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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 정조 054 부록 / 정조 대왕 행장(行狀)⑦

 이름 : 

(2005-12-06 23:22:00, 5907회 읽음)

정조 054 부록 / 정조 대왕 행장(行狀)⑦

6월 정묘일에 사자가 탄생하여 호칭을 원자(元子)로 정하고 백관들 하례를 받았는데, 중외의 신서(臣庶)들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내가 하늘이 내리신 복을 받고 말없이 도우시는 조종(祖宗)의 덕분으로 경술년 계미월 정묘일에 원자가 탄생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성현(聖賢)이 나시던 해이며, 이날은 또 자궁(慈宮)께 수(壽)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게다가 궂은비마저도 활짝 개여 햇살이 그림 같고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에 둘러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원자 울음소리가 품안에서 나오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어깨가 부딪치고 발에 차이면서 뛰어나와 거리를 메워서 있는 그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이라도 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에게는 하늘의 복을 누릴 만한 덕도 인심을 얻을 만한 선정도 없는데 나 한 사람의 기쁨에 대해 하늘이 기뻐해 주시고 사람들이 기뻐해주니 내 장차 무엇으로 하늘에 보답하고 사람들에게 보답하겠는가.
상제가 이 나라를 돌보사 우리에게 조윤(祚胤)을 주셨으니, 오늘로부터 국가 운명이 다시 계속될 것이며, 오늘로부터 조종의 공덕이 다시 유지될 것이며, 주(周)나라 본지(本支)의 시도 오늘을 시작으로 읊어질 것이며, 한(漢)나라 반석(磐石) 노래도 오늘을 시작으로 퍼질 것이다. 위로 자전과 자궁께서 애타게 바라시던 마음을 풀어드렸고, 아래로 신서(臣庶)들이 우러러 기다리던 숙원을 이루어준데다가 생년 생일까지 성인이 태어나신 해 또는 자궁의 수를 비는 경사스러운 날과 맞아떨어져 우리가 만년 억년 끝이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셈이 되었으니, 난들 어찌 하늘에 보답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에게 보답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내 한 번만 베푸는 것이 아니고 자주 베풀 것이니 그를 담당하고 있는 신(臣)은 재용이 떨어져간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들 마음이 화합하면 하늘 마음도 화합하여 비올 때 비오고 볕날 때 볕나 만물이 풍성하고 시절도 풍년이 드는 법이다. 더구나 경술년이라면 예부터 풍년 든 해가 많지 않았던가.”
하고, 이어 대사(大赦)를 했는데 그때 풀려난 자가 모두 1천 1백 54명이었고, 서울 외지 할 것 없이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이상, 사서(士庶)는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모두 가자(加資)를 했는데 그 수가 2만 5천 8백 10명에 달했으며, 1백 세 노인에게는 쌀과 육류를 내리고 각도의 해묵은 적곡 중 병신년 봄 이전의 문부에 마감 정리된 양만큼 모두 줄이거나 면제해주는 일을 단행했으며, 결세(結稅)·어세(漁稅)·염세(鹽稅)·장세(場稅)·사세(寺稅) 등 당연히 조세 항목에 들어있는 것들도 그 수를 감제(減除)하였다.
그리고 경연 신료에게 하교하기를,
“자궁의 하교에 ‘내가 그전에는 생일이 돌아와도 반가운 생각이 없었는데 명년부터는 그날이면 음식 차려 잔치도 하고 즐기기도 해야겠다.’ 하셨다. 내가 40년간이나 자궁을 모셔오면서 한 가지도 자궁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하교를 받고 나니 이제 자궁 뵈올 면목이 조금 서는 듯하다.”
하였다.
가을에는 주교(舟橋) 제도를 정하였다. 왕이 원침을 옮겨 모시고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전성(展省)할 예정을 세우고 강을 건널 때 용주(龍舟)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주교로 바꿔보도록 묘당(廟堂)에 명하여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상의 마음에 안 맞아서 상이 직접 생각을 짜내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만들고 그대로 실시했다.
그해에 큰 풍년이 들었는데, 감로(甘露)가 내렸다고 말하는 연신(筵臣)이 있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으로서는 풍년이 들면 그것이 최상의 상서이지 그 외의 다른 상서들은 바랄게 없는 것이다. 더구나 금년에는 큰 경사까지 겹치지 않았는가.”
