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무예 자료     사학 자료     이미지 자료     기사모음     박사논문

 [논문] 高句麗 馬具의 發展과 周邊 民族 및 地域과의 關係

 이름 : 

(2006-07-05 23:01:56, 7001회 읽음)

高句麗 馬具의 發展과 周邊 民族 및 地域과의 關係

                                                                    魏存成


漢唐시기 무예를 익히고 전쟁에 능하며 鴨綠江 양측의 광활한 산지에서 정권을 잡고있던 高句麗 민족은 騎戰과 騎射방면에서 명확한 우세와 특징을 갖고 있었다. {魏書} 등 문헌기재에 의하면 高句麗 선조를 "朱蒙"이라고 불렀는데, 바로 "옛날에 이르기를 '朱蒙'인자는 사격에 능하다"하여 그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朱蒙 역시 말의 우열을 식별할줄 알고 사격에 능하였다. 백여년간 재위한 高句麗 6대왕 太祖王 宮은 건광원년(建光元年:121年) 가을에 "말을 타고 韓, 濊貊의 수천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현토(玄 )를 공략하였다". 騎兵의 규모가 매우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궁(宮)의 후세인 位宮은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사람을 볼 수 있어(生亦能開木視人)" 宮과 비슷하였으며 마찬가지로 "힘이 있고 용감하며, 말을 잘 타고 짐승을 잡고 사격에 능하였다.(有力勇, 便鞍馬, 善獵射)" 好太王이 일생동한 친히 보병, 수병, 기병을 거느리고 곳곳에서 싸움을 벌여 토지를 빼앗고 城을 공략한 사실들은 《好太王碑》의 碑文에서 그 전형적인 전례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高句麗는 "多大産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其人性凶急, 喜寇 ."하였다. 따라서 수렵은 필연적으로 그 당시 중요한 생활의 원천이 되었다. "매년 봄과 가을이면 수렵을 하는데 왕도 친히 수렵에 나간다.(每春秋校獵, 王親臨之)" 이로부터 수렵이 高句麗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高句麗 墓葬의 벽화 중에는 신분이 고귀한 묘 주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냥군들이 말을 타고 삼림을 달리면서 짐승들을 붙잡는 생동적인 화면들이 많이 있는데 당연히 이것과 관련이 있다. 말을 타고 수렵을 하는 것은 군사훈련을 견지하고 전쟁준비를 하는 高句麗를 놓고 말할 때 그 실제적 의의를 홀시할 수 없다. 그리하여 高句麗후기까지, 비록 벽화 속에서 수렵하는 장면들을 더는 찾아볼수 없지만, 高句麗 사람들은 글을 읽고 활쏘기 연습하는 전통만은 그치지 않았다.
바로 高句麗의 騎戰과 騎射를 숭상하는 사회적인 풍습으로 인하여, 현재의 高句麗 墓葬 발굴에서는 이와 관계된 실물재료들이 적지 않게 출토되는데, 그 가운데서 마구가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오랜 시기 동안의 부식과 교란 때문에 마구의 피혁(皮革), 사직품(絲織品), 목질(木質)부품은 이미 대부분 존재하지 않고, 지금 볼수 있는 것은 거의 금속부품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데 表一과 圖一을 보기로 하자.
表一에서 高句麗 墓葬을 열거하였는데 마선구(麻線溝)M1, 우산하(禹山下)M41과 장천(長川)M2는 벽화묘이다. 墓葬의 형식 구조 및 벽화내용의 풍격과 출토된 사이전연호(四耳展沿壺)의 특징에 근거하여 배열하면, 그 연대는 5세기이다. 이런 묘는 일찍이 열리게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마구의 부품은 매우 적다. 만보정(萬寶汀)M78은 방단계단식 석광(方壇階梯石壙)이고 칠성산 M96은 방단 계단식 석실인데, 모두 "돌을 쌓아 봉분을 한(積石爲封)" 적석묘(積石墓)이며, 또한 규모도 비교적 크다. 묘는 비록 도굴이 되었으나 적석(積石)이 복잡하여 수장품들이 비교적 쉽게 숨겨져 있게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마구 부품이 비교적 많다. 그중에서도 만보정(萬寶汀)M78 한채의 묘에서만도 두 쌍의 마구가 출토되었다. 墓葬유형의 변천과 출토된 유약을 바른 도자기(釉陶) 등의 상황 분석에 근거하면 이 두채의 묘의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는 것이 비교적 적합하다. 환인(桓仁)M15, M19; 집안 만보정(集安萬寶汀)M242와 우산하(禹山下)2식 적석묘(積石墓)의 유형은 비교적 원시적이고 출토된 마구의 부품도 매우 간단한데 어떤 것은 단지 함표(銜 )만 볼 수 있어 그 연대가 비교적 이르다고 설명할 수 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集―錫(集安―錫林浩特) 도로건설을 하기 위해 禹山 묘구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을 진행하여 모두 113채의 墓葬을 발굴하였는데, 그중 1/3은 적석묘(積石墓)이고, 2/3는 봉토묘(封土墓)이다. 그러나 수장품이 積石墓에서 많이 출토되었으며 그중 마구 부품으로는 철마함(鐵馬銜), 안교철포변(鞍橋鐵包邊), 유금대잡( 金帶 ), 유금 살구나무 잎( 金杏葉), 안교류금압조(鞍橋 金壓條), 유금보요활엽대식( 金步搖活葉帶飾)등이 있다.(圖二) 발굴보고에서 墓葬의 등록표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매 墓葬 및 그 수장품에 대해 상세하게 대조 검토할수 없다. 