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무예 자료     사학 자료     이미지 자료     기사모음     박사논문

 [논문] 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 運用

 이름 : 

(2006-07-06 22:25:24, 6634회 읽음)

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 運用

                                                               姜 性 文*


Ⅰ. 序論


한민족은 이민족의 빈번한 침략을 산악이 많은 지형적 여건을 활용한 淸野入堡策으로 대응해 왔다. 이 수성전에 적합한 무기체계가 바로 장병기인 궁시였다. 궁술은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무예로 발달하였고, 그 중에서도 騎射를 장기로 여겼다. 長兵術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短兵術을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여기에 장기간의 昇平으로 인해 白兵戰式의 단병술에 대한 관심은 낮아졌고, 또한 고려말의 화약병기의 출현으로 장병술이 더욱 중시되면서 단병술은 쇠퇴를 면치 못하였다. 장병기인 궁시는 화약병기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던 것이다. 궁시는 화약병기가 갖는 여러 취약점인 화약의 다량 제조의 부담이나 雨中 사격의 곤란 및 裝塡 시간이 긴 것 등을 보완하면서 그 위치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궁술은 평소 심신수련의 도구라는 인식을 통한 사회적 기능이 유사시에는 군사적 기능으로의 전환이 용이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궁시 외의 병기류들은 흉기라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유사시의 군사적 기능으로의 전환이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비록 도검이 군사무기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부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대로부터 그 威名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검 한 자루만으로 백만 대군을 물리쳤다.'라는 古詩를 통해서는 도검의 탁월한 위력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표현하였다. 또한 고대 정복국가 시대에 도검은 그 살상력이 가장 치명적인 공포의 무기이기도 하였다.

신식무기인 화약병기의 출현으로 인해 군사무기 전반에 걸친 일대 변화가 도래한 시대가 바로 조선조였다. 전통적인 재래무기는 그 기능과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단병기인 도검류에 있어서 변화는 컸던 것이다. 도검류의 군사적 기능 축소는 장기간의 승평과도 연관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란이라는 국제적 대전쟁은 군사무기를 비롯한 국력이 총동원되었다. 이를 통해서 신식무기의 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동시에 또한 재래무기 활용에 대한 중요성도 재인식되었다. 양란 이후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국방력의 재건을 위한 제반 노력이 시도된 바 있었지만,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인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군사적 환경을 군사무기체계 그 중에서도 최근접무기인 도검류를 중심으로 그 군사적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도검류와 관련된 군대와 기술 및 훈련을 위한 노력과 다른 단병기와의 상호 비교를 통한 특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비교적 문헌적 자료가 풍부한 조선시대를 대상으로 삼았다. 도검류 관련 현전 자료의 태반이 명칭이나 수량 정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내용에 관련된 자료의 부족으로 해석상의 무리한 부분도 있으리라 예견된다. 그러므로 본 내용은 기존 연구성과와 기본 자료에 대한 재조명을 통한 총괄적 이해 정리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Ⅱ. 朝鮮前期의 刀劍과 刀劍軍



1. 軍隊와 刀劍



1) 兵士와 刀劍

고려말 이전 화약무기가 실전에서 사용되기 이전의 전쟁에서 동원된 일반무기는 刀 劍 矛 戟 矢 등의 五兵으로 대표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약병기의 출현과 더불어 전쟁에서 사용된 무기체계에 변화가 왔다. 전투에서의 화약병기의 비중이 점차로 높아지면서 전통적인 궁시류 및 창검류와 같은 일반무기류의 비중은 감소되는 추세였다.

조선시대에 도검류의 대표는 環刀였다. 환도는 군기감 산하의 環刀匠이 제작하였으며, 세조 6년(1460)에는 軍器監 소속하에 환도장의 인원이 33명으로 증액되고, 5명이 遞兒職을 받아 京工匠의 專屬工匠이 되었다. 성종 16년(1485)에 완성된 {經國大典}에는 인원이 12명으로 감소되고, 소속도 尙衣院으로 바뀌게 되었다. 경공장 소속의 환도장에 의해서 제조된 환도는 왕족 및 귀족들의 패용을 위한 일종의 복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의장용이었다. 또한 이들 계층을 위한 의장용은 자연히 은세공과 같은 고급화 내지 사치품화 되는 경향까지도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제조된 환도가 양반 귀족들의 의장용이라면, 지방에서 제조된 환도는 병사들의 개인 휴대용 무기였다. 환도는 상공의 품목으로도 선정되었기에, 諸邑에서 일정량을 제조했던 것이다.

도검류 중에서 검은 의례용의 기능이 컸던 것에 비해, 도는 군사용의 기능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검류 중에서 도가 전투용으로 주로 사용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기능상으로 첫째로 칼등이 두껍기 때문에 접촉 시에 쉽게 부러지지 않고, 베는데 유리하였다. 이것은 검이 양면의 얇은 날로 구성되었기에 접촉 시에 쉽게 부러지는 것과 비교되었다. 둘째로 한 면의 날만 만들기에 제조 시간이 짧고, 비용이 저렴한 점이었다. 셋째로 전투 기능과 보급에 유리하였기에 군대의 주 전투장비가 되었던 것이다.

문종대에는 환도에 대한 규격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咸吉道都節制使인 李澄玉이 일선 지휘관으로서 실전에 필요한 전투도에 대한 제작 공급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가 제기한 환도의 형태는 모양이 곧고 짧은 것, 즉 '直短'의 형태였다. 이를 계기로 전투용 환도에 대한 규격화에 대한 검토를 거쳐 환도의 표준화가 결정된 것이다. 물론 환도의 규격화에 대한 반대 주장도 제기되기는 하였지만 일단은 관례와 현실적 요구를 종합한 환도체제가 된 것이다. 이 때에 이르러 표준적인 관례에 따른 규격화가 성립된 것이다.

보병용 환도의 크기는 길이가 1척 7촌 3푼(54.04cm), 너비가 7푼(2.19cm), 자루 길이가 2권(19.42cm)이었다. 기병용 환도의 크기는 길이가 1척 6촌(49.98cm), 너비가 7푼(2.19cm), 자루 길이가 1권 3지(15.54 cm)였다.

오위진법은 기본적으로 북방민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병중심을 중심 전력으로 삼고 여기에 비약적 발전을 하고 있었던 화약병기를 결합한 기병중심의 전술체계였다. 그러므로 도검류의 표준화에 있어서도 대여진전을 통한 기병용의 표준화가 중심이고, 이를 계기로 보병용도 표준화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서 환도는 각 병사들이 휴대한 기본적인 주전투무기 중의 하나였다는 점이었다. 진법은 주로 기병으로 편성 이를 담당하는 계층이 正軍을 담당, 정군은 말과 각종 무기류와 제반 경비를 자신이 직접 마련, 이들 계층은 양인상층으로 그 과중한 부담으로 15세기 후반 이후 합법,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이탈하였다. 결국 하위계층으로 부담 전가해서 이를 충당하자, 전투력 발휘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환도의 규격화 이후 제대로 실시되었는지의 여부에는 의문시되고 있다. 환도를 규격화 시킨 23년 후에 편찬한 {兵器圖說}에도 환도의 규격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단순히 누락된 것이라기 보다는 환도의 규격화가 의미를 상실한데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환도를 규격화시킨 목적은 편리성에 기준을 두었는데, 사람의 체력의 강약이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규격화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 효과를 半減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문종대의 환도체제를 정함에 있어서 실전의 경험을 통한 주장에서 환도는 칼날이 곧고 짧은 직단이 큰 고려 요소로 작용되었다. 환도의 직단의 형태는 도검류에 있어서는 초기 형태로 찌르기에 편리한 단검의 기능과 같았다. 이 직단은 急遽之間에 사용이 편리한 점을 내세우고 있었다. 환도에 있어서 긴 것보다는 짧은 것을 선호한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전교하기를 해마다 方物로 진상하는 환도 또한 지나치게 긴 것이 들여온 것이 많지만 사용하기에 불편하다. 행여 군사들에게 내려주어 차고 다니는데 마땅치 않다. 이것 역시 지금 보내는 견본대로 짧게 만들도록 하라.



進上 환도의 규격이 점차로 커지는 일반적인 추세를 개선하여 패용 위주의 환도 규격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환도에 있어서 직단의 형태는 {軍禮序例}상의 彎曲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술적 기능상의 변화와의 관련성이다. 도검은 용도상 크게 세 가지 기능으로 나타나고 있다. 치는 기능 즉 擊法, 베는 기능 즉 洗法, 찌르는 기능 즉 刺法으로 대별할 수 있다. 칼날의 彎曲은 기병전에서 擊殺用 내지 洗殺用으로 적합한 데 비하여, 칼날의 직단은 보병전에서 刺殺用으로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중기의 직단 모양의 환도는 대표적인 '防身物'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직단의 환도는 주전투무기 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개인 護身用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軍器監 소장의 도검은 개인 소장의 도검과는 구별되는 칼날에 '軍器'라는 글자를 篆刻하였다. 환도의 민간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서 환도에 한하여서 소속 州鎭名을 篆烙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환도가 사적인 개인 호신용으로 소지 사용되었음을 成宗 때에 발생된 昌原君 晟에 의한 古邑之 살해 사건으로 알 수 있다. 환도는 전투용 무기였지만 개인 私藏時에는 호신용기능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전투용보다는 호신용 기능으로의 전환은 휴대의 간편성과 急遽之間의 사용성에 우선해서 환도의 규격은 자연스럽게 짧아지게 된 것이다.

