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무예 자료     사학 자료     이미지 자료     기사모음     박사논문

 [논문] 검무 복원을 위한 시론

 이름 : 

(2007-12-30 12:05:03, 7486회 읽음)

검무 복원을 위한 시론(상)

윤석산__ 서울교구장·한양대 국문학 교수

1. 서론

   일반적으로 검무(劍舞)를 검기무(劍器舞), 황창랑무(黃倡郞舞)라고 한다. 무사의 복장인 전립(戰笠), 전복(戰服), 전대(戰帶), 전식(戰飾) 등을 하고, 네 명 혹은 그 이상의 무원(舞員)들이 긴 칼을 들고 서로 겨루듯이 대무(對舞)를 하며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검무는 본래 처용무(處容舞)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행하던 가면무(假面舞)였다. 이러한 가면무가 조선조에 들어서 궁중정재(宮中呈才)로 채택이 되어, 궁중에서 행하는 연희(宴戱)가 되면서 가면을 벗고 추는 춤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서 칼도 무당들의 무구(巫具)의 하나인 길이가 짧고 손잡이가 돌아가는 칼이나 칼날이 무딘 단검으로 바뀌었다.1) 이와 같은 일반 검무에 비하여 수운 선생이 추었다는 검무는, 수운 선생 스스로 종교적인 수행을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추던 춤이다. 또한 검도 긴 진검(眞劍)이나 무구(巫具)의 하나인 짧고 손잡이가 돌아가는 칼이 아니라, 목검(木劍)이 된다.
   또한 검무를 추기 위하여 수운 선생은 「검결(劍訣)」을 짓기도 하였다. 즉 수운 선생은 바로 이 「검결」에 맞추어 검무를 추었던 것이다. 수운 선생이 지었다는 이 「검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수운 선생의 검무와 연결을 지을 수 있다. 즉 「검결」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사용된 노랫가락이 되는 ‘음악’과 「검결」의 가사가 되는 ‘시’, 이 양면은 모두가 검무와 상관관계를 지닌다. 「검결」이라는 ‘노래’가 수운 선생이 추었다는 검무의 배경 음악이 된다면, 이 「검결」이라는 ‘시’, 곧 가사는 곧 검무의 대본(臺本)이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상 오늘 수운 선생이 추었다는 검무는 그 원형을 찾을 수가 없다. 즉 수운 선생이 조선조 조정에 피체가 되어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때, 당시 취조관들에 의하여 검무가 ‘난을 꾸민다는 빌미’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해월 선생이 스승인 수운 선생의 가르침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목판으로 간행할 때 「검결」을 삭제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동학 교단에서 이 검무를 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제단을 설치하고 천제를 지낸 뒤에 검무를 추던, 초기 동학의 종교의식 대신에 해월 선생은 인등제(引燈祭), 구성제(九星祭) 등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수운 선생이 추었다는 ‘검무’의 원형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가 없음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차제에 김광욱 전 교령이 주관이 되어 <용담검무보존회>를 만들고, 검예가인 장효선 동덕을 중심으로 두 차례에 걸친 검무 공연과 천도교의 각종 행사에서 검무의 시연을 선보인 바 있다. 이와 같은 공연과 시연은 천도교 동덕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40년간 잠들어 있던 수운대신사의 검무가 오늘 다시 재현된다는 설렘과 함께, 검무를 통한 천도교단의 종교 예술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기대를 걸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140년간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보이지 않던 검무가, 과연 그 원형 그대로 재현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오늘 이렇듯 공연되고 있는 검무를 어떤 면에서 수운대신사의 검무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뜻있는 동덕들에 의하여 제기되기도 하였다. 본 논문은 바로 이와 같은 많은 뜻있는 동덕들의 격려와 우려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 검무를 과연 어떻게 복원하여 재현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글이다. 140년간이나 교단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 형태를 보이지 않던 검무를 어떻게 복원하고 또 재현할 것인가는 지난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어려움과 함께 본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문헌을 중심으로 수운 선생의 검무가 한국 검무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수운 선생 검무의 역사적 위상을 찾고, 나아가 수운 선생이 추던 검무는 어떤 성격,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어서 검무의 복원을 위하여 「검결」을 분석함으로써 검무의 정신이나, 검무라는 춤 동작, 나아가 검무의 전반적인 구조 등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2. 수운 선생 검무의 역사적 의의


