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무예 자료     사학 자료     이미지 자료     기사모음     박사논문

 [고려] 고려 무신집권기 사병세력과 병권의 관계

 이름 : 

(2009-09-06 22:25:05, 4590회 읽음)

고려 무신집권기 사병세력과 병권의 관계

                                                 발제자 : 최형국
                                              

1. 머 리 말
2. 집권무신의 중방 장악과 발병권 확보
3. 국왕과 최충헌의 타협과 병권 분장
4. 맺 음 말


1. 머 리 말

  고려 무신집권기는 군사력을 토대로 정권이 성립되고 교체된 시기이다. 따라서 무인정권의 배후에는 일정한 군사집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 무신정권 수립과 이후 계속되는 권력다툼 및 정치 갈등은 私兵을 거느리고 있는 무신과 국가의 正規軍을 움직이는 병권의 중심인 국왕과의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무신란 후 私兵勢力의 대두는 새로운 사회변화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사병은 특정한 개인에 의해 사사로이 양성된 군사들로써 정부의 통제 밖에 있던 병력이다. 이들 사병은 그 주인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세력화되어 무인집권기 내내 종속 하였다.

  무신집권기 사병에 대해서는 몇 편의 연구가 이루어져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연구의 대부분이 사병집단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무인집권기의 정치사적 흐름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사병세력이 대두함에 따라 政治勢力의 變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병권의 향방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무신란 후 사병세력이 그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감에 따라 종래 병권을 쥐고 있던 국왕의 실제적 관행이 깨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국왕과 집권무신은 일정한 현실적 타협을 통해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보전시켜 나갔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 같은 관점에서 무신란 후 사병세력의 대두문제를 병권의 소재와 행사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다루려는 중심내용은 執權武臣의 重房 장악과 發兵權 확보, 國王과 崔忠獻의 타협과 兵權 分掌에 대해서이다.

2. 執權武臣의 重房 장악과 發兵權 확보

  집권무신들이 사병세력을 휘하에 두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당시 사병세력만으로 곧 바로 권력을 장악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兵權을 장악하는 일이 중요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집권무신들은 사병세력을 토대로 병권의 행사와 관련된 어떤 기구를 장악하는데 주력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사료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① 毅明以降 武臣用事 重房之權益重
(≪高麗史≫ 77 百官志 西班 序)

의종․명종시대 이래로 무관이 용사하여 중방의 권한이 더욱 중하게 되었다
(의종, 명종(毅明) 이후에 무관들이 정권을 좌우하게 되자 중방의 권한이 더욱 커졌다.)

② 軍國權柄 屬之重房者 實由義方之力
(≪高麗史≫ 128 列傳 李義方)
군국의 권병이 중방에 속하게 된 것은 실로 이의방의 힘이다(≪고려사≫ 128 열전 이의방).

  위의 사료들은 모두 무신란 이후에 권력의 핵심기구가 바로 重房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중방은‘軍國의 兵權’과 직접 관련된 일을 처리한 기구였던 것이다. 원래 고려의 관료체계는 문반, 무반 각기 독자적인 사로를 밟아 승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정치를 담당한 문반의 최상층부는 宰臣과 樞臣이었다. 이들은 재추회의에서 국가의 주요 정책을 협의 결정하였다. 이러한 合坐體制는 고려 귀족사회의 중요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재추회의와 마찬가지로 兩府의 고관들이 합의하는 경우로서 都兵馬使, 式目都監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합좌체제 자체가 결국 문반 고위관리의 주도 아래 고려의 정치 실제가 운용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반의 고위관리가 재추회의라는 합좌제도를 지니는 것과 같이 무신의 회합기관으로서는 중방이 있었던 것이다.
  사료 ①의 기록과 같이 무신란후 중방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어 나갔다. 이제 중방은 집권무신들이 회동하면서 권력을 천단하고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본거지로 되었던 것이다. 중방이 단순한 회둔소가 아닌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로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집권무신들이 국왕에 오를 수 없었던 현실에서 관심은 자연 ‘軍國의 權柄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이의방이 군국의 권병을 중방에 속하게 한 것도 이러한 현실적 여건에서 취해진 것이었다고 믿어진다. 이제 집권무신이 군국의 권병을 장악하기 위해선 합좌제적인 성격을 띤 중방에서 실세의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집권무신으로서 중방 소속의 무인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實勢를 차지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兵權의 확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병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 두는 일이야말로 집권을 보장하는 관건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시대 병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다음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先是, 臺省復上交章曰:
兵權不可散而無統, 亦不可偏而獨專。 散而無統, 則其威分, 偏而獨專, 則其權移。 威分於人, 權移於下, 其生亂一也。 臣等前日上章, 請罷私兵, 屬三軍府, 以防威分之弊, 卽蒙兪允, 衆心欣慶。 然以重兵歸之一府, 則偏專權移之患, 不可不預爲之防也。 臣等謹按, 古者兵法之設, 有發命發兵掌兵之差。 發命者, 宰相也; 發兵者, 居中摠制也; 掌兵者, 受命以行者也。 宰相非稟君上之命, 不得發命; 摠制非有宰相之命, 不得發遣; 掌兵者非有摠制之命, 不得以行。 上下相維, 體統不亂, 雖欲爲變, 莫能自動, 此定法也。 前朝舊制, 取法唐、宋, 省宰掌邦治, 軍國之事, 無所不統, 卽發命者也; 中樞掌軍機, 卽摠制發兵者也; 諸衛上、大將軍已下, 專掌府兵, 以當宿衛, 有變小則遣郞中郞將, 大則遣將軍已上, 出而應敵, 未嘗敗衄, 此則掌兵者也。
(≪定宗實錄≫卷 4, 2年 4月 辛丑-문하 시랑찬성사 하윤에게 명하여 관제를 다시 정하다)


