使)를 두어 전부 서울에서 관리하게 했다가 효종 임진년에 와서는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부사를 겸임토록 했었다. 숙종 계해년에 조정 논의가, 광주(廣州)가 이미 수어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다 또 부윤(府尹)을 두면 갑병(甲兵)과 재부(財賦) 등의 관리가 둘로 나뉘어진다 하여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ㆍ이상진(李尙眞)의 건의로 경청(京廳)을 옮기고 유수(留守)를 두기로 고쳤다. 경오년에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의 말에 의해 다시 그만두었다.
선왕 경오년에는 또 산성을 진무하도록 명하면서 경기 삼진(三鎭)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임하도록 하고, 기묘년에는 수어청을 오영(五營) 속에다 편입시키고 전영(前營)으로 만들어 유수(留守)의 임무를 맡게 했는데, 그후 그 자리가 너무 자주 갈리는 바람에 백성들이 그 피해를 입는다 하여 총영청의 예대로 유수니 절도니 하는 호칭을 없애고, 종전대로 다시 경청(京廳)에 머물면서 주관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내가 왕위를 이어받고 나서 수어(守禦)와 총영(摠營)을 합병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없앨 것인지에 대해 조정의 의견을 물었고, 갑인년에 와서 수어와 경청을 혁파하고 유수 제도로 하면서 전영(前營)까지도 혁파할 것인지를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종전대로 전영(前營) 칭호를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그전 출진(出鎭) 때는 절반은 서울, 절반은 시골이었는데, 서울에는 영문(營門)도 있고 군교(軍校)도 있으므로 5개 영의 축에 들더라도 안 될 것이 없었지만, 이번에 그것을 고치면서 경영(京營)의 폐단이 된다 하여 경영 호칭을 없애 버리게 되면 이른바 오영(五營)이라는 칭호가 그야말로 붙일 곳이 없게 되고 만다. 지금 꼭 여러 사람들 논의대로 하기로 들면, 진무영(鎭撫營) 관리도 당연히 조련을 합열(合閱)에 끼워 해야 하므로 그리되면 칠영(七營) 제도가 되어 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오행(五行)보다는 조금 많고, 팔괘(八卦)보다는 작고 하여 그야말로 여기에도 저기에도 맞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로 《병장속도설(兵將續圖說)》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병조 판서는 대중군(大中軍)으로서 삼군(三軍)의 사령(司令) 임무를 띄고 있는 몸인데, 그의 관할 아래 있는 중영장(中營將)과 훈련대장(訓鍊大將)이 허리춤에다 삼군 사명기(三軍司命旗)를 꽂고 있고, 기껏 수기장(手旗將)이 대중군의 절제를 받고 있으니, 만약 공죄(功罪)를 가려야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그것이 대단히 불합리하고 모순된 일이다. 《병장속도설》이 인행(印行)된 초기에는 거둥 때 동원될 군대의 동원 표신(標信)을 대중군에게 내리면 대중군이 영전(令箭)으로 수가대장(隨駕大將)에게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한 장신(將臣)이 그 분부를 따르지 않았다가 준엄한 견책을 당한 일이 있은 후로 그 영전을 곧 환수하도록 명하여, 그후로는 대중군이 영전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병장속도설》의 제도가 아마 선왕 때 이미 고쳐졌던 모양이다.
우리 선대왕께서 세조의 《어제오위진법(御製五衛陣法)》에 서(序)를 써서 중외에 반포하시면서 하교하시기를, “경군문(京軍門)이 설치되면서 병(兵)과 농(農)이 둘로 갈라졌는데, 오위(五衛)의 절제(節制)와 약속을 경군문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식자들이 오위(五衛)를 부활시키고자 한 지 오래인데, 지금 중간(重刊)하여 널리 반포하는 것은 그 제도를 만세에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뜻이다.” 하셨으니, 아, 너무나 훌륭하도다. 후세 사왕(嗣王)들이 두고두고 이어 나아가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오영(五營)의 제도를 고치는 것은 바로 경장(更張)이 아닌 소술(紹述)인 것이다. 그리하여 수어청 전영(守禦廳前營)이란 칭호를 없애라고 명했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수어청 제도가 된 것이다.
