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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高句麗 兵器에 대한 연구

 이름 : 

(2006-10-23 10:54:20, 6942회 읽음)

高句麗 兵器에 대한 연구
                                      金性泰(畿甸文化財硏究院 硏究室長)
            

                                 Ⅰ. 머리말
  고구려가 삼국 중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5세기 대 고구려는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그리고 이런 군사력은 고구려인의 호전성과 상무정신, 淸野守城으로 대표되는 군사전술, 강력한 기마군단의 운용 등을 밑바탕으로 하여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고구려 군사력의 또 다른 축인 병기체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우선, 고구려의 군사력을 뒷받침하였던 병기체제의 기본적인 성격은 무엇이며,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ㆍ발전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주변국가와 교류관계를 살피고자 중국의 병기체제를 수용해 가는 과정을 검토하고, 그들의 군사문화가 신라ㆍ백제ㆍ가야의 병기발전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기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고구려 병기가 갖는 병기사적 특성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시기의 구분은 형성기, 발전기, 확립기로 시기를 나눈 후, 형성기와 발전기는 전기와 후기로 小期를 나누었다. 이런 시기구분은 신라ㆍ가야의 병기체제의 변화단계를 준용한 것으로 형성기 전기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후 2세기 전엽까지, 그 후기는 기원 후 2세기 중엽부터 3세기 중엽까지로 나누었다. 발전기 전기는 낙랑의 세력약화로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저하되면서, 고구려와 신라ㆍ백제가 직ㆍ간접적으로 접촉을 시작하는 3세기 후엽부터 4세기 중엽까지로 보았다. 그리고, 그 후기는 고구려의 병기체제가 신라ㆍ가야로 본격적으로 이식되는 4세기 후엽에서 6세기 전엽까지로 보았다. 확립기는 삼국이 공수성용병기를 적국적으로 개발하고 국운을 건 국가전을 치루는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로 삼았다.
병기의 분류는 遠射兵器와 接戰兵器로 크게 구분한 후, 접전병기는 다시 장병기와 단병기로 구분하여, 원사병기를 弩와 弓. 장병기를 戟과    , 단병기를 刀劍과 戰斧로 세분하였다.
한편, 이 글에서는 안악 3호분에 그려진 병기들을 중국계 병기로 파악하고, 고구려 병기자료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병기자체만 볼 때, 위진시기의 문헌기록에서 확인되는 刀부대가 묘사되어 있고, 중국의 전형적인 병기인 장병기인 戟이 다량으로 확인되는 사실로 미루어, 벽화에 그려진 행렬도는 고구려의 군대룰 묘사한 것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武器와 兵器의 개념을 분명히 하여, 도검ㆍ궁시ㆍ창모ㆍ 마구와 무장ㆍ공수성용 병기 등과 같은 병기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철겸ㆍ깬돌ㆍ농공용 도끼 등과 같은 무기는 연구대상에서 제외하였다.
                             Ⅱ. 병기체제의 발전과정
1. 형성기
1) 전기
현재까지 이 시기의 고구려 병기로는 문헌기록에 검에 관한 기록이 전하고, 실물자료로는 추형촉이 환인지역의 적석총에서 확인될 뿐이다.
  短兵器는 기원후 1세기 전엽까지 劍이 주로 사용하였으나 1세기 중엽부터 刀가 등장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은 일단 문헌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A-1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       己所有斷劒 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三國史記』 卷13, 高句麗本紀 第1, 瑠璃       王 1年條)
    2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三國史記』 卷13, 高句麗本紀 第1,  瑠璃王 28年條)
    3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劒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斬頭 (『三國史記』          卷14, 高句麗本紀 第2, 大武神王 5年條)
    4  乃伏劒而死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 第2, 大武神王 15年條)
    5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大          武神王 15年條)
    6 杜魯藏刀以進王前 王引而坐 於是 拔刀害之(『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慕本王 6         年條)
이들 기록에서 1세기 전엽까지 단병기로는 劍이 대표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유리왕 대에 검에 관한 언급만이 있는 사실뿐만 아니라, 사료 A-3 大武神王 5年條의 기록에서 적어도 紀元後 22年까지 實戰에서 劍이 사용되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劍은 短劍이 아니라 長劍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短劍은 실전용이기보다는 의기적ㆍ벽사적 ㆍ주술적 기능이 크고 非實戰用 때문이다. 또한,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 漢를 비롯하여 夫餘ㆍ 鮮卑 등 북방지역의 短兵器는 長劍이 보편적이었던 반면에 단검은 널리 사용되지 않은 사실도 위의 추측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한편, 위의 기록을 통하여 刀는 1세기 중엽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파악된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 戰場에서의 사용례가 아닌 점으로 미루어, 실전용으로 刀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이 시기의 유적에서 도가 확인된 예가 없는 점으로도 방증된다.
철모는 이 단계부터 이미 長槍인  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보이는 "長矛"의 존재는 장창의 사용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이미 이 단계에 기마전이 성행하고 있었던 사실은 기마용 창인  의 사용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사병기는 錐形鏃이 주로 확인된다. 이런 錐形鏃은 鑄造로 만들어졌고 그 단면이 삼각형 혹은 방형인 점이 다른 화살촉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며, 漢의 전형적인 화살촉이다. 출토유적은 환인 大甸子 石棺墓(三角錐形銅鏃 1, 有翼形銅鏃 1), 大夾板  古墳群(有翼形銅鏃), 五道河子 積石塚(四角錐形鐵鏃 1) 集安 果樹鄕 遺蹟(鐵莖三角錐形銅鏃) 등이다. 현재까지 고구려 早ㆍ初期의 화살촉이 극히 소수밖에 보고되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보면, 형성기 전기의 고구려의 화살촉을 대표하는 형식이었다고 판단된다.
2) 후기
  이 시기의 병기구성은 無環頭大刀와 素環頭大刀로 대표되는 도검류와 함께 유관직기형 장공식 철모, 유엽형 a형ㆍ릉형ㆍ검신형ㆍ착두형의 촉두를 지닌 無頸有莖式 철촉이 조합을 이룬다. 馬具에는 긴 인수를 지닌   가 존재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 시기에 관한 자료 역시 매우 부족한 실정으로 단편적인 자료만 보고되었을 뿐이다.