하고, 도형(徒刑)·유형(流刑)에 처해진 자의 처첩(妻妾)이 유배지로 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해 허가해주도록 명했는데 그 역시 그해의 특별 은총이었다.
겨울에 건원릉(健元陵)과 목릉(穆陵) 원릉(元陵)을 배알했고, 《무예도보(武藝圖譜)》가 완성되었다. 경모궁(景慕宮) 대리 청정 당시 척계광(戚繼光)의 곤봉(棍棒) 등 6기(六技)에다 죽장창(竹長槍) 등 12기(十二技)를 더 보태 그것이 바로 18기(十八技)였는데, 왕이 거기에다 또 기창(騎槍) 등 4기(四技)를 더 늘리고 원도보(原圖譜)와 속도보(續圖譜)를 합쳐 인쇄하여 쓰도록 명했다.
15년 봄에 비변사에 명하여 원침 행행 때의 정례(定例)를 만들게 하고 정례 당상관을 차출하여 매 행행 때마다 그 일을 맡아 거행하게 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각 궁방(宮房)이 도서(圖署)를 남발하여 외읍(外邑)을 야금야금 침탈하는 폐단을 금하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임진년 이후로 토지와 토지 사이의 한계가 흐려져 주객(主客)을 구분하기 어려운 틈을 타 호우(豪右)들이 그를 독차지했기 때문에 공전(公田)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고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절수(折受) 제도를 창안했던 것이지만 그로부터 2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토지 사이의 경계가 이미 그어져 있으니 절수라는 명칭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속세(屬稅)의 법과 함께 중간에 다 포기했어야 했는데 절수라는 이름만 붙이면 금방 면세(面稅)를 해왔던 그 제도에 대해 늘 개운찮은 생각이 있어왔던 터다. 지금 궁방들이 도서를 남발하는 그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 나머지야 알 만한 일이 아닌가. 지금 새로 발족한 장영(壯營)이라고 거기에는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도 없고 멋대로 팔아먹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지금부터서는 엄한 단속을 재삼 강조하여 궁방이고 영문(營門)이고 아문(衙門)·조신(朝臣) 할 것 없이 별도로 하사받은 토지라고 하더라도 그 절급(折給)한 공문서에 만약 재가 인장이 찍혀있지 않으면 수령이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그 즉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왕은 항상 단종조 제신들에 대해 시대를 초월한 감회가 있어 어가가 노량(露梁)을 지날 때면 곧 육신사(六臣祠)에다 제물을 내리곤 하였다. 경기도 유생들이 상언(上言)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도 그 충효와 절의가 육신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창절사(彰節祠)에다 추향(追享)할 것을 청해 왔는데,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일전에도 노량을 지나다가 육신사가 나오기에 수레를 멈추고 탄식도 하고 행전(行殿)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어나는 감회를 금할 길이 없어 촛불을 밝히게 하고 유제(侑祭)의 글월을 입으로 부르며 쓰게도 했었다. 육신이야 물론 더없이 훌륭하지만 금성(錦城)·화의 같은 이들도 종실 속에서 그와 같은 절의가 나왔다는 것 그 얼마나 더욱 장한가. 그 두 사람 외에도 사육신(死六臣) 못지않은 이들이 많으니 지금 추배(追配) 때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사실 절의를 장려하고 충절을 포양하는 국가 정령에 부합되는 일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다방면으로 고찰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그때 영월부(寧越府)에 화재가 있어 불탄 민가 사이에 자규루(子規樓) 옛 터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단종이 기거하던 곳이었다. 도신이 그 사실을 알려오자, 왕이 이르기를,
“일이 마치 뭐가 느껴져서 그리된 것 같구나.”