이보다 앞서 대성(臺省)에서 다시 교장(交章)을 올려 말하였다.

[해석] 예전에 병법의 설치에는 명령을 발하고 군사를 발하고 군사를 맡는 차등이 있었습니다. 명령을 발하는 자는 재상이요, 군사를 발하는 자는 중간에 있는 총제(摠制)이요, 군사를 맡는 자는 명령을 받아서 행하는 자였습니다. 재상은 임금의 명령을 품(稟)한 것이 아니면 명령을 발하지 못하고, 총제는 재상의 명령이 있는 때가 아니면 군사를 발하지 못하고, 군사를 맡은 자는 총제의 명령이 있는 때가 아니면 행(行)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하(上下)가 서로 유지(維持)하여 체통이 문란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변을 꾸미고자 하더라도 능히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정해진 법이었습니다. 고려의 옛 제도는 당(唐)나라·송(宋)나라를 법받았는데, 성재(省宰)는 나라의 정치와 군국(軍國)의 일을 맡아서 통속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므로 곧 명령을 발하는 자이요, 중추(中樞)는 군기(軍機)를 맡았으므로 곧 총제(摠制)하여 군사를 발하는 자이요, 여러 위(衛)의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 이하는 부병(府兵)을 전장(專掌)하여 숙위(宿衛)를 맡아서, 변이 있을 때 작으면 낭중(郞中)·낭장(郞將)을 보내고, 크면 장군(將軍) 이상을 보내어 적(敵)에 대응케 해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군사를 맡는 자입니다.(조선왕조실록 中 정종실록 2년 4월 辛丑 부분)

  위 사료의 주요 내용은 옛날에 병법을 만들 때에는 發命∙發兵, 그리고 掌兵을 구별하였다는 것이다. 발명권은 재상에게 있었으며, 發兵權은 居中摠制에 있었고, 掌兵權은 명령을 받아 시행하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각 병권의 소재자가 병권 행사를 독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재상의 발명권은 군주의 명이 아니면 발동될 수 없고, (거중)총제의 발병권은 재상의 명이 아니면 역시 발동될 수 없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의 장병권도 거중총제의 명이 아니면 발동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 고려(前朝)에서의 각 병권의 행사자가 누구인가를 언급하고 있다. 발명권은 邦治軍國의 일을 관장하는 聖宰가, 발병권은 軍機를 관장하는 중추원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병권은 제위의 상∙대장군에게 주어져 있어, 작은 변란에는 낭장과 중낭장을, 큰 변란에는 장군 이상을 출동시켜 대응토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의 군령체계는 發命∙發兵∙掌兵權者의 상하관계에 의해 규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정치적으로는 발병권이 장병권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병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장수들의 병력사용은 먼저 군사들이 징발되어 그들에게 배속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병자는 군령체계상 장병자를 부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발병권이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무인집권기는 시기의 성격상 발병권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집권무신들은 공적으로는 상장군직을 차지하고, 私的으로는 휘하에 사병세력을 두고 중방에 출입한 실례를 보아 그러하다. 상장군직으로서 중방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면서 동시에 사적인 사병세력을 보유함으로써 중방소속의 무장들 가운데 실제로 부각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일인 專權體制를 구축할 수 없는 입장에서 합좌체제인 중방에서의 결정사항은 집권의 명분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좌체제이긴 하지만 중방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집권 무신 자신들이 생각하는 범위와 방향으로 결정되고 처리될 수 있다면, 집권무신들은 그 역할을 점차 강화시켜 갔을 것이다.