인조 때는 완풍군(完豐君) 이서(李曙)로 하여금 남양(南陽), 수원(水原), 장단(長湍) 세 진(鎭)의 군무를 절제하도록 명하고 이름을 총융청(摠戎廳)이라 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관하에 예속시켰다가 곧 체부(體府)는 혁파하고 총융사(摠戎使)라는 이름만 남겨 두었다. 17년에 와서 총융사 구굉(具宏)이 경기 관내의 속오(束伍)에서 용감한 정병 1천여 명을 골라 장초군(壯抄軍)이라는 이름으로 훈국(訓局)에다 소속시켰던 것을 효종 때 다시 총융사 소속으로 하였고, 현종 때는 경기 관찰사 이하 모두가 그의 절제를 받도록 하였다. 11년에는 아병(牙兵)을 더 두고 별도로 또 파총초관(把摠哨官)을 두었으며, 숙종 때에 다시 체부를 두고 허적(許積)을 도체찰사로, 김석주(金錫胄)를 부사(副使)로 삼았다가 얼마 안 가서 혁파했다. 4년에는 체부를 다시 두고 허적을 도체찰사, 이원정(李元禎)을 부사로 삼았다가 6년에 와서 다시 그 제도를 없앴다. 12년에는 총융사 구일(具鎰)이, 총융사가 전관(專管)하는 기보병(畿輔兵)을 남한산성과 강화도로 나누어 배속시켰다가 군대 모양이 제대로 되지 않자 장초군과 아병 이외에 또 둔아병(屯牙兵)과 보인(保人) 그리고 속오군의 남은 인원까지 모두 동원하여 합해서 삼부(三部)로 만들 것을 건의했다. 31년에는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경리청(經理廳)을 두었다. 선왕 때에 와서는 또 경리청을 없애고 그것을 총융사에게 배속시켜 북한산에 가 있으면서 산성 쌓는 일을 관리하도록 했고, 26년에는 경기 병마절도사(京畿兵馬節度使)까지 겸임하도록 하고, 36년에는 절도(節度)라는 이름을 뺐다. 40년에 와서야 비로소 군영의 오부 제도(五部制度)와 수어청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총융청을 없애고 별도로 단영(單營)을 만들어 3개 영이 서로 협조하도록 하는 체제를 취했다. 이것이 바로 총융청 제도였던 것이다.
선왕 경오년에 균역청(均役廳)을 두고 병조(兵曹)의 기병과 보병 8개 번(番)이 16개월 만에 한 번씩 돌아가서 4년에 걸쳐 세 번 돌아가던 것을 6개 번으로 만들어 12개월 만에 한 번씩 돌아가는 것으로 하고, 그 정원 수를 줄였다. 보(保)는 1호(戶)마다 보가 셋인데, 거기에 세 보를 더 정하여 보포(保布) 6필의 수에 준하게 하였다. 별기병(別騎兵)도 기병 제도와 똑같이 6개 번으로 만들었다. 훈국의 포보(砲保)는 3만 70에서 4백을 감하고, 유황(硫黃)과 취철(吹鐵) 등의 군대도 570을 감하였다. 금영 별파진(禁營別破陣) 보(保)도 9백에서 120을 감하고, 유황과 취철 등의 군대도 351을 감하고, 미보(米保) 2만 9628을 포보(布保)로 바꾸었다. 어영 별파진(御營別破陳)의 보(保)도 9백에서 120을 감했으며, 유황과 취철 등의 군대도 1415를 감하고, 미보 2만 8979를 포보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각영에 바치는 보포의 필 수를 감해 준 시초가 된 것이다.