하고, 이에 장릉 백성(柏城) 밖에다 단을 쌓아 당시 순의(殉義)한 제신들을 추배하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도록 명했는데, 정단(正壇)에 32인, 별단(別壇)에 1백 98인, 사실이 분명치 않은 자 8인, 연좌당한 자 1백 90인이었고 이어 배식록(配食錄)을 만들었던 것이다.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즉위 초부터 마음에 늘 잊혀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균역(均役)에 관한 이해(利害) 문제와 사노(寺奴)에 관한 폐단인데, 균역에 있어서는 감포(減布) 정책이 바로 만세까지 미칠 혜택인데도 그를 맡아 관리하는 신하가 왕의 의도대로 잘 집행을 못했던 것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늘 주장하시기를, 어염세(漁鹽稅)는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선무포(選武布)는 결과적으로 백성을 속이는 일이라고 하셨으므로 나도 선왕의 뒤를 이어 그것을 바로잡고 개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수요를 대체시킬 만한 재원이 없어 당장 논의는 못하고 있어도 내가 장영(壯營)을 신설한 것은 나대로의 뜻이 있어서 한 일로 단시일에 무슨 효과를 기대하기란 사실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사노 문제는 지금 백성들 뼈에 사무치는 폐단으로 노비에 관한 법보다 더한 것이 없어 선두안(宣頭案)을 볼 때마다 언제나 마치 내 몸에 병이 있는 듯이 느껴진다. 쇄관(刷官) 제도는 아주 없애서 폐단이 다소나마 바로잡혀지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각도에서는 찾아내는 일을 여전히 하고 있어 그 병은 고칠 약이 없다. 말하는 자들 중에 혹자는, 금년부터 시작하여 신해년에 제정한 법을 다소 수정해서 쓰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자는 기한이 만료되기를 기다려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또 과거 응시의 길을 열어주어 스스로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혹자는 보충대법(補充隊法)을 만드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그 읍에서 신공(身貢)을 받아 균역청(均役廳)으로 하여금 그 대신 값을 주고 사서 쓰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있는데, 그 모두가 다 미봉책에 불과한 말들이고 일단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그 이름을 없애버리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기자(箕子) 이래로 이미 정해진 명분을 하루아침에 싹 없앨 수도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천(私賤)들이 덩달아 너도나도 본받을 염려도 있다. 그렇다면 사노 폐단은 끝내 바로잡을 수 없는 문제란 말인가.”
하고, 이어 널리 각도에 자문을 구하라고 명했으나 결국 정론을 못 찾고 말았다.
여름에 홍수가 나서 한성부가 집들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기고 했다고 아뢰자, 각신(閣臣)과 옥당·사관 등을 오부(五部)·사교(四郊)·팔강(八江) 등지로 나누어 보내 위로하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그 일은 비변사 낭관들이 할 일이로되 특별히 그대들을 보내는 이유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에서 잊지 않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가을에 각도에 명하여 납육(臘肉)을 호서(湖西)의 예대로 경청(京廳)이 공물로 환산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과거에는 경영(京營)에 엽치군(獵稚軍)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옛날의 응사계(鷹師契)이다. 사냥을 나갈 때면 언제나 그 사냥꾼들이 열씩 백씩 무리를 지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마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하는 변고까지 있었으므로 왕은 그 폐단 때문에 꿩사냥을 하지 말고 대신 값으로 바치도록 명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는 또 멧돼지나 노루사냥도 꿩사냥과 다를 바 없다 하여 그것 역시 공물로 환산하여 하도록 명했다.
궁인(宮人) 이씨(李氏)에게 수칙(守則)이라는 작첩과 정렬(貞烈)이라는 호를 내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을 표하여 ‘수칙 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고 하였다. 이씨는 그전에 경모궁(景慕宮)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여인으로서 늙어 머리가 희도록 초막집을 그대로 지키며 사람들과도 접촉을 하지 않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느끼는 바 있어 표이(表異)의 은전을 특별히 베풀었던 것이다.
사릉(思陵)을 배알하고 어진(御眞)을 베껴왔는데 선왕조 때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베끼던 고사대로 한 것으로서 한 장은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경모궁의 망묘루(望廟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현륭원 재실(齋室)에다 봉안하였으니, 아침 저녁 정성(定省)의 뜻을 담은 것이다. 뒤에 화령전(華寧殿)에다 봉안하고는 각신(閣臣)에게 이르기를,
“열성조가 다 휘호(徽號)가 있는데 영릉(英陵)과 효묘(孝廟) 두 조(朝)만은 휘호를 받지 않으셨다. 내 어찌 감히 두 조의 성절(盛節)을 뒤따를 수 있겠는가마는 신축년 표제(標題) 때부터 제신들이 많은 말들을 했었는데 이제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리고 또 연월(年月)만으로 표제한 일은 또 열성조에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하였다.
