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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황사영 백서

 이름 : 

(2013-07-22 21:42:45, 2583회 읽음)

 링크 1 : http://kcm.kr/dic_view.php?nid=38108&key=&kword=%5B%B0%A1%C5%E7%B8%AF%5D&page=

◆ 황사영 백서 사건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으며 이에 그는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 든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른다.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약종은 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이로써 그는 부귀 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 백서 내용

백서는 흰명주에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 122줄을 13,384자를 가는 모필로 깨알처럼 곱고 정밀히 써진 것이다. 비록 황사영 자신이 쓴 글이나 자기 이름은 숨기고 황심(토마스) 등이라 했음은 우선 사영의 겸허한 마음의 표현이요, 사영의 판단에 황심이 북경 내왕이 잦고 이미 여러 차례 그곳 주교와 신부들을 만났으므로 누구보다도 신임을 더 받을 것으로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제1부분은 신유년 박해에 순교한 이들 중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필두로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제2부분은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의 골육 상잔의 당쟁(黨爭)이었음을 필역하고, 제3부분은 빈사 위기에 처한 교회의 희생과 동족학살의 구원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등 자신의 사견을 진술하였다.

◆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罪人多黙等 涕泣呼 干 本主敎大爺閣(閤)下 客春行人利旋 伏聞氣 候萬安 日月馳  歲色垂暮 伏未審  內更若何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 (湯士選 구베아) 각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길 떠났던 사람 편에 각하께서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세월이 지나 벌써 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伏惟賴 主洪恩 神形兼佑 德化日隆 望風馳慕 不勝 賀

엎드려 생각하건대, 각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덕화가 나날이 융성하시기에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하례 드리는 마음 이기지 못할 듯 합니다.

罪人等罪惡深重 上干主怒 才智淺短 下失人謨 以致窘難大起 禍廷神父 而罪人等又不能臨危捨生 偕師報主

저희 죄인들은 죄와 악이 깊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헤아림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에게 (주문모) 미치게 하였습니다. 저희 죄인들은 또한 위태로움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復何面目 濡筆而仰訴乎 第伏念 聖敎有顚覆之危 生民罹溺亡之苦 而慈父已失 攀號莫逮 人昆四散 商辦無人

다시 무슨 면목으로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겠습니까? 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성교가 뒤집혀 엎어질 위험이 있고, 백성이 박해에 걸려 죽을 고통 속에 있는데도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할 데도 없으며, 어진 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모든 것을 헤아려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惟我大爺 恩兼父母 義重司牧 必能憐我救我 疾痛之極 我將呼誰

각하께서는 은혜로운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지극한 괴로움에 저희는 장차 누구를 불러야하겠습니까.

玆敢 奏窘難顚末 而 釀已久 端緖頗多 一筆難述 故具在左方 伏望哀憐而照察焉

이에 감히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지 이미 오래고 실마리가 하도 많아서 간단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우므로 다음에 자세히 적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方今敎務 板蕩無餘 惟獨罪人倖免 若望不露 或者 主恩未絶於東國歟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했고, 요한도 (옥천희 : 若望) 들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嗚呼死者旣損生以 敎 生者當致死以衛道 然才微力薄 不知攸爲

아! 죽은 사람은 이미 목숨을 버려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미약하고 힘이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密與二三敎友 商量目下事宜 披腹條奏 伏望 閱覽之餘 哀比 獨 速施拯救

몰래 두서넛 교우와 (황사영, 황심, 옥천희) 당면한 일을 깊이 생각하여 저희 복안을 조목조목 나누어 아룁니다. 읽어보시고 의지할 곳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빨리 저희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罪人等如群羊之走散 或奔竄山谷 或棲遑道路 莫不飮泣呑聲

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酸心通骨 而晝宵盼望者 惟上主全能 大爺洪慈 伏望誠求主佑 大施憐憫 拯我等於水火之中 措我等於 席之上如今

괴로운 심정이 뼈에 사무쳐,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의 전능하심과 각하의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으로 기구해 주시고 연민의 정을 크게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편안한 자리 위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聖敎已遍天下 萬國之人 無不歌詠聖德 鼓舞神化 而顧此左海蒼生 孰非上主赤子

이제 성교가 이미 천하에 두루 전파되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성덕을 노래하고 하느님의 교화에 북을 치며 춤추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左海] 백성들은 돌아보건대, 어느 누가 주님의 자녀가 아닌 이가 있겠습니까마는,

地方避僻 聞敎 晩 氣質孱弱 耐苦狼難 而十載風波 長在淚泣憂愁之中 今年殘害 更出夢寐思想之外

지역이 멀고 후미져서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기질이 잔약하여 괴로움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워 십 년 풍파에 늘 눈물과 근심 가운데 있었는데 금년의 잔혹한 박해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이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哀我人斯 胡至此極耶 此難之後  無特恩 耶蘇聖名 將永絶於東土

참으로 가엾습니다.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 교난이 있은 후에 아직 특별한 은총이 없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이 장차 이 나라에서 아주 끊어져 버리려 합니다.

言念及此 肝  裂 中西敎友先生們 聽此危苦之情 寧無惻然傷心乎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간장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중국과 서양의 교우 선배들이 이 위태롭고 괴로운 사정을 들으면, 어찌 불쌍히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敢望敷奏敎皇 布告各邦 苟可以救援吾 者 靡不用極  吾主博愛之恩 顯聖敎同仁之義 以副此切望之誠

감히 바라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각국에 널리 알리시고, 진실로 저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은 모두 강구하시어, 우리 주님의 넓은 사랑의 은총을 본받아, 성교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시는 뜻을 드러내어, 저희의 이 간절히 바라는 정성에 보답케 하여 주십시오.

罪人等 心揮涕 哭訴衷情 引領翹足 專候福音 惟我大爺 千萬可憐我 書不盡意

저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목을 늘이고 발돋움하여 오직 기쁜 소식이 있기만 기다립니다. 우리 주교 각하께서는 부디 글로써 다 아뢰지 못하는 저희들을 가련히 여겨 주십시오.

自乙卯失捕後 先王疑 日深 潛譏密察 未嘗少間 而終不知神父 跡

을묘년에(1795) 주문모 신부를 체포코자 하다 놓쳐 버린 후부터 (한영익의 고발로 주문모 신부가 잡힐뻔한 일) 선왕(正祖)의 의심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잠시도 멈추지 않고 철저하게 기찰을 하였으나 아직 신부에 관해서 조그마한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끝내 신부의 종적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乃使趙和鎭者 假托奉敎 探之湖中(忠淸道之別名)事情

그리하여 조화진이라는 자를 시켜, 거짓으로 성교를 믿는다 핑계하고 호중의 (충청도의 별명)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遂有己未冬淸州之窘 湖中熱心敎友死亡 盡

마침내 기미년(1799) 겨울 청주의 박해가 일어나 충청도의 열성적인 교우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崔多黙必恭者 中路人也 性直志毅 仗義疎財 熱心 盛 有卓 不 之風 辛亥之窘 不幸被誘背敎

최필공 토마스 (多黙 1745∼1801 순교자) 형제는 중인으로,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세며, 의로움에 의지해서 재물을 멀리하며, 성교에 대한 열성이 지극하여 일반 사람과 다른 뛰어난 풍모가 있는데 불행히 신해년(1791)의 박해 때 (전라도 전산에서 일어난 윤지충의 사건을 말함) 잡혀서 유혹에 빠져 성교를 배반하였습니다.

先王甚喜之 爲之娶妻拜官 多黙不得已順受 近年家居 深痛往失 常思損軀補贖

선왕은 몹시 기뻐서 그를 장가들게 하고 벼슬을 주니, 토마스는 하는 수 없이 순종하여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년에 와서는 집에 들어앉아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통감하며 항상 몸을 바쳐 보속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己未八月 先王忽然招致刑曹 問 尙奉邪學否 多黙適中所願 自分必死 遂直陳聖敎忠孝之理 自己痛悔之情

기미년(1799) 8월에 선왕이 갑자기 형조로 불러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신봉하고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토마스는 이 때야말로 자기가 바라던 대로 성교를 위해 죽을 때라고 여기고, 마침내 성교의 충효의 이치와 자기가 뼈아프게 뉘우치고 있는 심정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所言光明俊偉 感動旁聽 而刑官駭憤殊甚 據辭上聞 先王不復加刑 困循放釋

그의 말은 빛나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을 모두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형관은 몹시 놀라고 성이 나서 그대로 임금께 아뢰었는데,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가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臺臣抗疏請誅 亦 糊賜批 頗示包容之意 事遂寢

그러자 대신이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려 토마스를 사형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서, 자못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였기에,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李瑪爾定中培者 少論一名也(士夫妾子孫謂之一名) 居京畿道驪州 勇力絶倫 志氣豪快

이중배 마르띠노는 (瑪爾定 ?∼1801 순교자) 소론의 일명으로, <一名 : 사대부 첩의 자손을 말함> 경기도 여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용맹과 힘이 월등히 뛰어나고 의지와 기개가 호쾌하였습니다.

