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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 정조 054 부록 / 정조 대왕 행장(行狀)⑩

 이름 : 

(2005-12-06 23:21:21, 5852회 읽음)

정조 054 부록 / 정조 대왕 행장(行狀)⑩

왕은 하늘에서 타고난 총명과 슬기에다 너그럽고 인자하고 검소한 마음씨를 지녔다. 육경(六經)을 기본으로 하여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이치를 터득하고 삼고(三古)에 뿌리를 둔 예악(禮樂) 성명(聲明)의 치적을 남기었다. 도(道)는 우주(宇宙)를 요리할 만했고, 덕(德)은 당우(唐虞) 시대를 재현시킬 만했으며, 공(功)은 만세를 위해 태평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만하여 무슨 덕 하나 혹은 행위 하나만을 들어 명명(命名)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면 경천 위지(經天緯地)한 것을 일러 문(文), 예악(禮樂)이 다 잘 갖추어진 것을 일러 성(成), 대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확실한 공로를 세운 것을 일러 무(武), 끊임없이 덕을 닦고 업을 개척하는 것을 일러 열(烈), 사물의 이치를 다 알고 천성대로 하는 것을 일러 성(聖),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하는 것을 일러 인(仁), 올바른 길을 걷고 화평을 지향하는 것을 일러 장(莊), 선왕의 뜻을 이어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을 일러 효(孝), 나의 정직으로 상대를 심복시키는 것을 일러 정(正)이라고 하였다.
왕은 15년간을 춘궁(春宮)에 있으면서 문침(問寢) 시선(視膳)의 일이 아니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적(經籍) 연구에 몰두하여 분전구색(墳典邱索) 수사낙민(洙泗洛) 기타 구류(九流) 백가(百家)의 전적에서부터 우리 나라 선유(先儒)들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융회 관통하였고 또 성리(性理)의 원리와 학문하는 방법 그리고 옛 성인들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과 과거 현자들이 미처 말하지 못했던 심오한 이치도 역시 다 연구하고 찾아냈던 것이다. 급기야 왕위에 올라서는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제때에 대지 못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좌우에다 책을 두고서 밤을 낮삼아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 자신 수양의 방법에 있었서는 이르기를,
“극기(克己)는, 자기 성격이 그쪽으로 치우쳐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부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너무 조급한 것이 병인데 ‘자신을 많이 책하고 남은 적게 책하라.’는 공자의 교훈을 읽고서 자기 기질을 변화시켰던 여백공(呂伯恭)에 대해 내 늘 그를 흠모하면서도 그대로 못하고 있다.”
했고, 또 이르기를,
“내가 무슨 학문으로 이룬 공부가 있겠는가. 다만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해하고 참고하는 데서 다소 도움을 얻었던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선비라면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래서 ‘홍의(弘毅)’ 이 두 글자에 대해 많은 음미를 해왔었다.”
하였다.