   검무의 기원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에 검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황창랑(黃倡郞)이라는 소년이 백제의 임금을 시해(弑害)하기 위하여 백제의 궁중에 들어가 검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첨(李詹)이 변별하여 말하기를 “을축년(1385) 겨울에 계림에 객으로 갔을 때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鄕樂)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가면을 쓴 동자가 뜰에서 칼춤을 추기에 물어보았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신라 때 황창(黃昌)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나이가 15,6 세이나 칼춤을 잘 추었다. 그는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원하옵건대 임금님을 위하여 백제의 왕을 쳐서 임금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하였다. 왕이 허락을 하니, 곧 백제로 가서 시장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의 구경꾼들이 담처럼 늘어섰다. 백제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을 추게 하고 구경하니 황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드디어 좌우의 신하에게 살해되었다. 그 어미가 듣고 너무 슬퍼 눈이 멀었다. 사람들이 그 어미를 위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가면을 쓰고 춤을 추게 하였다. 그 어미가 기뻐 눈물을 흘리고 이내 눈을 떴다.2)
   이러한 기록은 다소 차이는 있지만,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도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즉 검무의 또 다른 이름이 ‘황창랑무’가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연원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황창랑이 백제의 왕을 죽이기 위하여 검무를 추었다는 사실은 이미 그 이전부터 검무가 신라나 백제 등지에서 일반적으로 공연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의 팔청리 고분이나 약수리 고분, 미천왕 고분, 수산리 고분 등의 벽화에서도 칼을 가지고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3)을 보아 신라나 백제 이외에 고구려 등지에서도 이미 황창랑이 검무를 추기 훨씬 이전부터 검무가 널리 성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황창랑과 같이 검무를 통하여 상대를 암살하려 했던 기록은 중국 측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서한연의(西漢演義』 또는 『초한지(楚漢志)』 등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의 사이에서 유방을 살해하고자 항장(項莊)이 홍문연회(鴻門宴會)에서 검무를 추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기도 하다.4) 이렇듯 검무는 ‘칼(劍)’이 지닌 ‘상무(尙武)’의 정신과 ‘춤(舞)’이 지닌 ‘기예(技藝)’의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이룩한 예술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검무는 ‘상무’의 정신을 강조하는, 그러한 무장들에 의하여 주로 추어지던 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위에 인용된 『동경잡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황창랑무는 매우 연희적(演戱的)인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고 하겠다. 즉 황창랑무의 기원이 되는 것은 첫째 황창랑의 어머니가 너무 슬퍼하여 눈이 멀게 되자, 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가면을 쓰고 춘 것이다. 즉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춘 춤이 된다. 둘째 황창랑의 죽음을 애도하고 나아가 그가 보인 충절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춤을 춘 것이다.5) 즉 황창랑무의 기원에는 충절의 정신을 기린다거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춘다는 ‘의식(儀式)’으로서의 면이 강조되고 있지, 상무(尙武)와 같은 칼이 지닌 무인으로서의 정신은 배제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황창랑무’로 우리나라 검무의 기원을 삼고 있다는 것은 곧 검무가 지닌 ‘상무’의 정신보다는 ‘기예’가 주를 이루는 연희로서, 또는 의식을 행한다는 제의적(祭儀的)인 의미가 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검무가 궁중의 정재로 채택된 것은 순조 때부터이다. 순조는 임금으로서 치적을 쌓은 것은 없지만, 이때에 이르러 궁중정재가 크게 일어나, 가히 궁중정재의 황금기라고 일컬을 만했다. 즉 순조의 태자인 효명(孝明)이 무용에 관하여 특별한 재능과 관심이 있으므로 해서 궁중정재가 많이 다듬어지고 또 새로이 채택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검무 역시 궁중정재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6)
   이렇듯 궁중정재로 채택이 된 검무는 그 전까지 가면을 쓰고 추던 것을 가면을 벗고 추게 되었다. 즉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處容舞) 등의 ‘가면무(假面舞)’란 일반적으로 악령을 쫓는다는,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주술적 의미가 담긴 것인데,7) 궁중정재로 채택이 되면서 이러한 악령을 쫓는다는 등의 제의적인 의미가 배제되고, 연희, 곧 놀이로서 의미가 더욱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검무에서 쓰이던 긴 칼이 무당들의 무구인 손잡이가 돌아가는 짧은 칼이나 날이 무딘 단검으로 바뀌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짧은 칼을 쓰면서, 그것도 손잡이가 돌아가는 칼을 쓴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칼이 지닌 무(武)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라고 하겠다. 즉 20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러 검무는 ‘검(劍)’이 지닌 ‘무(武)’로서의 의미, 또는 ‘제의(祭儀)의 성격’ 등은 완전히 사라지고, ‘무(舞)’라는 ‘춤’의 의미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현존(現存)하는 검무에 비하여, 수운 선생이 처음 창안하고 또 추었다는 검무는 진검이 아닌 목검을 쓰며,8) 동학의 종교적 의식에서 주로 시행되던 춤이다.9) 따라서 연희적인 성격보다는 오히려 의식(儀式)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특히 달이 밝은 밤이면 산정에 올라 하늘에 제(天祭)를 지내고, 이러한 종교적 의식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목검을 손에 쥐고 검무를 추며, 의식에 참가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검결」을 불렀다고 한다.