素與金健淳爲生死之交 及健淳奉敎 瑪爾定亦信從領洗 熱心如火 明目張 而行 不 人知覺

전부터 김건순과 (요사팟 若撤法 1775∼1801 순교자) 생사를 같이할 만큼 친하게 사귀어 왔는데, 건순이 교를 믿어 받들게 되자 마르띠노 역시 믿고 순종하여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는 불꽃같은 열성으로 믿으며, 눈을 바로 뜨고 대담하게 행동하여,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庚申復活占禮 煮狗 酒 與同里敎友 會坐路邊(山僻小路) 高聲念喜樂經 擊匏樽按節 歌竟飮酒嚼肉 飮訖復歌 如是終日

경신년(1800) 부활절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가지고, 한 동리 교우들과 함께 길가에 <산골 작은 길> 모여 앉아서 큰소리로 희락경을 (희락삼종 : 부활삼종기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고, 이렇게 해가 다 저물도록 계속하였습니다.

未幾爲仇家所告 與同友十一人 被捕到官 友中亦有弱者 皆賴瑪爾定鼓動勸勉之力 屢經毒刑 一幷堅固 遂拘囚不放

얼마 뒤에 원수처럼 지내는 가문의 고발로 그는 교우 열한 사람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지마는, 모두 마르띠노의 격려하고 권면하는 힘에 의지하여, 여러 번 지독한 형벌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굳게 버티어, 결국은 석방되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瑪爾定本來 知醫術 而不甚精工 入獄後 或有問疾者 則先求主佑 後施鍼藥 莫不 愈

마르띠노는 본래 의술을 조금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깊지는 못했는데, 옥에 갇힌 후에 혹 와서 병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기구하고, 그런 다음에 침을 놓고 약을 쓰게 하여,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從此聲名大播 遠近輻輳 獄門如市 本官不能禁 自己有病 還來問藥 因此獄中日用不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서 멀고 가까운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옥문 앞이 저자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 고을 군수는 이것을 막지 않았고, 자기도 병이 있어 와서 약을 물으니, 이로 인해 옥중에서도 날마다 쓰는 것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金健淳嘗言 人或問瑪爾定療病之能  名稱之太籍 答以爲十之八九 然其實十之十 百之百 無一不效

김건순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들이 혹 마르띠노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열에 여덟 아홉은 고친다고 대답하지마는, 실상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 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하는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獄吏求見醫方 答曰我無方書 只是恭敬天主 汝欲學醫 亦當信主 吏曰書冊已盡燒  從何而學 瑪爾定笑曰 吾胸中不 之書 猶足以誨人奉敎

옥리가 의서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그가 대답하기를 "내게는 의술을 적은 책이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마땅히 주님을 믿으시오"하였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다시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어찌 배울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마르띠노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없어지지 않는 책으로 족히 남들을 가르쳐서 교를 받들게 할 수 있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同囚之元若望 有一老婢 常來須視 陳說家中情景 反覇誘說 若望不爲動

함께 갇혀 있는 원요한에게 (元景道 1773∼1801 순교자) 한 늙은 여종이 있었는데, 늘 옥에 와서 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집안 사정을 늘어놓고는 성교를 그만 두라고 거듭 말하며 꾀었으나 요한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有一次語甚酸切 若望有戚戚之意 瑪爾定 視之 老婢   不敢畢其說而退 後遂不往曰 李生員眼光可畏 不能復往矣

한 번은 여종의 말이 하도 간절하여 요한이 집안을 걱정하는 기색이 나타나므로 마르띠노는 그 늙은 여종을 노려보았습니다. 늙은 여종은 두려워 감히 말을 마치지 못하고 물러가, 그 뒤에는 다시 옥에 가지 않고 "李생원님의 눈빛이 무서워서 다시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獄中常 書念經 講道勸人 獄卒一人 動心信從 亦爲熱心之人

李마르띠노는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해설하여 남들에게 교를 믿으라고 권하였는데, 옥졸 한 사람은 마음이 움직여 성교를 믿고 따라서 열성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權哲身者南人(卽東人) 大家之裔 居京畿道楊根郡 素以經禮之學 爲世名儒 聖敎到東 全家信從

권철신은 (암브로시오 1736∼1801) 남인 (곧 東人) 대가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근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경학과 예학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는데, 성교가 우리나라에 이르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本係名家  謗亦甚 其弟日身 死於辛亥之窘 自此以後 不敢顯然守誠 而仇嫉者之憎恨愈深

본래가 이름 있는 집안인 만큼, 성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도 역시 심하였습니다. 그의 아우 일신이(프란치스코사베리오 ?∼1801) 신해박해(1791) 때에 죽자, 그 뒤부터는 감히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더 심해 갔습니다.

己未夏本鄕怪鬼輩  誣告官 權家子弟 亦爲對卞 事將張大 賴本官明良 調停解釋 惡謨不遂

기미년(1799) 여름, 그의 고향의 귀신같이 고약한 무리들이 사실과 어긋나는 일을 꾸며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맞서 일이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해석한 덕택에, 간악한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詭計愈秘 締結京中惡官 庚申五月 面奏先王曰 楊根一鄕 邪學熾盛 無人不學 無村不爲

그러나 간교한 계획은 더욱 비밀히 진행되어, 서울에 있는 간악한 무리와 결탁하여 경신년(1800) 5월에 직접 선왕을 뵙고 아뢰기를 "양근 온 고을에 사학이 극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습니다.

而本官恬然 不加査察 該郡守合當警責 先王可其奏 楊根守引咎自退 新官到任 舊案復起 逮捕多人

그러나 군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그 군수를 징계하고 문책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선왕은 그들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양근 군수는 책망을 받고 스스로 사퇴하였습니다. 새 군수는 부임하자마자 묵은 사건을 다시 일으키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而哲身則年老 怯 上京姑避 官將其子代囚之 其子屢請代受父罰 而本官不許 必欲招致哲身 事久不決

철신은 나이가 많고 체포 후의 일을 두려워하여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아들이 여러 차례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청하였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철신을 불러들이려고 하여, 사건이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先王雖甚疑  然每事本不欲張大 且鐸德之事 關係兩國 萬一顯著 則處置極難 故乙卯後 群臣多請嚴禁聖敎 而一幷委之於有司 若不欲干涉者然

선왕이 성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또한 신부의 [鐸德] 일은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일) 두 나라 사이에 관련되는지라, 만의 하나라도 일이 드러나 알려지게 되면 그 처리가 매우 난감하므로, 을묘년(1795) 이래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중히 금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체를 담당 관리에게 맡기고는 그러려니 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外鄕窘難 莫非暗命 而佯若不知 盖欲緩敎友之心 潛捕神父 暗地結果 計未成 而遽 落

그러나 지방의 박해는 은밀한 명령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부러 모르는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여 신부를 잡아 암암리에 결말을 지어 버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金汝三者 本係湖中人 弟兄三人 皆領聖洗 爲避窘難 移居都下 近年汝三冷淡背敎 交結匪類 兩兄不能禁

김여삼이라는 (?∼? 1801년 신유박해의 밀고자) 사람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형제 셋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근년에 와서 여삼은 냉담하여 성교를 배반하고 무뢰배들과 함께 몰려다녀, 그의 두 형도 이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有李安正者 亦係湖中人居京者  有家産而 爲汝三之姻親 汝三貧寒 常望其週給 而安正不能稱其意

이안정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좀 있었고, 여삼과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집이 가난하여 늘 보태주기를 원했습니다만, 이안정이 그의 뜻대로 다 들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因而結恨 尋常切齒 時安正恒受聖事 汝三 知之 妄以爲若神父勸他施財 則他不敢不從 而因神父不勸 故他不施財

이로 인해 여삼은 한을 품고 항상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안정이 늘 성사를 받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를 눈치채고 망령된 생각을 하기를, ’만약 신부가 다른 사람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라고 권하면 그는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안정에게 권하지 않았으므로 안정은 여삼에게 재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遷怒於神父 生謀害之心 遂將神父之事 密告於捕盜部將 部將輩廉察五六年 終不能得 及聞此言 如何不喜歡

그러자 여삼의 노여움은 신부에게로 옮겨져서 신부를 모략하고 해칠 마음을 먹고 끝내는 신부님의 일을 포도부장에게 밀고하였습니다.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5∼6년 동안이나 몰래 살펴보아도 끝내 알아내지 못하던 판에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許以事成 則當薦汝爲厚祿之任 究問此人 方在何處 時神父住葛隆巴家 汝三亦能猜測 遂與部將約曰 某日 來我家 我當告之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마땅히 너를 재물이 넉넉한 관직에 추천하겠다"고 하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캐어물었습니다. 이 때 신부는 골롬바의 (葛隆巴 姜完淑 1760∼1801 순교자)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여삼은 이것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포도부장과 약속하기를, "아무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내 알려 주겠소" 하였습니다.