발굴보고에서는 이 積石墓의 연대를 4세기 전후에서 5세기로 추측하였는데, 출토된 마구의 특징으로 보아 상술한 표1의 묘장 연대 측측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이전의 연구에 의하면 兩晉 남북조(南北朝)는 마구의 발전시기인데, 마구 각각의 부품이 이 시기에 이르러 기본적으로 완비되었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마구가 출토된 墓葬도 바로 이 시기이다. 高句麗 마구의 발전 및 주변 민족, 지역과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본문에 아래 마구의 각 주요 부품의 비교 그림 가운데 이 역사시기 高句麗 이외의 몇 기의 중요한 墓葬에서 출토된 마구도 끼워넣었다. 우선 분석비교를 하기 전에 이 몇기의 墓葬의 연대 족속(族屬)등의 상황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연대가 비교적 이른 것은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인데, 이 묘는 무덤길이 비탈지고 사다리꼴인 석실묘(梯形石室墓)로서 안에는 사다리꼴의 목관이 놓여져 있다. 묘 안에는 甲으로 된 기구(騎具) 옷 한벌이 있는데 복원된 철두무(鐵兜 ), 경갑(頸甲), 말 투구(馬胄)가 각기 한벌씩이고, 복원이 불가능한 甲片이 1000여 片이나 된다. 출토된 마구는 완벽한데 유금동당로( 金銅當盧) 1점; 류금동 말의 재갈( 金銅馬 ) 쌍 2점; 목심류금동안교포편(模芯 金銅鞍橋包片)은 두쌍인데 한쌍은 하얗고 무늬가 없는 面으로서 동시에 2점의 하얗고 무늬가 없는 익형편(翼形片)이 출토되었으며, 투조된 한쌍에서는 동시에 4점의 투각된 익형편(翼形片)이 출토되었는데 투각된 주제 꽃무늬는 거북이 등무늬이고 안쪽은 괴이한 짐승들의 무늬이다. 류금동 말등자 ( 金銅馬 ) 1점 즉 단등자(單 )는 긴 자루에 원반모양(扁圓形) 등환( 環)이며 밑부분은 안쪽으로 옴폭 들어갔다. 원구형 동방울(銅 鈴)은 26점이며; 동 살구나무 잎(銅杏葉)은 12점으로서 한가지 종류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규형(圭形)이고, 다른 한가지 종류는 도형(桃形)을 나타내고 있으며; 매화형 류금동대식( 金銅帶飾)은 10점으로서 네잎인 것이 9점이고, 다섯잎인 것이 1점이며; 류금동보요활엽대식( 金銅步搖活葉帶飾) 180점에서 아래 墓葬에서 출토된 것과 다른 것으로는 이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의 원고형(圓鼓形) 밑부분이 덮어 씌워진 것이 아니고, 위로 향하게 하여 놓은 것이다.(圖三) 발굴보고에서는 이 묘의 시대를 전연(前燕)이 서울을 업성( 城)으로 옮기기(352年) 이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의 墓葬에서 출토된 마구는 역시 단등자(單 )인데, 墓葬에는 순장된 말머리, 개머리, 개발이 있었다. 이러한 장례 풍속에 의하여 원보고에서는 이것을 "鮮卑人의 墓葬이 아니면 적어도 鮮卑의 영향을 받고 鮮卑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다.(圖四) 이묘의 연대는 약 4세기 중엽 전후인데 이 시기는 바로 묘용(慕容)鮮卑의 세력이 황하(黃河)하류로 발전하고 있었던 시기었다.
조양원대자동진(朝陽袁臺子東晉) 벽화묘에서 두 개의 등자가 출토되었는데(圖五) 그 연대가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보다 이르지 않다. 墓葬의 벽화는 운남소통후해자동진(云南昭通後海子東晉) 郭承嗣 벽화묘(4세기말), 조선반도안악(朝鮮半島安岳)3號 冬壽 벽화묘(357年) 및 덕흥리유주자사(德興里幽州刺史)□□鎭 벽화묘(408年)와 매우 비슷한 것들인데, 동시에 묘안에서 출토된 동괴(銅魁)는 조양현후연(朝陽縣後燕) 崔 (395年) 묘에서 출토된 것과 형상과 구조가 같고, 크기도 비슷하므로 조양원대자(朝陽袁臺子) 동진 벽화묘의 연대는 마땅히 4세기 후반일 것이다.
본계소시진묘(本溪小市晉墓)는 돌로 쌓은 묘실(墓室)인데, 주실 밖의 앞 복도(前廊) 좌우에 이실(耳室)이 설치되어 있으며 오른쪽 것이 크고 왼쪽 것이 작고, 요양(遼陽) 지역 위진(魏晉) 墓葬의 전통에 속한다. 묘안에서 출토된 도기(陶器)는 요서(遼西) 鮮卑 도기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圖六), 그중 1점의 목이 짧고 배가 볼록한(腹鼓) 관(罐)의 어깨부분에는 수장문(垂帳紋)이 장식돼 있다. 이런 무늬장식(紋飾)은 칠성산(七星山)M96, 우산하(禹山下)M41, 장천(長川)M2등 高句麗 墓葬에서 출토된 도기에서 모두 발견된다. 이 묘의 연대에 관하여 원보고는 "양진(兩晉)시기보다 늦지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진(東晉)시기이다. 이 묘의 족속(族屬)은 아직 진일보된 고증을 기다려야하나, 묘장에 반영된 문화적 교류는 아주 명확하다.
新羅 천마총(天馬塚)의 연대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인데, 이에 대한 중외학자들의 관점은 일치하며, 묘에서 출토된 마구는 다섯 쌍에 달한다. 마구가 출토된 중요한 新羅 墓葬은 천마총(天馬塚) 1채만이 아니며, 그것들의 연대는 주로 5, 6세기에 집중되고 있다.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의 연대는 6세기 후반기로서 그곳에서 출토된 마구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日本 옛 무덤 마구의 걸출한 대표라고 할수 있겠다. 마구가 일본 옛 무덤에서 출현한 것은 약 5세기 중반기부터 시작되었는데, 5, 6세기에 급격히 증가하였다.