우선 실물자료로는 集安 下活龍 8호와 20호분에서 출토된 소환두대도, 桓仁縣 高力墓子村 15호분에서 출토된 二葉文環頭大刀, 그리고 同 유적의 19호분에서 출토된 鐵刀와 鐵 가 있다. 이 중에서 高力墓子村 19호분에서 출토된 刀와 철모는 보고서에 사진만이 소개되었을 뿐, 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하활용 M8, 20호분은 모두 무기단적석총으로 한변의 길이가 8∼15m에 달하는 大形의 고분이다. 보고자는 출토된 철기들이 河南 新安 鐵門鎭 漢墓,樂陽燒溝 漢墓 및 河北 滿城 漢墓에서 출토된 철기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출토 토기들이 고구려 초기의 풍격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축조시기는 중국 東漢時期에 해당되며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서 출토된 刀는 2 자루인데, 素環頭大刀이고 크기는 각기 32cm와 46cm로 短刀인 점이 무엇보다도 주목된다. 高力墓子 15호분에서 출토된 二葉文環頭大刀가 출토되었는데 그 형태가 東漢의 전형적인 大刀와 동일한 형태로 남부지방에서는 출토된 적이 없다. 고력묘자촌 19호분에서 출토된 刀는 무환두대도이며, 그 크기는 공반출토된 철모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小刀에 속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통해 장병기는 素環頭大刀와 無環頭大刀가 특징적이며 그 크기가 小刀인 점이 가장 주목된다. 이는 문헌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 紐由가 刀를 食器에 감추었다가 魏나라 장수를 刺擊한 기록을 통하여서도 엿볼 수 있다. 이 기록은 刀의 사용뿐만 아니라, 小刀가 유행하였을 개연성을 보여주며, 이는 실물자료의 현황과도 일치되는 사실이다.
  한편, 鐵 에 관한 실물자료는 고구려지역에서는 高力墓子 19호묘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대표적으로 보고서에 실측도면이 없어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사진을 통하여 볼 때 有關直基形 장공식이 가능성이 크다. 이런 철모는 제원 양평리 A지구 1호분 및 2호분, 제원 도화리 적석총에서도 확인되었다. 이상으로 長兵器는 有關直基形 長 式 鐵 가 확인되나 수량이 부족하여 그 사용의 보편성 여부는 추후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은 궁시에 관한 검토이다. 궁은 이미 주변으로부터 貊弓이라고 하는 좋은 궁이 고구려에서 생산된다고 기록할 정도로 이 단계에 좋은 궁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그 실상은 유물이나 사생자료가 없는 까닭에 알 수는 없다. 철촉은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 대표적이다. 로남리 남파동 주거지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鐵鏃과 銅鏃으로, 동촉은 無頸式이고 단면이 菱形과 이등변삼각형인 것들이다. 철촉은 無莖式과 無頸式으로 대별되며, 無頸式이 일반적이다. 無莖式은 소형으로 a식에 속하는 것이며, 無頸式은 뾰족촉이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넓적촉이다. 뾰족촉은 유엽형에 속하며, 넓적촉은 릉형으로 폭이 3cm 이상이고 단면이 板狀이며, 길이는 6∼7cm 전후이다. 이외에도 鑿頭形鐵鏃이 로남리 남파동 104호분에서 1점이 확인되었다.
마구는 현재까지 환인 고력묘자촌 19호분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이 마구는 양끝에 둥근 環이 있으나 환의 중간에  가 보이지 않으며 원환이 비교적 큰 것으로, 원래는 角形이나 S자형의  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표비는 긴 인수를 갖추고 있다.
2. 발전기
1) 전기
  無環頭大刀ㆍ素環頭大刀로 대표되는 刀劍類, 燕尾有關形 長 式 鐵 와 錫盤附鐵  및 長頸柳葉形ㆍ鑿頭形ㆍ劍身形 등으로 구성된다. 마구는  子의 사용이 가장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甲胄는 騎兵戰에 적합한 札甲이 중심을 이룬다.
刀劍類의 실물자료로는 집안 JYM3296호분에서 출토된 素環頭大刀가 유일하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無環頭大刀와 素環頭大刀와 같은 非裝飾大刀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우선 다른 조합에서 長頸鏃과 大刀가 공반출토되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이 시기의 전후로하여 無環頭大刀와 素環頭大刀가 사용되었던 점도 또 다른 추측의 근거가 된다.
철모는 연미유관형 장공식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部 下段部에 錫盤이 달린 소위 錫盤附鐵 가 존재하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 크기는 30cm 전후이고 鋒部는 狹鋒式이 일반적이다. 삼국시대 철모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고구려ㆍ신라 고분에서만 확인되는 錫盤附鐵 가 공반되는 점이 다른 조합과 비교된다.
철촉은 긴 목이 있는 長頸鏃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점과 함께 고구려 철촉의 전형인 三翼形, 鑿頭形, 그리고 劍身形으로 불리는 短頸柳葉形 a식과 릉형촉이 주로 사용되었다.
甲胄는 집안 集錫公路古墳群에서 확인된 甲片을 통하여 騎馬戰鬪에 적합한 札甲이 일반적인 무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마구에 관한 자료가 없으나, 고구려 지역이 북방 유목민족의 마구문화를 신라ㆍ가야로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신라ㆍ가야의 마구와 비슷한 양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鐵製杏葉,  , 木心鐵板輪 子와 같은 기승용 馬具類를 갖추었을 것으로 일단 추측된다.
2) 후기
  이 단계에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병기관련 유물은 백제, 신라에 비하여 양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또 출토보고된 유물의 경우에도 도면이 게재되지 않거나 遺構와 유리된 채 수습된 예가 많아서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벽화자료와 실물자료를 종합하여 검토해 보고 이전 단계와 이후 단계의 병기 출토 양상을 참고하면, 그 대체적인 성격 파악은 가능하다.