約日未到 汝三適往他人家 忽然得疾不能還 約日部將到家空還 幸有一敎友 探知此事 告于神父 神父避往別所 命李安正備錢數十貫 往見和解之

그런데 약속한 날이 채 안되어 여삼이 마침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약속한 날에 포도부장이 그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헛수고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일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했고, 이안정에게 돈 수십 관을 마련해 가지고 찾아가서 여삼과 화해하게 하였습니다.

汝三恨怒暫緩 不多日 國王棄世 各司多事 事得不起 然汝三旣有密告之後 亦不能自己 常與惡輩 綢繆謀議 必欲肆毒而後已

그리하여 여삼의 원한과 분노가 잠시 누그러졌고, 며칠이 못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니, 각 관청에서는 일이 많아 사건이 더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삼은 이미 밀고를 한 뒤여서 또한 자기 스스로는 그만둘 수도 없었으므로, 늘 못된 무리들과 함께 용의주도하게 서로 의논하여 기어코 해치려고만 하였습니다.

本國士大夫 二百年來 分黨各立 有南人 老論 少論 少北 四色之目 先王末年 南人又分而爲二 一邊則李家煥丁若鏞李承薰洪樂敏等若干人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2백년 전부터 당파가 생겨서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북의 네 당파가 있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다시 나뉘어 두 파가 (攻西派와 信西派) 되었습니다. 그 한편은 이가환 (1742∼1801 남인학자) 정약용 (요한 1762∼1836 실학자) 이승훈 (베드로 1756∼1801) 홍낙민 (루가 1740∼1801) 등 몇몇인데

皆從前信主 偸生背敎之人 外雖毒害聖敎 中心尙有死信 而同黨鮮少 勢甚孤危 一邊則洪義浩睦萬中等 眞心害敎之人 十年以來 兩邊結怨甚深

모두 전에는 주님을 믿었으나 구차하게 목숨을 아까워하여 성교를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성교를 해쳤지마는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을 생각이 있었는데, 그 당파의 사람은 수가 아주 적어서 세력이 몹시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또 한편은 홍의호 (1758∼1826 박해자) 목만중 (1727∼? 천주교를 배척한 문신) 등 진심으로 성교를 해치는 사람들인데, 십 년이래 양편은 서로 깊이 원한을 맺었습니다.

老論又分而爲二 曰時派 皆承順上意 爲先王心腹之臣 曰僻派 皆力守黨論 抗拒上意 與時派如仇讐 而黨衆勢大 先王畏之 近年擧國而聽之

노론도 역시 두 파로 나뉘었는데 시파라는 것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심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당론을 고수하는데 힘써 임금의 뜻에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처럼 되었으나, 당의 형세가 매우 커서 선왕도 이를 두려워하였고, 근년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李家煥文章盖世 丁若鏞才機過人 乙卯以前 先王寵任之 乙卯後 漸見疎棄 然此二人爲僻派之所深忌 必欲中害

이가환은 문장이 세상에서 출중하였고, 정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뛰어났으므로 을묘년(1795) 이전에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 활동 사실이 발각되기 이전) 선왕이 그들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이후로는 차차 소외당해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벽파가 몹시 꺼려하여 끝끝내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家煥等雖背敎害敎 僻派諸人 常指斥爲邪黨  駁備至 先王每掩護之 僻派不得肆害

이가환 등은 성교를 배반하고 성교를 해쳤는데도, 벽파의 여러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사당으로 지목하고 배척하여 온갖 참소와 공박을 다하였지마는, 선왕이 매번 그들을 감싸주었으므로, 벽파가 마음대로 해치지는 못하였습니다.

及先王薨 嗣君幼  大王大妃金氏 垂簾聽政 大王大妃 卽先王之繼祖母 本係僻派中人 本家曾爲先王所廢

그런데 선왕이 돌아가시자 대를 이은 임금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곧 선왕의 계조모로서 본래 벽파 출신으로, 친정은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를 당하였습니다.

因此積年懷恨 而莫能泄 意外臨朝 遂挾僻派而肆毒 庚申十一月 先王葬禮 過 卽將一班時派 盡行放逐 朝內半空

그로 인하여 대왕대비는 여러 해 원한을 품고 있었지마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마침내 벽파를 끼고 거리낌없이 학정을 폈습니다. 경신년(1800) 11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어, 조정 안을 절반 정도나 비게 하였습니다.

從前害敎之惡黨 素與僻派相連 見時勢大變 譁然 起 有大擧之勢 庚申四月 明會報名之後 諸友勸於神工 會外之人 亦從風而動 皆以化人爲務

전부터 성교를 해쳐오던 못된 무리들이 벽파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시세가 크게 변동되는 것을 보자 요란스럽게 들고일어나서, 크게 일을 저지를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경신년(1800) 4월에 명도회에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주문모 신부에 의해 세워진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 가입한 후로 여러 교우들이 신공에 부지런히 힘썼고, 회원 아닌 사람들도 역시 자진해 움직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기에 힘썼으므로,

秋冬之間 蒸蒸向化 日甚一日 而婦女居其二 愚鹵賤人居其一 士夫男子   世禍 信從者狼少

그 해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무럭무럭 감화되어 나날이 불어났는데, 그 중 부녀자가 3분의 2요, 무식한 천민이 3분의 1이었습니다. 사대부 집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

乙卯窘難 葛隆巴有保護之大功 而才能出衆 故神父專任之 葛隆巴亦熱心料理 化人甚衆 仕宦家婦女 入敎者頗多

을묘년(1795) 박해 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큰 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에, 신부는 전적으로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성으로 일을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로서 입교하는 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盖國法若非逆賊 刑不及於士族婦女 因此他們不以禁令爲慮 神父亦欲籍此爲廣揚之根基 待之特厚 敎中大勢 都歸女友 然聲聞緣此亦廣

대개 우리나라의 법이, 역적만 아니면 사대부의 집안 부녀자에게까지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이로 인해 그들은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도 역시 그 점을 빌어서 성교를 널리 전할 바탕을 삼고자 하여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시니, 교회 안의 대세가 모두 부녀 교우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성교의 소문도 그에 따라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聖敎爲國家之一大政 新君卽位之後 明知必有一番處分 而不知處分之如何 神父愈加謹愼敎友咸懷憂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사가 되었으므로 새 임금이 (純祖) 즉위한 후 반드시 제일 먼저 어떤 처분이 있을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처분이 어떠한 것일지는 알 수가 없어서, 신부는 더욱더 삼가고 조심하였고, 교우들은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十二月十七日 刑曹發差 捕崔多黙拘因 而此人則去年獄案 尙在未決 此番被捕 不是意外 且其時不過自此申禁 朝廷則未有嚴敎

12월 17일에 형조에서는 포졸을 내보내어 최필공 토마스를 체포해다가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아직 미결로 있었으므로, 이번에 그가 체포당한 것은 뜻밖의 일은 아니고, 또한 그 때는 단속하여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으로 조정에서는 아직 엄중한 금령이 없었습니다.

故敎友們 雖爲戒嚴 不甚驚  十九日聖獻堂占禮日曉頭 崔多黙之從弟崔伯多祿 在臨街藥 閣子裡 與數人念公經

그러므로 교우들은 비록 경계는 하였지마는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움이 심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19일 성헌당첨례일 (주의 봉헌 축일) 새벽에 최토마스의 종제 최베드로가 (崔必悌 伯多祿 1769∼1801 순교자) 한길 가에 있는 약방 안쪽 방에서 몇몇 교우들과 함께 경문을 외고 있었습니다.

窓外適有投錢禁亂一輩 (投錢雜技名無賴輩以此賭錢故法司常有禁令) 聞窓裡 心聲 以爲投錢拍節聲 排窓躍入 不見投錢 搜各人身邊 獲一占禮單

창문 밖에 마침 투전을 단속하고 다니는 한 관리가 있다가, 창문 안에서 가슴 치는 소리를 듣고 투전의 장단 치는 소리로 알고 창문을 열고 뛰어들었는데 투전이 보이지 않자 한 사람 한 사람 몸을 수색해서 첨례단 (교회 축일표) 한 장을 찾아냈습니다.