  그래서 사병세력을 보유한 집권무신들은 권력을 장악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중방을 장악하는 일에 주력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중방이 수행하는 일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방을 통해 병권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권하였다고 하여 병권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왕을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들이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3. 國王과 崔忠獻의 타협과 兵權 分掌

  집권무신들이 중방을 강화시킨 것은 병권을 확보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중방 소속의 무인들 가운데 실세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방을 통해 확보한 병권은 집권체제 구축을 위해 행사되었다. 이른바 ‘최씨정권시대’를 열었던 최충헌의 집권과 전권체제의 확립도 이렇게 확보한 병권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최충헌은 어떠한 방식으로 병권행사를 하였을까. 최충헌의 위치가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하여 정부의 중앙군인 2군 6위의 통수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의문스러운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최충헌의 집권은 명종 26년(1197)에 이의민과 그의 추종세력들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의 정권은 최이, 최항, 최의에게 승계되어 4대 62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처럼 세습적으로 정권을 승계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최씨가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먼저 최충헌, 최충수 형제가 어떻게 집권하였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①李義旼子將軍至榮奪忠粹家鵓鴿忠粹請還言甚悖至榮怒令家僮縛之忠粹曰 非將軍手縛誰敢縛我   至榮壯而釋之忠粹卽告忠獻曰: “義旼四父子實爲國賊我欲斬之何如?” 忠獻難之忠粹曰: “吾志已決不可中止 忠獻乃然之.

②會王幸普濟寺義旼稱疾不扈從潛往彌陁山別墅忠獻與忠粹及其甥隊正朴晉材族人盧碩崇等袖刃至別墅門外候之義旼將還出門欲跨馬忠粹突入擊之不中忠獻直前斬之從者數十人股弁皆潰. 使碩崇持首馳入京梟于市觀者驚噪聲振都下. 扈從者聞變潛遁王亦趣駕還宮

③忠獻忠粹馳馬露刃至十字街見監行領將軍白存儒告以故存儒樂從之召集將士忠獻忠粹率兵詣宮門奏曰 賊臣義旼曾負弑逆之罪虐害生民窺覘大寶臣等疾視久矣今爲國家討之但恐事泄不敢請命 死罪死罪 王慰諭之

④仍請與大將軍李景儒崔文淸等討餘黨遂與之坐市街召募壯士響應於是諸衛將卒亦皆畢集膝行聽命莫敢仰視乃閉城門分捕支黨悉獲之  (≪高麗史≫ 129 列傳 崔忠獻)

[해석]
① 이의민의 아들 장군 이지영이 최충수 집 비둘기를 빼앗았는데 최충수가 그 반환을 요구하면서 언사가 심히 불공하였으므로 이지영이 노하여 가동들을 시켜서 결박하라 하였더니 최충수가 말하기를  “장군이 손수 나를 결박한다면 몰라도 누가 감히 나를 결박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지영이 장히 여겨서 놓아 주었더니 최충수는 즉시로 최충헌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의민 4부자(父子)는 실로 국적(國賊)이니 내가 죽이고자 하는데 어떻소?”라고 하였으므로 최충헌이 난색을 보이니 최충수가 또 말하기를  “저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그만 둘 수 없소”라고 하였다. 그때야 최충헌도 찬동했다.  ②그런데 때마침 왕이 보제사(普濟寺)로 갔는데 이의민은 병을 칭탁하고 호종(扈從)치 않고 남모르게 미타산(彌陀山) 별장으로 나갔으므로 최충헌은 최충수와 그의 생질 대정 박진재(朴晉材), 친척인 노석숭(盧碩崇) 등과 함께 칼을 감추어 가지고 별장문 밖에 가서 엿보고 있다가 이의민이 돌아오려고 문을 나와 말에 올라 타려 할 때 최충수가 뛰어들어가서 쳤으나 맞지 않아서 최충헌이 곧바로 앞으로 나가서 이의민을 베어 죽이니 이의민의 종자(從者) 수십 명은 모두 다 벌벌 떨면서 흩어졌다.  최충헌이 노석숭에게 이의민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서울로 달려 들어와서 시가에 효수하게 하였더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서 떠드는 소리가 서울 안을 진동했다.  호종하던 자는 사변을 듣고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으며 왕은 수레를 재촉해서 환궁했다.  ③최충헌과 최충수는 칼을 뽑아 든 채 말을 달려 십자가에 이르러 감행령(監行領)에서 장군 백존유(白存儒)를 만나 보고 사유를 이야기했더니 백존유는 즐겨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하고 장병(將兵)들을 소집하여 주었다. 최충헌과 최충수가 군사를 인솔하고 궁문으로 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역적 이의민은 일찍이 임금을 해친 대역의 죄를 지고 있으며 백성들을 포악하게 해치고 왕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이미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여 왔으며 지금 나라를 위해서 처치했는데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어명을 청하지 않았는바 백 번 죽을 죄를 졌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④ 최충헌은 이어 대장군 이경유(李景儒), 최문청(崔文淸) 등과 함께 잔당의 소탕을 청하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시가(市街)로 나와서 자리잡고 초모하였더니 장사(壯士)들이 이에 호응하여 나섰다. 이렇게 되니 각 위(衛)의 장졸들도 모두 모여 들어서 무릎을 꿇고 명령을 들었으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제는 성문을 닫고 각처에서 이의민의 일당을 수색해서 전부 체포했다