아래에서 우리들은 高句麗 및 기타 주변 민족과 지역의 마구에 대하여 분석 비교를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圖七의 함표(銜 )를 볼 때 함표(銜 )는 마구 말고삐와 재갈( 頭) 중 주요한 부품으로서, 다른 것으로는 또 액대(額帶), 비대(鼻帶), 협대(頰帶), 인대(咽帶)와 금속부품인 당로(當盧)등이 있다. 초기의 표( )의 조형으로는 뿔(角)형과 "S"형이었는데 그중 漢시대에 유행되기 시작한 "S"형은 위진(魏晉)시기에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집안만보정(集安萬寶汀)M242에서 출토된 것이 바로 이러한 조형인데, 이것은 하북양원(河北陽原) 서한(西漢) 말기 墓葬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비슷하다. 당연히 만보정(萬寶汀)M242의 연대는 그렇게 이르지 않으며, 그것의 연대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일 것이다. 환인(桓仁)M19는 만보정(萬寶汀)M242보다 연대가 이른데 단지 재갈(銜)과 끈을 맬 때 사용하는 몸신이 긴 투환(套環. 예전에는 "引手"라고 함.)만 출토되었다. 재갈(銜)과 조합하여 사용한 표( )는 마땅히 "S"형 혹은 뿔(角)형이었을 것이다. 만보정(萬寶汀)M78과 칠성산(七星山)M96에서 출토된 마표(馬 )는 모두 타원형이며, 어떤 것의 위부분에는 장방형의 천공(穿孔)이 있고 협대(頰帶)까지 꿰뚫고 있다. 표신( 身)은 어떤 것은 무늬가 없이 흰색의 반들반들한 판(光板)이며, 혹은 십자가인 대들보(梁)를 더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것은 투각한 꽃무늬가 있다. 이러한 약간의 차이가 있는 조형과 무늬장식은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 조양원대자동진(朝陽袁臺子東晉) 벽화묘와 본계소시진묘(本溪小市晉墓)에서 출토된 마표(馬 )에서 이미 모두 볼수 있고 新羅 "천마총(天馬塚)"시기에 와서도 여전히 유행이 되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이 한가지 종류에 속한다.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에서 출토된 마표(馬 )는 세 개의 화판형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런 타원형의 마표(馬 )는 이시기 中國 북방과 朝鮮半島외에 日本에서 광범위하게 유행되고 있었던 유형들이다.
마구의 제 2부분은 안구(鞍具)인데, 전후로 안장(鞍橋), 말언치( ), 장니(障泥) 등을 포함하고 있다. 오랫동안 기나긴 시간을 거쳐 오늘까지 전해진 것은 일반적으로 전후 안장(鞍橋)표면의 금속包片(일부는 가죽包片) 뿐이다.(圖八) 현재 발견된 비교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高句麗 안장(鞍橋)包片들은 각기 만보정(萬寶汀)M87, 칠성산(七星山)M96과 우산하(禹山下)M41, 이 세 채의 묘에서 출토되었고, 기타 몇 채의 묘에서는 단지 잔편(殘片) 혹은 포변(包邊), 압조(壓條)만 출토되었다. 包片의 둥근 아치형 외형으로부터 볼수 있는바 그것들은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와 원대자동진(袁臺子東晉) 벽화묘에서 출토된 것과 같으며, 모두 양진(兩晉)에서 유행되기 시작한 고안장(高鞍橋)에 속한다. 新羅"천마총(天馬塚)"과 日本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에서 출토된 것도 역시 이 유형에 속한다. 보존이 완정한 안장(鞍橋)包片에서 볼 때 윗부분이 말발굽 모양으로 된 주체부분과 아래부분이 좌우로 서로 연결되거나 혹은 연결되지 않는 익형편(翼形片. 예전에는 "磯金具"라고 함.)으로 나뉘는데, 주체부분의 외연에는 또 다른 금속包片이 있다. 주체부분과 익형편(翼形片)이 서로 연결된 곳이 바로 행을 이루어 리베트( 釘)로 고정된 압조(壓條)이다. 칠성산(七星山)M96에서는 단지 상부 주체부분만 출토되었고 만보정(萬寶汀)M78에서 출토된 두 쌍 가운데 한쌍은 오직 하부 익형편(翼形片)만 남아 있다. 보존이 비교적 잘 된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과 "천마총(天馬塚)",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을 포함한 新羅, 日本의 墓葬에서 출토된 마구에서 볼 때 흉대(胸帶)와 추대( 帶)는 전후 안장(鞍橋)의 익형편(翼形片)에 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익형편(翼形片)에 고정된 매듭이 있거나 혹은 매듭이 있는 천공(穿孔)을 발견하였는데 앞의 안장(鞍橋) 익형편(翼形片)에는 두 개의 천공(穿孔)이 있고 뒤의 안장(鞍較) 익형편(翼形片)에는 네 개의 천공(穿孔)이 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위에서 서술한 안양(安陽), 원대자(袁臺子), 및 高句麗의 墓葬에서 출토된 마구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과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에서 또 각기 위에 두 개의 천공(穿孔)이 병렬되어 있는 "만두형안식편(彎頭形鞍飾片)"을 수집하였으며; 집안우산하(集安禹山下)M41과 마선구(麻線溝)M1에서도 이러한 형상과 구조의 식편(飾片)이 출토되었는데, 복원시킬때 그것을 안판(鞍板)에 고정시켰다. 안장(鞍橋)包片은 어떤 것은 하얗고 무늬가 없으며, 어떤 것은 투각된 꽃무늬가 있다. 