학문하는 법을 논하면서도 이르기를,
“직내 방외(直內方外), 그 공정을 터득해야 천덕(天德)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직내란 바로 경(敬)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뜻을 견지하는 것이고, 방외란 바로 의(義)를 말하는 것으로 가령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같은 것이다. 사람이 성인이 되게 가르치고 현인이 되게 가르치는 성인의 말씀 천 마디 만 마디가 궁극적으로는 그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모름지기 평상시에 마음을 잘 지키고 천성을 함양하여 그 마음이 언제나 내 속에 존재하고 의리가 항상 내 속에서 밝아야지만 비록 단사 표음(簞食瓢飮)으로 삭막한 고을에 있더라도 천지를 메우고도 남을 호연지기가 그대로 있는 것이고, 또 아무리 거록(鉅鹿) 진터에서 큰 전쟁을 구경하고 동정(洞庭) 넓은 들에서 아홉 마당의 주악을 하더라도 허명 정일(虛明靜一)한 내 마음은 변함없는 그대로 있어야 비로소 큰 군자(君子)가 될 수 있고 큰 사업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했으며, 또 말하기를,
“사람이 누구나 강력하게 실천을 못하는 까닭은 다만 그것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학문이 물격(物格) 지지(知至) 정도에 이르면 그는 이미 그 지위가 8, 9분(分)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의(誠意) 이하의 공부는 다만 그 본령(本領)을 그대로 가지고서 적재 적소로 거기에 맞게 늘 써나가는 것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문장(文章)에 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문장이라는게 도(道)가 있고 술(術)이 있는데 그 도는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되고, 술은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문장이라면 당연히 육경(六經)을 주축으로 삼고 자사(子史)를 보조역으로 하여 최고의 목표를 주자서(朱子書)에다 두어야지만 그 내용이 순정(醇正)하여 도와 술에도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 전설 따위나 주워모은 자질구레한 작품들은 그것이 사람 심술을 제일 못쓰게 만드는 것들이므로 경술(經術)·문장에 뜻을 둔 선비라면 비록 상을 주더라도 그런 것들은 보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는 작가(作家)가 되려고도 해보았고 또 경학(經學)에도 종사해보았고 그리고 또 단정하게 공수하고 무릎 꿇는 것과 법도 있게 걷는 그 방면에도 공부를 해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들이 내 몸과 마음에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제왕(帝王)의 학문은 보통 선비와는 또 달라 그보다 더 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심성(心性)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도 오히려 그것을 두고 세밀 또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문장짓고 쓰는 그러한 일에다 내 심력을 허비할 것이야 뭐가 있겠는가. 가령 은하수처럼 떠오른 그 상태를 가지고 말하자면 크고 둥근 옥돌 같은 것이 제왕의 문장 격식이요, 꾸밈없는 소박한 거문고가 태고의 가락인 것이며, 성문(聖門)의 말세는 좋은 구름 화창한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명불측의 변화를 일으켰을 때는 아무리 예원(藝苑)의 문장가라도 그것으로는 얘기 거리가 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다 찾아 나열해 놓으면 아무리 전문지식이 있는 큰 선비라도 그렇게까지 해박할 수가 없을 만큼 끝도 없으면서도 모두가 절주에 맞아 《서경》의 전모(典謨), 《시경》의 아송(雅頌)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하였다.
왕이 책으로 꾸며놓은 《존주휘편(尊周彙編)》은 의리를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고, 《대학유의(大學類義)》는 옛것을 가져다 오늘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륜행실(五倫行實)》·《향례합편(鄕禮合編)》은 민속을 올바르게 계도하기 위함이었고, 《팔가선(八家選)》·《두륙집(杜陸什)》은 문장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꾸민 것이며, 자양자(紫陽子)의 여러 책들은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열기 위해 만든 책들이었다. 그리고 만년에 와서는 촌음을 아끼는 공정으로 복희(伏羲) 선천(先天)의 역(易)에 정력을 집중하였는데 그 책은 아직 여기 있건만 서언(緖言)을 들을 수는 없어 주 문왕(周文王)이 후세를 걱정했던 뜻인 공자가 십익(十翼)으로 발휘했던 내용들이 말학도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뭇 어리석은 자들을 계발하게도 못하고 말았으니 아, 이 도(道)가 막힐 징조가 아닌가.