검법은 도검에 맞추어서 성립되는데 대체로 중국검은 偃月刀처럼 무겁고 등이 두터워서 치는 검법 쪽이다. 일본도는 가볍고 검신이 얇아 베는 검법 쪽이다. 조선의 도검은 양국의 중간 정도라서 검법이 양쪽으로 운용할 수 있는 다양성은 있지만 검법의 발달과는 별개의 문제이었다. 당대에 보편적인 개인 휴대 무기인 도검류를 기준 삼아 이를 비교하기로 하겠다.

조선의 환도는 중국의 요도나 단도 혹은 왜검과는 유사한 종류의 검이라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유물이나 혹은 도면 및 설명문을 통해서 이들은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조선식 환도는 중국의 단도나 혹은 왜검에 비하여 칼날이 별로 굽지 않아 거의 직선에 가까운 直刀인 것이다.

칼날에 있어서 이처럼 중국검이나 왜검이 조선검보다 만곡으로 굽어 있다는 점은 베기 동작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직도의 형태가 찌르기에 유리한 반면에, 굽은 형태는 풀 베는 낫의 날이 굽은 것처럼 베기 동작에 유리한 것이다. 찌르기 동작은 장창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특성이라면, 베기 동작은 刀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성이었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다면 조선의 환도는 치고 베는 전투용 도가 가진 기능면에서 중국검이나 왜검에 비해서 낮다고 평할 수 있겠다. 특히도 왜검은 형태에서 뿐만 아니라 그 금속의 강도와 예리함이 제일 탁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왜검은 군사적 기능 즉 실전에서 우수한 전투용 무기였다.  

도검류는 화약병기의 발달과 전술적 활용의 증대로 인해 군사적 기능과 역할과 크게 전락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검류가 모든 병사들에게 개인 휴대무기로 지급된 것은 최근접전의 호신용으로서의 군사적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다는 점이었다. 예로 총통군의 경우에 총통 휴대 외에 개인 호신용 궁시나 혹은 도검을 휴대시켰다. 화기수라 할지라도 개인 호신용으로는 도검을 선택적으로 휴대케 했던 것이다.



2) 指揮官과 刀劍

고대국가의 상당한 기간까지 국왕은 야전 사령관으로서 친히 군대를 이끌고 대외전쟁에 출정하곤 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국가 행정력의 확대로 인해 親征보다는 국왕을 대신해서 장수를 파견해서 이를 담당케 하였다. 출정 장수는 국왕의 명령을 받아 출정하게 되지만, 이에 대한 권위 증진을 위한 임명식을 행하였던 것이다. 출정 대장 임명식에 관한 일정한 의례는 太公望으로부터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의 {六韜}에는 대장 임명식인 斧鉞 親授式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장 임명식은 {李衛公問對}에서도 古法을 준용한 斧鉞儀式을 논하고 있다. 이 부월의식은 군주가 生殺與奪權을 위임하는 징표로 부월을 대장에게 내리는 것이었다.

대장 임명 의식에서 사용된 무기가 도끼인데, 이처럼 도끼가 生殺與奪權을 의미하는 무기로서의 의미를 가졌던 것은 고대 사회에서 도끼가 가지는 군사적 역량이 타 무기에 비해서 컸던 것과 연관이 있었다. 선사시대 이래로 집단의 장이 그의 권위를 나타내는 무기로 星形 내지 多頭石斧의 전통이 있었다. 이 무기들은 상대방을 가격해서 치명상을 입히는 최상의 석기용 무기였을 것이다. 또한 이 석기들은 그 외형적인 형태에 있어서도 타 무기에 비해서 복합성과 秀麗性을 구비한 점이었다.

고려조에 元帥 尹瓘의 9성 출정식에서  鉞儀式을 거행하였다. 이 부월의식은 조선조에는 변화되어 도검류가 부월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부월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화하는 국왕의 冕服 전통으로만 계승되어졌다. 국왕의 冕服九章 중의 하나로 裳에 도끼인  를 수놓았던 것이다.

태종이 朴蔓을 東北面 都巡撫使로 삼아서 그곳으로 보내면서 廐馬와 甲胄 劍을 하사하였다. 국왕은 보검, 내장검, 尙方劍 등을 하사하면서 군권을 위임하였던 것이다. 성종이 북방 정벌의 도원수 許琮에게 보검을 내려 주면서 "옛날부터 장수에게 명령할 적엔 도성 밖의 일을 專制하도록 했으니, 진실로 文識과 武略이 구비된 인재가 아니면 어찌 군사를 어루만지고 적에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壬辰倭亂時에 宣祖는 申砬을 三道 巡邊使에 除授하는 자리에서 寶劍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李鎰(巡邊使)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 또한 후일에 선조는 차고 있던 內藏劍을 都巡察使인 權慄에게 하사하면서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 라고 하면서 전장 터에서의 군율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 이후로 丙子胡亂時, 李麟佐亂 토벌시, 洪景來亂 토벌시에도 이와 동일한 예에 속하였다. 각급 지휘관들은 실전에서 도검류를 직접 빼어들고 부하들을 督戰하였고, 또한 명령 불복종 자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즉결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2. 陣法과 刀劍軍



조선 초기의 병법의 핵심이 陣法이었고, 이를 정리한 陣法書가 편찬되었다. 鄭道傳의 {陣法}과 세종대의 {陣圖之法} {癸丑陣說}과 문종 御撰의 {五衛陣法}이 있다. {오위진법}은 세조대와 성종대에 보완되어 조선 전기의 기본 전술교범이 된 것이다.  

조선의 {오위진법}은 그 이전까지의 모든 병학사상을 종합하여 만든 것으로 주로 북방민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병을 중심 전력으로 삼고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화약병기를 결합한 기병중심의 전술체계였다. {오위진법}은 유사시를 대비해서 평시에 국가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일시에 전개시킬 수 있는 대규모부대 운영을 고려한 전술교범이었다.

세종대에 편찬한 {계축진설}은 4군과 6진의 영토 개척과 野人征伐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계축진설}은 局地戰을 위한 실전용이며, 실제적인 행동요령을 구비한 공격용 전술교범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오위진법}을 편찬하던 문종 세조대는 몽고 지방의 Oirat(瓦刺)부족의 대규모 침입이 예상되던 시대적 배경이었다. {오위진법}은 全面戰을 대비한 평시훈련용으로, 軍政을 行政에 일원적으로 통합시킨 방어용 전술교범이었다.  

{오위진법}의 편제로는 大將 아래에 五衛, 각 衛將 아래에 五部, 각 部將 아래에 四統으로 대부대 편제가 있다. 이 衛-部-統은 전술적 기동을 위한 대형의 단위이다. 그 아래로 旅帥-隊正-伍長이 지휘하는 旅-隊-伍-卒의 소단위 인원 편성으로 각기 125명-25명-5명-1명이라는 인원 규모이다.

5위는 모두 100統이 되며 이 부대 편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1통의 인원은 규정된 정원이 없는 것이다. 예로 여를 통으로 삼는다면 5위는 12,500명, 三軍은 37,500명이 되나, 3∼4개 여를 1통으로 삼는다면 3군은 10만 명 이상의 대군이 되는 것이다.

각 部에는 騎兵 2통과 步兵 2통을 두는데, 기병 2통 중 1통은 나아가 싸우는 戰統이며, 1통은 머물러 대기하는 주통이다. 보병도 이와 동일하였다. 이들을 병종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기병 2통에는 射手와 槍手가 갖춰져 있는데, 대개 인원의 5분지 3은 사수, 5분지 2는 창수로 구성된다. 그러나 병사의 장기에 따라서 구성해야 하므로 굳이 구성의 비율을 확정할 필요는 없었다. 보병 2통에는 弓手 銃筒手 槍手 劍手 彭排手(防牌手)가 갖춰져 있는데, 이 5개 병종의 군사 수의 비율은 균등하게 한다. 그러나 궁수 창수 검수는 병사의 기능에 따라 가감해도 무방하지만, 총통수와 방패수의 인원만큼은 반드시 정법에 따라야 했다. 그리고 창 검이 구비되지 않았으면 도끼 철퇴로 대체해도 가능했다.