刀劍은 素環頭大刀와 三葉文環頭大刀가 일반적인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方環頭大刀이나 龍鳳文環頭大刀, 三累環頭大刀 등은 출토예가 확인되지 않았다. 無環頭大刀는 출토예가 없지만, 이전 단계에 널리 사용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편적인 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三葉文環頭大刀는 平壤 兵器廠址 유적에서 출토된 1점이 유일하다. 이 刀는 銅地銀裝으로 推定 全長이 94cm이다. 合口式으로 손잡이는 대부분이 결실되었으나 상어가죽으로 싼 흔적이 남아있으며, 柄頭金具는 銅地金裝이며 素文帶가 1대 있다. 銅地金裝의  이 있고 칼집은 전면에 黑漆을 하였다. 銅地金裝의  口金具에 釣手가 돌출되어 있다. 칼집하단에는 銅地金裝의  尾金具가 있으며 筒金具로서 口緣에 한 개의 素文帶가 있다. 이 刀는 고구려에서 확인된 유일한 裝飾大刀인 점, 新羅ㆍ加耶의 대표적인 장식대도인 三葉文環頭大刀의 조형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 把部의 구조가 실용적인 점, 등으로 병기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리고 實用刀로는 素環頭大刀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무장의 기본이 되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실물자료에서 素環頭大刀가 가장 일반적으로 출토되고, 벽화고분에 묘사된 大刀가 모두 素環頭大刀인 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따라서 短兵器의 기본이 素環頭大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刀에는 小形과 中形, 그리고 大形이 있었는데, 소형은 중무장기마병이 비상시를 대비하여 패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 길림성 通溝(集安) 12호분 戰鬪圖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 전투도에는 갑주무사가 적장으로 추정되는 갑주무사를 小刀로 참살하려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小刀는 전투 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아니면 장수들이 지니고 있다가 적의 목을 베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무장기마전이 널리 유행했던 고구려 지역에서 小刀가 많이 확인되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이는 중국의 丹陽 南朝墓 塼畵에서 鎧馬甲胄武士가 길이 60cm 정도로 추정되는 짧은 칼을 차고 있는 점으로도 입증된다. 한편, 중형과 대형의 素環頭大刀는 벽화그림에서 행렬도의 護衛武士나 무덤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차거나 들고 있다. 이를 통하여 中形大刀는 호위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다음은 창에 관해서이다. 우선 기병용의 창인 長槍은 적어도 길이 250cm를 넘었던 것은 확실시된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 기병이 들고 있는 창은  대안리 1호분, 안악 3호분 전실 남벽, 약수리 벽화고분 전실 동벽, 쌍영총 연도동벽, 삼실총 공성도, 장천 1호분 전실천정 등에서 확인되는 데 그 크기를 무사의 신체크기와 비교하여 추정해 볼 때 적어도 250cm는 넘는다. 이와 함께 中國 滿城 1號墓 출토품도 290cm 정도로 보고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기병용 장창의 길이는 보통 300cm를 넘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보병용의 창은 안악2호분 연도 양측 및 현실남벽, 삼실총 제2실 서벽, 장천 1호분 전실 북벽, 수산리 벽화고분 연도 동벽, 통구 사신총 연도, 덕흥리 벽화고분 연도 서벽, 팔청리 벽화고분 전실동벽 등 고구려 벽화고분에 그려져 있다. 여기서의 창들은 무사의 신체크기와의 비교를 통해 볼 때 대략 200cm전후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크기는 중국 출토품에서도 비슷하여 臨淄 齊王墓陪葬坑에서 출토된 것이 210cm이고 滿城1號墓에서 출토된 것이 196cm로 보고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보병용 창의 길이는 2m정도로 짧은 것이 일반적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벽화에서 창은 대부분 行列圖에서 호위를 맡은 무사들이나 戰鬪圖에서 鎧馬의 갑주무사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鎧馬를 타지 않은 甲胄武士가 들고 있기도 하고 무장을 갖추지 않은 騎馬武士가 步兵이 들고 있다. 이를 통해 장창은 중무장기마병의 가장 기본적인 병기였던 점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보병이나 輕武裝騎兵들도 보병용의 槍이나 長槍을 사용하였던 점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고구려의 가장 기본적인 병기는 槍이였던 점을 벽화를 통하여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鐵 에 관한 실물자료는 集安 集錫公路 古墳群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이 고분군은 積石塚의 여러 가지 형식 중에서 串形墓와 方壇階段式石槨墓가 확인된 고분군으로 출토유물과 무덤 구조에 의해 4세기부터 5세기까지 축조된 무덤들로 보고되었다. 鐵 은 4점이 보고되었는데, 모두 燕尾有關形이며 그 크기는 30cm 전후이다. 長 式 3점, 中 式 1점이다. 이 중에서 錫盤이 달린 燕尾有關形 1점과 모신 중앙을 따라서 음각선이 돌려진 것이 있다. 한편, 이 유적에서 창고달이 1점 출토되어, 馬上槍인  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고구려 각지에서 출토된 철모의 기본적인 형태들도 상기 集安 集錫公路 古墳群 출토품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활은 이전 단계에 사용되던 角弓인 短弓이 계속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角弓의 형태와 구조를 알 수 있는 현존하는 유물로는 平壤 永和 9年銘 塼築墳에서에서 출토된 骨製의 활 2개체 분이 유일하다. 이 두 개의 활을 만드는데 사용된 뼈는 소의 갈비뼈로서 1개의 활을 만드는데 3개씩 모두 6개가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弓幹이 4개이고 줌피부가 2개이다. 한 개의 활은 궁간 두 개와 줌피부로 구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弓幹은 전장이 37cm 정도로 바같쪽 端은 넓고 둥근 기미로 처리했으며 그 반대쪽은 안쪽 단을 향하면서 조금씩 폭을 좁혀 나갔다. 안쪽 端도 둥글게 홈을 파서 木幹을 덧대기 쉽게 하였다. 활고자의 안쪽 부분은 凹상으로 깎아 활시위를 걸게끔 고안하였다. 줌피는 길이 약 20cm정도로 양단의 폭이 비슷하며 모두 둥근 기미로 처리하였고 단면은 편평한 편이다. 