그리고 왕이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통한, 아름다운 종묘(宗廟)와도 같고 수많은 백관(百官)과도 같은 저술을 신들이 명을 받아 편집 교열한 것으로는 삼집(三集)으로 된 《홍재전서(弘齋全書)》 1백 권이 있다. 그 책 머리에다 어서로 기록하기를,
“내가 세 살 때부터 수업하기 시작하여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에 대해 약간 들은 바 있으므로 애당초 나 자신이 수사(修辭)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든 기무(機務)를 살피고 모든 일들을 경륜하는 동안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고 찬란한 공업들을 근사하게 그려내려고 하다 보니 자연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 내 어찌 문장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학문은 추노(鄒魯)를 우두머리로 여기고, 치교(治敎)는 삼대(三代)의 것을 제일로 여겼으며, 덕(德)에 나아가는 계제로는 격물·치지·성의·정심[格致誠正]이었고, 풍속을 선도하는 법으로는 예의 염치(禮義廉恥)였으며, 문장은 의사만 전달되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교(政敎)에 반영한 것으로는 규장각을 건립하여 집현(集賢)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최고의 우문(右文) 정책을 지향했고, 호당(湖堂) 제도를 모방하여 영선과[英選]를 설치함으로써 인재 양성의 지남(指南)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교 삼물(五敎三物)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상서(庠序)를 세우고 정학(正學)을 밝히고 사술(邪術)을 물리쳤으며 경전을 존숭하고 패설류는 물리쳤다. 많은 선비들을 오게 하여 가빈(嘉賓)으로 대우하고 서로 연마하도록 격려하고 권장하여 한 조정에 모여 함께 가도록 길을 열어주었기에 당시 선비들은, 비록 작고 볼품없는 재주까지 위아래로 다 살피시는 왕의 덕화에 의해 고무되고 진작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1천 5백 년이나 뒤에 요순(堯舜) 문무(文武)의 전통을 이어 이 땅에 사도(師道)가 엄연히 위에 있었던 것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힘쓸 것을 생각하라.”
했고, 전(傳)에는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떠나고 없으니 이제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
했듯이, 왕이 그래서 문(文)이 된 것이다.
왕은 세상에 보기 드문 자품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백관들을 올바르게 감독 관리하고 명분과 실상을 종합 검토하여 일처리를 했다. 질(質)을 중시했던 은(殷)과 문(文)을 중시했던 주(周) 그리고 강(綱)을 앞세웠던 한(漢)과 목(目)에 치중했던 당(唐)의 제도들을 두루 알맞게 적용했었다. 그리하여 교화가 간 곳마다 이루어지고 정형(政刑)이 바람처럼 백성을 고무 진작시켜 얼마 있으면 온 나라가 한 덩어리가 되고 그로부터 다소의 세월만 더 걸리면 대성공이 있을 뻔했었다. 남단(南壇)의 제향 의식을 바로잡고, 기곡제[祈穀]를 대사(大祀)로 승격시켜 원구(圓邱) 방택(方澤)의 의의를 갖추었다. 늦은 봄이면 예복에 면류관 차림으로 황단을 배알했으며 경각(敬閣)을 세워 중국 조정에 대한 생각을 표시하고, 한려(漢旅) 제도를 두어 중국 유민의 후예들을 위로했다. 제사 빈객의 예를 친히 보살펴 옛부터 내려온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며, 환묘(桓廟) 올려 모시는 의식을 8회 서갑(瑞甲)의 해에 거행하고는 의폐(衣幣)와 책축(冊祝)을 해마다 꼭 직접 주었고 변두(豆) 올리는 일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경건히 거행하게 하여 원묘(原廟)에 대한 예가 비로소 바르게 되었다. 황조(皇祖)를 세실(世室)에 올려 모심으로써 50년에 걸친 그의 치적을 천양하고 백세불천의 덕이 있음을 보였으며, 궁원(宮園)에서 행할 의식을 피눈물을 흘리며 제정했는데 모든 절차가 법도에 알맞고 인정으로 보나 예제로 보나 유감될 것이 없었다.
대현(大賢)을 성무(聖)에 모시게 하여 유술(儒術)이 흥성했고 화궁(華宮)에서 뭇 늙은이들을 대우하는 등 은총을 널리 베풀었다. 연사(燕射)의 예를 거행하여 군자(君子)다운 다툼을 구경하고 향음주례[鄕飮]를 익히게 하여 왕도(王道)가 어렵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길·흉·군·빈(吉凶軍賓)의 대례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의문(儀文)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경례와 곡례를 참작하지 않음이 없었고 고금을 통틀어 고증하여 인정에도 어긋남이 없고 천리에도 맞게 모든 예제가 찬란하게 갖추어졌으니 이는 예가 이루어진 것이다.