내가 임인년에 와서, 숙종 을축년에 무예별감(武藝別監) 출신(出身) 30인을 훈련도감국(訓鍊都監局) 출신 3개 번과 교차시킨 선례를 따라 무예 출신 및 무예별감의 장교(將校)를 지낸 경력이 있는 자 30인을 골라 뽑아 번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랑(南廊)에 입직하도록 하고, 을사년에는 그 명칭을 장용위(壯勇衛)로 정함과 동시에 정원도 20인을 더 늘렸다. 그리고 척씨(戚氏)의 남군 제도(南軍制度)를 모방하여 5개 사(司)에 25개 초(哨)를 두었는데, 중사(中司) 5개 초는 서울에 있게 하고, 전사(前司) 5개 초는 수원(水原)에, 좌사(左司) 5개 초는 양성(陽城), 용인(龍仁), 광주(廣州)에, 우사(右司) 5개 초는 고양(高陽), 파주(坡州), 안산(安山), 과천(果川), 시흥(始興)에, 후사(後司) 5개 초는 지평(砥平), 양근(楊根), 가평(加平), 양주(楊州), 장단(長湍)에 각각 있게 했다.
신해년에는 옛 금려 제도(禁旅制度)를 부활시켜 정원을 6백 인으로 하고, 거기에서 1개 번 50인을 덜어 내어 장용위 50인으로 옮기고 각번에다 붙여 궐원이 생겼을 경우 보충을 하게 했다. 그리고 이어 정원 이외의 내금위(內禁衛) 규정을 준용하여 정원 외에 장용위 10인을 더 두고 그 자리는 사부(士夫)에서 뽑았다. 그리고 또 선기대(善騎隊) 3개 초를 두고 훈국의 경기도 승호군(陞戶軍) 20명을 그리로 옮겨 배치하고, 기병과 보병으로 표하군(標下軍)을 5152명으로 하여 처음으로 병조(兵曹)의 별부료 병방(別付料兵房)의 규정을 적용하여 병방이 모든 군무를 맡게 하고 이름을 장용영(壯勇營)이라고 했는데, 그 영을 둔 목적은 남 보기 좋으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호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딴 뜻이 또 있었다. 즉 군대가 있으면 군량미도 있어야 하므로 군문(軍門) 하나를 두게 되면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기 마련이다. 훈국이 생기자 삼수(三手)의 세(稅)로 베 두 필씩을 징수했고, 금위영ㆍ어영청ㆍ수어청ㆍ총융청을 두게 되자 보미(保米)와 보포(保布)를 육도(六道)가 거의 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또 영 하나를 더 설치하면서 다른 각영들이 하는 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내가 몇십 년을 두고 먼 안목으로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써 온 본의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탕전(內帑錢)으로 각도의 곡물을 사서 그곳에다 두고, 백성들에게서 많은 조세를 받아오던 내수사(內需司)의 토지에 대해서도 그 요부(徭賦)를 경감하고 양서(兩西)에다는 그것으로 둔전(屯田)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밖의 더 보태진 진상품이거나 상격(賞格)에 쓰이는 것들, 또는 정원 이외의 남아도는 액례(掖隷), 격식에 틀린 군제(軍制), 그리고 또 군대들에게 주어야 할 미곡이 선혜청에 저장되어 있거나 내수사가 지급해야 할 대금이 탁지부(度支部)에서 나오는 것들을 혹은 바로잡기도 하고, 혹은 그쪽으로 전속시키기도 했다. 이어 담당자에게 그러한 종류들을 미루어 다 찾아보게 하여, 분급량(分給量)이 많아 백성들에게 피해가 있을 때는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힘을 펴게도 해 주고, 유치량(留置量)이 많은데 흉년이 들었을 때는 더 주어서 식량이 넉넉하도록 해 주기도 한다. 공정한 값으로 그것을 사 가는 경우도 있고, 일정한 값을 주고서 가져오는 경우도 있어 토지에 조세를 더 받지 않고, 백성들에게 부담을 더 주지 않아도 재용이 늘 남아돌아 그것을 별도로 쌓아 두고 있는 것이다. 뒤에 언젠가는 나의 그러한 점을 알 때가 있을 것이다.