무장한 군대에 있어서 각 무기의 비중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병력 비율을 통해서 상대적 비중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본다. 검수의 비율이 보병의 경우에는 1/5 수준이었고, 전체적인 비율로는 1/10의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비율로 보면 첫째 등급은 사수로 전체 병력의 2/5 수준이다. 둘째 등급은 창수로 전체 병력의 3/10 수준이다. 셋째 등급은 검수 총통수 방패수로 동등하게 1/10 수준이다.

조선 도검군이 대응하는 가상적국은 바로 북방 종족인 여진족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율을 여진군과 비교해 볼 수 있겠다. 여진군은 일반적인 군대 편성에는 보병이 없었다. 기병 50명을 1隊로 편성하되, 20명은 중무장에 창을 소지하고, 30명은 경무장에 활을 소지하였다. 창수와 사수의 비중은 조선군의 기병과 동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예로 建州衛의 老乙可赤이 自稱 王이라 하고, 그의 동생은 船將으로 칭하여 그 군대를 環刀軍 鐵鎚軍 串赤軍 能射軍의 4軍으로 나누었다. 이 내용을 통해서 여진군의 주력은 기병이었고, 이들이 무장한 무기인 도검 철퇴 창 궁시별로 병종을 구분하였다. 환도를 주무기로 하여 무장된 부대는 전체 병력의 1/4의 수준으로 추론된다. 세종 15년(1432) 5월의 여진 정벌시에 조선군의 노획품 중에는 환도 6자루가 있었는데, 이는 조선의 환도가 아니라 여진 환도로 추정된다. 여진군의 단병기 제작 수준도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특히도 그들의 단병기를 다루는 전투 기예 능력이 조선군보다 우월했던 것이다.

조선 도검군상의 특징을 여진족과의 비교해 보면 첫째로 기병에는 전담 도검군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환도체제상에 있어서 기병용 환도가 규격화가 되었지만 이는 기병의 주무기가 아닌 궁시와 창에 대한 보조무기였다. 둘째로 도검류가 부족할 경우에는 다른 무기로의 충당이나 도끼나 철퇴에 의한 대체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술훈련상에 있어서 도검류가 군사무기로서의 확고한 그 위치를 정립하지 못한 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조선군은 여진군에 비해 기본적인 기병술과 단병술에 있어서 열세한 수준이었다. 조선군은 이 열세한 군사기술을 장병기인 片箭 등의 궁시류와 火車 등의 화기류로 이를 극복하였다. 장병술에 의존한 조선은 15차례에 걸친 여진 정벌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해서 그들을 招撫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여진족과의 군사적 대결을 통해서 조선군에게도 환도의 규격화를 비롯한 각종 무기류의 개발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Ⅲ. 壬亂期의 刀劍術 受容



1. 三手兵制와 中國 短兵術 導入



무기체계상에 있어서 임진왜란 이전에는 궁시와 화포를 중심으로 하는 장병전술을 이용한 조선군은 창검을 주무기로 삼는 단병전술을 구사하는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개인 휴대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면서 단병전술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장병기인 조총은 조선의 궁시를 능가했으며, 또한 단병기인 창검도 조총의 비호를 받아서 그 활용도가 컸던 것이다.    

일본군의 전술 운용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기 1개 부대들은 그 공격대형에 있어서 5陣 3疊陣이라는 공통적인 진법을 사용했다. 각 부대는 3개의 행렬로 이루어졌기에 이를 3疊陣이라고 한다. 첫 행렬은 기치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진으로 正兵이 되고, 다음 행렬은 조총수로 2개의 진으로 나누이고 奇兵의 되며, 제일 뒤의 행렬은 창검류를 소지한 단병의 군사로 2개 진으로 나누이고 奇兵이 된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한 부대는 1正兵 4奇兵 즉 5陣 3疊陣이 된다. 조총부대는 궁시의 지원을 받아서 상대방을 화력으로 제압한 다음에 戰機가 무르익으면 장창과 왜검을 든 보병과 기병이 동시에 돌진하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왜군의 장기는 조총으로 평지전에 강하였고, 조선군의 장기는 궁시로 험한 지세를 이용한 伏兵戰에 유리하였다. 왜군은 조총의 전술적 운용에 능하였고 또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돌격하며 싸우는 백병전에 능했던 것이다. 백병전의 전개시에 개인이 휴대한 무기가 장창, 특히도 양손에 든 왜검이 주였다.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의 도면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기효신서} 법을 보면



나이가 어리고 몸집이 중간이며 신체가 유연한 자 두 명을 제1 제2로 삼아서 圓牌手로 충원하고, 나이가 장성하고 신체가 커서 힘이 센 두 사람은 제3 제4로 삼아서 낭선수로 충원하며, 정신과 骨力이 있는 네 명을 제5 제6 제7 제8로 삼아서 장창수로 충원하고, 殺氣와 담력이 있는 자 두 명을 제9 제10으로 삼아서 당파수로 충원하며, 사람이 용렬하고 녹록하여 남의 부하가 되기를 좋아하는 자 한 명을 제11로 삼아서 火兵으로 충원한다.



개인의 적성에 맞게 장비를 지급해서 훈련시켜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개인의 기량을 중시하던 그 이전의 병학사상에서 한 걸은 나아가 다소 기량이 떨어지는 개인을 적성에 따라 묶어 집단적으로 운용하려는 것이었다.

선조는 당시의 사회상으로 조선의 유생들은 평일에 무사 보기를 異端과 같이 하고, 대접도 노비와 같이 하는 극단적인 文弊를 지적하기를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히고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고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에는 궁수가 3인뿐이었다. 풍속이 이와 같고 서야 어떻게 적병을 막겠는가.



라 하여 무술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차별의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신수련의 도구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던 궁술도 실추된 인식이었기에, 하물며 이에 비해 한 단계가 더 낮았던 검술에 대한 천대는 당연지사였다.

조선은 朝明聯合軍의 작전을 통하여 明軍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명군에 대한 의존이 컸는데 결과는 명나라 요동 總兵 祖承訓이 평양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중국 南兵의 來援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보병 중심의 浙江兵으로 戚繼光이 備倭策으로 개발한 {紀效新書}의 전법에 의해 훈련된 군대였다. 이들 군대를 직접 목도한 司諫 李幼澄이 극찬하였다. 이듬해 평양성 수복전의 승리로 인해서 이들의 역할은 입증되었다.



浙江兵이 압록강을 건너왔을 때 이들이 사용하는 방패와 狼 , 장창과   의 기예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보는 것으로   明軍이 평양으로 진입한 다음 먼저 화포를 발사하고 뒤이어 火箭을 발사하여 왜적의 기를 꺾고 말았다. 명군은 곧 장창과 당파를 사용하는 병사를 동원하여 각기 운용 방식에 따라 사용하였는데, 만약 적이 먼저 돌진해 오면 낭선부대를 집중시켜 대기하고 만약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방패수들이 방패를 들고 전진한 결과 적은 크게 潰走하고 말았으니, 그 운용 방법이 지극히 신묘하여 無敵임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장기는 원거리에서는 장병기인 조총부대에 의한 연속사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한 후에 근접한 백병전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 검술로 조선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육전에서의 연전연승은 전술과 무기체계상에 있어서의 우월성의 경과였다. 그런데 명군의 참전으로, 특별히 절강병의 전법과 무기가 판이하였다. 원거리에서는 화포로 일본군의 조총부대를 압도했으며, 근접 백병전에서는 다양한 무기체계로 일본 검술을 압도했던 것이다.

이 평양전의 승전 결과로 조선 정부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 柳成龍은 {기효신서}의 내용을 검토하게 하고 유생 韓嶠(1546∼1627)에게는 명군과의 접촉을 통해서 의문점을 질문케 하였다. 이에 대한 결실로 전쟁 중인 선조 31년(1598) 10월에 우리 나라의 단병기 무예서인 {武藝諸譜}가 편찬된 것이었다. {무예제보}는 {기효신서}의 내용 중에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棍棒 藤牌 狼  長槍    雙手刀의 6技를 선택해서 편찬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壬亂중에 명나라의 척계광의 병법인 三手兵制에 의한 훈련을 담당하는 [훈련도감]을 창설하게 된 것이었다. 삼수는 사수 포수 살수로 사수는 병사들의 전통적인 필수무예였기에 포수와 살수의 양성에 치중하였다. 포수도 기존 병종이었기에 신병종은 창검류를 다루는 살수였다. {기효신서}의 새로운 무예 중 특히 살수에 관한 기보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이들 단병기는 기존의 단병기의 주류인 창검류로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다양했으며, 그 근원도 다양하였다. 당파는 농기에 그 연원이 있는 무기로 농민들이 손쉽게 이를 다룰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낭선의 경우도 가지를 다 자르지 않은 대나무에 창날을 꽂은 것이므로 기존의 무기와는 달리 주변에서 쉽게 재료를 구하여 제작할 수 있고 농민들도 이에 익숙해지는 데 어려움이 적었다. 또한 편곤의 경우도 농부들이 모두 사용하는 回鞭(도리깨)와 같으니 잘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장기간의 무예 수련 과정 없이도 농민들은 군역, 특히 正軍에 입속시킬 수 있었다. 도검류는 단병기 6기 중에서 雙手刀 1기가 주이고, 부차적으로는  牌 사용시의 腰刀가 있다.