이 활은 소위 角弓으로 문헌상에 보이는 고구려 활인 貊弓 혹은 角弓으로 생각되며 騎馬用 활일 가능성이 높고 고분 벽화에 표현된 활들의 실물자료가 아닌가 판단된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조선시대의 角弓 제작법을 예로 삼아 볼 때 뼈로 만든 弓幹과 줌피 뒤에 탄력성이 좋은 나무를 덧대어 붙인 후 그것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제조되었을 경우 활의 전체 길이는 90cm 전후의 短弓이였을 것으로 상당한 탄력성을 지닌 好弓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실물을 통한 활의 형태 복원은 벽화자료를 통해 검증할 때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벽화에 보이는 활 중에서 시위가 당겨져 彎曲된 상태가 아닌 사용하지 않을 때의 활의 전체적인 모습을 실감있게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角抵塚 벽화 속의 활을 들 수 있다. 이 활은 무덤 주인공이 앉아 있는 의자 뒤의 네발 달린 탁자 위에 矢와 함께 놓여져 있다. 그림을 통해 볼 때, 대칭하고 있는 弓幹과 그것을 연결하는 줌피로 구성되었고 활시위는 弓幹의 양단에서 약간 안으로 들어온 위치에 홈을 파서 걸리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리고 弓幹과 줌피가 만나는 곳에는 따로 강하게 묶은 듯이 구별되게 표현되어져 있으며 弓幹에도 그 중간에 묶은 흔적이 표현되어져 있다. 이는 弓幹을 2개의 만곡한 弓幹部材를 맞붙여 만들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활의 정확한 크기를 算出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화살 뒤에 놓여져 있는 화살에 있는 無頸鑿頭形  a式 철촉의 크기를 통해서 대략적인 크기를 계산해 보면 약 100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실물자료가 수십 점이나 출토된 無頸鑿頭形 a식 철촉의 촉두 평균 길이가 약 10cm전후인 점에 착안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활의 크기를 상정해 보면 활의 크기가 鏃頭의 약 10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산출한 활의 길이는 전술한 平壤 永和 9年銘 塼築墳에서 출토된 활의 復元 치수와 거의 일치하고 있고, 狩獵圖에 그려진 시위가 당겨진 활의 길이와도 일치된다. 『後漢書』에  婁의 활이 4尺으로 약 92cm인 사실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길이를 지닌 활을 당겼을 때, 彎曲하는 정도는 화살의 크기를 가지고서 검토해 보면 약 45cm 정도까지 뒤로 당겨지게 된다.
활을 당겼을 때, 활의 모양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은 舞踊塚 玄室 西壁의 狩獵圖에서 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활은 短弓의 角弓일 가능성이 높고 그림에 표현된 마디의 숫자로 보아 5개의 骨材를 연결시켜 만든 활로 추정된다. 그리고 활을 최대로 당겼을 때, 활의 양쪽 가장자리 사이의 폭이 화살의 크기 정도로 좁혀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살대의 길이가 약 65cm 전후로 계산되므로 활이 최대로 彎曲되었을 때 활 양단의 폭이 약 60cm 전후로 좁혀진다.
화살대는 실물자료가 확인된 것은 없다. 단지 화살대가 가장 완전한 형태로 표현된 예는 角抵塚 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주인공이 앉아 있는 의자 뒷편 탁자 위에 활과 함께 두 개의 화살이 놓여져 있다. 화살대의 윗 부분에는 착두형 철촉이 꼽혀 있으며 뒷편에는 깃이 달려 있다. 깃은 새털로 3개가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벽화에는 흰색과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두 종류가 있다. 깃 아래에도 화살대가 그려져 있고 그 말단이 쐐기모양으로 처리되어 있어 활시위를 거는 오늬 구멍으로 보인다. 화살의 전체 길이는 착두형 철촉의 평균 길이로 추정해서 비교해 볼 때, 65cm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계산 결과는 肅愼과  婁의 화살대 길이가 한자 여덟치라는 문헌 기록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고분의 활을 쏘는 장면에서 확인되는 화살 길이와도 대략 일치한다. 즉 줌피를 쥔 쪽의 팔을 쭉 펴고 시위(弦)에 건 화살대의 깃을 잡은 손은 귀 뒤까지 당겨져 있는 상태로 보아 대략 화살대 길이가 60∼70cm라는 계산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화살대는 선명치는 않으나 그림 속에 검은색으로 처리되어 있으므로 검은 옻칠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실물자료는 集安 集錫公路고분군, 집안 통구고분군 M159, M157, M195에서 출토된 병기들이 대표적이다. 集安 集錫公路古墳群 출토품은  無頸鑿頭形 a式과 b식, 넓적촉계통의 릉형 2점, 長頸柳葉形 2점 등이 확인된다. 집안 통구 고분군 M159, M157, M195에서 출토된 병기는 모두 鐵鏃으로서 三翼形鐵鏃이 있는 점이 주목되며, 그 외에 릉형과 단경유엽형 a식(검신형), 長頸柳葉形 등이 확인된다. 삼익형 鐵鏃은 선단이 편평한 형태이고 날개에는 구멍이 뚫혀 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이들 유적은 대략 3세기대로 편년된다. 이렇듯  鐵鏃은 長頸柳葉形 a식과 無頸鑿頭形 a式, 無頸鑿頭形 b식, 三翼形 등이 우세하게 출토된다. 특히 無頸鑿頭形 a式과 三翼形이  벽화 자료와 실물자료로 모두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두 형식이 널리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단 그 용도는 수렵용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무장과 마구에 관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갑옷은 札甲과 가죽갑옷이 있었고 그 중에서 札甲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보병용의 갑옷과 기병용의 갑옷으로 기능분화가 이루어져, 보병용은 목도리가 없고 소매가 없거나 또는 팔꿈치까지 오는 갑옷저고리만 있다. 기병용은 높은 목도리가 있고 소매가 손목까지 오는 갑옷저고리와 발등까지 오는 긴 갑옷바지를 갖추고 있다. 마구는  子와 재갈, 안장의 완전한 일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말에도 갑옷을 입혀 네 다리를 제외한 몸통전체에 馬甲을 입히고 머리에는 馬面甲를 씌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중무장기마병은 人馬가 札甲으로 완전히 무장한 상태로 전투에 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고구려의 무장과 마구는 개마갑주무사로 대변할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실례로 雙楹塚 연도 동벽에 그려진 鎧馬甲胄武士圖를 들 수 있다.