겨울에 호남의 도신(道臣)이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자기 아비가 죽었는데 제사도 모시지 않고 사판(祠版)을 불태워버렸다고 아뢰었다. 그 당시 일종의 사도(邪徒)들이 서양(西洋)의 야소(耶蘇) 교리에 젖어들어 연경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여 저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익히고 하였는데, 그는 하늘을 속이고 귀신을 홀대하고 임금도 어버이도 다 버리고 윤기(倫紀)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명분(名分)이 뒤범벅된 교리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저들끼리 당여(黨與)를 결성하는 등 경기 지역과 양호(兩湖) 사이에서 나날이 번성 일로에 있었다. 그중의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권일신(權日身) 등이 더욱 두드러진 자들이었으며 최필공(崔必恭)·이존창(李存昌)도 밑바닥 층에서는 가장 깊이 빠져있는 자들이었다. 유사가 그들을 잡아두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형을 가하여 가지런하게 만드는 것은 덕으로 인도함만 못한 것이다. 내 장차 그 서적은 불태워버리고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만들겠다.”
하고는, 서울과 외지를 막론하고 집에 서양 서적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모두 관에 자수하도록 명하여 책은 모아 불태우고 가환·약용·승훈 등은 견책하여 저들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게 했으며 일신과 필공은 형조로 송치하고 존창은 호옥(湖獄)에다 가두는 등 형을 가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여 되도록 감화(感化)를 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이 그 도계(道啓)를 보고나서는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패역 무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충·상연에게 모두 대벽(大)을 적용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양의 강한 기운이 쇠퇴하면 음의 재앙이 고개를 들듯이 사설(邪說)이 퍼지는 원인은 정학(正學)이 밝지 않아서인 것이다.”
하고, 묘당(廟堂)과 각도에 명하여 경(經)에 밝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들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였으며, 또 명(明)나라 말 청(淸)나라 초기에 유행했던 패관 소설[稗官小品] 종류를 단속하고, 연경에 가서 서적 구입을 못하도록 금법을 거듭 엄히 했다. 그리고 영남 선비들이 사학에 물들지 않은 것은 바로 선정(先正)들의 유풍(遺風) 때문이라 하여 옥산(玉山)·도산(陶山) 등 서원(書院)에 제를 내리기도 하였다.
《악통(樂通)》이 완성되었다. 왕은 주자가 인정한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가 미처 관현(管絃)에 올려지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그를 다시 손질해서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하였다. 그보다 앞서 임인년 봄에 숙종(肅宗)조 고사를 본따 무예(武藝) 출신 및 일찍이 영의 교위를 지냈던 자 30명을 선발하여 번(番)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행랑채에 숙직하게 하고, 을사년에 와서 그를 장용위(壯勇衛)라 칭했으며, 또 척계광(戚繼光)의 남군(南軍) 제도를 모방하여 5개 사(司)에 25초(哨)를 두고 그해에 금려(禁旅)의 1번 50명을 감하여 장용위로 옮겼다. 그리고 액외 내금위(額外內禁衛) 규정을 준용하여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를 두고 10명은 사부(士夫)로 충원했으며, 또 선기대(善騎隊) 3초를 두어 훈련 도감의 경기 지역 승호군(陞戶軍)을 그것에 이속시켰다. 기마병·보병 합하여 경향(京鄕)의 군대가 3천 4백 50명이었는데 병조의 별부료 병방(別付料兵房) 규정을 준용하여 병방을 두고 군무(軍務)를 맡아보게 하고는 그를 이름하여 장용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백성으로부터 많은 조세를 거두어들이던 내수사 장토(庄土)를 없애고 양서(兩西)에는 둔전(屯田)을 두었으며 내외를 막론하고 필요 이상의 경비와 필요 이상의 인원을 줄이고 내탕의 돈을 출자하여 곡식을 각도에다 쌓아두고 병영의 용도에 쓰도록 했다. 그리고 또 제조(提調)를 두어 일찍이 호혜당(戶惠堂)을 지낸 사람을 골라 임명하였다.
16년 1월에 현륭원을 배알하고 2월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했다. 규장각(奎章閣)에 대제학을 두어 문형(文衡) 권내의 사람 중에서 왕지(王旨)를 받아 내각에 추천 임명하도록 했으며, 현직 제학(提學)이 재상 제수를 받으면 자연 올라가 대제학이 되고, 과거 직각(直閣)을 지낸 사람이면 전형 없이 자리가 나는 대로 곧바로 추천이 가능하며 대교(待敎)를 지낸 사람은 역시 남상(南床)으로 곧바로 추천이 되도록 규정을 정했다.