연전 연패의 국난을 통해서 이를 타개할 국방 재건을 위한 길로 일차적으로는 중국식 군사기술의 도입이었다. 조선 정부가 초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중국군의 화포는 물론하고 창검술 등과 같은 다양한 단병기예였다. 이 결과로 평양성에서는 검술과 포술이 크게 유행되었고 한 달 사이에도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유성룡은 당시 전황 중에도 장기적인 양병책을 국방의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은 중국식의 살수를 훈련을 시켰고, 이에 대한 기예 시험은 初試 없이 殿試만으로 시험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자체 평가나 혹은 중국인의 평가에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내리고 있다. 이와는 달리 降倭들에 의한 살수 평가는 아이들 놀이 수준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현실적으로 당시의 정부는 창검술은 자세를 잃지 않았으면 入格으로 논하고, 대개는 그다지 까다롭게 논하지 말도록 하였던 것이다. 당시 살수의 기예 수준은 초기 장려책의 일환으로 그만큼 낮을 수밖에 없었다.

장려책에도 불구하고 살수에 대한 인식은 무신들마저도 부정적이었다. 조선 무사의 장기는 射藝인데 지금 검술을 익힌다는 것은 습성을 거슬리는 것으로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선조는 검술은 상고적부터 書冊과 동일하게 영웅들이 학습한 것이라 하면서 무사들의 창검술 습득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관심으로 창검술 試才에 국왕이 親臨한 예가 많았다. 또한 선조는 검을 뽑을 때 함성을 질러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과 적과의 遭遇時에 일시에 함성을 질러서 聲威를 조장하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당시 선조가 살수에 대한 평가에서 오직 장창과 낭선 등의 기예만 익힐 뿐 검술을 연습하는 자가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백병전을 위해서 모든 군사들이 검술을 익히며, 試才時에도 劍士를 충분히 뽑도록 하였다. 당시의 현실을 훈련도감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기효신서}의 제도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원인은 먼저는 살수에 응모하여 지원하는 인원수가 거의 없었다. 다음으로는 살수에 대한 비웃는 여론으로 인해 훈련에 임하는 마음에 분발하는 자세가 없었다. 살수 훈련을 시작한지 3년 이상이나 경과했지만 이에 대한 성과는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특히 검술에 있어서는 부정적이었다. 전세가 위급한 창졸간에 짧은 무기로 접전하는 데 있어서는 검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해서 포수와 사수에게도 검술 훈련을 요구하였다. 병사의 강약과 勇怯은 장수의 운용에 달려 있다. 군졸이 潰散되지 않게 하는 가장 긴요한 방법은 오직 束伍에 있었다.

다양한 전투경험 기존의 진법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서 선조 28년 7월부터 임진왜란으로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이 틈을 타서 여진족들의 통합 움직임이 구체화 되면서 여진족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대책이 강구되면서 진법이 재 부각되었다.

{진법}의 복원과 {기효신서} 법의 검토를 통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병법 체계 구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다. 진법의 대안의 하나로 {練兵實紀}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평야와 달리 산간의 좁은 지형이 많은 상황에서 전차를 이용한 전술 적용이 곤란해서 최종적으로 진법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중국의 제도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게 된 것이다. {진법}과 {기효신서} 등의 절충적 정리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대외적 변화에 대해 조선이 행할 수 있는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효신서}는 군역 담당계층을 진법체제와는 달리 하층 농민층들로 조직 훈련을 강조한 것이다. 종래의 병학사상은 개인의 기량을 중시한 것에 비해 다소 기량이 떨어지는 개인을 적성에 따라 묶어 隊라는 기본 단위를 중심으로 집단적인 운용을 말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떨어지지만 隊라는 공동체로 결합될 때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런 조직적인 편성이 개인의 전투기량보다 전투력 발휘에 절실히 필요하였다. 예로 당파의 경우는 농기구를 개량해서 만든 무기로 농민군이 손쉽게 이를 다룰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낭선의 경우는 가지가 달린 대나무에 창날을 꽂은 일종의 창으로 주변에서 재료를 쉽게 구해서 만들 수 있는 무기로 농민군에게는 친숙한 무기인 것이다. 이들 무기는 장기간의 무예수련이 요하지 않는 무기인 것이다. 기병 중심에서 보병 중심으로의 전환이다. 양인 상층에서 양인 하위층인 일반농민이나 노비들이 중심이었다.    



2. 降倭人과 倭劍術 受容



조선은 선초이래 왜검의 우수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대에는 왜의 도검술 수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하였다. 1430년 (세종12년) 6월 일본에 건너가서 제도술을 익히고 돌아와서 일본도와 다름이 없는 칼을 만들어 바친 船軍 沈乙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고 또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三浦에 내왕하는 왜인 가운데 제도술에 밝은 자가 있으면 이들로부터도 기술을 전습하려고 노력하였다.      

왜도에 대한 평가는 沈會의 보고에 의해 軍器寺에 소장된 왜도 가운데 下品이라 할지라도 매우 예리하여 군국의 중요 무기가 되었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군기시 소장의 왜환도를 북변 경비의 병사들에게 분급하여 실전에 사용토록 하였다. 당시의 貶下된 對倭觀 가운데 왜도의 효용성만은 인정한 처사로 여겨진다.

왜검에 대한 선호는 임진란시 크게 활약했던 黃進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가 일본에 체류시에 주머니의 돈을 전부 털어 보검 한 자루를 사고는 '오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하면 이 칼이 쓰이리라'고 하였다.

조선조에서 궁술은 화약병기와 더불어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강조된 반면에, 단병기였던  창검은 보조무기의 위치로 전락되고 말았다. 槍術은 무과시험과 일반 병사의 試取에 포함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해갔던 비해서, 劍術은 무과시험과 試取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그 발달은 기대할 수 없었다. 임란 초기 조선에는 '我國絶無劍手'라 하여 검술을 제대로 할 줄 아는 劍手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다가 임란중 일본군과의 대적을 통해서 검술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부터 무과시험에도 검술을 채택하였다. 그렇지만 검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倭劒에 대해서 {武藝圖譜通誌}에서는



茅元儀가 말하기를 '일본도는 크고 작은 것, 길고 짧은 것이 같지 않다. 사람마다 장도 한자루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佩刀라 한다. 그 칼 위에 또 한 개의 작은 칼을 꽂아 두어서 편리하게 잡용에 쓴다.'   {倭志}에 이르기를 '왜적은 용감하고 우직해서 살고 죽는 것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매번 전쟁 때 오로지 나체로 석자의 칼을 들고 춤추며 앞으로 나오니 막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왜검은 일정한 恒式은 없지만 대략적인 규격은 3∼4尺의 크기로 조선의 환도보다 길어서 실전에 효과가 컸던 것이다. 조선은 왜검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왜검술의 습득에도 관심이 높았다. 조선 정부는 중국의 각종 무기에 대한 기예의 수용과 더불어 일본에 대한 왜검술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남원부에 위치하고 있던 도원수 휘하에 있던 降倭者를 서울로 올려 보내 이들을 통한 왜검술의 전습에 노력하였다. 선조는 이르기를



이번에 귀순한 倭人 중에는 劍을 잘 쓰는 자도 있고, 槍을 잘 쓰는 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劍術이 전해오지 않았는데, 근일에 약간 傳習하니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 이제 한 장수를 정하고 따로 한 부대를 세워 倭人의 槍劍 쓰는 법을 傳習시키고, 그 試才와 論賞하는 法을 中國과 동일하게 할 것으로 訓鍊都監에게 말하라.

  

라고 하면서 항왜자를 통한 왜검술의 습득에 관심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항왜들이 평시에 칼을 차고 횡행함으로 일반 서민들에게는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민폐를 끼치게 되자, 이들 중에서 기예와 공순한 자만 진중에 남겼고 그 나머지는 도검을 회수하고 수군의 格軍에 충당시켰다.