   수운 선생의 검무가 처음 그 모습을 보인 때가 언제인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검무의 배경 음악이며 동시에 대본으로서의 기능을 한 것으로 생각되는 「검결」이 처음 지어진 시기를 상정하여, 수운 선생이 동학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펴기 바로 전인 경신년(庚申年, 1860)으로 추정된다.10) 그러나 이 검무가 종교적인 의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수운 선생이 본격적으로 동학을 세상에 펴기 시작한 신유년(辛酉年, 1861) 6월 이후라고 생각된다. 즉 수운 선생이 검무를 여러 제자들과 함께 강도(講道)를 하던 중에 추었다는 기록11)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수운 선생의 검무는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전래되고 있는 여타의 검무들이 지닌 역사적인 성격에 비하여 어떠한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래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검무는 그 형태적인 면에서, 황창랑과 같이 ‘무사들이 추던 춤’에서 ‘가면을 쓰고 추는 가면무(假面舞)로서의 검무’로, 다시 이 가면무에서 ‘가면을 벗고 추는 검무’로, 또 이와 같은 검무에서 ‘손잡이가 돌아가는 짧은 칼을 쥐고 추는 검무’로 변천되어 왔다. 이와 같은 검무의 변천은 곧 ‘상무(尙武)의 정신을 나타내던 검무’에서 처용무(處容舞) 등과 같이, 일반적인 가면무가 지닌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제의적(祭儀的) 성격이 강한 검무’로 변천되고, 또 이에서 ‘궁중정재라는 연희적(演戱的)인 의미가 강조된 검무’로 전이된 것이며, 또한 이에서 기녀들이 추는 ‘예능적(藝能的)인 면이 강조된 검무’로, 그 역사적 흐름과 함께 변천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수운 선생이 추었다는 검무는 비록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검무이지만, 그 성격이 ‘연희적’, 또는 ‘예능적’이 아닌, 우리나라 전래의 검무 중 가장 위 시대에 속하는 ‘상무적 의미를 띤 검무’나 ‘제의적(祭儀的) 검무’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수운 선생의 검무는 동학의 종교적 의식에서 거행되었으며,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가면(假面) 등의 장치는 없었어도, 수운 선생이 조선조 조정에 체포가 되어 관의 취조를 받을 때에 “한울님으로부터 서양의 침공을 물리치도록 받았다.”고 직접 진술을 하기도 한다.12) 즉 ‘서양의 침공’이라는 ‘사악(邪惡)함’을 물리치고 민족과 국가를 보호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경사(慶事)로움’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의미를 이 검무는 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수운 선생의 검무가 여타의 다른 검무들과는 다르게 ‘목검(木劒)’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제국에 대한 서양의 침공으로부터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쇠로 된 진검(眞劍)으로 검무를 추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목검’을 가지고 춤을 추었는가. ‘목(木)’은 곧 ‘동(東)’을 의미하고 있다. 진검을 이루는 ‘쇠’는 ‘금(金)’으로 곧 ‘서(西)’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서양을 뜻하는 쇠로 된 ‘진검(眞劍)’이 아닌, 동방을 뜻하는 ‘목검(木劒)’을 사용하는 검무, 곧 검무를 추며 수운 선생은 서양을 물리치고자 염원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늘 수운 선생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칼춤을 익히는 자는 장차 보국안민하여 공훈을 세울 것”13)이라고 하였다. 즉 수운 선생의 검무는 그 협의의 면에서는, 19 세기 중엽 조선조를 유지시켜 왔던 유교적인 질서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이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체계가 나타나지 못하므로 해서 겪게 되는 아노미 현상, 그리고 겹쳐지는 정치적 경제적인 어려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양의 침공이라는 민족적인 위기 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신념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다 광의의 면에서, 수운 선생의 검무는 선천(先天)으로 이야기되는 혼란의 시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후천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우주적 차원에의 벽사진경(僻邪進慶)이기도 한 것이다.
   즉 검무는 수운 선생의 중요한 종교적 체험인, 한울님이라는 신(神)의 계시에 의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는다는 종교적 주술 기능을 지닌 춤이며,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차원의 삶인 후천을 열어가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과 함께 추던 춤이 된다. 그러므로 이 검무는 한울님께 제를 지낸다는 동학의 제천의식(祭天儀式) 등, 중요한 종교적 의식에서 거행되던 춤이며, 나아가 검무가 지닌 의미의 측면에서 우리나라 검무의 가장 오래된 상고시대의 검무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검무는 ‘연희적’, 또는 ‘예능적’인 면에 머물지 않고, 비록 목검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검무의 본질인 ‘제의적인 면’과 ‘무예적 기교’가 함께 어우러진 검무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수운 선생의 검무는 우리나라의 검무가 오랜 역사적 흐름을 거쳐오는 동안 약화되고 또 상실했던 ‘제의적인 면’과 ‘무예적인 면’ 모두를 다시 재현시키며 수운 선생에 의하여 복원된 검무이다.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용담검무가 지닌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오늘 수운 선생의 검무가 복원되고 또 재현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면, 곧 ‘제의적이며 또 무예적’인 면이 함께 살아나는 검무이어야 할 것이다.