기유년에는 우리 현륭원(顯隆園)을 수원(水原)으로 모셨고, 계축년에는 수원의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켰으며, 장용외영(壯勇外營)을 두고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장용 병방(壯勇兵房)을 합쳐서 장용사(壯勇使)라 칭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청(扈衛廳)까지 합쳐서 소속시켰다. 그리고 또 일찍이 호혜 당상(戶惠堂上)을 지낸 자를 제조(提調)로 임명하여 군향(軍餉)을 맡게 하고, 원침(園寢)을 위해서 외영(外營)을 두고, 또 외영을 위하여 내영(內營)까지 두었는데, 그만하면 일을 미리미리 정해 두면 뒤에 차질이 없다고 한 그 말대로 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수원의 마보 군제(馬步軍制)는 대략 훈국의 그것을 모방한 것으로 평소 외도감(外都監)으로 칭하던 것을 승격시켜 장용외영으로 하였는데, 그 체제로 말하면 더욱 유별한 데가 있는 것이다. 건국 초기에 영안도(永安道)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칭하던 전례에 따라 친군위 306인을 두고 제주도 목마(牧馬)를 복정(卜定)하여 훈국에서 말 나누어 주는 법[訓局給馬法]에 비추어 1인당 1필씩을 주고 있으나, 해마다 보급되는 말의 수는 30, 40필에 불과하다. 별효사(別驍士)를 없애고 별군관(別軍官)을 두었으며, 보병 1백 명으로 삼사(三司)의 제도를 만들어 13개 초를 두고 보병과 기병 모두가 매년 10월에서부터 이듬해 2월까지 윤번제로 행궁(行宮) 방수(防戍)에 임하도록 했고, 무오년에는 과천, 시흥, 진위, 용인, 안산 5개 읍을 외영에다 소속시켰으며, 각영(各營) 각사(各司)에서 관리하던 군졸들도 모두 외영 소속으로 하였다. 그리고 금어(禁御)에 상번(上番)할 때는 경기내 각읍에 있는 금위군(禁衛軍)을 어영(御營) 5개 읍의 군대 수에 준해서 어영에다 이속시키고, 금위영의 향군(鄕軍)을 매 초마다 3명씩 줄여서 그 대행의 수를 채우게 하였다. 그리고 또 외영아(外營兒)를 없애고 별무사(別武士) 1천 명의 수미군(收米軍)에게서 받던 쌀 6두(斗) 또는 4두인 것을 모두 1두씩 감하기도 했다. 5개 읍의 수령을 위장(衛將)이라 칭하고 각기 성 지키는 데 예속시켰는데, 용인은 창룡위(蒼龍衛), 진위는 팔달위(八達衛), 안산은 화서위(華西衛), 시흥은 장안위(長安衛), 과천은 통구유병장(通衢游兵將)이라고 했으며, 그 밖에 또 신풍위(新豐衛)와 장락위(長樂衛)를 두었다.
외영(外營)의 13개 초는 5개 읍과 상통하게 하고, 사초(司哨)의 제도를 고쳐 5개 위(衛)에 25개 부(部)로 만들었으며, 성정군(城丁軍) 및 사문위(四門衛)와 신풍위(新豐衛)도 5개 위의 제도를 적용했다. 왜냐면 오위(五衛)의 제도가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兵)과 농(農)이 하나가 되는 것도 마치 강(綱)이 있고 목(目)이 있는 것과 같아 평상시에는 도총관과 부총관이 절제를 맡고, 일단 유사시는 장수에게 출사(出師)를 명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왕이 직접 간열(簡閱)할 때라도 좌우에다 상대장(廂大將)을 별도로 두어 5개 위의 군대를 각기 소속별로 영솔하도록 하고, 도총관은 단(壇)에 올라서 시위(侍衛)하는 것이다. 그 제도는 우리의 건국 초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주(周) 나라 때 관직 제도를 만들고 장수를 임명하고 할 때부터 그 근본 취지는 이미 똑같았던 것이다. 다만 위(衛)와 부(部) 제도가 없어지고 군영(軍營)이 설치되면서부터 옛 제도가 씻은듯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선 외영(外營)에서부터 옛날의 위부 제도(衛部制度)를 다시 수명(修明)하기로 한 것인데, 거기에는 선대에 하시던 일을 계승하고 옛것을 배우자는 뜻이 담겨져 있고, 또 한편으로는 대의(大義)의 일단을 밝혀 두자는 뜻도 있어 이번에 한 일이 결코 무단히 한 일은 아닌 것이다. 보포와 보미를 견감(蠲減)한 곳은 한대(漢代)로 말하면 풍패(豐沛)의 땅이고, 병위(兵衛)의 수호를 강화한 곳은 명(明) 나라로 말하면 봉양(鳳陽)인 것이다. 모든 신하들 중에 나의 그러한 뜻을 이해 못할 자 누가 있겠는가.