여름에 윤구종(尹九宗)을 친국하였다. 구종이 혜릉(惠陵)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았던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내가 선왕(先王)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 비록 재일(齋日)을 당했지만 친국을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그가 공초를 바쳤는데 진술 내용이 패역 무도하여 지레 죽고 말았었다.
영남 유생 이우(李瑀) 등이 막중한 일임을 빙자하여 의리(義理)를 구현한다는 구실로 임오년 일을 상소로 진술하였다. 왕은 그들을 불러 경(經)과 권(權)의 한계에 관해 개유하고 연본(筵本)을 가지고 돌아가 그 지방 인사들에게도 알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영남 유생들 상소 이후로 장주(章奏)가 쉴새없이 올라오고 관학 유생들까지도 장주를 올려 기어이 관철하려고 하였으므로 왕이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준엄한 하교를 내려 제신들이 합문 밖에서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그 어느해 일에 대해서는 감히 한 번도 분명하고 속시원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과연 원수를 숨겨두고 원한을 잊어서 한 일이겠는가? 옛날 선왕께서 갑신년 2월 20일에 대신 이하 제신들을 진전(眞殿) 문 밖에다 부르시고 어필로 손수 쓰신 구주 문자(口奏文字)를 반포하시며 이르기를 ‘만약 아무해의 일을 들먹이는 자가 있으면 구휘경몽(耉輝鏡夢)에게 적용했던 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이렇게 해야지만 네가 드러내지 못한 죽은 네 아비의 뜻을 밝힐 수 있을 것이고, 원통하고 애석한 내 마음도 설명할 길이 있을 것이며, 세신(世臣)들도 너의 본심과 아울러 네 아비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 대신 이하 제신들을 또 재전(齋殿)으로 불러 종통(宗統)을 바로잡는 일에 대한 윤음을 내리셨던 것이다. 그 당시 사실들은 모두 내가 병신년에 상소한 이후 세초(洗草)해 버렸지만 윤음과 진전에 올렸던 구주 문자(口奏文字)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그후 전석(前席)에서 다짐을 했었는데 만약 선왕이 승하하신 후 이제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여 갑신년에 했던 대답을 모두 번복해버리면 그게 어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듯 해야 하는 도리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당시 하교 시의 ‘통석(慟惜)’ 그 두 글자는 바로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니 내 그를 폐부에 새겨두었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제하려 해도 억제할 수 없는 것이 그 슬픔이요 막아버리려 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 감정이라서 부자간 천륜으로 볼 때 그 원수가 저기 있어 앉으나 서나 눈에 걸리었다. 그리하여 우선 임시 권도로 을미년 주토(誅討) 때 내가 직접 그 일을 대신 맡았는데 이는 꼭 선왕이 자리에 계실 때 하려고 해서였던 것이고, 그 이듬해 병신년 봄에는 내가 대리 청정을 하면서 눈물 어린 진정소를 올려 천지간 망극한 은총을 받고 차마 볼 수 없는 당시 기록들을 모두 세초(洗草)해 버리라는 특명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성상께서는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사자대(思子臺)·망자궁(望子宮)보다 훨씬 더 낫고 나도 이제 지하에 가면 볼 낯이 있겠다.’ 하시고,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하례를 올리도록 했으며 호(號)를 주신다는 윤음과 함께 어제의 유서(諭書)와 어필로 된 은인(銀印)을 내리셨다. 그리고 나에게 묘(墓)를 전성하도록 명하셨는데 이상이 대체적인 선왕의 본뜻이었던 것이다.