3. 수운 선생의 검무와 「검결」


   수운 선생의 검무와 「검결」은 서로 표리를 이루는 관계에 있다. 앞에서도 거론한 바와 같이, 「검결」은 노래를 부를 때 사용된 노랫가락이 되는 ‘음악’과 「검결」의 가사가 되는 ‘시’, 곧 음악과 가사 모두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검결」이라는 ‘노래’가 수운 선생이 추었다는 검무의 배경 음악이 된다면, 이 「검결」이라는 ‘시’, 곧 가사는 곧 검무의 대본(臺本)이 된다고 하겠다. 「검결」은 그 형식상 수운 선생의 다른 가사 작품과는 다르게, 매우 짧은 형식인 단가(短歌)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 형태적으로는 가사의 기본적 율격인 4·4조의 연속을 유지하고 있지만, 불과 10행에 그치는 매우 짧은 형식의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한문투의 표현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한문투가 지닌 장점 중의 하나인, 매우 간결하며 함축적인 표현의 양상을 잘 살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수운 선생의 가사 작품인 『용담유사』 소재 여덟 편의 작품은 모두 수운 선생 자신의 종교적 가르침을 보다 문학적으로 담아낸 작품14)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검결」은 이들 『용담유사』 소재의 가사 작품들과는 다르게 보다 종교적 성취감의 극대화를 극적으로 노래한 작품으로, 동학이 지향하는 바, ‘시천주(侍天主)의 정신’, 나아가 이러한 정신의 고양된 상태, 또한 동학이 지향하고 있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자 하는, 그러한 정신적인 희열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검결」은 수운 선생의 다른 가사 작품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교의를 담은 작품들과 같이 동학의 교도들에게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사용되었기보다는, 제천 등의 종교적 의식의 장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작품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종교의 의식 속에서 「검결」을 부르고, 또 당시의 동학 교도들이 목검을 쥐고 검무를 춤으로 해서, 이는 마치 새로운 시대를 향한 혁명을 고취하는 의식으로 일반인들에게 보일 수 있는 여지 또한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면 때문에 「검결」은 수운 선생이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던 당시, 매우 중요한 자료로 관에 의하여 채택되게 된다. 즉 ‘혹세무민(惑世誣民)과 반역(叛逆)을 꾀하였다.’는 죄목을 씌우기에 가장 적합한 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수운 선생을 문초하고 처형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 1801∼1868)이 올린 장계는 다른 사안보다도 「검결」과 ‘칼춤’, 즉 검무에 관계되는 내용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장계」 곳곳에 「검결」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수운 선생의 여러 저술 가운데 유독 「검결」 만이 전문(全文)이 한역(漢譯)되어 실려 있기도 하다. 특히 수운 선생의 문초 시에, 수운 선생 스스로의 가르침인 ‘천도와 동학’을 논한 저술인 「논학문(論學文)」 등을 언급하는 자리에서는 오히려 취조관들이 논지(論旨)를 왜곡시키고 있으면서도, 「검결」과 ‘검무’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추궁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검결」과 ‘검무’를 통해 수운 선생을 반역의 혐의로 몰아가고자 했던, 당시 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수운 선생에 대한 문초는 「검결」과 ‘검무’를 중심으로, 태평한 시대에 반란을 도모하기 위한 취당(聚黨)으로 결론이 내려진다.15) 이러한 관의 판결과 수운 선생의 처형 이후에 「검결」과 검무는 동학 교문에서도 기피하는 노래와 의식이 되었고, 후일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 등에 의하여 동학의 경전이 판각(板刻)될 당시,16) 「검결」은 이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또한 ‘검무’ 역시 동학의 의식에서 사라지고, ‘인등제(引燈祭)’, ‘구성제(九星祭)’ 등으로 그 종교의식이 바뀌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17)
   그후 「검결」은 관변기록 등을 바탕으로 다시 복원되어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의 별편으로 편입되게 된다. 나아가 한역되어 표기된 관변기록을 바탕으로 가사가 복원되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욱 한자투의 표현이 현저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다음호에 계속>










윤석산__ 서울교구장·한양대 국문학 교수


검무 복원을 위한 시론(하)