而伊等不識字 不知爲何物 遂持去以示識字之吏 知係聖敎文字 復回來捉人 時天已大明 他敎友已盡走散 惟伯多祿 及吳斯德望兩人 被捕入官 與多黙同囚

그들은 글자를 알지 못해서 무엇인지 모르므로,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서 보였습니다. 그것이 성교에 있는 글임을 안 그들은 교우들을 잡으려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았는데, 다른 교우들은 벌써 다 달아나 흩어졌고, 오직 베드로와 오스테파노 두 사람만 남아 있다가 잡혀서 관가로 들어가 토마스와 같이 수감되었습니다.

於是捕盜部將輩 挾金汝三及都下無賴輩 以爲耳目 到處  採訪 敎中洶洶擾亂 値歲暮 事得暫緩

이에 포도부장의 무리들은 김여삼과 장안의 무뢰한들을 앞장 세워서, 안 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찾아 교중이 온통 물 끓듯 요란해졌는데, 마침 세밑이 되어 일이 잠시 잠잠해졌었습니다.

正月初九日 總會長崔若望被捕 自後部將輩 晝夜旁午 處處緝拿 被捕者塡滿兩廳 (捕盜廳有左右兩廳) 而率皆愚鹵新進 及閭巷婦女 剛毅者狼少

정월 초아흐레 (1801. 1.9) 총회장 최창현 요한이 (崔昌顯 1754∼1801 순교자) 체포 당하고부터 부장들은 밤낮 없이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여기 저기서 잡아가, 체포된 사람이 양청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무식하고 새로 입교한 사람과 여염집 부녀자들이었고, 의지가 강하고 굳센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十一日 大王大妃下敎嚴禁  曰 先王每謂正學明 則邪學自熄 今聞邪學依舊 自京至于畿湖 日漸熾盛 豈不凜然寒心乎

11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성교를 엄금하였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습니다. ’선왕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바른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들으니 사학이 여전하여 서울에서 기호에 이르기까지 날로 점점 더 성해진다고 하니, 어찌 소름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京中及外鄕 修明五家統之法 統內若有爲之者 統首告官懲治 然猶不悛 當論以逆律  殄滅之  無遺種 於是各處騷擾 禍炎愈熾 敎友們 尤無所措手足

서울과 지방에 오가작통의 법을 분명히 하여, 그 통 안에 만약 사교를 믿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가에 고발하여 정치하게 하여라. 그래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으면 마땅히 역률로 논죄하여 모두 다 사형에 처하고 씨도 남기지 않게 할 것이다.’ 이에 각처가 소란해지고 환난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서, 교우들은 몸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明會長鄭奧斯定 若鏞之第三兄也 先居楊根 庚申五月之窘 率家上京 本來 謗甚盛 庚申夏 有一惡官 指名請誅於先王面前 賴先王叱止之

명도회장 정아우구스티노는 (정약종 1758∼1801 순교자) 정약용의 셋째형입니다. 전에는 양근에서 살다가 경신년(1800) 5월 박해 때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전부터 사교를 믿는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경신년 여름 한 고약한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를 지명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至是見時勢已變 火色漸熾 自己恐不得免 取所有聖物書冊 及神父手札 貯之一籠 寄在他家 未幾寄籠之家 又有駭機 將欲搬回本家 而恐爲部將輩所獲

정아우구스티노는 이 때 시세가 이미 변화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 스스로 도저히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가지고 있던 성물과 책과 신부의 편지 등을 농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른 집에다 맡겨 두었는데, 그 농을 맡긴 집도 발각될 가능성이 있고,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본 집으로 도로 운반해 오려고 했으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使任多黙者 扮作賣柴的 裡籠以枯松葉 十九日夕陽時 從街上負來 籠大薪薄不類樵擔

임토마스라는 사람을 시켜 나무 장수로 가장하고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서, 19일 석양 무렵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땔 나뭇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漢城府別肉禁亂見之 疑其爲私屠牛肉(私屠之禁絶嚴)  迫到官 開看都是聖敎書像 及神父筆札 府官大駭 遂將籠與人 押送捕廳

마침 한성부의 별육 단속하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것이 밀도살한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하여 임토마스를 관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책과 성상과 신부의 편지였으므로 한성부의 관리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농과 사람을 다 포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是如火上添油 禍難因此而大 書籠被捉後 敎友們莫不震驚 恐不保朝夕 過了十餘日 寂無動靜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것과 같아 환난이 이로 인하여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책을 넣었던 농이 압수된 이후에 교우들은 모두 놀라 몸을 떨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했는데, 십여 일이 지나도 아무런 동정이 없어 조용하였습니다.

二月初 捕盜大將李儒慶移職 新官申大顯視事 盡放滿獄背敎之人 惟崔多黙兄弟 崔若望 任多黙不放

2월 초에 포도대장 이유경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고, 새로 임명된 신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차 있던 배교한 사람들을 죄다 석방하고 오직 최토마스 형제와 최요한과 임토마스만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或云將欲杖殺 或云方議遠竄 外間緝捕暫停 敎友們喜出望外 庶乎其無事 時有少北朴長卨 老論李書九 南人崔顯重 相繼上疏 極 聖敎 請以逆律論罪

혹은 말하기를 장차 장살할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멀리 귀양보낼 의논을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외부에서도 검거가 잠시 중지되니 교우들은 기뻐하였고, 이대로 아주 아무 일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이 때 소북의 박장설, 노론의 이서구, 남인의 최현중 등이 계속해서 상소하여, 극단적으로 성교를 비방하면서 역률로 논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幷論申大顯輕治之罪 大妃震怒 繫大顯于吏 移捕廳所囚四人于禁府 國法朝士及逆賊 禁府治之 捕廳專管盜賊 庶民有罪 刑曹治之

아울러 신대현이 교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을 죄로 몰아 논란하였습니다. 대비가 크게 노하여 신대현을 이조에 가두고, 포도청에 가두어 두었던 네 사람을 금부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조정의 신하와 역적의 죄는 금부에서 다스리고, 포도청에서는 오로지 도둑을 관장하고, 서민의 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敎友皆庶民 而屬之捕廳者 用治盜律也 移之禁府者 論以逆律也 二月初九日 下李家煥 丁若鏞李承薰洪樂敏于禁府

교우들은 다 서민이어서 포도청에 수감되어 있는 자는 도율을 적용 받고, 금부로 옮겨간 자는 역율로서 논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2월 초아흐렛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금부로 하옥시키고,

十一日 捕權哲身丁若鐘 一邊申飭捕廳 從前放送之人 盡行追捕  將驪州楊根所囚諸人 解赴禁府 京鄕知名之敎友 無一人得免

11일에는 권철신, 정약종을 체포하였으며 한편, 포도청에 단단히 경계하여 전에 석방한 사람들을 모두 다시 체포하게 하고, 아울러 여주와 양근에 가두어 둔 여러 사람을 금부로 압송해 오니, 서울과 지방의 이름 있는 교우는 한 사람도 이 난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道路上 邏卒橫馳 晝夜不絶 禁府及兩捕廳及刑曹獄 皆塡塞不能容云矣 二十四日 葛隆巴全家被捕 此後 士族婦女被捕者甚多 而皆不得詳聞

길에는 나졸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고 널려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의 옥은 모두 빽빽이 차서 더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24일 골롬바의 온 가족이 체포되었고, 그 후로 사대부집 부녀자도 체포된 이가 많았습니다만 자세히 들은 바는 없습니다.

鄭奧斯定到官 官問書籠來歷 奧斯定認爲己物 官將籠中書札 遂一究問 奧斯定緘口不答

정아우구스티노가 관가에 이르러, 관리가 농 속의 책의 내력을 묻자, 아우구스티노는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리는 농 속의 편지를 내어놓고 하나하나 캐어물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官送人問于家屬曰 汝夫汝父 只告神父之姓名居住 則必無死理 而甘受毒杖 終不開口  等家屬 應必知之  等須念家長之性命 從實直告 家屬俱以不知答之

그러자 관리는 사람을 보내 가족에게 묻기를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단지 신부의 이름과 있는 곳만 말한다면 절대로 죽을 까닭이 없는 것인데, 독한 매질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너희들 가족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대로 말하여라." 하였지만 가족들은 한결같이 모두 모른다고만 대답하였습니다.

於是公卿會義 論以大逆不道 二十六日 奧斯定及崔若望 崔多黙 洪方濟各沙勿  洪樂敏 李承薰 共六人一幷斬決

이에 조정에서[公卿會議] 대역부도의 죄로 판결하여 26일에 아우구스티노와 최요한, 최토마스, 홍프란치스코사베리오 (洪敎萬 1737∼1801 순교자), 홍낙민, 이승훈, 여섯 사람을 모두 참형에 처하였습니다.