만보정(萬寶汀)M78에서 전 면에 투각된 구름 무늬가 있는 것이 한쌍 출토되었으며,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 新羅"천마총(天馬塚)"과 日本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에서 각기 한쌍의 투조된 6각형 거북이 등무늬가 있는 것이 출토되었고, 또 각종 복잡하고 세밀한 구름무늬 및 화초와 짐승들이 투조된 무늬가 장식된것도 출토되었다. 거북이 등무늬의 문식(紋飾)에 관하여서는 서진(西秦) 건홍원년(建弘元年: 420年) 병령사석굴(炳 寺石窟)의 불상과 高句麗의 귀갑련화총(龜甲蓮花塚)의 벽화묘에서 모두 볼수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문식(紋飾)이 그 시기에 광범하게 유행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세 번째로는 말등자(馬 )(圖九)인데, 이는 마구의 발전사에서 관건적인 위치에 놓여져 있다. 말등자(馬 )가 있음으로해서 사람과 말이 결합되어 일체를 이루고, 더우기 말 위에서 활동하기가 편하다. 하지만 한위(漢魏)이전은 현재까지도 말등자(馬 )가 있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모두가 알다싶이 장사(長沙) 서진영녕이년(西晉永寧二年: 302年)의 墓葬에서 출토된 유약을 바른 도자기기용(騎俑) 좌측의 단등자(單 )는 지금까지 발견된 제일 이른 말등자(馬 ) 조형이다.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88M1과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에서는 단등자(單 )의 실물이 발견되었다. 북표풍소불묘(北票馮素弗墓: 415年)에서 출토된 쌍 등자(雙 )는 지금까지 명확한 기년이 알려져 있는 제일 빠른 시기의 쌍을 이루고 있는 말등자(馬 ) 실물이다. 초기 말등자(馬 )의 제조 특징은 안쪽은 목심(木芯)이고 밖은 금속편으로 포장하였는데, 일부는 피혁으로 포장하기도 하였으며 등자( )의 자루(柄)가 비교적 길다. 등환( 環)의 아래부분 즉 발을 딛는 부위인 단면(斷面)은 여전히 상부와 마찬가지로 좁다. 대체로 발을 딛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발과 등자( )사이의 마찰을 크게 하기 위해 일부 등자( )를 環의 아래부분에 사용함으로써 평평하게 하거나 혹은 안쪽으로 약간 옴폭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어떤 것은 또 환(環)의 안쪽으로부터 밖으로 몇 개의 큰 리베트( 釘)을 박기도 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흔적들은 圖九에서 나열한 高句麗 및 高句麗이외의 말등자(馬 )에서도 모두 찾아볼수 있다. 그중 朝鮮半島 남부의 동래복천동(東萊福泉洞)M10과 日本 자하현(滋賀縣) 신개(新開) 옛 무덤의 연대는 5세기 중엽이다. 圖九 마지막에는 日本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에서 출토된 말등자(馬 )를 끼워 넣었는데, 그 완정한 조형은 등자( )의 앞부분을 모두 둘러 쌓았으며 장화(靴)의 앞부분과 비슷한 일종의 등자( )이다. 이런 등자( )는 日本에서 비교적 많이 발견되었으나 기타 지역에서 아직까지도 확실한 발견이 없다.
마구의 네번째 부분으로는 흉대(胸帶)와 추대( 帶)이다. 흉대(胸帶)와 추대( 帶)에서 늘 볼수 있는 대식(帶飾)으로는 살구나무 잎(杏葉), 방울( 鈴)과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이다. 살구나무 잎(杏葉)은 추대( 帶)의 양측 아래 부분에 걸려 있다.(圖十)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 조양원대자동진(朝陽袁臺子東晉) 벽화묘와 본계소시진묘(本溪小市晉墓)에서 출토된 것은 기본적으로 한가지 유형인데, 허리를 꼭 졸라맨 잎형(束腰葉形) 혹은 가늘고 긴 규형(圭形)이다. 이런 유형은 집안(集安)의 高句麗 묘 가운데서는 아직 나온 적이 없으나 新羅와 日本에서는 많이 발견되었으며 '천마총(天馬塚)' 같은 것들을 예로 들수 있다.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에서 출토된 것도 역시 이런 유형에 속하는데 日本에서는 멧대추나무 잎형(棘葉形)이라고 한다. 집안(集安) 高句麗 마구의 살구나무 잎(杏葉)은 모두 도형(桃形)인데 어떤 것은 가운데에 십자 대들보(梁) 혹은 세 갈래의 호형(弧形) 대들보(梁)를 가하였고, 또한 어떤 것은 투조한 꽃무늬이다. 이런 유형은 新羅와 日本에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유행하였다.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에서도 위에서 서술한 두가지 종류의 살구나무 잎(杏葉)이 출토되었다. 마땅히 지적할 것은 살구나무 잎(杏葉)의 만드는 방법과 문식(紋飾), 늘 같은 쌍의 마구의 마표(馬 )와 안장(鞍橋)包片의 일치는 본문에 삽입된 그림과 비교하여 보면 곧 알아낼수 있는 것이다. 또한 圖十은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에서 발견된 살구나무 잎(杏葉)을 수록하였는데, 이는 山城의 연대를 고찰 검증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참고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일종의 살구나무 잎(杏葉)은 형체가 기타의 것보다 모두 크며 3개의 도형(桃形) 살구나무 잎(杏葉)으로 이루어졌고, 가운데 십자 대들보(十字梁) 위에 또 하나의 가지가 세 개인 보요할엽대식(步搖活葉帶飾)을 세워 놓았다. 