    3) 확립기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구이동 고구려요새, 서울 아차산 제4보루, 요녕성 무순 고이산성, 沈陽 石台子山城 등이 대표적으로 관방유적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에 관한 자료는 문헌기록이 풍부한 데에 비하여 사생자료는 전무하고 실물자료는 이전 단계에 비하여 풍부하지는 않다.
刀는 구이동 고구려 요새에서 無環頭大刀로 2점, 고이산성에서 심부대도 1점이 대표적이다. 전자는 잔존길이는 68.3cm, 67.9cm에 달하며 刀身 전면에 목질이 부착된 점으로 미루어 목제 칼집에 넣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후자는 칼코인  이 부착된 심부대도로 길이 75cm이다. 이런 심부대도는 고이산성에서   1점이 확인되어 당시의 도의 한 종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특징적인 형태의 대도는 확립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확립기의 전형적인 대도로 자리하는데, 손을 보호하기 위한  이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의 대도와는 기능적으로 차이가 있다.
한편, 이 시기에도 裝飾大刀가 여전히 사용되었고 그것이 權威象徵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문헌상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가 淵?font color=red>弓暻?그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冠과 옷을 金으로 장식하고 五刀를 찼던 기록이다. 이를 통하여 장식대도가 여전히 신분과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城主였던 孫代音이 항복을 請하면서 刀와 鉞로서 맹세하였던 기록은 일단 刀가 전투뿐만 아니라 신의를 맹세하거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梁의 蘇愆이 高句麗 安藏王에게 寧東將軍 高句麗王으로 冊封하면서 衣冠과 劒, 佩物을 보낸 사실도 刀가 정치적인 결속을 다지는 상징물로 사용된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런 문헌기록과 함께 刀가 儀器的으로 사용된 실례는 앞서 살핀 벽화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소련 아흐라샤브 都城址 23지점 1호실 使節圖에서 둥근 모자에 두 개의 羽毛를 꽂은 외국 사절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이 素環頭大刀를 차고 있는 점은 칼이 전투에서 뿐만 아니라 의례적인 장소에서도 패용되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한편, 도검과 함께 단병기로 분류되는 戰斧로 추정되는 도끼는 현재까지 아차산 제 4보루 6점, 구의동 군사요새 4점, 고이산성 1점 등 총 11점이 확인되었다. 이들 철부가 농공구류로도 사용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지만, 영남지방의 고분에서 확인되는 농공구류의 철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戰斧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농공구용의 날과는 달리 평행하는 橫 部를 갖추고 있는 점,  관방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점, 아차산 제 4보루 출토품과 같은 양인을 갖춘 철부가 확인되는 점 등으로 추정된다. 특히 백제 武王이 신라에 침범하였을 때, 신라장군 訥催가 백제 병사가 휘두른 斧에 맞아 죽었다는 기사는 戰斧의 존재를 분명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戰斧의 존재가 분명하고, 그것이 바로 고구려 관방유적에서 확인되는 橫 의 철부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병기체제에 관한 중국측의 기록에 斧가 포함되어 있진 않는 사실은 기본병기이기보다는 보조병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한편으로, 확립기에 戰斧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점은 이 시기에 근접전이 새로운 전투방식으로 성행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철모는 고이산성에서 유관직기형 초장공식 2점과 고달형 2점이 출토되었고,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고달형만이 8점 출토되었으며, 구의동 군사요새에서는 유관직기형 장공식 7점과 유관연미형 1점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하여 이 시기에 철모는 유관직기형과 고달형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철모의 경량화ㆍ소형화로 특징지울 수 있다. 한편, 고구려의 병기에 관한 중국측의 기록에 고구려의 장병기로 戟ㆍ ㆍ矛ㆍ鋌이 언급된 사실은 마상용의 장창을 비롯하여 보병용의  , 그리고 수성용과 투창용의 鋌 등 다양한 기능과 형태의 창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鐵鏃은 길이가 23∼25cm에 달하는 超長頸柳葉形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구의동 고구려요새에서 1,300여 점이나 출토된 사실로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초장경유엽형철촉은 아차산 제 4보루, 고이산성, 石台子山城 등에서도 확인되어, 확립기의 표지적인 화살촉이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이 철촉은 현재까지 그 출토품이 산성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공수성용에 적합한 활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화살에서 화살대와 촉의 중량 비율이 화살의 사거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점으로 미루어, 장궁에 적합한 화살촉이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추형촉의 등장도 주목된다. 그 출토예로는 석태자산성 1점, 고이산성 4점 등에 불과하나, 확립기의 새로운 철촉의 형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추형촉은 습베의 단면이 원형이고 촉두의 단면이 원형ㆍ 삼각형ㆍ사각형 등의 추형인 점이 가장 특징적이며, 그 크기가 5cm 전후의 소형에 속한다. 이 철촉은 기본적인 형태와 크기로 미루어 一般弩에 사용된 철촉으로 일단 추측된다.
한편, 이 시기의 유적에서 대형철촉이 한 점 확인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 대형철촉은 고구려토기가 다량으로 수습되어 6∼7세기 대 고구려의 군사유적으로 보도된 漣川 無等里 2堡壘에서 수습되었다. 그 크기는 전체 길이는 21cm이고 촉신부의 길이는 15.5cm이며 무게는 75g에 달한다. 보고자는 이 철촉은 무게로 볼 때, 일반적인 활로 쏘는 것이 무리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아마도 1,000보를 날릴 수 있는 고구려의 쇠뇌로 추정하였다. 이런 추측은 후술한 백제의 부소산성에서 확인된 다량의 대형철촉에 대한 검토 결과,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이상으로, 확립기에 고구려에는 장궁에 사용된 초장경의 철촉과 함께, 쇠뇌에 사용된 노촉이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확립기가 되면서 수성용 병기의 개발이 요구되었고, 그에 부응하여 長弓, 一般弩, 그리고 床弩를 개발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武裝에서는 기존의 蒙古鉢形胄와 小札甲을 발전시킨 형태가 여전히 사용되었으며, 그런 한편으로는 明光鎧라는 특징적인 형태의 갑옷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몽고발형주와 소찰갑의 사용은 무순 고이산성과 아차산 제4보루에서 확인되며, 보장왕 4년(645) 대당전투에서 당이 高延壽와 高惠眞을 패배시키고 明光鎧 萬領을 고구려로부터 획득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까지 명광개라 단정할 수 있는 실물자료는 없다.