담월(月)에도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던 것은 헌자(獻子)의 남은 슬픔 그것이었고, 술잔 올리고 풍악 울림은 노래자(老萊子)의 봉양 잘하는 그것이었다. 아송(雅誦)을 편찬하여 시(詩) 교육을 널리 보급하고 《악통(樂通)》을 저술하여 음률의 원류를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악관(樂官)을 명하여 격조없는 가락을 지양하고 화평의 음을 되찾도록 했는데 그게 바로 일창삼탄(一唱三歎)의 유음(遺音)이라는 것이었다. 어찌 그뿐이랴. 금슬(琴瑟)과 생용(笙鏞)을 울려 빛나는 조종들을 오시게 하고, 종고(鍾鼓)와 관약(管)을 우리 백성들과 함께 즐겨 화기가 감돌고 소리도 아름다웠기에 하늘도 땅도 함께 호응하여 반수(泮水) 뜰에서는 해묵은 옥경[磬]이 나타났던 것이니 이는 모든 것이 찬란했던 영릉(英陵) 시절을 이 몸이 직접 보았던 것으로 그만하면 악(樂)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한부(信漢符)를 만들어 궁성 안이 엄숙해졌으며, 노부사(鹵簿使)를 두어 의장 시위가 정연해졌다. 태상(太常) 제도를 바로 고쳐 범절이 명확하였고, 대정(大庭)에는 표(標)를 두어 조정이 보기에 숙연했다. 관부(官府) 군현(郡縣)에 기록없는 곳이 없고, 양형(量衡)·율도(律度)가 다 일정한 기준이 있었으며 정책 수립과 인재 등용, 국가 경제와 민생 문제 등 모든 분야에 다 정해진 법과 기율이 있어 하나의 대전(大典)이 성헌(成憲)으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한 왕조의 체제가 질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니 그만하면 법도(法度)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공(百工)들은 서로가 서로를 스승으로 삼고 모든 일들은 다 잘 되어갔다. 강기(綱紀)가 정연하여 조정 정사가 잘되었고, 예양(禮讓)이 흥행하여 민속이 순화했고, 기상이 맑고 깨끗하고 규모가 크고 원대하여 치도(治道)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역(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도(道)를 이탈없이 지키고 있기에 천하가 동화되어 만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듯이 왕도 그래서 공을 이루었던 것이다.
왕은 타고난 용지(勇智)에다 세상을 덮을 만큼 신무(神武)하여 비록 백 년 승평(昇平)을 유지하고 북소리 한 번 내지 않았었지만 일단 조정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서는 이 땅덩어리 전체를 한번 뒤흔들고 싶은 개연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병신·정유년 이전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겼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신기(神機)를 써서 뭇 흉물들을 소탕하고 국가 운명을 태산 반석 위에다 올려놓았으며 팔과 겨드랑 밑에서 권간(權奸)들이 재주를 뿌리기도 했으나 담소하면서 그들을 물리쳐 하루가 다 안 가서 조정이 깨끗해졌다. 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손에는 법의 칼을 들고서 사안에 따라 각기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데 사람들은 감히 그 깊이를 엿볼 길이 없어 마치 비와 이슬이 내리다가도 바람이 일고 벼락이 떨어지고 하면서도 하늘 자체는 아무 동요없이 하늘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았었다.
조정 진신 중 혹 한 사람이라도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비록 평소 존경하고 총애하고 예우했던 자라도 그것 때문에 법대로 처리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고 대의(大義)가 걸려있는 선악을 가리는 데는 더욱 엄하였다. 그리하여 궁(宮)과 부(府)가 일체가 되고 속과 겉이 다를 것이 없었으며 궁액(宮掖) 무리들도 감히 함부로 궁중 출입을 못해 안으로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밖으로 먼 지방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마치 몸이 팔을 뿌리고 팔이 손가락을 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어느 사람이거나 마치 밝은 촛불이 눈앞을 훤히 비추고 있는 듯하여 국가 대계를 정하는 데 있어 발언하는 자들이 뜰을 메웠는데 왕은 그 중지를 다 받아들인 다음 한 마디로 독자적인 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이 막힘없이 잘되었으며 무슨 일이든지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행할 정도로 뭇 신하들이 다 승복하고 오직 자기들 직무 수행에 분주했다.