매 도형(桃形) 살구나무 잎(杏葉)의 동물형상은 등에 6각형 무늬장식(紋飾)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북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물형상이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 마표(馬 )의 동물형상과 비슷한데, 단지 후자의 몸에서는 거북이 등의 무늬를 찾아볼 수 없어서 원보고에서는 그것을 청개구리(蛙)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선구(麻線溝)M1, 칠성산(七星山)M96과 新羅'천마총(天馬塚)'에서는 일종의 위에 원환(圓環)을 건 작은 살구나무 잎(杏葉)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마선구(麻線溝)M1에서 출토된 한점은 대잡(帶 )이 길고 가는 금속에 연결되어 있어서, 이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위치를 확정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圖十一, 十二는 각기 방울( 鈴)과 보용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이다. 방울( 鈴)은 큰 유형으로는 두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한가지는 원구형으로서 속이 비었고, 안에는 작은 동구(銅球)가 있으며, 위에는 코뚜레를 꿰었다. 이런 유형의 방울( 鈴)은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에서 세점이 출토되었고,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에서 두점이 채집되었으며, 원대자동진(袁臺子東晉) 벽화묘에서 다섯점이 출토되었는데, 복원시킬 때 흉대(胸帶)에 걸어 놓았다. 다른 한가지 유형은 위부분이 방울덮개이고 아래부분이 영신(鈴身)이다. 방울덮개는 원모형(圓帽形)인데 어떤 것은 평연(平沿)으로 넓게 펼수 있다. 영신(鈴身)은 원구형 혹은 원추형인데 투각된 것이고 안에는 작은 동구(銅球) 혹은 석구(石球)가 있다. 이런 유형의  방울은 출토된 수량이 매우 많아 조양십이대향(朝陽十二臺鄕) 전창( 廠)88M1에서 23점이 출토되었고,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에서 85점이 출토되었으며, 원대자동진(袁臺子東晉) 벽화묘에서 110점이 출토되었는데 소량만이 흉대(胸帶)에 걸려 있고 그 외에 기타의 것은 모두 종횡으로 교차된 추대( 帶)에 걸려 있다.(見{考古}1986年第6期安陽孝民屯M154出土馬具復原圖和{文物}1984年第6期袁臺子東晉壁畵出土馬具復原圖)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 가운데 비교적 간단한 것은 가는 銅絲에 설형활엽(舌形活葉)을 건 다음 아래로 세로의 원관(圓管)을 꿰뚫고 맨 나중에 반원형의 밑부분까지 이르는 것이다. 복잡한 것은 하나의 가는 관(管)을 중간에서 여러 가지로 뻗게 하여 각기 그곳에 설형활엽(舌形活葉)을 거는 것이다.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것은 위에 활엽(活葉)이 걸려 있는 것인데 상부는 원형이고, 하부는 너비가 균일하지 않는 길죽한 형(長條形)으로서 이 묘에서 출토된 일종의 살구나무 잎(杏葉)과 비슷하다.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은 일부 묘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 수량이 몇십점에 달하며 주로 추대( 帶)에 사용된다.(見{考古與文物}1985年第二期"天馬塚"出土馬具復原圖) 일부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은 또 추대( 帶)가 교차된 곳의 십자형 사엽대식(四葉帶飾)과 연결되어 일체를 이루고 있다. 십자형 사엽대식(四葉帶飾)에 관하여, 그것은 여전히 추대( 帶)와 말 고삐와 재갈( 頭)에서 늘 볼수 있는 대식(帶飾)의 하나로서, 칠성산(七星山)M96에서만도 32점이 출토되었다. 대식(帶飾)은 혁대(革帶)가 교차되는 곳에 사용되는데, 리베트( 釘)로 혁대(革帶)에 박아서 고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미관을 위해서 네잎을 정방형, 원각방형(圓角方形), 매화형, 도형(桃形)등 다른 형태로 만들 수 있는데, 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온 원포(圓包)가 있으며 전반적으로 식건(飾件)은 유금( 金)으로 일체를 이루어 눈부시게 빛나고 매우 아름답다.(見{考古}1983年第6期第559頁"集安七星山96號墓馬具後  飾想象復原圖")
圖十一, 十二에서 출토된 방울( 鈴)과 출토된 보요활엽대식(보요할엽대式)을 비교하여 보면 전자의 유행된 연대가 후자보다 빠름을 발견할수 있다. 이로부터 설명할수 있는바, 이 시기 추대( 帶)의 금속장식품은 방울( 鈴)이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후에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으로 개변되었고 ; 흉대(胸帶)의 금속장식품은 처음에 방울( 鈴)을 사용하다가 후에는 보용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 혹은 살구나무 잎(杏葉)으로 개변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 본신도 단잎에서 다잎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의 기원은 모용(慕容)鮮卑의 보요관(步搖冠)의 영향을 받았다. {晉書·慕容 傳}에 "時燕代多冠步搖冠, 莫護跋見而好之, 乃斂發襲冠, 諸部因呼之步搖, 其後音訛, 遂爲慕容焉."