마구에서는 鑄造品의  子의 등장이 특기할 만한데, 현수부가 방향을 90°로 돌린 형태이며 踏受部가 버들잎모양을 띠고 있다. 이런 등자가 集安 冷飮石西院遺址과 撫順 古爾山城에서도 확인되어 삼국시대 후기의 보편적인 등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대의 기마병이 이전 단계의 중무장 기마병에서 輕武裝騎馬兵으로 바뀐 사실을 고려하면,  子에서의 상기의 변화는 기마전술의 변화와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된다.
이 시기 고구려 병기체계에서 변화는 攻守城用兵器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이는 抛車와 弩의 사용에서 확인된다. 抛車에 관하여 『三國史記』에는 新羅 太宗武烈王 8年(661)에 고구려 장군 惱音信이 述川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옮겨서 北漢山城을 치는데 抛車를 벌려 놓고 돌을 쏘아대니 돌에 맞는 대로 성가퀴와 집이 무너져 내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통하여 고구려가 攻城用 병기로 투석기인 포차를 사용하였던 점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성에서는 그리고 수성에는 주로 弩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J-1. 兵器有甲弩弓箭鞍 矛鋌 (『周書』卷49 列傳41 異域(上) 高麗條 ;『冊府元龜』卷959         外臣部 土風1)
   2.  昔年 潛行財貨 利動小人 私將弩手 逃竄下國 豈非修理兵器 意欲不臧 (『舊唐書』 卷          197(下) 列傳149 東夷 高句麗條)
   3. 李思摩中弩矢 帝親爲 血 (『資治通鑑』卷197 唐紀)
   4.  唐太宗東征爲流矢所中目盲史官諱之..(中略)..太宗處三軍之中必不躬踏危地 而 飛矢能中        之也所以必欲徵師造成也 (『星湖僿設』 卷5 萬物門 木弩千步條)
사료 J-1에서 고구려의 병기에 弩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히 할 수 있는데, 여기서 弩는 투석기인 砲弩와 弩矢를 발사하는 床弩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床弩의 존재는 사료 J-3과 사료 J-4를 통하여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砲弩의 존재는 고구려 관련기사에는 없지만, 신라에서 守城 時에 砲弩를 설치하고 있었던 점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료J-2를 통하여 노를 제작하는 기술은 高句麗가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수나라의 기술자를 매수하여 습득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발전기에 고구려에 수성용의 弩가 없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며, 아울러 중국의 攻城用 병기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성용 弩의 개발에 힘쓴 사실을 알 수 있다.  

                               Ⅲ. 계통과 교류
   기원을 전후로 한 형성기 전기의 고구려병기체제는 현재까지의 자료로 볼 때, 화살촉으로는 錐形鏃이 주로 사용되었고, 도검은 劍이 일반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이들 자료가 극히 소략하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인 특징으로 볼 때, 북방권의 병기체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북방권의 병기체제란 삼한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권의 병기체제와 비교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북방권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北韓의 大同郡 上里 遺蹟, 경주 구정동 A지구 유적,에서 출토된 병기를 들 수 있다.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병기는 단검 혹은 장검+직기유관형 장공식+추형철촉과 유익촉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錐形鏃이 북방권을 대표하는 화살촉의 형식이고, 이 시기 고구려의 전형적인 화살촉이 추형촉이라는 사실은 서북한지역의 병기체제와 고구려의 병기체제는 동일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한편, 이런 북방권의 병기체제는 한식병기에 직접적인 계통을 두었다기보다는 고조선계 병기를 계승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판단은 전형적인 한식병기인 弩ㆍ戟ㆍ裝飾劍이 존재하지 않은 점과 세형동검을 계승한 철제단검이 출토되지 않는 점 등등으로 뒷받침된다.
형성기 후기의 병기체제는 전술한 바와 같이 環頭大刀로 대표되는 도검류와 함께 유관직기형 장공식 철모, 유엽형 a형ㆍ릉형ㆍ검신형ㆍ착두형의 촉두를 지닌 無頸有莖式 철촉이 조합을 이룬다. 馬具에는 긴 인수를 지닌   가 존재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여기서 소환두대와 이엽문환두대도는 중국 도검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그리고 긴 인수를 지닌 표비도 한식 표비에 그 계통을 두고 있다. 이렇듯 이 시기의 고구려 병기는 기본적으로 한식병기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화살촉은 중국의 錐形鏃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無頸의 유경식 철촉이 일반적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만의 독특한 弓矢文化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貊弓으로 불리우는 고구려의 好弓이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으며, 또한 고구려가 善射를 중히 여기고 군자의 덕목으로 삼았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발전기 전기의 고구려 병기의 교류는 안악 3호분에서 확인되는 병기와 고구려의 병기를 비교하는 것으로 중국병기와의 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다.
안악3호분의 피장자에 관하여 고구려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그 피장자는 金元龍의 견해와 같이 336년에 고구려에 망명해 온 前燕 慕容仁의 部將인 ?font color=red>弓坪?무덤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설령 그 무덤에 동수가 묻힌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행렬도에 그려진 군대는 고구려왕을 호위하는 동수의 군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악 3호분에 그려진 병기와 무장을 고구려의 것으로 보는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은 재고되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벽화에 그려진 병기는 고구려의 병기와는 거리가 먼 鮮卑族이 세운 前燕의 兵器와 武裝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안악 3호분의 병기와 무장은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계 유목민족의 병기에 관한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될 수 있다.