국조의 군영(軍營) 제도가 잘못되어 있음을 병폐로 여겨 내외의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다시 옛날과 같은 위부(衛府) 제도를 실시했으며 모든 무신은 모두 그 길을 통해 진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성질이 사납고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라도 모두 멍에와 채찍을 가해 통솔 범위 안에 있게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장용영을 신설한 것은 숙위(宿衛)를 엄히 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대로의 깊은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선천 금려(宣薦禁旅)를 두어 무인들 발신의 길을 열어놓았고, 서북인들에게 무예를 장려하여 뛰어난 재목을 구하려고 했다. 전영(前營)을 없애 쓸모없는 병졸을 도태시키고, 양진(兩鎭)을 두어 묵어있는 국토를 넓혔으며, 남쪽 교외에서 대 사열을 하면서 노군(勞軍)의 예를 제정하고, 화성 초루에서 밤 조련을 시켜 성가퀴를 오르는 용감성을 연출시키기도 했다. 그전에 마음먹었던 일을 뒤쫓아 실현해보려고 《무예도(武藝圖)》를 증보하기도 했고 《병학통(兵學通)》을 편찬해서 척계광의 병법을 통달하려고도 했다. 황제(黃帝)·위료자(尉子)의 저술이나 팔진(八陣)·육화(六花)의 진법도 성명의 눈앞에서는 파죽지세여서 비록 전쟁 속에서 늙은 숙장(宿將)이라도 왕이 가끔 고문을 구하면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또 활쏘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타고난 재주였다. 그러나 50발을 쏠 경우에 항상 그 하나는 남겨두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가득 차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틈만 있으면 내원(內苑)에 나아가 조련하고 진법을 익히게 하면서 앉고 서고 치고 찌르는 법을 구경하고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면 꿩고기 굽고 탁주를 두루 하사하여 장사들을 먹이면서 소무(昭武)의 악(樂)으로 여흥을 돋우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영릉(寧陵)의 철장(鐵杖) 목마(木馬)와도 같은 뜻이었다. 《역(易)》에 이르기를,
“사(師)는 대중이란 뜻이요, 정(貞)은 바르다는 뜻이니 대중을 바르게 지도한다면 왕(王)이 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왕은 그래서 무(武)가 된 것이다.
왕은 왕도(王道)를 존중하고 패도(覇道)는 취하지 않는 것을 나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고, 현자를 신임하고 척리를 멀리하는 것을 인재 등용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것을 교육 지표로 삼고, 허례를 버리고 내실을 힘쓰는 것을 백성 교화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순화시키는 것을 세상을 이끌어가는 권형(權衡)으로 삼았던 것이다. 넓은 도량은 태조(太祖)를 닮았고, 높고 빛난 문장은 세종(世宗)을 본받았으며, 영무(英武)하기는 광묘(光廟)와 같았고, 지행(至行)은 효릉(孝陵)을 닮았었다. 화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일은 선조(宣祖)를 뒤따랐고, 자나깨나 국력 배양에 힘쓰고 대의(大義)를 만천하에 밝힌 것은 효묘(孝廟)와 짝할 만했으며, 현사(賢邪)를 가려 진퇴시키고 매사에 용단이 있었던 것은 숙조(肅祖)의 정치 솜씨였고, 만민이 지향할 표준을 세우고 우리 세신(世臣)들을 보호한 일은 영고(英考)의 마음씀 그것이었다.