此後又有九人斬決 而女子三人 一則葛隆巴 其二不知 男子六人 亦不知爲誰 似是崔伯多祿等 而傳聞未詳 不敢强定耳

그 뒤에 또 아홉 사람을 참형에 처하였는데, 여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골롬바이고 다른 두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남자 여섯 사람 역시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최베드로 등인 것으로 짐작되나, 소문으로 전해 들은 말이 정확하지는 않아, 함부로 단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驪州楊根所囚諸人 皆還送本邑斬決 而未及査實 不能條奏 總會長崔若望昌賢 中路人也 乙卯致命崔瑪弟亞之族姪

여주 양근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임희영) 도로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목베어 죽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낱낱이 아뢸 수 없습니다. 총회장 최창현 요한은 중인으로, 을묘년에(1795) 순교한 최마티아의 (崔仁吉 瑪弟亞 1764∼1795 순교자) 족질입니다.

家傳眞實之訓 聖敎到東 首先進敎 平和謹愼 公明精勤 二十年如一日 表樣純粹 言辭簡當 人或 疑 或遇患 心甚憂悶 一見其面 則自覺所遭之不大不難

그는 참된 가르침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몸가짐이 편안하고 화목하였으며 언행을 공정하게 힘써 20년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은 간단하면서도 정의로워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을 한번만 보아도 자기가 당면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이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更聞數言 則胸次釋然 講道詳明有味 雖談說天然 不圖悅聽 而人皆樂聞 不知厭倦 入人 深 聽之者大有神益

다시 몇 마디 말을 더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리게 하였으며, 도리와 강론도 자세하고도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비록 예사롭게 말하며,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듣고 싫증이 나지 않고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심의 유익함이 아주 많았습니다.

順命謙遜 出於自然 旣無卓異之表 亦無瑕 之行 德望爲敎中第一人 人無不愛信 家在笠井洞 故敎中號爲冠泉

그가 천명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므로, 남보다 뛰어나거나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서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 사이에서는 호를 관천으로 불리었습니다.

趙和鎭之廉聞湖中也 已知崔冠泉爲敎中領袖 但不知其名與居住 故不能捕獲 至是見窘難將大 避住敎友家 辛酉正月初五日 體氣不平 不得已還家調攝

조화진이 충청도를 염탐하여 최관천이 교인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단지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러 최요한은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으로 피해 있다가 신유년(1801) 정월 초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를 하였는데,

初九日夜半 金汝三導捕盜部將 到家掩捕 囚之捕盜廳 十餘日後 受治盜棍十三度 杖時屛氣伏地 如死人一樣 杖後 官數罪 蹶然而起 講明聖敎十誡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부장을 인도하여 와서 덮쳐,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0여 일 후에 치도곤 열 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그 모양이 마치 죽은 사람 같더니, 매질이 끝난 다음 관리가 그의 죄목을 헤아리자, 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官曰汝旣孝敬父母 胡不行祭 答曰請審思之 就寢之時 雖有旨味 必不能嘗  已死之人 安能享飮食乎 官不能答 遂命下獄

관리가 말하기를, "네가 부모에게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소?" 하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명령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自後無所聞 與丁奧斯定 同日被斬 時年四十三歲 丁奧斯定若鐘 性直而志專 詳密過人

그 뒤에 아무런 소식을 못 듣겠더니, 정아우구스티노와 같은 날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 였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성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고, 무엇에서나 자상하고 세밀한 것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嘗有學仙長生之志 誤信天地改闢之說 歎曰 天地 改時 神仙亦不免消融 終非長生之道 不足學也 及聞聖敎 篤信而力行之

일찍이 선도를 배워 오래 살 생각이 있어서, 엉뚱하게 천지개벽설을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변하고 바뀔 때에는 신선도 역시 없어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이것도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닐 것이므로 배울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성교를 듣자 그는 독실하게 믿고 힘써 실행하였습니다.

辛亥之窘 兄弟親友 少有全者 而獨不撓動 拙於俗論 而 喜講論道理 雖當疾病飢乏之時 若不知其苦者然

신해년(1791) 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구들 중에서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 드물었는데, 오직 그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사를 이야기함에는 서툴렀으나 성교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비록 병들어 괴롭거나 굶주림을 당했을 때에도 그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或不明一端道理 則寢食無味 全心全力而思之 必至融通而後已

그러나 혹 한가지 조그만 이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雖在馬上舟中 總不斷黙想之工 見有愚蒙者 盡力訓誨之 至於舌疲喉痛 而少無厭倦之意 雖甚愚鹵者 鮮有不明

그는 비록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나 묵상의 공과를 그치지 않았으며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보면 혀가 굳고 목이 아프도록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면서도 조금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비록 아무리 어리석고 둔한 사람이라도 그와 있으면 깨치지 못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嘗爲敎中愚者 印國諺文 述主敎要旨二券 博採聖敎諸書 參以己見 務極明白 愚婦幼童 亦能開卷了然 無一疑晦處

일찍이 그는 교우들 가운데 무식한 이들을 위해 우리나라의 한글로『주교요지』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널리 성교의 여러 가지 책에서 인용하고 자기의 의견을 보태서 지극히 쉽고 분명하게 설명하여 어리석은 부녀자나 어린아이들이라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한군데도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습니다.

緊於本國 更勝於   神父准行之

그래서 신부도 이 책이 이 나라에서 꼴과 땔나무보다도 (중국의 교리책『성세추요』로 해석도 가능함) 더 요긴하다 하여, 간행을 인준하였습니다.

積年宿學 習與性成 每見交友 寒暄之外 卽陳講論 終日   無暇旁及他談

정아우구스티노는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쌓은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으로 생활화되어 매번 교우를 만나면 안부 인사 정도만 하고, 강론을 시작해서 종일토록 힘써서 미처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或得自己所未通者一二端 則滿心歡喜 積讚不已 或有冷淡糊塗者 不肯聽講 則不勝缺然悶然之意

그는 혹 자기가 아직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알게 되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해서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혹 신심이 식어버려, 태도가 분명치 아니한 사람이 강론을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서운해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人問各端道理 如探囊取物 不煩思索而滔滔不竭 反覆辦難 未嘗少窮 所言皆排比次序 無或錯亂 而精奇超妙 詳細的確 固人之信 熾人之愛

사람들이 별의별 도리를 다 물어도 그는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고 말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데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다 차례가 갖추어져 논리가 어그러지거나 혼란하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뛰어나 오묘함을 넘어서며, 자세하고도 정확하여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여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雖德望不及冠泉 明理過之 又以爲天主諸德 及各種道理 本來浩汗 而散在諸書 無一全論 讀之者難於領會 將欲 集各書 分門別類 彙爲一部 名曰聖敎全書

비록 그의 덕망은 관천에게 미치지 못했지마는, 성교의 이치에 밝기는 관천보다 나았습니다. 그는 또 천주님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본래 크고 광활한데,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있어 온전히 논한 책이 없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요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부문별로 나누고 모아서 책이름을『성교전서』라 하였습니다.

以贈後學 起草未半 而被難不能成 被捕入獄 官以王命責問 奧斯定直陳聖敎眞實之理 明其不當禁之意 官大怒以爲辦駁王命 論以大逆不道

뒤에 성교의 교리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남겨주려고 하였는데, 초고가 반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박해를 당하여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니 관리가 왕명으로 심문하였는데 그는 성교의 진실한 이치를 분명히 진술하고 성교를 금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크게 노하여 왕명을 반박한다고 하며 대역부도의 죄로 논죄하였습니다.

出獄上車 將就法場 卽高聲謂人曰  等勿笑吾  人生於世 爲天主死 卽當行之事耳 大審判時 吾 之涕泣  而爲眞樂  等之喜笑  而爲眞痛  等必勿相笑

그는 옥에서 끌려나와서 함거에 올라 형장으로 가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대심판 때에는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정한 기쁨으로 바뀌고 당신네 기쁨과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니 당신들은 꼭 그렇게 서로 웃지는 마십시오." 하였습니다.

臨刑顧謂觀者曰  等勿  此時當行之事  等必毋   此後效而行之 一斫之後 頭頸半截 蹶然起坐 大開手畵聖號 從容復伏

그리고 그는 처형 받기에 앞서 주위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들은 두려워말고 후에 본받아서 행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칼로 한 번 찍으니 머리와 몸이 반으로 잘렸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서 십자 성호를 긋고는 조용히 다시 넘어졌습니다.