안악 3호분의 行列圖를 보면 주인공의 양측에 4인씩 활을 든 보병이 있고 그 외측의 양편에 5인씩 도끼를 맨 보병이 있고 그 앞에 2인씩 방패를 옆구리에 끼고 環頭大刀를 어깨에 맨 보병이 있다. 가장 바깥쪽에는 鎧馬를 타고 갑주로 무장한 騎兵이 오른손에 長槍을 들고 호위하고 그 前方에 갑주를 입고 오른 어깨에 戟을 왼손으로 가슴부위에 방패를 가린 보병이 나아가고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군대구성이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보병의 주된 병기는 短兵器로 環頭大刀와 斧를, 長兵器로 戟과 槍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기병은 모두 鎧馬에 타고 갑주로 무장해 있는 점이다. 이는 발전기 전기의 고구려 병기체제에서 鎧馬의 증거가 확인되지 않은 점, 보병의 주된 병기는 戟이 아니고 철모인 점, 도끼가 전투에서 사용된 증거가 없는 점 등등에서 대조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안악 3호분에서 출토된 철모 3점이 廣鋒系로 狹鋒系가 주류인 고구려의 철모와는 구별되는 점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다음으로 발전기 후기에 관한 병기의 교류에 관한 검토이다. 이 시기 삼국의 병기교류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고구려 병기체제가 남방권의 신라, 백제, 가야로 전해진 사실이다. 이 시기 고구려 병기체제의 전파는 협봉의 연미유관형 철모와 蒙古鉢形胄와 騎乘用 재갈로 대표된다. 이런 고구려 문물의 파급은 4세기 대 주요한 역사적 사건인 낙랑군의 멸망에서 찾을 수 있다. 낙랑의 멸망으로 신라의 교역상대가 漢郡縣에서 고구려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고구려의 문물이 신라 및 가야지역에 직ㆍ간접적으로 유입되었다고 추측된다.
이에 대한 검증은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신라는 248년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게 되는데 이 때부터 시작된 고구려와 신라의 통교는 그 후에도 계속이 되어, 그 결과 麻立干時代에 들어가면 신라의 왕자들이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되는 데에 이르렀다.  양국 사이의 화친은 고구려로서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신라세력과 연합하기 위한 화친정책에서 비롯되었고, 신라로서는 백제와 전쟁에서 고구려를 자기의 배후 세력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신라의 건국주체로 고구려 東川王이 관구검에 의해 옥저로 쫒겨 갔을 때, 동행하였다가 귀국하지 않고 남은 자들로 보는 『隋書』의 기록은 특기할 만하다. 또한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의 漢二郡을 멸망시키고 韓과 濊에 대한 지배가 용이해졌고,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신라의 결속이 이미 4세기대에 있었다는 견해도 주목된다. 여하튼 4세기 중엽에 신라는 주변소국에 대한 정복을 마무리짓고 백제세력과 대치하게 된 상황에서 沃沮지역을 매개로 하여 고구려와 정치적인 결속을 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발전기 후기가 되면 고구려의 병기체제는 본격적으로 남부지방으로 전파된다. 특히, 신라 및 가야의 병기체제는 고구려의 그곳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우선, 고구려 병기체제의 전파에 관한  단적인 증거는 황남동 109호분 3.4곽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고구려의 전형적인 鐵鏃 형식인 無頸鑿頭形 a式과 단경유엽형 a식(검신형) 촉이 신라에서 등장하고 이 단계부터 鐵鏃도 短頸에서 長頸으로 바뀌는 것도 고구려의 영향으로 평가된다. 또한 고구려지역에서 사용되던 錫盤附鐵 가 이 단계부터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사실도 고구려 병기의 유입을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 4곽에서 확인된 X자형 環板 를 비롯한 경주 월성로 가-13호분 출토 板  역시 고구려의 영향으로 평가된다.  이렇듯, 이 시기에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ㆍ군사적 유대 강화로 인하여, 고구려의 문물이 급속하게 신라사회에 파급되었고 군사문화 역시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였다.
이렇게 신라로 전파된 고구려의 병치체제는 다시 신라의 정치적 영향하에  있던 낙동강 동안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런 판단의 근거로는 유형D와 유형F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라고분에서 표지적으로 확인되는 三葉文環頭大刀와 三累環頭大刀가 확인되는 사실이다. 특히 특징적인 형태를 지닌 모자도가 경산 조영 C-I-1호분과 상주 신흥리 나-39호분에서 확인되었다. 또한 철모에서 錫盤附鐵 가 창녕 교동 3호분에서 확인되고, 고구려의 영향으로 보이는 三枝槍이 창녕 계남 1호분에서 확인되었다. 더욱이 철촉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 철촉인 無頸鑿頭形 A형 鐵鏃이 동래 복천동 11호분과 상주 신흥리 나-39호분과 등에서 출토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병기는 백제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이는 발전기에 백제지역에서 나타나는 단궁의 사용, 장창인 삭의 출현, 중무장 기마전술의 등장 등의 새로운 변화는 고구려의 영향이라 언급했던 바와 같다. 그 외에 천안 용원리 유적에서 고구려계의 錫盤附鐵 가 확인되고, 청주 신봉동고분군에서 고구려철촉인 鑿頭形鐵鏃이 출토된 점도 고구려의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백제의 병기체제도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의 그것을 따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확립기가 되면, 고구려는 선진화된 중국병기의 제작기술과 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砲弩와 抛車로 대표되는 공수성용 병기를 비롯하여, 일반노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추형촉, 새로운 도검형태인 심부대도, 문헌기록 속에 보이는 명광개, 등등의 등장으로 대변된다.
특히, 문헌기록 속에 고구려의 병기가 중국의 병기와 대체적으로 같다는『北史』의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 기록은 이전 시기의 삼국의 기본병기가 刀矛弓矢라고만 언급한 것과는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는 확립기에 들어 고구려 병기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사료 J-2의 기록은 고구려가 중국 공수성용 병기의 수입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더 나아가서는 고구려의 공수성용병기의 계통이 중국에 있었던 점을 시사해 준다.

                              Ⅳ. 병기사적 특징
이상의 검토로 고구려 병기에서 찾아지는 병기사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단병기에서 길이 50∼70cm 정도의 소도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실물자료뿐만 아니라 벽화자료와 문헌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벽화자료로는  길림성 通溝(集安) 12호분 戰鬪圖가 대표적이다. 이 전투도에는 갑주무사가 적장으로 추정되는 갑주무사를 참살하려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가 사용하는 단병기가 小刀이다. 이런 소도의 일반적 사용은 문헌 A-5, 6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상기 기록은 몸이나 쟁반에 감출 수 있는 小刀의 존재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런 小刀의 성행은 고구려가 기마전투를 特長으러 삼았고, 기만전투에 적합한 刀의 크기가 소도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추측된다.