   이와 같은 「검결」 및 검무가 겪은 역사적 수난에 의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검결」 및 검무는 대체로 혁명적 의식을 고취하는 노래로 인식되었고, 또 그러한 방향에서 연구되어 왔다. 특히 수운 선생이 지향하던, 후천개벽이 ‘정신적 개벽’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겠다는 그러한 정신과는 다른, 보다 직접적으로 혁명을 고취시키는 노래라는 측면에서 고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수운 선생 스스로 지지자들을 모아 정치적인 변혁을 꾀하려고 했다는 그 증거를 이 「검결」이나 검무에서 찾는 견해 또한 나오게 된다.18)
   그러나 「검결」은 이러한 외적인 측면과 함께,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종교적 성취감의 극대화를 보다 극적(劇的)으로 노래한 작품으로, 그 내면에 동학이 지향하고 있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자 하는, 그러한 정신적인 희열을 매우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다. 즉 「검결」은 외양상 ‘일전(一戰)을 불사하는 혁명적 변혁’을 꾀하는 노래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종교적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충일된 정신의 고양 상태’의 표출, 또는 이러한 정신의 고양을 통하여 지향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로의 열망을 표출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검결」과 검무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은 두 모습, 즉 「검결」이라는 노래가 지닌 외적인 모습과 그 내면성에 포괄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이가 지닌 본질에 보다 명확하게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검결」이 지닌 외적인 모습과 내면적인 면을 깊이 있게 분석함으로써 「검결」을 배경 음악으로, 또 「검결」을 검무를 추는 대본으로 삼아 수운 선생이 추었다는 검무를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검결」 분석을 통한 검무의 복원


   「검결」이 창작된 시기는 수운 선생이 무극대도(无極大道)를 한울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한 경신년(1860)의 후반쯤이 된다. 이때 같이 쓰여진 「용담가」 등의 가사는 수운 선생의 다른 한문 저술들19)과 함께 동학의 종교적 교의를 담은 글들이 된다. 또 주문 등은 종교적 수행을 위한 글들이다. 이러한 여타의 글들이 지닌 성격으로 보아, 「검결」 역시 다만 혁명을 위한 노래만이 아니라, 종교적 수행을 중요한 모티브로, 동학의 종교적인 의식을 위한 노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수운 선생은 이렇듯 ‘칼’을 하나의 상징물로 자신의 종교적 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을 쓰고 또 이 ‘칼’로 추는 춤인 검무를 하게 되었는가? 이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첫 번째로 수운 선생은 ‘문(文)’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았지만, ‘무(武)’에 대한 관심 역시 이에 못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운 선생의 선친인 근암공(近菴公) 최옥은 글을 읽는 선비로 영남 일대에 이름이 알려졌던 사람이었지만, 수운 선생 자신이 늘 선친인 근암공 못지 않게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선조는 병자호란에 공을 세운, 자신의 6대조가 되는 최진립(崔震立) 장군이다. 즉 수운 선생은 「안심가」 등에 “우리 선조 험천(險川)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 보세.”20)라고 노래함으로써 무장(武將)으로서 나라에 공을 세운 최진립 장군을 늘 마음으로 칭송하였고, 자신이 이렇듯 세상에 떳떳이 서 있는 것 역시 바로 이와 같은 선조의 음덕(陰德)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1)
   이러한 생각이 수운 선생으로 하여금 무장(武將)의 표상인 ‘칼’이라는 무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의식과 충일을 노래하게 한 하나의 작은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수운 선생 스스로 무(武)를 연마한 듯한 기록이 동학의 많은 기록 중에 나타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동학의 많은 기록에 의하면, 수운 선생은 한 젊은 지식인으로서 세상을 근심하며, 우울한 심사로 세상을 보내며, 한때 무예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주유팔로(周遊八路)의 길을 떠나기 전, 활쏘기 등 무예의 길을 버렸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22)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수운 선생은 어려서부터 무(武)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무의 길을 가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영향이 수운 선생으로 하여금 「검결」을 짓고 또 검무를 추게 하였으며, ‘칼’이라는 무(武)의 상징을 통하여 자신의 종교적 고양 상태, 내지는 종교적인 희열을 표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로 검무(劍舞)라는 춤이 지니고 있는 흥과 가락, 그리고 춤사위를 수운 선생은 다분히 종교적인 의식으로 살린 것으로 생각된다. 흥과 가락, 그리고 춤사위가 지니고 있는 율동적 효과와 칼이 지니고 있는 상징이 한데 어울려 동학이 지향하는 바, 후천개벽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혁의 의지’를 고취시켜 주고 있는 동시에, 정신의 고양도 극도로 높여 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칼춤과 칼노래를 통한 정신의 고양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희열과 통하는 것으로,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또는 한울님이라는 ‘신(神)과 내가 하나가 되는’ 종교적 극치에 이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춤과 흥과 가락이 지닌 검무의 효과는 이 검무의 가사가 되고 있는 「검결」의 표현 양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검결」은 “시호시호(時乎時乎)” 등의 구절을 반복하거나, “좋을시고 좋을시고” 등의 동어를 반복하고 있어, 이는 의미의 전달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구조적으로 ‘반복과 상승’의 효과를 높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검결」은 그 시적 구조가 “시호 시호 이내 시호” 하는 반복을 통한 정조(情調)의 ‘상승적(上昇的) 효과’와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 일신(一身)으로 비껴 서서 /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時乎時乎) 불러내니”의 다시 갈아 앉히는 ‘평정의 모습’. 그런가 하면,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데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와 같이 다시 고취되는 정조의 ‘상승’이라는, ‘상승·평정·상승’의 형태적 미를 지닌 작품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태는 노래나 춤을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한 것이며, 노래나 춤을 통해 의식을 고양시키고 또 절정에 달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검결」은 ‘칼’이라는 상징물과 함께 가사 표현의 반복적 기능이 지닌 상승의 효과, ‘상승과 평정’이라는 구조적 변용, 그리고 춤과 가락이라는 복합적인 요소를 이에 첨가함으로써 종교적 의식을 통해 고취시키고자 했던 ‘시대적 변혁 의지’와 ‘종교적 정신의 희열’을 모두 아우른 격조 높은 작품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승·평정·상승’이라는 「검결」이 지닌 구조적인 면에서 검무가 지닌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검결」이 지닌 구조적인 면이 검무 전반을 이루는 ‘구성’의 어떤 형식이 된다면, 「검결」이 지니고 있는 내용의 분석을 통하여 검무가 시연되기 위한 춤사위를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기록 전승되는 「검결」의 전문을 단락에 따라 부분 부분 나누어 인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춤사위를 재현해 보고자 한다.