與崔多黙同斬 時年四十二歲 崔多黙年老多病 獄中久已委頓 登車不省人事 將近法場 始顯歡容 首先被斬 時年五十六歲

최필공 토마스와 함께 처형당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2세였습니다. 최토마스는 나이가 들고 병이 많은데다가 옥중에서 오래 시달린 끝에 이미 지쳐서 수레에 오를 때에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형장 가까이에 이르자 비로소 얼굴에 기쁨이 나타났습니다. 맨 먼저 처형당했는데 이 때 나이 56세였습니다.

洪沙勿 敎萬 權哲身之母舅 居京畿道抱川縣 少登進士 晩好經學 權家奉敎他亦信從 絶意仕宦 勸化鄕隣 爲一鄕領袖

홍교만 사베리오는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현에서 살았습니다.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뒤늦게는 경학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에서 성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고향의 이웃 사람에게 성교를 권하고 감화시켜서, 한 고을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其女適奧斯定之子 因此素有 謗 至是被捕致命 洪保祿樂敏 本係忠淸道禮山縣人也 少中進士 移居都下 與李承薰丁若鏞等爲友

그의 딸이 정아우구스티노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이로 인해 전부터 남들의 비방을 받아왔는데 이 때에 잡혀서 순교하였습니다. 홍낙민 바오로는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입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는 이승훈, 정약용과 벗이 되어 지냈습니다.

甲辰乙巳之間 信從聖敎 以熱心明理幹事見稱 而爲遮人耳目 不絶科擧 己酉年登及第 屢官至司諫院正言 辛亥之窘 先王迫令背敎 頗有壞表

갑진년(1784) 을사년(1785) 사이에 성교를 믿고 따르기 시작하여 열심으로 성교의 도리를 밝히고 큰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과거 보기를 중단하지 아니하여 기유년(1789)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1791) 박해 때 선왕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배교하였는데 자못 신앙의 외형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同時背敎者 皆全不守規 李保祿則不廢經齋 乙卯行聖事時 受補禮 預備解罪 未及辦工而窘難大起 名在韓永益告 中 又被先王逼迫背敎

그러나 함께 배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전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지마는 바오로만은 염경과 재 지키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을묘년(1795) 성사를 행할 때에는 보례를 (성세성사나 혼인성사 등 성사예식 집행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예식) 받아 고해를 준비하였으나 미처 판공할 때가 이르기 전에 박해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한영익의 고발에 들어 있어서 또 선왕에게 배교하라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自後在家則全守規誠 出外則隨順壞俗 己未遭母喪 亦不拜牌 年來熱心稍蘇 將欲全心歸主 善志未成 而被捕同斬

그는 이 후로부터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지켰으며 밖에 나갔을 때도 세속을 거스르지 않고 순순히 따랐습니다. 기미년(1799)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지마는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와서 열성이 약간 소생하여 장차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가려 하였으나 이 거룩한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함께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獄情嚴秘 不能詳知 而以意席之 則此人罪名 本來不大

옥안의 사정을 엄중히 비밀에 붙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짐작컨대 그의 죄명은 본래 중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若到官背敎 未必就死 而至於斬首 則可知其不悖聖敎矣 李承薰伯多祿 李家煥之甥姪 丁奧斯定之妹兄 少登進士 素好學問窮理 布衣李蘗大奇之

만약 잡혀가서 배교하였더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을 것인데 참형을 당하기에 이른 것을 보면, 그가 성교를 거스르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이가환의 생질이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올랐고 본래부터 학문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좋아하여 포의로 (벼슬하지 않거나 벼슬에 뜻이 없는 선비) 있던 이벽이 (1754∼1786 세자요한) 크게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時李蘗密看聖書 而承薰不知 癸卯隨父入燕 李蘗密托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 子往見之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則西士必大愛之

이 때 이벽은 몰래 성교에 관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승훈은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계묘년(1783)에 이승훈이 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이 은밀히 부탁하여 말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천주당에 서양 사람인 선교사가 있으니 자네가 가서 찾아보고 신경 한 부만 구해달라고 하며, 아울러 영세 받기를 청한다면 그 서양 선교사는 반드시 크게 사랑할 것일세.

多得奇物玩好 必勿空還 承薰如其言 到堂請洗 諸位司鐸 以其不明要理 不許領洗 惟梁神父力主授洗 幷給許多聖書

그러므로 반드시 기이한 물건과 좋은 장난감을[玩好] 많이 얻어 가지고 오되 그냥 돌아오지는 말게" 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영세를 청하니까 여러 신부들은 영세에 필요한 성교의 요점과 이치에 밝지 못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오직 양신부만이 (梁棟材 그라몽신부 1736∼1812 프랑스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힘써 주장하여 세례를 주고 더불어 성교에 대한 책을 많이 주었습니다.

承薰到家 與李蘗等潛心看書 始通眞理 因而勸化親友 一時名士 從者甚多 推承薰爲首 隨後厥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

승훈이 집으로 돌아와 이벽 등과 함께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그 책을 읽어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친한 친구들에게 권하고 교화시켜 당시 이름난 선비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그들은 승훈을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습니다. 뒤에 그의 아버지가 성교를 엄중히 금하고 나쁜 친구들은 마구 그를 비방하였지만 승훈은 오히려 참아 견디며 성교를 받들었습니다.

先王愛其才 庚戌秋補蔭仕 官至平澤縣令 申亥被拿背敎 屢著毁敎文字 皆非本心也 乙卯聞司鐸東臨 動心回頭 豫備沾恩 不多日窘難起 承薰仍復畏縮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1790) 가을에 음직에 (과거를 보지 않는 대신에 조상의 음덕으로 하는 벼슬) 임명하여 벼슬이 평택 현령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에(1791) 체포되어 배교하고 여러 번 성교를 헐뜯는 글을 썼으나 다 자기의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에(1795)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박해가 일어나 승훈은 두려워서 다시 몸을 움츠렸습니다.

而以 初傳書之故 惡黨之攻斥聖敎也 必歸罪於承薰 先王每曲護之 承薰外雖從俗 或逢舊時密友 則 眷不能忘情 常思有以振起之 至是被禍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성교에 대한 책을 전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의 성교에 대한 공박과 배척은 반드시 그 죄가 승훈에게로 돌아오기 마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왕은 매번 그를 두둔하고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승훈은 겉으로는 비록 세속을 따랐지마는, 혹시 옛날에 함께 신앙을 지키던 벗을 만나면 간절한 정을 못잊어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나려고 생각하다가 이에 이르러 화를 입었습니다.

而此人有傳書之罪 雖復背敎 難免死刑 故不知其善死與否 徐當査實耳 李家煥自在幼少 才智超群 及長 風度魁偉 文章冠一國 無書不覽 强記如神

이 사람은 성교에 관한 서적을 전한 죄가 있어서 비록 다시 배교한다 하더라도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교를 위한 죽음인지 아닌지는 마땅히 앞으로 사실을 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가환은 어릴 때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해서는 풍채가 늠름하고, 태도가 대단히 훌륭하였습니다. 문장은 온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뛰어나 마치 신의 경지와 같았습니다.

又精天文幾何之學 嘗歎曰 老夫死則東國幾何種子絶矣 少信理氣之學 每膽天黙歎曰 這樣大排布 何謂無主宰者 三十餘 登進士及第 先王器重之

또 천문학과 기하학에 정통하여 일찍이 그는 탄식하며, 자기가 죽고 나면 이 나라에서 기하학은 그 근본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의 학문을 다소 믿던 그는 매번 하늘을 쳐다보고 속으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와 같이 크고 넓게 깔린 모습에 어찌 주재하는 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서른 살이 넘어서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선왕이 그 그릇의 큼을 알고 중히 여겼었습니다.

甲乙之際 聞李蘗等信從聖敎 責之曰 我亦見西洋書數卷 (本家有職方外記西學凡等) 不過是奇文僻書 只可廣吾識見 安足以安身立命 李蘗據理答之 家煥辭屈 遂求書細覽

갑진, 을사년 무렵에 이가환은 이벽등이 성교를 믿고 따른다는 말을 듣고 책망하며 말하기를 "나 역시 서양 서적 몇 권을 보았는데《그의 집에『직방외기』『서학범』등이 있었다》기문벽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단지 내 식견은 넓힐 수 있을 뿐이로되, 어찌 그것을 믿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서 하찮은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벽에 이치에 의거하여 답을 하니 가환이 말이 막혀 마침내 책을 가져다 자세히 읽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李蘗與初函書數種 時有聖年廣益一部 而恐家煥不信 蹟 不肯借看 家煥力爭之 盡取其時所有聖敎書 潛心反覆 決意而信之曰

이벽은 기본 교리책중 (天學初函 : 명나라 말 이지조가 편찬한 천주교 관계 총서) 몇 가지를 주었는데, 그 때『성년광익』☞(천주교 성인전) 한 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성스러운 기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가환은 기어코 달라고 하였습니다. 가환은 이벽이 그때 가지고 있던 성교 서적을 모두 가지고 가서 정신을 가다듬어 되풀이해 읽어보고는 성교를 믿기로 뜻을 결심하고

眞理也 正道也 苟非實事 書中所說 皆誣天耳 慢天耳 西士必不得涉海傳敎 當遭雷震死矣 遂勸化門生 密與李蘗等 晨夕往來 頗有熱心

"이것은 진리요 정도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이 책 가운데 한 말은 다 하늘을 모함한 것일 따름이요, 하늘을 업신여긴 것이니 서양 선교사가 바다를 건너와 전교하지 못하고 마땅히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제자들을 권하여 교화하고 몰래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토론하며, 상당히 열심이었습니다.