한편, 단병기에서의 또 다른 고구려적 특색으로는 삼엽문환두대도를 들 수 있다. 이 장식대도의 계통에 대하여 漢代의 平壤 石巖里 9號墳 출토품과 같은 형태에서 변형ㆍ발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三葉文의 모티브는 고구려 金銅冠과 杏葉에서 확인되므로 高句麗의 三葉文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평양 청암리 토성 출토 金銅冠에 三葉文이 확인되는 점은 環頭大刀에서 보이는 三葉文이 고구려 문물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이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장병기에서 다양한 형태의 철모가 확인되는 점이다. 이는 신라, 가야, 백제의 철모들이 유관연미형 장공식을 기본으로 하고, 그 변형이나 이질적인 형태가 드문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錫盤附鐵 는 고구려계의 철모의 전형이라 할 수 있으며, 음각선이 돌린 형태는 고구려 철모에서만 확인된다. 이렇듯, 철모의 형태와 크기가 다양한 것은 고구려의 철모에  ㆍ ㆍ鋌이 있다는 『周書』의 기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원사병기에서는 수렵용의 철촉이 널리 유행한 사실이다. 이는 벽화고분의 수렵도에서 확인되는 삼익촉과 착두형철촉이 고구려고분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사실로 쉽게 입증된다. 그리고 검신형 철촉도 고구려의 특징적인 화살촉으로 국내성, 장성리 돌각담무덤, 동명왕릉 부근 12호분, 통구 159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신라, 백제, 가야의 도자형과는 구별되는 고구려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화살촉에서 보이는 이런 특징들은 고구려가 '貊弓'이라 불리는 강력한 角弓을 널리 사용하였던 사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日本書紀』에 보이는 高句麗의 鐵的은 고구려 화살이 철적을 관통할 수 있을 정도 강력하였던 사실을 시사해 주며, 이 역시 고구려의 철촉에 검신형과 같은 뾰족하면서도 중량감이 있는 철촉이 널리 사용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고구려의 병기에 관하여, 병기체제의 발전과정, 계통과 교류, 그리고 병기사적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형성기 전기의 병기체제는 자료의 부족으로 그 분명한 성격을 밝히기가 어렵지만 추형촉의 출토로 미루어, 서북한 지역의 병기체제와 유사한 성격일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장검으로 대표되는 도검류와 추형촉을 표지적인 형식으로 하는 원사병기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형성기 후기의 병기체제는  無環頭大刀와 素環頭大刀로 대표되는 도검류와 함께 유관직기형 장공식 철모, 유엽형 a형ㆍ릉형ㆍ검신형ㆍ착두형의 촉두를 지닌 無頸有莖式 철촉, 긴 인수를 지닌   가 조합을 이룬다. 발전기 전기가 되면, 병기발전에서 새로운 변혁이 시작된다. 그것은 無環頭大刀ㆍ素環頭大刀로 대표되는 刀劍類, 燕尾有關形 長 式 鐵 와 錫盤附鐵  및 長頸柳葉形ㆍ鑿頭形ㆍ劍身形 등으로 구성된다. 마구는  子의 사용이 가장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甲胄는 騎兵戰에 적합한 札甲이 중심을 이룬다. 이런 변화는 기마전투에 적합한 마구와 병기의 등장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발전기 후기의 병기체제는 중무장기마전투에 적합한 병기체제가 특징으로, 그 구성은 裝飾大刀와 燕尾有關形의 鐵 , 長頸式 鐵鏃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마구에서 등자, 재갈, 안장의 완전한 일식이 갖추어지고, 무장은 인마가 찰갑으로 완전히 무장하게 되는 개마갑주무사가 출현한다. 확립기의 병기체제는 弩砲와 抛車로 대표되는 공수성용병기의 발달이 가장 특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격용 병기는  附大刀로 대표되는 도검류, 直基無關形ㆍ燕尾直基形의 無關系 鐵 , 短頸錐形ㆍ超長頸柳葉形의 철촉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武裝에서는 기존의 蒙古鉢形胄와 小札甲을 발전시킨 형태가 여전히 사용되었으며 중국제 갑옷인 明光鎧라는 특징적인 형태의 갑옷도 사용되었다. 마구에서 마구에서는 鑄造品의  子의 등장이 특기할 만한데, 현수부가 방향을 90°로 돌린 형태이며 踏受部가 버들잎모양을 띠고 있다.
다음으로 계통과 교류에 관한 정리이다. 형성기 전기의 고구려 병기에 서북한 지역을 포함하는 북방권의 병기체제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그 계통은 고조선계의 병기체제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았다. 형성기 후기의 병기에는 소환두대와 이엽문환두대도와 긴 인수를 지닌 표비 등과 같은 중국계 병기의 영향이 확인되나, 그런 한편으로는 중국의 錐形鏃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無頸의 유경식 철촉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고구려만의 독특한 弓矢文化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파악된다.  발전기 전기의 병기체제는 안악 3호분과의 비교를 통하여 검토하였는데, 기본적으로 안악 3호분의 병기구성은 고구려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이 시기에 고구려의 독특한 병기체제가 이루어지는 단계로 보았다. 그런 한편, 고구려의 병기체제는 낙랑의 멸망을 계기로 하여 신라ㆍ가야지역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삼국이 이전 단계의 남방문화권과 북방문화권이 비슷한 병기체제를 갖추게 되는 요인으로 파악되었다. 발전기 후기가 되면, 고구려의 병기체제는 본격적으로 신라ㆍ백제ㆍ가야지역으로 전파된다. 특히, 신라의 병기체제는 고구려의 그것을 이식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확립기가 고구려는 선진화된 중국병기의 제작기술과 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병기체제의 변화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으며, 고구려의 병기기 중국의 그것과 같다는 『北史』의 기록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병기의 특색에 관한 정리이다. 이는 고구려만이 지닌 독특한 병기의 형태를 규정한 것으로, 삼엽문환두대도, 착두형ㆍ삼익형ㆍ검신형의 철촉, 석반부철모 등을 들었고, 刀에서 小刀가 널리 사용된 사실을 밝혔다.

출처 : 고구려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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