이들 항왜들을 동원해서 반란 여진군의 토벌전의 돌격부대로 투입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군 사졸 중에서 날랜 병사를 선발해서 칼을 휘두르며 선봉으로 돌입해서 성공했던 것이다. 이들 항왜들은 投順軍이라 하여 경기와 양호에서 발생된 土賊을 진압하는데 이들을 동원했는데, 이에 대한 일반의 비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후일에 조선 정부는 대여진책으로 서북면에 이들 왜검사들을 야전에 배치해서 활용하려 했었다. 李适 휘하에는 평안도 최정예병 1만 2천여 명과 임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왜병 조총수와 劍士 130여 명이 배속되었다. 이괄 난시에 이들 왜검사들의 활약이 탁월하였다. 정부는 이괄난 토벌책으로 부산 거류 일본 무사들을 청병하려 했었다. 이처럼 항왜 검사들의 숫자는 비록 적었을지라도 이들의 출중한 무예 실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투 의지로 위급한 상황하에서의 특수 임무를 부여받곤 하였다. 반란군이나 토벌군 양군 측에서 동시에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 정부는 임란 중에 堂下 무신들에게 5개월간의 검술 훈련을 시켰지만 그 성과도 기대 수준이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일부 측에서는 "검술은 조선의 장기가 아니기에 무용한 군사훈련이다. 혹은 창검술은 참으로 헛된 일이며, 비록 포수가 살수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장기인 빠른 화살만은 못하다." 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일본군을 물리칠 조선군의 일반적인 방략은 전통적인 청야입보책으로 궁수와 포수에 의한 복병전이었다. 왜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에서도 "만약 강가의 갈만한 곳에 다른 군사를 섞지 말고 수백 명의 궁수와 포수만 설치하고 적병이 이를 때 편전과 조총으로 난발한다면 왜적의 무리가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군의 대일본전에서의 승산은 육전에서는 산성에 의존한 장병작전이며, 수군은 적 후방 기습작전이었다. 조선군의 승산은 조선군의 장기의 활용이지 결코 일본군의 장기인 왜검술의 활용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조선 정부는 왜검술의 습득에 대하여 단기적 대책보다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兒童을 뽑아서 왜검술을 익히게 하였다. 아동대 50명 중에서 검술에 능한 자로 일차로 19명을 입격시켰고, 이어 아동 포살수대의 아동 중에서 재시재로 검술에 입격한 자가 16명으로 도합 35명이 되었다. 전일에 李榮白 哨의 아동수인 35명과 동일하게 1旗가 된 것이다. 별도로 초관을 차출하여 呂汝文에게 왜검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아동대 2기를 1초(원래는 1초3기)로 해서 왜검술을 훈련시킨 것이다. 항왜인이었던 山所佑가 검술로 아동대를 훈련시킨 결과 이를 시험해 보니 성취된 자가 많았고, 격려로 熟馬 한 필을 상으로 주었다.

평상시의 도검 휴대로 인해서 파생된 사회적 피해 사건도 있었다. 훈련도감군들의 서울 상주와 이들의 무기 휴대로 인한 집단적인 무력 과시와 같은 각종 범죄행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Ⅳ. 朝鮮後期의 刀劍 武藝



1. 武藝書와 刀劍 武藝



조선조의 임란이전까지 兵事는 개인적인 무예 기술보다는 兵士들의 전투 대형에 의한 효율적인 관리에 우선한다는 [先陣後技]의 개념으로 인해 군대 훈련은 진법훈련이 중심이었다. 군대를 조련시키고 무예를 사열함에도 훈련과 무예를 폐지하고 오직 진용만을 익힐 뿐이었다. 공격과 방어의 방법은 유념하지 않은 채로 다만 기치를 휘날려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케 하는 정도였다. 무예가 있다할지라도 궁시 뿐이었고, 단병기로는 마상에서 창을 쓰는 한 가지 기예가 무과 시험이 있는 정도였다.

임란을 계기로 진법훈련에 앞서 개인의 무예 기술을 중시한다는 [先技後陣]의 개념이 도입되며서 다양한 단병기의 훈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정체로 정조대에 이르러 다양한 단병기 무예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와 정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는 바다밖에 치우쳐 있어서 옛부터 전해오는 것은 단지 弓矢 한가지 기예가 있을 뿐이다. 검과 창에 이르러서는 한갖 그 무기가 있을 뿐, 이를 돌보아 익히고 쓰는 법이 없었다. 마상에서 창을 쓰는 한가지 기예가 비록 무과시험에 채용되었을 뿐이나 그 사용법 역시 자세히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검과 창이 그 무기 자체가 폐기된지 오래이다. 따라서 왜병과 대진하여 왜병이 문득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오면 아군은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을지라도 칼을 칼집에서 뺄 틈이 없고, 창은 맞부딪쳐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의 상태로 모두 적의 흉악한 칼날에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러한 까닭은 전혀 검 창법을 익히는 무예의 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란 직전의 시기에 있어서 조선은 단병기인 창검술에 대한 훈련이 전무한 상태였기에 왜병의 백병전에 속수무책이었다. 왜병은 먼저 조총에 의한 선제공격 후에 왜검을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격자세로 백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임란중에 명군의 단병술과 왜군의 왜검술 수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는 병자호란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다. 청군의 대규모 기병 중심의 기동전에서 조선의 소부대 중심의 살수부대 작전은 최정예군일지라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병자호란을 통해서 조선은 국가 전략뿐만 아니라 전술 및 무기체제상에 있어서 그 동안 경시해 오던 야인에게도 열세한 것이 입증되었다.

孝宗의 등장과 더불어 對淸 보복작전을 위한 北伐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등한시 해 왔던 궁시류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였다. 그는 신식무기인 화포에 대한 관심 못지 않게 재래무기에 대한 相補的인 기능을 중시한 것이다. 이는 북벌전 상대국의 병기 상태가 재래무기 중심이고, 전장 터가 만주 평야지대인 점을 감안한 조치였다.

효종은 射法은 물론하고 劍法 개선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문종대의 환도체제의 복원과 劍頭에 줄을 매는 방법을 禁軍에게 적용토록 하였다. 청군의 도검류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보병은 장병검, 기병은 단병검으로 대체하고, 검두에는 줄을 매어 적군과의 접전시 손에서 떨어뜨리는 것을 예방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의 화포 부대는 최강의 전력이었지만, 화포의 취약점은 폭풍우 시에는 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의 개선책으로 守禦廳의 火 隊를 화포수와 사수를 반반으로 혼합 편성한 全天候의 [射 參半隊]로 재편성하였다.

효종은 장차의 북벌전이 만주 평원전이 될 것을 예상하여 이에 대비책으로 禁軍을 친위기병대로 개편하고, 창덕궁에 전용 騎射場을 마련하여 衛士들에게 말타기 활쏘기 등의 무예를 연마시켰다. 효종이 대청 기병전에 중점을 둔 것은 그의 8년간의 인질생활과 세 번의 명나라 從軍을 통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취한 전반적인 무기체계의 강화 방향은 화포와 궁시 및 騎射 등 장병기 중심이었다.

조선 정부가 다시 단병기에 대한 관심은 가지게 된 것은 영조대였다. 단병기 무예서인 {무예제보}가 편찬된지 160여 년이 지난 영조 35년(1759)에 {武藝新譜}가 간행되었다. 임란 중에 정부가 집중 투자했던 단병기 무예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로는 먼저는 전통적인 민족 무예로서 궁술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하여 단병기에 대한 선호도가 낮았던 실정이었다. 다음은 양란 이후로 장기간의 승평과 대내외적 환경으로 인한 자의반 타의반 군비 증강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것이다.

단병기에 대한 관심이 영조대에 크게 관심을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는 都城 死守論의 제기를 통해서 근접전을 위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단병기에 대한 관심이 제고된 점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국란을 당해서 이념적으로는 戰守論을 주장하면서도 현실론은 去 策을 선택하곤 하였다. 여기에 차선의 방책으로 南漢山城이나 江華島의 保障地論도 실효성이 부족하였다. 결국 영조는 도성 사수를 闡明하고 이를 위한 군비 개선으로 무기체계도 정리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전쟁술 수준에서도 도성 사수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실제적인 도성 방위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요새화된 군사도시인 華城 건설과 莊勇營을 통한 수성전 및 국왕 호위를 위해서는 화약병기 뿐만 아니라 단병기 무예의 필요성도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大閱 등을 통하여 이를 시험하거나 장려하였다.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는 {무예신보}의 내용 일부를 {무예도보통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무예신보}는 {무예제보}의 6기에 12기를 추가한 총 18기이다. 추가된 12기는 竹長槍 旗槍 銳刀 倭劒 倭劒交戰 月刀 挾刀 雙劒 提督劒 本國劒 拳法 鞭棍 등이다. 단병기 18기 중에서 도검류가 9기로 전체의 절반 수준으로 대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90년에 발간된 {武藝圖譜通志}에는 이상의 18기에 騎槍 馬上月刀 馬上雙劒 馬上鞭棍 등의 4기와 추가적으로 擊毬 및 馬上才를 덧붙여서 총 24기를 이루고 있다. 단병기 무예 중에서 도검류의 비중은 24기 중에서 11기라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도검류의 종류와 크기가 다양해지며, 그 명칭에 있어서도 다양해짐을 알 수 있다. 또한 諸軍門에서 시취하는 명칭도 서로 달랐기에 正祖는 이를 명하여 명칭부터 통일시켰다. 예로 軍劍을 用劍으로, 短槍을 旗槍으로,   을 狼 으로, 長槍을 竹長槍으로, 挾刀棍을 挾刀로, 鞭棍을 武鞭棍으로, 牟劍을 交戰으로 개칭한 것이다.