봉모당(奉謨堂)을 건립하여 열성조의 신장(宸章) 보한(寶翰)을 모셔두고 19조(朝)의 《보감(寶鑑)》을 편찬하여 태실(太室)에다 두었다. 그리고 다시 《갱장록(羹墻錄)》을 꾸며 선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동시에 선세의 뜻을 뒤따라 실현했으며, 그밖에 적도(赤島)의 비(碑), 귀주(歸州)의 명(銘), 곡주(谷州)의 기(紀), 율원(栗園)의 편(扁), 검암(黔巖)의 갈(碣) 등등 무릇 성적(聖蹟)이 지나간 곳이나 왕실의 뿌리가 되는 고장이면 이렇듯 다 세상이 알게 표장(表章)하였다. 심지어 옛 동판을 모방해 활자를 주조하여 책들이 계속 전해지게 하였고, 남다른 총애의 표시로 술잔을 하사했던 일을 계승함으로써 출중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해마다 두 번 반시(泮試)를 시행하여 중엽(中葉)에 있었던 좋은 제도를 재현하고, 한 달이면 여섯 차례 빈대(賓對)하여 성조(聖祖)의 선정 구현에 몰두했던 일을 본받았다. 관예(觀刈)의 예를 거행하여 농삿일을 권하고 가체(加)의 습속을 금하여 사치 풍조를 없앴다.
그밖에도 범위를 가일층 확대하여 충절을 포장하고 공덕을 보답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황폐한 사당에 총광(寵光)을 내려 태백(泰伯)·중옹(仲雍)의 고상한 뜻을 표출하기도 하고, 단을 쌓아 명의 방효유(方孝孺)와 연자령(練子寧)의 높은 절의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풍성(風聲)을 수립하기도 했다. 곽(郭)·이(李)·순(巡)·원(遠)과 공로가 같은 이들을 나란히 실어 기울어진 국운을 다시 일으킨 공적들을 기록했고, 한(韓)·악(岳)·사(謝)·정(鄭)과 지조가 같은 이들을 똑같이 포상하여 나라 빼앗긴 억울한 마음으로 아픔을 참고 견딘 그들 뜻을 추모하기도 했다. 신축·임인년간에 순국(殉國)했던 자, 기사년의 항의(抗義)했던 자, 무신년의 종정(從征)했던 자, 임오년의 진절(盡節)했던 자들에 대하여도 혹은 즉석에서 감회를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그날 그때를 추상도 해보면서 숨어있는 사실 하나하나를 다 찾아 내어 그에 맞는 은유(恩侑)와 총록(寵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국초 이래 유문(儒門)의 여러 현자들에 대해서도 그가 남긴 저술을 읽고는 마치 아침에 만나고 저녁에 만날 듯이 그를 사모하여 예에 맞게 조두(祖豆)와 분필(芬苾)을 마련하였다. 그야말로 왕은 조종(祖宗)의 자리를 지키고 조종이 하던 정사를 그대로 하면서 가까운 신하를 대하면 곧 조종의 교목(喬木)이라고 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면서는 조종의 적자(赤子)라고 했으며,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 계획 하나 명령 하나까지도 그 모두를 조종의 것을 이어받아 그대로 실현하였다. 이렇듯 꼭 옛법만을 따랐기에 허물도 없었고 잊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제도 하나라도 고치려면 아주 조심조심 신중을 기하여 만년 억년을 두고 조종 유업을 후세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서경》에 이르기를 “대단하다 문왕(文王)이 남긴 교훈이여, 그를 잘 계승하였다 무왕(武王)의 열(烈)이여.” 하였듯이 왕도 그래서 열(烈)이 된 것이다.
왕은 생지(生知)의 슬기와 재주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크나큰 육합(六合)에서부터 머나먼 천세(千歲)와 삼교(三敎)의 같고 다른 점, 백대(百代)의 치세와 난세, 심지어 건문(乾文)·지지(地志)·갑병(甲兵)·전곡(錢穀)·의약(醫藥)·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이치는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일상의 말은 역시 《시(詩)》·《서(書)》·예(禮)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음양(陰陽) 운행의 묘리라든지 이기(二氣) 굴신의 오묘함 같은 것은 신들로서는 들어보지 못했었다.