時李承薰等 妄行聖事 家煥勸人領洗 自己不肯 其意欲奉使入燕 受洗於西士也 未幾見時勢艱難 遂廢工課

이 때 이승훈 등이 감히 성사를 행하였는데 가환은 다른 사람에게 권하여 그에게 영세를 받게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신이 되어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영세를 받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세가 어려워짐을 보고는 마침내 공과조차 폐지하여 버렸습니다.

而奉敎得謗者 多係家煥之姻親族屬 故惡黨常指斥爲敎主

그러나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을 받는 사람은 가환의 일가친척들이 많았으므로 성교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항상 그를 교주로 지목하여 배척하였습니다.

辛亥窘難時 爲廣州府尹 頗害敎中 爲自明計 用治盜律於敎友 自家煥始 辛亥後 先王頗用南人 家煥乘勢 屢歷名宦 升拜工曹判書

신해년(1791) 박해때 그는 광주 부윤이 되어 성교를 많이 해침으로써 자기를 변명할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교우에게 도율을 적용하여 다스리는 것도 가환으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신해년(1791) 이후에 선왕이 남인을 많이 등용하자 가환은 기회를 타 여러 높은 벼슬을 역임하고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乙卯三人致命後 惡黨不知司鐸之事 歸罪於李承薰及家煥 交章迭攻 先王不得已 謫承薰于禮山 左遷家煥爲忠州牧使 忠州有一敎友  謗素著

을묘년에(1795) 세 사람이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관련하여 처형된 지황, 윤유일, 최인길을 말함) 순교한 후에 악한 무리들은 신부의 일은 모르고 그 죄를 이승훈과 이가환에 뒤집어씌우고, 글로써 번갈아 공격하였으므로 선왕도 어찌할 수 없이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가환을 충주 목사로 좌천시켰습니다. 충주에 어떤 교우가 있어 전부터 남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家煥治以嚴刑 逼令背敎 用周紐(治盜極刑)於敎友 亦自家煥始 又納官妓爲妾 皆所以掉脫 謗也 然自後枳廢 不復進用 居家以文章自娛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리며 협박하여 배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교우에게 주뢰를 <周牢 주리 : 도둑을 다스리는 아주 혹독한 형벌> 사용한 것도 역시 가환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관기를 첩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짓은 다 자기에게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버림받고 다시 등용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집에 들어앉아 글을 짓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즐겼습니다.

其妻素有信根 勸化女婦妾婢 或書冊綻露 家煥不爲査禁 戊午己未之間 聞外鄕窘難迭起 密謂其所信曰 此事譬如以杖擊灰 愈擊愈起 主上雖欲禁止 終當無奈何矣

그런데 그의 아내가 본래 성교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을 권유하여 감화시켰는데, 혹 성교에 관한 책이 탄로 나도 가환은 조사하고 금지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무오년과(1798) 기미년(1799) 사이에 그는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자기의 소신을 말하기를, "이것은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 것과 같아, 치면 칠수록 더욱더 일어나는 법이오. 주상께서 아무리 금하려고 하시나 끝내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初入禁府 猶自抵賴 治獄者 皆平時仇嫉之人 必欲致之死地 自知終不得免 遂承認本心 到死不  畢命於毒杖烙刑之下 時年六十歲 六人致命前數日也

처음에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오히려 스스로를 변명하고 죄를 승복하지 아니하였으나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 평시에 그를 원망하고 시기하던 자들이라 기필코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하므로, 그 스스로도 끝내 면할 수 없음을 깨달아 마침내 본심을 인정하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던 중 그만 목숨이 끊어졌는데, 이 때 나이 60세였습니다. 여섯 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權哲身亦杖斃 而不知其善惡死 容俟採訪 崔伯多祿必悌 字子順 多黙之從弟也 家貧親老 賣藥爲生 價廉而材精 人皆信之

권철신도 역시 매를 맞고 죽었는데 그가 성교를 위해 순교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널리 탐지하여 알아낼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최필제 베드로는 자가 자순인데 최토마스의 종제입니다.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는 늙어, 약을 팔아 살아갔는데,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용하였습니다.

眞實忠厚之表 粹然見於顔面 望而知其賢人也 多黙志氣高邁 而常敬憚之 雖係少年之弟 事皆諮之而後行 不敢自專

진실하고 중후한 표양이 순수하게 얼굴에 나타나므로 사람들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최토마스도 의지가 높고 기개가 뛰어났지마는 항상 베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비록 나이가 적은 아우이지마는 모든 일은 다 그에게 물어 본 다음에야 행하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多黙有一親弟 毁斥聖敎 歷 敎友 而惟伯多祿則不敢譏  常稱天主敎中 惟子順一人 餘無可取

최토마스에게 친동생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교를 헐뜯고 배척하며 교우들을 차례로 돌아가며 욕했지마는 오직 최필제 베드로에게만은 감히 헐뜯어 나무라지 못하고 항상 천주교 신자 중에서 오직 자순 한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그밖에는 취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습니다.

神父嘗歎美之曰 夫婦守貞者 鮮克有終 而子順夫婦 志操愈固 苦工愈勤 眞賢人也 被捕之後 其父本係外敎 驚憂成疾 臨終信主受洗而死

주신부도 일찍이 그에게 탄복하고 칭찬하여 말씀하시되 "부부가 정결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자순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 갈수록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체포된 후 그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그 아버지도 천주님을 믿어 영세를 받은 후에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伯多祿在獄聞訃 訴官請暇 官命歸葬 更以言語 示其微意 欲令逃避 伯多祿不肯從 葬後 限入獄 竟以斬首致命 年三十二歲

최베드로는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청에 호소하여 말미를 청하였는데 관청에서는 돌아가 장례를 지내라고 하며, 다시 말로 눈치를 주어 도망가게 하려고 하였으나 베드로는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바로 기일 안에 옥으로 돌아가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였는데 이때 나이 32세였습니다.

嘗與數友 各言其志曰 斬首致命 乃吾至願 竟如其言 或傳伯多祿不勝杖 背敎 而官猶不放 伯多祿復說明受死云 頗未的實 姑以存疑耳 金若撤法健淳 老論大家之 

최베드로는 일찍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제각기 자기의 소원을 말할 때 그는 참형 당해 순교하는 것이 자기의 더 없는 소원이라고 말하였는데 결국 그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최베드로는 매를 못 이겨 배교하였지마는 관가에서는 석방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다시 성교를 설명하고 사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못 확실하지 아니하여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김건순 요사팟은 노론 대가의 자손입니다.

家在京畿道驪州 先祖尙憲 有大功於國家 故世襲冠冕 爲國內甲族 若撤法生而穎異

집이 경기도 여주에 있었고, 그의 선조 상헌이 국가에 큰 공이 있었으므로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아 나라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김요사팟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하고 뛰어난 데가 있었습니다.

九歲便有學仙之志 幼時受論語於塾師 至敬鬼神而遠之之章 問曰 當敬則不當遠 當遠則不當敬 而敬而遠之何也 其師不能答

아홉 살 때 선도를 배울 생각을 하였고, 어려서는 글방 훈장에게『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라는 대문에 이르러 선생에게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면 멀리하는 것이 옳지 않고, 멀면 마땅히 공경하지 않는 것인데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은 어찌 그렇습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其家素有畸人十篇 若撤法喜看之 十餘歲 著天堂地獄論 以明其必有 稍長博通文學 經史子集 醫經地誌 以至佛老兵家之書 莫不精熱

그의 집에 전부터『기인십편』☞(마태오리치가 지은 책으로 불교와 대비하여 천주교를 주장한 책) 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 책 읽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십여 세 때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좀 자라서는 문학과 경사자집과 의서와 지리 등에 널리 능통하였으며 불교와 노자와 병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十八遭養父喪 東國喪服 遵用宋儒之制 頗失古法 若撤法 而正之 俗儒駭訝 貽書責之 若撤法作書答之 引據該洽 文辭霑  李家煥見而歎曰 吾不敢望也

열 여덟 살에 양부의 상을 당했을 때는 우리나라 상복이 송나라 선비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써서 옛날의 법을 많이 잃었었는데 요사팟은 이것을 고쳐서 바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세속의 잘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크게 놀라고 의아하여 글을 보내서 힐책하므로 요사팟은 글을 지어 이에 대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근거가 해박하고 넉넉하면서도 문장이 유창하여 이가환이 보고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따라가지도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居家忠信篤敬 德著鄕里 家本富饒 而傾財喜施 自己衣食 泊如貧者 名譽藉甚 每遊都下 軒馬輻輳 皆以一見爲奇

그는 집안에 있어서는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웠으며 독실하고 공손하여 덕망이 고향일대에 자자하였습니다. 집안이 본래 넉넉하여 재산을 남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면서도 자기가 먹고 입는 것은 검소하기가 가난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 명예가 대단하여 서울에 올 때마다 그를 찾는 사람의 가마와 말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며, 모두들 그를 한 번 만나 보는 것을 아주 특별한 일로 여겼습니다.