양손에 사용하기 위해서 제작되는 短刀 중에서 가장 짧은 도검이 雙劍이었다. 雙劍은 검술을 중시한 중국에서는 상당히 발달했지만 조선에서는 발달되지 못하였다. 이 雙劍은 조선전기의 환도에 비하면 1/2이나 더 길어서 보병용 환도를 보다 더 선호하였다. 쌍검술 자체가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었기에 조선에서는 등한시되었다.      

임란을 계기로 환도 제작상에서 길어짐은 왜검에 대한 대응과 그의 우수성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도검류의 표준적인 규격은 중국 검을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환도가 길어짐은 왜검에 대응할 전투용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야전에서는 전통적으로 실전에 편리한 짧은 도검을 요구하였다. 銳刀에 관한 {무예도보통지}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명은 短刀이다.   옛말에 병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칼을 말한다. 이제 와서는 陣치는데 쓰지 않으니 失傳되었다. 근래 변방의 관리들이 등이 두텁고 길이가 짧은 칼을 제조하기를 간청하였으며, 군사들은 편리한 이 칼을 많이 쓴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조선후기의 실정으로 국가는 병사들에게 개인 휴대무기로 전투용인 긴 환도를 지급해주었으나, 오히려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긴 것보다는 짧은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긴 환도는 단병기의 대종으로 병사들에게 근접전의 무기로 지급되었으나,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은 위험에 대한 공포심과 중량으로 인한 사용 불편으로 이를 忌避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병사들은 짧으면서도 가벼워 사용에 간편한 환도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왜검술에 대한 관심은 {무예도보통지}의 24기에 특별히 倭劍譜와 병행하여 交戰譜도 기재하고 있다. 교전보의 등재 사실은 실전에서의 높은 효과를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편을 이용하여 수천 자루의 鳥銃과 환도 구입에 적극적이기도 하였다.



궁시 방패 창은 모두 아주 오랜 옛날의 무예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풍속은 방패와 창은 무슨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궁시만을 무예로 여기었다.   쇠뇌는 가장 예리한 병기이다.    弩手들에게 각각 腰刀 한 자루씩 차게 하여 적이 앞에 가까이 오면 쇠뇌에 걸터 앉아서 칼을 사용하니, 이같이 하면 활과 칼의 長短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다.



상황에 맞게 장병기와 단병기를 적절하게 사용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丁若鏞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 전반은 무예에 대해서 무관심했으며, 군영내의 병사들까지도 가장 보편적이었던 활쏘기마저 등한시했던 현실이었다.

무예란 단기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의 단련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예로 왜인들은 한가할 때 방 앞에 藁枕(볏짚 베개)을 놓고 손에 木刀를 잡고 틈날 때마다 베개를 쳐서 그 세법과 기법을 익혀서 그 신통력을 얻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도검류의 기예로서의 인식은 조선 전기의 기본적인 도검류와는 달리 {기효신서}류에서 주장하는 절강병법상의 도검류에 해당하는 월도와 쌍검 등이다. 월도 등은 일반적으로 그 웅실함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 실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서북 지방의 3개 道는 弓馬를 숭상하는 지역인데, 문학을 숭상하는 폐단이 날로 심해져서 試射마저 전폐될 위기에 있었다. 당시 국방 책임자들은 창검이 鐵箭과 더불어 조선 무사들의 기본적으로 무예로는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고유 전래의 궁마 무예에 대한 위기론이 대두되는 상황하에서는 試射의 장려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무예서를 통한 단병기 전반에 걸친 무예의 습득을 위한 훈련을 통한 군사력 건설은 하나의 과제였다. 결과적으로 단병기 무예서의 완성 자체는 기술의 성취 및 보급 수준보다는 교범류의 정리 수준으로 이해함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정조대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고유의 전통적 가치의 확립과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려는 전환기시대인 문예부흥의 시대였다. 국방력 증강도 국방에 관련된 여러 요소의 결합인 것이다. 그 중의 한 요소가 무기체계이며, 무기체계 중의 한 부분이 24반 무예인 셈이다. 실제로 {무예도보통지}상에는 전통무기의 대표격인 궁시류와 신식병기류의 대표격 화기류에 관한 기예는 실려 있지 않다. [御製 序]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치고 찌르는 법' 즉 [擊刺之法]의 무기인 단병기에 관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예도보통지}는 단병기 무예를 습득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범서인 셈이다. 단병기 무예 중에서 특히 도검류에 대해서만은 이미 失傳된 내용까지도 발굴해서 포함시킨 종합력과 체계성을 구비한 당대 최선의 무예서라 할 수 있겠다.  



武技가 禮樂의 정신과, 그리고 비록 농경적인 주조에 근거하였으나, 안으로의 경제적인 조건과 밀착시켜 다루어지고 있는데서 당시의 군주나 관료적 學人들이 얼마나 임진 병자 양란 후의 우리 국가 사회의 국방현실을 주시하였는지를 보게 한다. 왜검술을 다루고 있음은 당대 조선 학자들이 왜국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었다. 이익은 임란 이후 대왜의 의식에 경고함이 있었고,   왜에 통래한 통신사의 일본 행차에 있어서 마상재는 이 나라 무예의 신기를 일인에게 자랑했던 바요, 또 일인들은 이를 보고 좋아하고 놀랬던 것이다.



라는 평을 통해서 정조대에 무예 진흥의 목적은 사회 종합적 인식과 관련되었다. 이를 통해서 도덕적으로는 예악 정신의 함양이었고, 대내적으로는 농업경제력의 조건과 대외적으로는 분명한 대적관 인식과 관련이 되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전투기술인 무예만의 독점적 장려라면 이는 생명을 경시하는 세기말적 사회적 병폐를 유발시키는 末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정조대의 무예 진흥의 목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생산적인 문화 건설을 위한 정리이자 공동체의식과 연관되었다.



2. 短兵器上의 位置



조선 후기에 화약병기는 군사무기로서의 개인 휴대무기와 공용무기에 있어서 최상의 군기로 인식되어졌던 것이다. 전술상에 있어서도 이를 중심으로 하는 편성과 훈련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弓矢 干戚 槍劍 銃砲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긴요한 군기인가?"라는 純祖의 질문에 대해 備局의 有司堂上인 徐榮輔는 총포 최우선을 제시하였다. 承旨인 李光益도 왜국에서는 오로지 총포만을 숭상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임진란 후로 이 법을 구비하게 된 것을 인정하였다.

전쟁에 있어서 공격력의 발달과 더불어 이에 대응하는 방호력도 발달하게 되었다. 군사무기는 장병기 중심으로 발달했지만, 전투의 승패는 근접전의 결과로 결정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근접전의 주무기가 다양한 재래무기였던 것이다. 근접전을 위해서 다양한 단병기가 동원되었고, 이들 중에서 도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실전에서 군사들은 여러 단병기 중에서 어떤 무기를 더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과연 동일한 조건하에서 훈련된 단병기 무예의 상호 비교는 가능한가의 의문이다. 마침 {무예도보통지}의 [技藝質疑]에는 각 무기의 무예에 대한 겨루기 비교가 제시되어 있다. 이 무예는 절대적 우위보다는 상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은 낭선(혹은 당파)으로 이길 수 있고, 낭선은 등패로 이길 수 있고, 등패는 兪家棍 즉 棍棒으로 이길 수 있고, 곤방은 楊家槍 즉 창으로 이길 수 있다. 이 단병기들의 무예에 대한 우열의 기준이 일정한 순환적인 상대성 원리로 정리되었다. 이를 도식화하면 즉, 창 < 낭선 < 등패 < 곤방 < 창 순이었다.

이는 각 무기별 우열의 비교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특별한 기능성에 기준을 둔 평가라는 점이다. 즉 낭선이 창을 이기는 연유를 不精巧性, 즉 粗放 粗暴性에서, 등패가 낭선을 이기는 연유를 敏捷性에서, 곤방이 등패를 이기는 연유를 打擊力에서, 창이 곤방을 이기는 연유를 長短의 차이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무기별 대결에 있어서 우열은 그 기준에 따라 반대로도 평가될 수 있었다. 예로 등패와 낭선의 대결에 있어서 전반적으로는 낭선이 등패를 제압하지만, 낭선의 단점인 민첩성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게 되면 오히려 등패가 낭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각 무기의 대결은 단순 비교보다는 기능상의 장점에 대한 활용도라는 점이다. 또한 다른 자료를 통해서는 곤방류 중에서 子鞭을 매달은 鞭棍의 경우에는 오히려 창이나 검보다 낫다고 평가하였다.