병신·정유 이후로 자주 일어난 역옥(逆獄)들이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해 그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지만 나의 집념은 바로 겉으로는 정사에서 형적(形迹)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는 내 할 도리를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다스릴 자는 다스리고 하여 위로 성은(聖恩)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아래로 내 이마에 땀이나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에 대해 북면(北面)을 하고 있는 조정 신료들로서 지금 이 시점에 나더러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내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을미년 이전 주토를 당한 자들처럼 난적(亂賊)이요 역신(逆臣)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0년 한 서린 마음으로 어떻게 차마 그 왕언(王言)을 말하며 그 장주(章奏)를 볼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사실은 점점 묻혀져 결국 차마 들출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후생들이 그 막중한 사실을 전혀 모르게 될 듯하여 영남 유생들이 왔을 때 불러서 접견하고 비답도 내렸는데 그것은 우선 그들을 효유(曉諭)해야겠다는 급급한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을 짐작하는 자는 그 비답을 보고 틀림없이 슬피 울었을 것이고 우매한 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신자(臣子)들이 어찌 차마 그 사건을 놓고 그것을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 협잡질을 할 계기로 삼기 위해 은연중 임금이 원수를 숨겨주고 원한을 잊고 있는 것처럼 책임을 위에다 돌리면서 감히 그들을 징토(懲討)한다는 데 가탁하여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다반사처럼 지껄이고 다닐 것인가. 그렇게 되면 조선 천하에 이른바 임금이란 자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밝히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경들은 그 방법을 생각해보라.”
하여, 그 하교를 계기로 중외가 모두 왕의 의중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하던 환단(壇)이다. 이 땅에 이 나라를 단군(檀君)이 처음 세우셨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무더기를 쌓고 하늘에 제를 올렸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국(大國)으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지 않았어도 참람된 데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원래 혐의가 있는 일이면 그를 분명히 하는 데 엄했기 때문에 광묘(光廟) 이후로 ‘환단’을 고쳐 ‘남단’으로 불러왔다. 대체로 군·국·주·현(郡國州縣)이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 제 올리는 곳으로서 경건한 마음으로 조촐하게 모시는 정성이야 환단이거나 남단이거나 그 이름이 다르다 하여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문헌상으로 빠져 있고 담당자들은 그들대로 인습에만 젖어왔기에 현재 행하고 있는 의식은 도리어 채소만으로 간단히 차리는 농잠(農蠶) 제사만도 못한 실정이니 그를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신과 논의하여 올바르게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에 광릉(光陵)을 배알하고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사서인은 나이 80세로서 지난 병진년과 을해년 선왕의 행행 광경을 구경하고 지금의 행행까지 본 자에게는 모두 한 자급씩 더해주고 나이 1백 세가 된 자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얹어주었으며 백성들에게는 그해의 향곡(餉穀)과 적곡(穀)에 있어 모비(耗費)분을 특별히 견감하였다.
17년 정월 초하룻날 선원전(璿源殿)에 잔을 올렸다. 왕은 즉위한 이후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진전(眞殿) 배알을 해왔었는데, 그날은 영종의 나이 만 1백 세가 되는 날이라 하여 대신(大臣)·경재(卿宰)·시종(侍從) 모두 반열에 참여하도록 명하고 예를 마친 후에는 지난 병신년 이전에 본 품계에 있었던 아경(亞卿)·하대부(下大夫)에겐 모두 한 급씩 가자하고 경외(京外)의 백세 노인들에게는 가자와 함께 쌀과 비단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초하룻날 아침에 묘궁(廟宮) 배알을 하고 나니 나도 선왕과 똑같은 마음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행여 먹을 것을 대줄까 바라는 저 삼방(三方)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 굶주려 구렁을 메우지나 않았는지? 밤낮으로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때라고 간절하지 않겠는가마는 올해 배알 끝에 그날의 그 마음은 더욱 간절한 바 있다.”
하고, 홍화문(弘化門)에다 연(輦)을 멈추고 수계(隨計)의 관리를 불러 접견했는데 하나는 그 문이 바로 선왕조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던 문이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탕에서 내린 진휼한 물자를 우선 지방관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어 내탕의 돈과 후추를 삼남(三南)으로 나누어 보내 진휼 물자에 보태게 하였다.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그전의 명인 석학들이 모두 내수사(內需司)를 없애야 한다고 말들 했는데 실지로 살펴보면 우리 나라 내수사는 당나라때 덕종(德宗)과 현종(玄宗)이 사용(私用)하던 경림고(瓊林庫)·대영고(大盈庫)와는 다르다. 궁중의 1년 치 씀씀이가 각기 일정한 수량이 정해져 있는데 지금 만약 내수사를 없애고 탁지부에다 맡긴다면 탁지부로서는 어떻게 운영해나갈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되도록 절약하여 1년 쓰고 난 나머지를 다른 창고 하나에다 별도로 저장하고 그 이름을 보민고(保民庫)라 하여 수재나 한해에 대비하게 하고 있는데 전후로 나간 진휼 물자도 다 거기에서 나간 것이다.”