與李瑪爾定等五六人 結生死之交 將欲乘舟泛海 達于江浙 以至北京 面晤西師 多學利用厚生之方 歸傳于本國 因進敎不果 此五六人 皆爲主致命

그는 李마르띠노 등 대여섯 사람과 죽고 사는 것을 같이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강절 지방에 도달하여 북경으로 가서 서양 선교사를 직접 마주 대하고 이용후생의 방법을 많이 배워, 돌아와 우리나라에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대여섯 사람은 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時奉敎者 率皆南人 老論則未有一人 若撤法歆慕縱深 無門可入 偶因鄕間敎友 得見總領天神像 誤以爲聖敎與奇門相通 遂與姜彛天等 從事奇門

이때 성교를 받드는 사람은 모두가 남인이고 노론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金요사팟은 성교를 몹시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크고 깊었지만 입교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시골에 있는 교우로부터 총령천신상의 (미카엘 대천사의 상) 상본을 얻어 보고 성교가 술법과 서로 통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마침내 강이천 등과 함께 술법에 종사하였습니다.

姜彛天者 少北名士 而心術不端 以爲本國必不長久 將有風雲之會 學習此術 以圖乘時進取 若撤法不知而誤交之 神父聞其賢 以書勸之

강이천이란 이는 소북의 이름난 선비로서 마음 씀씀이가 단정하지 못하여서, 이 나라는 끝내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배우고 익힌 술법으로 기회를 보아 정권을 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런 줄을 모르고 그와 교제하였습니다. 주신부는 김요사팟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 권유하였는데,

若撤法驚動悅服 盡棄從前所學 全心歸主 時年二十二歲 同時密友 莫不歸化 而惟姜彛天不肯全信

그는 크게 놀라 감동하고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이 스물 두 살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와 함께 은밀히 친했던 친구들이 다 입교하였는데 오직 강이천만이 온전히 믿음을 수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不數月 彛天本事綻露 遂起獄事 辭連若撤法 先王素知其才 曲爲之保護 獲免于禍 領洗後 熱心熾然 遂爲父兄所知 嚴加禁止 三四年內 家窘無時無之  謗從之而盛

몇 달이 안되어 강이천의 일이 탄로 나서 마침내 옥사가 일어났는데 문초하는 말 가운데 김요사팟이 연루되었으나 선왕이 평소 그의 재주를 알고 있었으므로 마음이 휘도록 두호하시어 요사팟은 화를 면하였습니다. 그는 영세 후에 천주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불꽃같이 왕성하였습니다. 끝내는 집안의 부형들이 알고 극히 엄하게 금지시켰기 때문에, 3∼4년 동안 집안에 말썽이 없는 때가 없었으며 이에 따라 비방도 더 심해졌습니다.

若撤法表樣端正 謙 如愚下無知者 以此人愈敬服 被捕之緣由 臨難之操持 未能詳知 但聞臨刑謂市人曰 世間爵位聲名 都市虛假

김요사팟은 그 외양이 단정하고 지극히 겸손하여 겉으로 보기에 아주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더욱 남들이 공경하고 복종하였습니다. 그가 체포당한 연유와 난을 당할 때의 지조를 지킨 일에 관해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다만 들리는 말로는 처형당하기 앞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我亦薄有名稱 亦能仕宦 而爲其虛假 棄而不取 惟此天主聖敎 至眞至實 故爲此死而不辭  等須仔細 終以斬首致命 時年二十六歲 都民莫不嗟惜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했었지마는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기에 버리고 취하지 아니하였소. 오직 이 천주님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한 것이기에 이를 위해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들도 모름지기 이 뜻을 자세히 알도록 하십시오."하고 끝내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었는데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습니다.

金伯淳 王都人 健淳之族兄也 家本貧寒 志切功名 先祖尙容 官爲國相 崇德丙子 大淸兵陷江都 尙容義不屈 自焚死 因此建祠旌閭

김백순은 (?∼1801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서울 사람으로 김건순의 족형입니다. 집안이 본래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릴 생각은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선조 상용은 벼슬이 정승이 되어, 숭덕 병자년에(1636) 청나라 군사가 강도를 함락시키자 상용은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사당과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습나다.

本國建大報壇於闕內 祭祀前明萬曆崇禎兩皇帝 每年國王率丙子死節人子孫 行展拜禮 禮罷設科 試與祭人 謂之忠良科

우리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서 전조 명나라의 만력 숭정 두 황제를 제사 지냈는데, 해마다 국왕이 병자년에(1636) 절의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들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전배의 예를 행했으며, 예가 끝나면 과거를 설치하여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고 이것을 일러 충량과라고 하였습니다.

伯淳獨不與祭曰 尊周之誠 不在與祭 今日與祭者 專爲希 科名 事甚不誠 吾不爲也 初年隨人毁謗聖敎 亦爲擧子業 見世途危險 無心進取 讀宋儒書 窮究性理

김백순이 홀로 이 제사에 참례하지 않고 말하기를 "오늘날 제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주나라를 존숭하는 정성으로 이 제사에 참례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만 엿보는 것이니 그것은 매우 참되지 못한 마음으로 행한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참례하지 않는 것이오."하였습니다. 그는 처음 몇 해 동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성교를 헐뜯고 비방하면서 과거 공부를 힘썼는데 세상 형편이 앞으로 위험해질 것을 보고는 벼슬에 나아갈 마음을 버리고 송나라 유학자들의 책을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又見道理疑晦 不可全信 遂讀老莊之書 因而悟人死有不滅者存  爲新論 講說於朋 之間 友等 之曰 此人議論新奇 必從西敎矣

그러나 성리학 또한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못하여 온전히 믿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노자와 장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이론을 세워서 친구들에게 강설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은 꾸짖고 책망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롭고 기이하니 반드시 서교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伯淳聞而疑之曰 我得超人之見 而人以爲西敎 則西敎必有妙理 遂與敎友相從 數年辨論 確然信服 嚴守規誠

백순은 그들의 꾸짖는 말을 듣고 의심이 나서 이르되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 하니 그렇다면 서교에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교우들과 서로 친하게 어울리며 여러해 동안 그 교리를 판단하고 토론한 끝에 확실히 믿고 탄복하여 계명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其母亦熱心歸化 但其妻本來强悍 常望丈夫之顯達 一朝絶望 不勝 恨  辱備至 兼之族黨親友 咸加毁罵 伯淳少不撓動

그의 어머니 역시 감화되어 열심히 믿었으나 단지 그의 아내는 본래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서 항상 남편이 벼슬을 하여 이름이 높아지기만을 바라다가 하루아침에 희망이 끊어지니까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별의별 욕을 다 퍼부었습니다. 게다가 일가 친척과 친한 친구들까지 모두 그를 헐뜯고 꾸짖었으나 김백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습니다.

其母舅自來誘說 終不能得 乃曰 汝不聽吾言 當與汝絶交 伯淳曰 寧與舅氏絶交 不能與吾主絶交 於是友人莫不貽書告絶 宗族僉議別族 而伯淳晏如也

그의 외숙조차 와서 달래고 타일렀으나 끝내 어찌하지 못하여 외숙이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마땅히 너와 절교하겠다."고까지 하였으나, 백순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아저씨와 절교를 할지언정 우리 주님과는 절교할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친구들이 모두 편지를 보내 절교를 통고하지 않는 이 없었고, 종중회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축출하였지마는 김백순은 태연하기만 하였습니다.




常曰 我自認主以來 心界不動如山 與健淳同日被斬 年三十二歲 奉敎不久 故未受洗 無聖名 李喜英路加 若撤法之密友 先居驪州 後移都下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나는 천주님이 계심을 안 이래 내 마음이 태산과 같아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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