時乎時乎 이내 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검결」은 보다 직접적으로 호소하듯, 강한 정서적 반응을 드러내고 있는 노래이다. 즉 “때가 왔구나 때가 왔구나(時乎 時乎). 다시 오지 못할 그때가 왔구나(不再來之 時乎).” 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는, 그 시작에서부터 ‘무엇을 도모할 가장 좋은 때’를 만남에 대한 벅찬 희열과 고조된 감정을 작품 전면에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검무 역시 벅찬 희열과 이에 따른 고조된 춤동작으로 그 시작을 열어 간다. 그러면 이렇듯 희열에 찬 어조로 반복하며 표현한 ‘그때’는 과연 어느 때를 말하는 것인가? 그때는 다름이 아니라, “오만년만에 맞는 후천개벽의 시기”, 그러므로 후천개벽을 이루어야 할 기개 높은 장부로서, 꼭 맞이해야 할 그때인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따라서 ‘벅찬 희열과 함께 고조된 춤동작’은 그 표현이 매우 장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춤추는 사람이 ‘칼’을 손에 들기 이전이 된다. 즉 칼 없이 춤동작으로만 이어진다.

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노래는 ‘용천검, 그 잘 드는 칼을 아니 쓸 수 없다.’는 결연한 ‘용단과 결단’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용단과 결단은 다만 ‘결전(決戰)을 통한 용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운 선생에 의하여 선천의 마지막으로 지칭되고 있는 당시, 즉 조선조 말엽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조선조의 지배 체계인 봉건 질서가 결정적으로 붕괴되고, 이에 대체될 만한 새로운 신념체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그러므로 극도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무고사(巫蠱事) 등이 창궐하여 사회적인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서양이라는 이질적인 문화의 유입으로 인하여, 문화 교착상태(交錯狀態)마저 일어나던 시대이다.23)
   그러나 수운 선생은 실상 이와 같은 시대적 혼란과 위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어느 의미에서 사회 제도의 모순이나 정치적인 혼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가치 기준 없이 자기 자신만 잘 살겠다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타락한 이기주의적 성향의 팽배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24) 따라서 수운 선생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후천의 새로운 운을 맞이할 수 있는 ‘정신의 개벽을 위한 용단과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의 개벽을 위한 용단과 결단을 내릴 그때가 왔으니[時乎 時乎], 이 후천개벽을 위한 “용천검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개벽을 위해 용단과 결단’을 내릴 이 ‘용천검’을 써야 한다는 의지와 함께 춤동작은 일순 멈추면서 ‘세상’을 응시하는 태도가 연출되어야 할 것이다. 즉 용단과 결단을 내릴 강렬한 의지와 함께 ‘폭풍 전야의 고요와 세상을 향한 깊은 응시’가 춤추는 사람의 태도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舞袖長杉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무수장삼(舞袖長衫)’은 춤추기에 좋은 긴소매의 옷이라는 뜻이다. 고요한 응시 뒤에, 이내 무수장삼을 떨쳐입은 모습으로, 비로소 이 칼 저 칼을 주워 들게 된다. 주워드는 동작도 그냥 주워드는 것이 아니라, ‘넌즛’ 주워든다고 했다. 이 넌즛의 태도가 나오는 동작이 잘 연기되어야 한다.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는 소매가 긴 옷을 떨쳐입고, 새로운 후천의 세상을 열어갈 “이 칼 저 칼을 넌즛 들고는”, 다시 드넓은 천지를 배경 삼아 웅혼한 자세로 비끼듯이 서 있는 것이다. 천지를 배경 삼아 웅혼한 자세로 비껴 서 있는 자세는 이내 곧 펼쳐질 강렬한 춤동작을 연상할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결연한 모습으로 천지를 비껴서서 칼노래를 한 곡조 불러낸다. 즉 칼노래인 「검결」이 바로 이때에 보다 장엄하게 연주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폭풍 전야의 고요와 세계에의 응시, 나아가 호호망망의 넓고 넓은 천지를 배경으로 비끼듯이 서 있던, 결연하고 또 웅혼한 자세에 서서히 변화를 주면서, 드디어 크나 큰 춤동작으로 들어가게 된다.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칼춤의 동작은 일월을 희롱하듯, 춤을 추며 너풀거리는 무수장삼은 우주를 덮을 듯이, 춤동작은 커지게 된다. 이 대목에 이르러 검무는 그 절정에 달하듯이, 신명이 극에 달하듯이 추게 된다. 즉 바로 앞 대목에서부터 시작된 「검결」인 “시호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날랜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 입고 이 칼 저 칼 넌슷 들어……” 등으로 이어지는 노래를 부르며 본격적인 춤이 벌어진다.