하였다.
현륭원을 배알하고 수원부(水原府)를 화성(華城)이라 이름했으며, 부사(府使)를 승격시켜 유수 겸 장용 외사(留守兼壯勇外使)라고 하고,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의 병방(兵房)을 장용사(壯勇使)로 고치고, 문첩(文牒)에는 대장(大將)이라는 칭호를 써 마치 어영사(御營使)를 칭하여 어영 대장(御營大將)이라고 하듯 했으며, 또 도제조를 두어 마치 경리영(經理營) 도제조를 삼공(三公)이 으레 겸임하듯 하는 식으로 했다. 그리고 호위 대장(扈衛大將)도 같은 청(廳)으로 소속시켜서 내영 외영 제도를 비로소 완비하였다.
3월에 숙선 옹주(淑善翁主)가 태어났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시임·원임의 각신(閣臣)과 각신의 자제들 그리고 승지·사관 등을 불러 39명 수를 채웠는데, 그것은 그해가 계축년이고 그달이 모춘(暮春)이었기 때문에 난정(蘭亭)의 계모임을 모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신들을 명해 내원의 볼 만한 곳을 마음껏 구경하게 하고 이어 술과 음식을 내려 각기 흐르는 물가에 와 마시고 읊게 했다가 밤이 되어서야 파했는데 그를 두고, 태평성대의 성대한 일이었다고 한때 전송하였었다.
그때는 경사가 거듭 겹치고 조야(朝野)가 안정된 시기였다. 왕은 화기를 불러들이고 국가 운명을 장구히 하자면 백성들의 답답증을 풀어주고 막혀있는 것을 터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에 양전(兩銓)에 명령을 내려 일대 회탕(恢蕩) 정책을 펴도록 하고 혹은 중비(中批)를 내리기도 하였으므로 가끔은 몇 10년씩 묵혀 있다가 비로소 갓을 털고 일어선 자도 있었다.
가을에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 이하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내 그 아무해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차마 말못할 것들이기에 감히 말하지도 않지마는 금등(金) 한 가지 일만은 경들에게 말 한마디 해두고 싶었는데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선왕께서 언젠가 휘령전(徽寧殿)에 납시어 사관(史官)도 물리치고 어서(御書)로 된 문자 하나를 신위(神位) 밑 요 속에다 넣어두셨는데 병신년에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세상에 알릴 때 비로소 꺼내보았었다. 경들도 한번 보라.”
하고는, 금등 등본(謄本) 두 구절을 꺼내보였는데, 영조가 경모궁(景慕宮)의 죽음을 뒤늦게 슬퍼하여 쓴 어제였었다. 이에 왕도 울었고 제신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지역 내의 여러 능들도 두루 배알했다.
겨울에 대신 이하 제신들이 자전(慈殿)과 자궁(慈宮) 그리고 경모궁에 대해 유양(揄揚)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고 또 왕에게도 존호 올릴 것을 청하자, 자궁께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그 말미에 이르기를,
“내게도 존호를 올리겠다고 하니 경들이 임방(林放)만 못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존호 올리는 제도가 비록 삼대(三代) 이후에 비롯된 제도이나 그동안 명철한 임금들이 모두 그 일을 행하고 그 제도를 더 다듬고 손질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위로 하늘의 사랑에 보답하고 아래로 뭇 백성들 뜻을 따라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현상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방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전장(典章)이 있어 나도 일찍이 선왕께 정성을 다해 빌고 간청하자 그 겸손하신 선왕께서도 애써 당신 뜻을 굽히고 따라주신 일이 있었다. 나라고 어찌 감히 유별나게 많은 사람들 뜻을 어기고 물리치기야 하겠는가마는 내 말을 듣고도 내 뜻을 거스른다면 그는 결코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차마 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예(禮)가 원래 인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의리에 의하여 예가 제재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숭봉(崇奉)은 내가 말하는 숭봉과는 다르다. 내 감히 최고의 의리를 부질없이 경전(經傳)에 그냥 기록되어 있게만 해서 앞으로 천년 이후에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있다면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체득하여 나로 하여금 내 초지(初志)를 이루게 하리라. 나의 초지라면 오직 ‘장순(將順)’ 그 두 글자뿐이다.”
하였다.


【원전】 47 집 294 면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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