이상의 일반적인 평가에서 도검류는 일단 제외되어 있다. 도검류는 단병기에 포함되고 있지만 다른 단병기와의의 차별성으로 인해 비교에 어려움이 있다 하겠다. 도검류의 장점은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된 개인 휴대무기로 최후의 백병전에서는 최상의 무기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다른 단병기와 같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근접전에서는 도검류가 창파류와 같은 단병기에는 뒤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도검류의 사용은 탁월한 기예를 이용해서 육박전과도 같은 백병전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절대절명의 위기의 백병전 상황하에서 최후로 의존한 호신무기가 바로 도검류였던 것이다. 예로 深河 戰鬪에서, 金應河 장군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적을 쳐 무찔렀다. 그는 칼이 부러지자, 다시 맨 주먹으로 버티면서 더욱 분전하였는데, 이때 적병 한 명이 뒤에서 그의 몸에 창을 던졌다. 그리하여 땅에 엎어지며, 마침내 그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도검류는 단독적인 사용보다는 타무기와 합하여 사용하였다. 근접전시 도검류의 일반적인 사용은 防牌와 함께였다. 방패의 우수성은 먼저 한 손에 잡고 있는 방패 자체의 방호력과 여기에 다른 손에 잡고 있는  槍과 腰刀에 있었다. 전통 사회에서 무기 일반에 대한 호칭인 干戈를 통해서 방패와 창이 가지는 방어무기와 공격무기의 대표성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패의 하나인  牌는 그 방호력이 우수해서 화살과 칼은 물론하고 심지어 조총까지도 막아 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일정한 근접거리가 되면  槍을 던졌던 것이다. 이 표창은 일반적으로 찌르는데 사용하는 長槍(spear)이 아니라, 장창의 절반 길이로 가벼워서 멀리 던지기에 편리한 投槍(javelin)의 일종이었다. 표창을 던지고 난 병사는 적군의 단병기 공격을 한 손에 잡고 있는 등패로 막으면서, 다른 손에 든 요도를 휘둘러서 최근접 위치에서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이다.

수성 방어전에서 사용된 무기에 대하여 {守城機要}에 보면 적이 접근해 오는 동안에 차례로 砲 銃 → 활 → 창 → 돌을 사용하여 적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장병기로부터 차례로 단병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도검류가 생략되었는데 이를 창이 창검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근접전의 무기로 돌이 창에 앞서서 등장하는 것은 찌르는 창의 기능보다는 던지는 창의 기능에 우선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환도를 포함한 개인 휴대의 도검류는 전투를 위한 전술적 기능보다는 최후의 護身用의 의미가 강했다고 하겠다. 수성전에서 전투병의 기본 휴대무기는 도검류였고, 火夫라 할지라도 도검류를 포함한 기본 휴대무기를 구비했던 것이다.

도검류는 최근접 위치에서 치명상을 입혔기에 호랑이를 잡는데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조선 정부는 호랑이에 의한 인명 피해가 급증하자 호랑이 포획에 적극 나섰다. 丁若鏞은 호랑이 잡는 방법 중에서 제일 좋은 방법이 弩刀인데, 이는 반달 형상의 안팎으로 칼날이 있는 일종의 덫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紅夷砲와 같은 대형 화포가 전쟁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 화포는 조준기를 구비해서 사격의 정확성이 뛰어나서 보병 중심의 밀집 대형을 기본으로 하는 기효신서의 방진 전술은 화포의 공격에 취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기병은 보병과는 달리 기동성이 높아서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하였다. 대형 화포는 사격 방향을 신속히 변경하기 어려워 신속히 이동하는 기병에 대한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경무장한 기병이 다소 피해를 무릅쓰고 신속히 적군 진영에 돌입할 경우에는 효과적으로 소총병을 제압할 수 있었다. 따라서 경무장 기병의 역할이 한층 높아지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 조선은 대왜전을 위해서는 {기효신서}의 砲殺法을 썼고, 對胡戰을 위해서는 {練兵實紀}의 車騎步法을 썼다. 步 騎 車戰의 복합전술에서의 기병의 역할은 속도에 의한 충격력으로 輕騎兵 위주였다. 기병 중심의 龍虎營에서 기병이 전통적인 소총이나 창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장창과 같은 크고 긴 무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편곤과 같이 매우 휴대하기 쉽고 빠르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로 무장한 것이다. 이는 기병의 경량화로 신속한 기동과 충격효과를 중시하였기에 창보다는 편곤을 이용하여 밀집된 적군에 대한 근접전 능력을 중시하는 전법이었다.



龍虎營의 작전은 적병이 100보 안으로 들어오면 궁시를 일제히 발사하고, 적병이 50보 내에 들어오면 편곤을 뽑아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을 추격한다. 이 편곤은 농가에서 보리 타작에 사용하는 도리깨인 連 와 흡사하였다. 쇠사슬을 挾棒 위에다 매어서 좌우로 휘두르면 닿는 대로 모두 가루가 되고 만다.



조선의 기병전은 당시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진 기병전 형태와는 차이가 있었다. 서양에서는 17세기 이후로 기병 전법이 변화되었다. 종래의 총을 가진 기마의 선회동작이 폐기되고, 대신 기마에 의한 질주공격이 행해졌다. 기병의 주무기는 칼이었고, 총은 난전시 보조무기로 사용되었다. 기병은 속도와 비중을 적절히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다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기병은 이중적인 전술 기능, 즉 보병의 공격을 위해 전면에서 전초전을 벌여 길을 트는 기능과 결정적인 급습을 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와 같은 輕騎兵의 무기체계상의 변화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보병의 무기체계에도 변화를 초래하게 하였다. 보병은 대기병전과 대보병전을 위해 소화기의 총구에 帶劍 즉 銃劍을 장치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 장치로 인한 총검술은 근접전에서의 장창과 도검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장창 단독의 병종은 전투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전장에서 장창수가 소총수의 한 병종으로 합쳐지면서 보병 전술에 변화도 초래되었다. 이 총검술은 비록 현대의 군에게는 실전적인 기능은 퇴화되었다 할지라도, 대검을 통한 총검술 효과는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경기병의 주무기로 도검류를 대신해서 편곤이 선택된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무예도보통지}에는 마상무예로는 [馬上雙劍] [馬上月刀] [馬上鞭棍] [馬上才] [騎槍] [擊毬] 등 6가지가 실려 있고, 여기에는 도검류가 2가지나 포함되어 있다. 이들 기마를 통한 마상무예는 보통의 무예보다 그 숙달이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이 무예들 중에서 도검류인 쌍검은 숙달하기가 심히 어려웠고, 월도의 경우에는 실전의 진에서 거의 사용치 않았던 무예였다. [마상재]의 무기는 三穴銃으로 도면에서와 같은 立射자세로의 발사는 의례행사시 展示用 무예로서의 효과는 컸다. 그러나 실전에서의 발사 효과나 발사후의 총이 가지는 무기로서의 기능 저하 등은 실전용 무예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격구는 실전용의 전술적 기능보다는 기마 숙달의 군사훈련용의 성격이 강하였다. 기창은 유일한 전통적인 마상무예였지만 내용상에 있어서 달랐다. 종전의 시험 훈련용 기창에서 실전용으로 전환되었기에 이의 숙달에는 상당한 기간이 요하게 되었다. 이상의 무예와는 달리 편곤은 일상 생활 가운데 쉽게 접했던 농기구의 기능과 유사해서 이의 숙달 및 사용이 제일 손쉬웠던 무기였기에 경기병의 주무기로 쉽게 선택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訓鍊都監軍에게 지급되었던 군기의 규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馬軍: 갑주 環刀 筒兒 鞭棍 각 1, 長箭 20, 片箭 15, 校子弓 帿弓 油衫 각 1

步軍: 갑주 조총 環刀 각 1, 火藥 12兩5錢, 鉛丸 50, 油衫 1

  

이와 같이 환도는 射手인 馬軍과 砲手 殺手인 步軍 모두에게 지급된 개인 기본 휴대무기였다. 차이점으로는 마군에게 편곤과 궁시류가 지급되고, 보군에게는 조총이 지급된 점이다. 이 원칙 적용을 龍虎營의 군기 규정을 통해서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禁軍 기병(700명): 甲胄, 環刀, 校子弓, 鞭棍, 油衫 각 1

標下軍 보병(460명): 조총, 환도, 유삼 각 1

공용무기: 월도(8자루), 쌍검(10쌍), 장창(4자루) 등



용호영의 경우에도 훈련도감과 기본적인 원칙에서는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공통적으로 지급된 무기는 환도였고, 기병에게는 편곤과 교자궁이, 보병에게는 조총이 지급되었다. 이외의 월도 쌍검 장창 등은 공용무기로 소량에 불과하였다. 이로써 용호영 기병의 주무기는 장병기용으로 교자궁이 단병기용으로 편곤이 지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병과 보병에게 공통적으로 지급된 환도는 보조무기로 최후 호신용 무기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조선 기병의 백병전의 주무기는 편곤이었고, 보조무기는 환도였던 것이다.