   즉 동학이 지향하는 후천오만년의 새로운 변혁을 위한 그때를 맞는 장부는 “용천검 날랜 칼로 일월을 희롱할” 수 있는 기개와 기상을 지니게 되는 것이요, “넓고 넓은 긴 소매로 우주를 가득 덮는” 드넓고 커다란 기상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25) 그러나 이는 다만 단순한 장부의 기상과 기개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동학에서 이야기하는, 한울님의 덕과 마음을 체득하므로 해서[與天地合其德],26) 우주에 가득 차는 정신을 소유한 ‘무궁한 존재’27)로서의 자신을 깨달은 민중 모두의 모습이며, 동시에 쇠운(衰運)의 시대를 성운(盛運)의 시대로, 곧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주도하고자 하는 높은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때의 용천검(龍泉劍)이라는 명검은 사람을 베어 죽이는 칼이 아니라, 베어서 오히려 살리는 진리의 칼, 상생(相生)의 칼,28) 나아가 후천 개벽을 여는 ‘정신의 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이르러 검무는 ‘상생(相生)’이라는 ‘화해와 조화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보다 큰 춤동작으로 그 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萬古名將 어디 있나 丈夫當前 無壯士라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지금까지의 정신적인 고양(高揚)에 의하여, 그 신명(神明)이 극에 달하게 되고, 이내 그 희열이 최고조에 달하여 있던 춤동작이 서서히 전환의 국면으로 들어서며, 만고의 명장 모두 할 것 없이 당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나는, 그러한 자세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춤동작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자신감을 춤동작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모든 민중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줄 수 있는, 그러한 춤동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이러한 정신적 희열과 이에 의한 자신감이라는 검무의 절정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춤추는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민중들이 힘과 용기를 얻어 모두 함께,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를 부르며, 각기 손에는 ‘칼’을 들고 춤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따라서 이 대목에 이르러 검무는 단순한 한 사람의 독무(獨舞)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추는 군무(群舞)로 전환한다. 즉 모두의 입으로 「검결」을 부르며, 모두가 어울려 칼춤을 추는, 그러므로 새로운 후천개벽의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그 신명이 극에 달한 모습을 이 대목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후천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사람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운 선생은 당시 혼란된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사람은 어느 한 개인, 어느 한 계층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의 시대적 혼란이나 어려움은 결국 양반이나 서민,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이나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동으로 겪고 있는 시대적 위기감, 나아가 민족과 국가의 단위에서 맞고 있는 위기나 어려움이라고 보고 있다.29)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역은 당시의 ‘민중을 포함한 모두’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칼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어느 일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우렁우렁 부르는 바로 그 소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검무 역시 이 대목에 이르러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춤동작과 함께 모두 어우러지는 군무(群舞)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모두 어우러져 추는 군무와 함께 모두의 목소리로 열어갈 때, 비로소 그 후천의 세상은 오는 것이요, 후천의 동귀일체하는 세상은 도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곧 진정한 변혁이며, 「검결」이 내포하고 있는, “칼노래 한 곡조”의 “그때가 바로 왔다는”, 그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칼노래인 「검결」에 나타나고 있는 ‘칼’은 단순한 ‘무(武)’나 ‘변혁의 전의(戰意)를 다지는 무엇’의 상징이 아니라, 새로운 변혁시대인 후천개벽을 열기 위한 고양된 정신의 높은 상징이며, 또한 「검결」에 나타나는 신명과 희열은 종교적 각성을 통해 도달하는 희열과 신명이며, 동시에 후천개벽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모든 민중들의 높은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검결」이 그 내면에서 노래하고 있는 후천개벽은, 인간이 지향하는 보다 높은 정신적인 각성을 통해, 당시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봉건적 관념을 떨치고, 새로운 주체 의식을 민중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사상의 구체적인 모습이었으며, 나아가 보다 능동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고자 하는 개벽 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검결」을 그 대본으로 하여 추는 수운 선생의 검무는 다름 아닌 새로운 질서의 삶인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우리 민중 모두의 살아 있는 몸짓이기도 한 것이다.