5개 읍이 지리적으로는 더없이 유리한 곳이지만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은 인화(人和)이다. 화성(華城) 주위의 1백만 백성들은 모두 기쁜 소식을 서로 알리고 서로 앞 다투어 나와서 내가 옛날부터 뭇 백성을 아끼고 돌보아 왔던 성덕지선(盛德至善)을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5개 읍에 대해 납포군(納布軍) 490명, 속오군(束伍軍) 510명, 여정군(餘丁軍) 228명의 수를 정원에서 특감(特減)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옛 원(園)은 바로 28년 동안이나 궁검(弓劍)을 봉안했던 곳이기에 차마 버려둘 수가 없어서 옛날 파주(坡州)의 장릉(長陵)에 했던 것을 전례로 하여 위전(位田)은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고, 거기에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진 이름을 배봉진(拜峯鎭)이라고 하고 장영(壯營) 소속으로 했으며, 별후사파총(別後司把摠)을 만들어 아병(牙兵) 2개 초를 두었다. 또 노량진(鷺梁津)은 원 행차 때 첫 번째로 주필(駐蹕)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 역시 별장(別將)을 장영으로 이속시키고 군 편제도 배봉진같이 했으며 별아병장(別牙兵將)을 두었다. 관서(關西)는 또 옛날 성진(城鎭)으로서 관방(關防)의 중요 지대인데, 조폐(凋弊)가 갈수록 심해서 총융청 덕지둔(德池屯)의 예대로 장영을 만들고 그곳의 장이 자기 자의로 관원을 추천 임명하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4개 읍의 둔전을 관리하고, 5개 초에는 군교(軍校)를 두게 하였으며, 이름하여 별중사파총(別中司把摠)이라고 하였다. 이상이 내가 장용영, 내영(內營) 그리고 외영(外營)을 설치한 뜻이다.
공(公)이 선왕조 시절에 융무(戎務)에 숙달한 솜씨로 5개 영을 두루 편성했는데, 제아무리 군대에서 늙은 무수(武帥)라고 해도 감히 그 앞에서는 맞대결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가령 병영과 금위영을 분리 설치한 것이라든지, 경리청(經理廳)과 총융청(摠戎廳)을 합친 것이라든지, 수어청(守禦廳) 출입이라든지 어느 것 하나 공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후 계책을 짜는 자가 공의 주고(奏藁)를 한 번만 보면 공의 재능과 역량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북 지방의 무사(武士)들이 청(廳)을 설치하고 활쏘기 시험을 보이는 것을 서북별부료(西北別付料)라고 했는데, 그것은 북쪽의 육진(六鎭)과 서쪽 7개 읍의 무사들을 위로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기타 내지나 변지의 각읍에서도 뽑아 올릴 것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한쪽이 소외당하는 기분이 있기 때문에 선왕 때 남북을 합치자는 논의가 있었다가 결국 시끄러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하여 특명으로 혁파하고 말았던 것을 경진년에 와서 다시 합치기로 하였다. 그때 공이 왕명으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올렸는데, 서북에서 각각 40인씩을 뽑아 그 절반은 출신 한량(出身閒良) 자리를 주고 나머지 절반 20인은 양료(糧料)를 주되 활쏘기 시험을 보여서 부료(付料)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을 내가 기유년에 서로의 공평을 기하는 뜻에서 서쪽의 청남(淸南)과 북쪽의 남관(南關)에다 각각 40인씩을 더 늘려서 활쏘기 시험을 보여 부료(付料)하는 데 이상과 똑같은 예를 적용하도록 했었는데, 서북별부료 제도는 그래서 있게 된 것이다.