화약무기의 보급이 상당히 보편화된 19세기에도 전투 현장에서는 재래무기에 대한 의존도가 여전히 높았던 것이다. 재래무기 중에서 도검류는 기병전의 주무기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보병전에 있어서는 최후 백병전의 주무기였다. 조선후기에 都城과 北漢山城 및 南漢山城 등에 비축된 각종 군기의 수량이 {萬機要覽}과 {南漢志}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단병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병기의 비축 수량>  

환도를 포함한 도검류가 전체 단병기의 80% 수준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환도는 모든 병종의 병사에게 개인 휴대무기로 지급되었고, 유사시에 백병전 및 호신용 무기로서의 군사적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훈련도감에서는 편곤류의 비중이 30% 수준에 육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輕騎兵의 훈련무기로서 편곤류의 비중이 커진 것을 반영해 주고 있다.  

純祖 11년(1811)에 일어난 홍경래란시 이들 반란군이 무장한 개인 휴대무기는 재래의 궁시류와 창검류였다. 반란군은 鑛山 인부로 장정을 모집해서 광산 대장간에서 급조된 창검으로 무장시켰다. 홍경래는 平西大元帥라 일컫고, 은제 투구에 용미늘 갑옷을 걸치고 8척 장검을 잡고 반란군을 지휘하였다.

재래무기에 의존한 초기 전투에서 정부 토벌군과 반란군은 어느 편도 유리한 상황을 진전시키지 못하였다. 양군의 대치 상태를 붕괴시킨 것은 효과적인 화약과 총수의 활용 작전이었고, 이를 극대화시킨 것이 도검에 의한 최후의 백병전이었다. 정부군은 地下坑道를 굴착해서 1천 8백 근의 화약 폭발로 定州城의 일각을 붕괴시킨 후에 攻城戰을 전개하였다. 이들 정토 관군들이 반란군을 처참하게 진압했는데, 이 당시 관군이 사용한 백병전 무기가 바로 도검류였다.

조선에서의 도검류의 전술적 기능은 서양의 근대식 총포류의 등장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국왕의 의장 행차시에는 전통적인 여러 병종의 군대와 무기가 동원되었다. 선초이래 한말에 이르기까지 도검류를 휴대한 도검군도 동원되었다. 국왕 행차 전후에는 보병 기병 창병 검객 궁사 등 일단의 군사들이 참여하였다. 검객과 기병 중의 일부 군사들은 도검류를 휴대하고 최근접에서 국왕의 호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 도검군의 일반적인 복장으로 具軍服에 붉은 색 소매가 달린 동달이를 착용했었다. 이는 도검군이 타 병종에 비해 생명의 위험에 보다 더 노출된 사실을 반영해 주고 있는 점이다.



Ⅴ. 結論



동양의 전통적 병가사상은 평화주의였다. 손자가 내세우고 있는 전쟁 원칙도 싸우지 않고서도 적을 굴복시키는 것을 上策으로 여겼다. {육도}에서도 "최상의 전쟁은 적과 싸우지 않고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지, 승리를 백병전을 하여서 얻는 것은 愚者나 하는 일이다."라 했다. 상책의 실현은 堯舜시대의 이상이었고, 이의 실천을 위한 兵略은 발달했던 반면에 실전적인 군사 무기나 무예 등은 등한시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조선의 도검은 대여진전을 통해서 일정한 규격화가 성립되었는데, 이것이 文宗代의 환도체제였다. 이 환도체제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고 후일에 시대적 요구에 따라 그 길이의 장단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환도는 直短의 형태로 전투용의 기능보다는 개인적인 호신용의 기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야전 사령관에게 군권을 위임하는 대장 임명식은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부월의식으로 나타났는데, 조선조에는 검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조선의 대전략은 여진족에 대한 대북방책이었다. 이를 위해 기병 중심의 진법체제가 성립되었지만 기본적인 기병술이나 도검군의 무예술도 북방민족에게 열세한 입장이었다. 이 열세를 장병기인 궁시류와 화기류 등의 활용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임진란 이전에는 궁시와 화포를 중심으로 하는 장병전술을 이용한 조선군은 창검을 주무기로 삼는 단병전술을 구사하는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개인 휴대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면서 단병전술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었어 조선의 궁시를 능가했으며, 또한 단병기인 창검도 조총의 비호를 받아서 그 활용도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 명군의 참전으로, 특별히 절강병의 전법과 무기가 판이하였다. 원거리에서는 화포로 일본군의 조총부대를 압도했으며, 근접 백병전에서는 다양한 무기체계로 일본의 창검술을 압도했던 것이다.

조선은 연전 연패의 국난을 통해서 이를 타개할 국방 재건을 위한 길로 중국식 군사기술을 도입하였다. 조선은 임란중에 명나라의 삼수병제에 의한 훈련을 담당하는 훈련도감을 창설하였다. 중국식 단병기는 다양했고 농기구와 관련되어서 제작과 사용 숙달이 비교적 쉬웠다.      

임란 초기 조선군은 일본군과의 대적을 통해서 검술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부터 무과시험에도 검술을 채택하였다. 조선은 실전에 효과가 컸던 왜검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왜검술의 습득에도 관심이 높았다. 降倭者를 통해 왜검술의 전습에 노력하였다. 조선은 아동대를 편성해서 왜검술 습득에는 장기간의 계획으로 이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양란 이후로 조선은 단병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가지지 못하였다. 그 후 영조대에 都城 死守論의 제기를 통해서 근접전의 대비책으로 단병기에 관심을 보였다. 정조는 보다 실제적인 도성 방위를 위해 요새화된 군사도시를 건설하고, 이의 수성전을 위한 화기뿐만 아니라 단병기 무예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대한 훈련 교범서인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는데, 이 단병기 무예 중에서 도검류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다시 등장된 기병전은 조선전기의 단독전과는 달리 보병 및 전차와의 합동작전이었다. 이들 경기병이 휴대한 무기는 창검류나 총포류가 아니라 사용과 숙달이 보다 쉬웠던 편곤이었다. 비록 도검류는 그 숙달의 어려움으로 경기병의 주무기는 되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조무기로서의 위치는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다. 도검류의 장점은 최후의 급거지간에 의존할 수 있는 개인의 호신무기라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러 실전에서 그대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도검류를 제외한 단병기들은 현대 군대의 출현과 더불어 전투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도검류 역시도 현대전에 있어서 그 전술적 기능은 퇴화된 것은 현실이다. 그러한 가운데  군사적 전통의 일부가 현재에도 소총의 총검술용 대검과 의례적인 지휘도 및 예도 등으로 그 명맥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도검류에 관한 자료의 제한성과 능력 부족으로 처음에 제기했던 궁금증을 제대로 풀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측 자료는 물론하고 서양측의 관련 자료 및 지식이 요구된다. 또한 여기에 실험적이고도 과학적인 통계자료를 통해서 자료 해석의 근거로 제시되어야 하겠다. 비록 본 연구가 만족스러운 성과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활성화의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읽음

26

  [활] 조선의 궁술 -궁술교범 1 [1]

1929_11.jpg

2006/04/14

6538

25

  [활] 사진으로 보는 편전(애기살 쏘기) [1]

p_d.jpg

2006/04/20

6548

  [논문] 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 運用

2006/07/06

6634

23

  [해동역사] 병기(兵器)

2009/02/15

6642

22

  [자료] 논어와 맹자 속의 활쏘기

2010/03/30

6673

21

  [철전-육량전] 오주연문장전산고

2007/04/05

6683

20

  [문집] 여헌선생문집 제10권 - 논(論) 문무(文武)가 일체(一體)라는 논

2008/01/18

6727

19

   [자료] 목민심서(牧民心書)/병전육조(兵典六條)

2010/04/28

6907

18

최형국

  [해동죽지] 각저희, 탁견희, 수벽타

2006/06/07

7010

17

  [택견] 택견의 미학적 논의

2006/07/01

7032

16

최형국

  [무과] 조선의 무과는 양반의 과거요 평민의 희망이었다.

2006/06/07

7045

15

  동각 잡기- 팔준마

2007/07/16

7087

14

  [논문] 18세기 『어영청중순등록』에 나타난 각종 무예

2008/01/09

7182

13

  [Martialarts] History and Heritage [8]

2005/11/25

7205

12

  [신기통] 우리 모두 손가락 수련~

2007/08/15

7359

11

  [논문-택견] <<중요무형문화재 택견의 보급과 육성>>

2006/12/18

7363

10

  [논문] 국궁-비정비팔 흉허복실의 이해와 응용

2010/02/02

7386

9

  조선전기 개인 무기운용에 관한 기사 [3]

2005/11/09

7480

 

 

[1][2][3][4][5][6] 7 [8]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랄라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