5. 결론
.

   수운 선생이 춘 검무는 우리나라의 검무가 걸어온 역사적 전통에 견주어 볼 때 가장 위 시대에 해당되는 검무와 그 정신적인 맥을 같이한다. 즉 우리나라의 검무가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천되면서 잃어버린 ‘제의적인 면’과 ‘무예적인 면’을 수운 선생의 검무는 그대로 간직한 채 수운 선생에 의하여 다시 재현된 검무이다. 따라서 오늘 다시 수운 선생의 검무가 복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면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수운 선생의 검무가 바로 이와 같은 면을 지닐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으로는 검무가 동학의 종교적 의식에서 시행되었고, 또 동학이 열어나가고자 하는 후천개벽에의 의지를 내면에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검무는 우리의 전통적 사상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동학이라는 종교의 의식에서 거행되었으며, 또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도달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와 이 천인합일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그 내면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면에서, 민족의 정체성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또 새로운 삶의 질서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오늘, 검무는 다시 재현되고 또 복원되어야 할 당위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수운 선생의 검무가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사상적인 면, 또 춤으로서의 구조 등은 오늘 전하고 있는 검무의 배경음악이 되며 동시에 그 대본이 될 수 있는 「검결」을 보다 면밀하게 분석하여, 이를 근거로 다시 복원해야 할 줄로 믿는다.
   「검결」을 보다 상세히 분석하게 되면, 내면에 보다 내밀히 종교적 희열과 후천의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시대적 열망이 폭넓게 담겨져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즉 「검결」은 상징화의 수법을 통해 서정성을 획득하고 있고, 동학의 교리를 해설하기보다는 내면화된 방식으로 처리하여 다양한 정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기30) 때문이다. 나아가 그 형식이 단형(短型)이라는 형태적 특성과 함께, 반복의 율조와 ‘상승과 평정, 그리고 다시 상승’이라는 이 작품이 지닌 시적 구조와 후천개벽을 지향하는 높은 열망은 검무를 보다 극적인 춤사위로 이끄는 효과를 지닌다고 하겠다. 바로 이와 같은 검무가 지닌, ‘상무(尙武)에의 정신과 후천을 향한 정신’이 담긴 춤사위를 통하여, 잠재되어 있는 우리의 민족 정기를 다시 회복하고, 화해와 상생(相生)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함은 오늘 우리의 엄숙한 과제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와 같은 면에서 수운 선생의 검무가 오늘 다시 복원되고 또 재현되어야 할 당위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 신인간 146년 6~7월호(통권658호~659호)

- 해동검도 검우회 ( http://cafe.daum.net/haedongsword )에서 꽃나레님이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읽음

26

  [활] 조선의 궁술 -궁술교범 1 [1]

1929_11.jpg

2006/04/14

6537

25

  [활] 사진으로 보는 편전(애기살 쏘기) [1]

p_d.jpg

2006/04/20

6547

24

  [논문] 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 運用

2006/07/06

6634

23

  [해동역사] 병기(兵器)

2009/02/15

6640

22

  [자료] 논어와 맹자 속의 활쏘기

2010/03/30

6672

21

  [철전-육량전] 오주연문장전산고

2007/04/05

6682

20

  [문집] 여헌선생문집 제10권 - 논(論) 문무(文武)가 일체(一體)라는 논

2008/01/18

6727

19

   [자료] 목민심서(牧民心書)/병전육조(兵典六條)

2010/04/28

6904

18

최형국

  [해동죽지] 각저희, 탁견희, 수벽타

2006/06/07

7010

17

  [택견] 택견의 미학적 논의

2006/07/01

7032

16

최형국

  [무과] 조선의 무과는 양반의 과거요 평민의 희망이었다.

2006/06/07

7044

15

  동각 잡기- 팔준마

2007/07/16

7087

14

  [논문] 18세기 『어영청중순등록』에 나타난 각종 무예

2008/01/09

7181

13

  [Martialarts] History and Heritage [8]

2005/11/25

7202

12

  [신기통] 우리 모두 손가락 수련~

2007/08/15

7359

11

  [논문-택견] <<중요무형문화재 택견의 보급과 육성>>

2006/12/18

7361

10

  [논문] 국궁-비정비팔 흉허복실의 이해와 응용

2010/02/02

7385

9

  조선전기 개인 무기운용에 관한 기사 [3]

2005/11/09

7478

 

 

[1][2][3][4][5][6] 7 [8]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랄라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