금위영과 어영청을 둔 뒤에 또 별효위(別驍衛)와 별마대(別馬隊) 각각 750명씩을 해서(海西)에 두고 그것을 금위와 어영 두 영에 분속시켜 매월 50명씩 돌려가면서 상번(上番)하게 하였는데, 해서 각영에 별무사 도시(別武士都試)의 제도를 창설한 후로는 건장한 자들이 모두 대위(隊衛)에는 들어가지 않고 무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각읍에서는 그 수를 채우기 위해 부득이 보군(保軍)을 이용했다. 선왕 을축년에 해서 심리사(海西審理使) 남태량(南泰良)의 말에 따라 그것을 숙위기사(宿衛騎士)로 개칭하고 별무사 중에서 문벌과 신분 등을 고려해서 골라 뽑아 승차(陞差)를 시키고, 별도로 뽑은 금군(禁軍)을 대우하는 예대로 장교와 동등하게 철릭(貼裏)을 입게 했으며, 매 상번 때마다 두 영의 대장이 도시(都試)를 보여서 수석을 한 자는 곧바로 무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했다. 그러다가 경오년에 와서는 상번하기가 힘들고 폐단이 있다 하여 숙위기사들을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소속시키고, 친히 교관(郊館)에 나아가 출신자 3백 인을 시험을 거쳐 선발하여 50인을 1개 번으로 하고 각기 3개 번으로 나누어 두 영에 소속시켰는데, 그때 공이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그 일을 주관했다. 그런데 내가 무술년에, 두 영의 기사(騎士) 3개 번 중에 1개 번은 수문장(守門將) 또는 부장(部將) 후보로 추천된 사람을 쓰고, 그들의 근무 연한과 고과에 따라 도목정사 때 수문장이나 부장으로 임명하며 병조에서 취재(取才)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했는데, 두 영에 경기사(京騎士)의 제도를 둔 것도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밖에 각도의 수륙군(水陸軍)의 제도는 혹은 위부(衛部), 혹은 영사(營司), 혹은 방어(防禦), 혹은 진관(鎭管), 혹은 독진(獨鎭), 혹은 방수(防守) 등으로 그 제도가 일정하지 않은데 경기, 강원, 함경, 평안 4개 도에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은 인조 때 처음 시작하였고, 충청, 전라, 경상 3개 도에는 효종 때 처음으로 영장(營將)을 두었고, 함경도 남북관(南北關)에 친기위(親騎衛) 3천 인을 둔 것은 숙종 때 시작하였고, 각도의 이노(吏奴)로 부대 편성을 한 것은 숙종 36년에 시작하였고, 관서 지방의 병영에 난후사(攔後士) 2천 인을 둔 것은 선왕 때 시작하였고, 6개 도에 선무 군관(選武軍官)을 둔 것은 선왕 26년에 시작하였고, 순아병(巡牙兵) 5개 초를 경기 감영에 둔 것은 선왕 42년에 시작하였다.
각도의 아동초관(兒童哨官)과 수어청의 자질군(子姪軍)의 제도를 없앤 것, 그리고 강화도의 무학(武學)을 무려(武旅)로 칭호를 바꾼 것은 내가 즉위한 지 3년 후인 기해년에 처음 실시한 일이다. 동래부의 대변 군관(待變軍官)과 사부(射夫) 등 5백 명을 성정군(城丁軍)으로 한 것은 경자년에 시작하였고, 충순위(忠順衛)ㆍ충찬위(忠贊衛)ㆍ충익위(忠翊衛)에 아번(兒番)으로 베를 바쳐 온 911인분을 모두 탕감한 일, 제주도 아병(牙兵) 4개 초에 대해 수미(收米)의 제도를 혁파하고 윤번(輪番)의 법을 명시한 일은 임인년에 시작하였다. 경기 감영에 별군관(別軍官) 50명을 둔 것은 기유년에 시작하였고, 관서 지방의 노량삼수(奴良三手)에서 ‘노량’ 두 글자를 없애고 그냥 ‘삼수’라고만 칭하여 누구나 들어오도록 길을 열어 준 것과 광주(廣州) 좌우부(左右府)의 아병 별장(牙兵別將)을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정한 일은 무오년에 시작했던 일들이다. 이상이 각도의 개괄적인 군사 제도이지만 공이 만든 ‘서북사정절목(西北査正節目)’ 같은 것이야말로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치밀한 계획서로서 옛 분들이 일하는 데 있어 그렇게까지 주밀했던 점을 나로서는 세 번 되풀이하며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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