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녕북표(遼寧北票)에서 발견된 3세기 중엽 이후의 모용(慕容)선비 墓葬에서 바로 이러한 종류의 금환관식(金環冠飾)을 출토되었는데 관식(冠飾)에는 금환(金環)과 원형, 도형(桃形)의 금잎(金葉)이 있고, 조금만 움직여도 환(環)과 잎은 흔들려 멈추지 않는다. 宿白선생은 이것이 바로 문헌에 기록한 모용부(慕容部) 상류층들이 즐겨 쓰는 "보요관(步搖冠)"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런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은 新羅, 百濟, 日本에서 출토된 금속관(冠), 신발과 기타 기구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위에서 서술한 마구의 몇가지 부품은 당연히 마구 전부를 포함한 것이 아니어서 당로(當盧), 대잡(帶 ), 기생(寄生)과 화주(火珠) 같은 것 등은 모두 적게 언급되었거나 혹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이시기 전쟁의 증가와 기병의 옷의 중시 및 발전으로 인해 말의 몸체에 씌우는 구장갑옷(具裝鎧)과 기병이 쓰는 갑옷도 널리 사용되었다. 북조(北朝)시기 중원 16국의 도자기 인형(陶俑)과 벽화에서도 이러한 裝備가 많이 발견되었다. 마선구(麻線溝)M1과 삼실묘(三室墓)의 벽화에도 이러한 그림 형상이 있는데, 적지 않는 묘에서는 甲片도 출토되었다. 만약 말에게 구장갑옷(具裝鎧)을 씌운다면 위에서 서술한 마구 중 장식부품들은 대부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구장갑옷(具裝鎧)은 단지 전쟁 때에만 사용되고 평소 수렵을 할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으므로 구장갑옷(具裝鎧)에 대하여서는 본문에서 더 상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본문에서 논술한 함표(銜 ), 등자( ), 안장(鞍橋), 살구나무 잎(杏葉)과 보요활엽대식(步搖活葉帶飾)으로 볼 때, 高句麗에서 출토된 것들은 대부분 모두 그보다 일찍 중원, 요서(遼西)지역에서 먼저 발견되었고, 후에 다시 高句麗를 통하여 朝鮮半島 남부와 日本으로 전해졌다. 이와 동시에 마구도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이러한 전파과정 중에서 高句麗는 중개역할과 전후계승 작용을 함과 더불어 그 스스로도 창조와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高句麗 마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주로 鮮卑族이었다. 바로 中國 中原과 북방지역의 16국 북조(北朝)시기는 鮮卑族이 마침 역사무대에 등장한 시기였다. 鮮卑族은 예전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능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을 잘 다스려 匈奴를 능가하였다.(兵利馬疾, 過于匈奴)"고 마구의 발전 및 완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조양(朝陽), 안양(安陽)에서 출토된 마구의 墓葬이 바로 유력한 증거이다. 한위(漢魏)이후 鮮卑族은 장기적간 요서(遼西)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위진(魏晉) 시기  高句麗의 세력이 서쪽으로 발전하여 鮮卑와 직접 이웃하게 되었다. 그 시기 高句麗와 鮮卑 두 지역의 문화교류와 인사들의 왕래가 매우 빈번하였는데, 예를 들면 중외학자들이 공인하는 조선황해북도(朝鮮黃海北道) 안악(安岳)3號墓 주인인 冬壽가 바로 전연(前燕)에서 高句麗로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교류 속에서 鮮卑 마구의 공예와 특징이 高句麗에 전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高句麗 마구의 발전 및 주변 민족, 지역간의 관계를 분석 비교할 때 우리들은 몇가지 완정한 안장(鞍橋)包片의 크기에 대하여 통계를 내었는데, 表二를 보기로 하자. 表二에서는 각각 안장(鞍橋)包片 앞뒤 수레바퀴의 너비와 높낮이 수자를 열거하였는데, 높낮이를 놓고 말할 때 비교적 낮은 것은 안양효민둔(安陽孝民屯)M154에서 출토된 것이고, 비교적 높은 것은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등지목(藤之木) 옛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분명히 다른 墓葬에서 출토된 것보다 높고, 전형적인 개별적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墓葬의 등급 혹은 지역적인 요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이시기 유행되었던 고안장(高鞍橋) 유형에 속한다. 너비를 놓고 말할 때 高句麗 안장의 앞수레바퀴는 表에서 단지 칠성산(七星山)M96에서 출토된 한가지 항목의 수자만 있는데, 너비가 37cm로서 가장 좁은 것이다. 이것과 근접한 것으로 新羅"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너비가 38.5cm인 수레바퀴를 들수 있는데 다른 것보다 분명히 넓다. 