왕은 남에게 총명(聰明)을 자랑한 적이 없었지만 매양 자리에 임하면 계독(啓牘)은 산처럼 쌓여 있고 그밖의 묘모(廟謨)·대장(臺章)·융정(戎政)·시사(試事)·형옥(刑獄)·재부(財賦)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좌우에서 쉴새없이 주달해도 그를 대응하는 데 있어 늘 여유가 있었다. 왕은 말하기를,
“옛분들이 오관(五官)을 일시에 함께 썼던 것은 꼭 재주만 남달라서가 아니라 다만 분수(分數)에 밝았던 것이다.”
했는데, 이 세상 모든 이치가 왕에게는 다 득(得)이 되었던 것이다.
남의 좋은 점을 취하기를 마치 강하(江河)가 터지듯이 했다는 대순(大舜)과 같이 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맞으면 아무리 소원하고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화기에 찬 얼굴로 받아들였고, 뭇 신하들도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그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었으며 말이 혹 성상 뜻에 거슬려도 위노(威怒)를 가한 적이 없었다. 사리에 닿는 말이면 그를 따르기를 구슬을 굴리듯 했으며 대각(臺閣)을 중히 여겨 언젠가 언자(言者)가 승여(乘輿)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정신(廷臣)이 그에게 죄 내릴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까마귀나 솔개의 새알을 깨뜨리면 봉황새가 오지 않는 법이다. 그가 임금 직무에 대해 말을 했으니 권장할 일이지 죄줄 일이 아니다.”
하였다. 구언(求言)의 하교를 자주 내리면서 언젠가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는 성왕 만년(晩年)까지도 바른 말 격한 논쟁을 하는 자들이 많았었는데 근일에는 할 말을 과감하게 하는 자가 없으니 내가 간언을 하게 만드는 성의가 없어서인가?”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선(善)이 다 왕의 것이었던 것이다.
현자를 목마르듯 찾아 경술(經術)로 발신한 자도 있고, 문학(文學)으로 한 자도 있고, 재유(才猷)로 두각을 내민 자도 있고, 세록(世祿)이나 훈구(勳舊)로 나온 자도 있었는데 혹은 그의 재능을 성숙시키기 위해 두고 기르기도 했고, 혹은 높이 선발하여 초천(招遷)하기도 했으며, 혹은 남들이 다 버린 속에서 추려내는가 하면 혹은 쌓인 죄를 탕척하고 쓰기도 하여 맛에 따라 모양에 따라 각기 그의 생김새대로 이동하고 말뚝감은 말뚝으로 쓰고 문설주감은 문설주로 썼다. 하늘이 사(私)가 없고 바다가 물을 가려 받지 않듯이 능력만 있으면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그 모두를 적재 적소에 썼던 것이다.
침전(寢殿)에다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 팔황(庭衢八荒)’이라는 네 글자를 침전 벽에다 대서로 써서 걸었으며, 또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하여 그 서(序)를 썼는데, 서에 이르기를,
“달은 하나요 물의 흐름은 일만 개나 되는데 물은 이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太極)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이다.”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갖가지 재주가 모두 왕의 쓰임이 됐던 것이다. 지학(志學)의 나이 때부터 그 조예가 벌써 상성(上聖)의 경지에 가 있었으나 도(道)를 바라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여 발분 망식을 하고 순서를 따라 가고 또 갔다. 경신년년에 와서까지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듯이 겸손하기만 하여 자신을, 나이 50에 49세 때의 잘못을 알았다는 거원(遽瑗)에다 비유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성인 중에도 더욱 성인이었던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자기 천성을 다 찾아 그대로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하면 모든 물건에 대하여도 그리할 수 있고, 모든 물건에 대해 그리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왕은 그래서 성(聖)이었던 것이다.


【원전】 47 집 294 면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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