뒤 수레바퀴는, 3채의 고구려묘에서 출토된 것이 기본적으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세 가지와도 거의 비슷한데 모두 기타 4채의 묘에서 출토된 것보다 분명히 좁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각 쌍의 마구 자체를 만드는 방법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서술한 수자의 변화가 일치하고 명확한 것으로 보아 당연히 기타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안장(안교)을 말등에 얹어서 온당한 목적을 이루려면 말등의 너비와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 말등의 너비는 동일한 종류의 말을 놓고 말할 때, 비록 말마다 말의 높낮이, 실팍하고 여윈 정도는 완전히 같다고 할수 없지만 그 차이가 얼마 크지 않으며, 또한 마구를 대량으로 제조할 때에는 그렇게 세부적으로 고려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表가운데 열거한 高句麗 및 新羅"천마총(天馬塚)"의 안장(鞍橋 특히 뒤수레바퀴)은 분명히 안양(安陽), 요서(遼西)와 日本의 네가지 안장(鞍橋)보다 좁은 것으로 보아 대개 말의 품종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와 관련되는 문헌들을 찾아 보았는데 마침 이 방면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三國志·高句麗傳}에는 "그 말이 모두 작아서 산을 오르는데 편리하다. 國人들은 힘이 있고 전투에 능한데 沃沮, 東濊貊이 모두 복속하였다.(其馬皆小, 便登山, 國人有氣力, 習戰斗, 沃沮, 東濊貊皆屬焉.)"라고 기재되어 있다. {魏書·高句麗傳}에는 "高句麗에서는 三尺의 말이 나오는데 朱蒙이 그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하며, 말의 종류는 果下라 한다.(高句麗出三尺馬, 云本朱蒙所乘, 馬種卽果下也)"라고 기재되었다. 하지만 "果下"라는 명칭은 {三國志·濊傳}에서 왔는데 여기에서 이르기를 "濊에서는 國下馬가 나오는데 漢桓때에 그것을 바치었다.(濊出國下馬, 漢桓時獻之)" 裴松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果下馬는 높이가 三尺인데 그것을 타고 과수나무 아래로 다닐수 있다고 하여 果下라고 칭한다.(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라고 하였다. {後漢書}의 이에 대한 기재와 주석은 {三國志}와 같다. 그 밖에 {博物志}에도 이와 유사한 기재가 있는데 여기에서 "穢貊國은 남으로 辰韓, 북으로 高麗·沃沮와 잇닿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면하고 있다. 바다에서는 반어피(班魚皮)가 나오고, 육지에는 문표(文豹)가 나오며 또한 과하마도 나오는데, 과하마는 높이가 三尺이며 漢나라 때 그것을 바치어 손수레를 끌도록 하였다.(穢貊國南與辰韓, 北與高麗沃沮, 東窮大海. 海中出班魚皮, 陸出文豹, 又出果下馬, 高三尺, 漢時獻之, 駕輦車.)" 여기에서 우리들은 키가 三尺이고 과수나무 아래로 다닐수 있는 "果下馬"가 그 시기 高句麗와 기타 지역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이었음을 알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산에서 살고(人皆山居)", "옛적부터 騎射를 중시하여 온(俗重騎射)" 百濟에서도 역시 "果下馬"가 유행되었다. 두 개의 唐書百濟傳에는 모두 唐초에 百濟王이 사신을 파견하여 "果下馬"를 바친적이 있다고 기재하였다. 新羅에 대한 문헌에서는 新羅는 辰韓에서 연원되었으며 일찍부터 "소와 말을 타고(乘駕牛馬)" "소를 기르고 말을 타는(服牛乘馬)"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新唐書·新羅傳}에는 "말은 비록 크기는 하나 잘 걷지를 못한다(馬雖高大, 不善行)"라고 기록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新唐書·新羅傳}에는 또 "玄宗 開元중 많은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 果下馬를 바치었다.(玄宗開元中, 數入朝, 獻果下馬)"라고 기록되었다. 당연히 이시기에는 百濟, 高句麗가 이미 선후로 멸망되하고 新羅가 朝鮮半島를 통일하였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쳐진 "果下馬"는 역시 원래 百濟, 高句麗 지역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新羅에서도 일찍부터 "소와 말을 타고(乘駕牛馬)", "소를 기르고 말을 타는(服牛乘馬)" 습관이 있었으며, 단지 "잘 걷지를 못하는(不善行)" 큰 말은 당연히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新羅에는 朝鮮半島를 통일하기 이전에 기타 품종의 말이 있었음을 우리들은 부인할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高句麗, 新羅에서 출토된 마구로 무장하고 있는 말, 高句麗, 新羅가 평소 수렵하고 전쟁을 할 때 타는 말이 바로 문헌에 기재된 "果下馬"라고는 아직 단언할수 없다. 그러나 漢唐시기 우리나라[중국] 東北지역 동부와 朝鮮半島의 광활한 산지에서 유행하였던 말이 몸체가 작아 등산에 편리했던 것은 의심할바가 없다. 문헌에 기재된 "果下馬"는 그중에서 더욱 작은 것일 것이며, 관상(觀賞)에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동일한 품종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시 검증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들 사이에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은 역시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다.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읽음

26

  [논문]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騎射)에 관해

2006/07/05

6689

25

  [논문]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騎射)에 관해

2006/07/05

6598

24

  [논문] 검무 복원을 위한 시론

2007/12/30

8833

23

  [논문] 18세기 『어영청중순등록』에 나타난 각종 무예

2008/01/09

8332

  [논문] 高句麗 馬具의 發展과 周邊 民族 및 地域과의 關係

2006/07/05

7001

21

  [논문] 광개토대왕의 군사작전에 대하여 (수군을 중심으로)

2006/07/05

6920

20

  [논문-택견] <<중요무형문화재 택견의 보급과 육성>>

2006/12/18

8509

19

  [기병대] The US Cavalry

2006/06/26

11925

18

  [기병] 중국 고대 기병의 역사 중국

2007/07/02

7843

17

  [기마경기] WHAT IS HORSEBALL

feihorseball_000_1_rhrhektzja.jpg

2006/04/21

7037

16

  [관자] 관자 오교 -17 병법편-

관자_오교.jpg

2012/07/08

6463

15

  [과거] 경세유표 춘관 수제

2006/01/02

7556

14

  [경국대전] 병전-시취,무과

2005/12/06

6721

13

  [검선] 김광택전

2007/08/09

10733

12

  [거북선] 정조시대의 거북선~~ ^^

2006/03/18

6717

11

  [갑주] 4~5세기 동아시아의 갑주 [3]

2005/11/13

7472

10

  [Martialarts] History and Heritage [8]

2005/11/25

8644

9

  [2005] 조선시대 야간 군사 훈련 야조 기획안

야조_기획안.hwp

2005/09/11

6855

 

 

[1][2][3][4][5][6] 7 [8]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랄라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