  
  최충헌 형제의 이의민 제거는 “명종 26년 비둘기 쟁탈을 둘러싼 이의민의 아들 지영과 최충헌의 동생 충수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①).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9년 전에 최충헌은 이의민 정권에 불만을 품을 만한 일을 겪었다. 이의민 집권기인 명종 17년(1187)에 慶尙晉州道의 按察使織에 있던 최충헌이 파면당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 정권을 곧 바로 거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를 뒷받침할 군사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최충수가 비둘기사건을 빌미로 하여 이의민을 제거하려 했을 때 최충헌이 이를 어렵게 여겼던 것도 군사력이었다.

최충헌의 배후에는 어떤 군사력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위의 기록을 보면, 최충헌 형제의 가장 핵심세력은 사병세력이었다. 그 외에 族人集團이 있었다. 최충헌의 족인으로서 이의민 제거에 가담한 사람은 박진재와 노석숭 등이었다. 특히 박진재는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문객만도 상당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박진재도 그의 문객을 이끌고 최충헌에 협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거기에 경군을 동원하였던 점이 눈에 띈다. 자신의 군사력만으론 이의민 세력을 제거하는데 한계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을 제거한 뒤 곧 바로 監行領將軍 白存儒를 통해 將士를 소집하고 (③),제위의 장졸을 동원하여 이의민의 지당을 체포하였던 것이다(④). 최충헌의 중앙군 동원은 大將軍 李景儒∙崔文淸 등과 함께 국왕에게 청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국왕을 통한 경군 동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는 “시가에 앉아 불러 모집하니 將士가 響應하였다”는 대목이나 “이에 諸衛의 將卒도 또한 다 모여…”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장사”나 “제위군사”는 모두 常備軍(Standing Army)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렇듯 최충헌은 중앙군인 ‘제위의 장졸’을 동원하는 데는 국왕의 發命權을 받들어 행사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고려의 전통적인 통수체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居中摠制’의 위치에서 병력동원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최충헌은 집권과정부터 국왕에게는 발명권을, 자신은 행사하여 병권을 分掌하였다고 할 수 있다.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을 제거하는데 있어 군사력 못지않게 戰術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의민의 제거시기를 명종이 보제사에 행차시 이의민이 호종치 않고 미타산의 별장으로 갔을 때로 택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②). 집권무신 이의민이 국왕을 호종할 때로 택한다면 친위군을 비롯한 제위군사들의 반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최충헌은 이 점을 고려하여 이의민이 친위군졸을 거느릴 수 없을 때를 거세의 시기로 택한 것 같다.
최충헌은 그의 사병집단은 물론이거니와 박진재 등의 족인집단과 경군을 동원하여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의민 제거 직후에는 그의 집권에 반기를 든 사건이 있었다. “평장사 권절평, 손석 과 상장군 길인 등이 거병을 꾀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이처럼 최충헌의 집권에 반기를 든 사건에 대해 최충헌은 어떻게 병권을 행사했을까. 아래 기록에 주목하기로 하자.

① (崔)忠獻等坐市幕分捕節平碩及將軍權允柳森栢御史中丞崔赫尹等殺之. 時吉仁在壽昌宮聞變急卽與將軍兪光朴公襲等擅出武庫兵仗以授禁軍及宦官奴隷凡千餘人諭曰: “今忠獻作亂多殺無辜禍將及汝宜各戮力以立大功.” 乃率衆出宮門踰沙嶺向市街忠獻等勒兵迎戰 (≪고려사≫ 129 열전 최충헌)
② (崔)忠獻又殺上將軍周光美大將軍金愈信權衍等 (≪고려사≫ 129 열전 최충헌)

[해석]
①최충헌 등이 시가의 군막(軍幕)에 앉아서 장졸을 각처로 파견하여 권절평, 손석, 장군 권윤(權允), 유삼상(劉森相), 어사 중승(御史中丞) 최혁윤(崔赫尹) 등을 체포해다가 죽였다.  그때 길인은 수창궁에서 사변을 듣고 장군 유광(兪光), 박공습(朴公襲) 등과 함께 무기 창고의 병장기를 무단 출고해서 금군, 환관(宦官), 노예 등 약 1천여 명에 나누어 주면서 설유하기를  “지금 최충헌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있으니 앞으로 화가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각자는 힘을 다하여 큰 공을 세우라”라고 하고 궁문을 나서서 모래재(沙嶺)를 넘어 시가로 향하였다.  최충헌 등은 군사를 내어 맞받아 싸웠다
②최충헌은 또 상장군 주광미(周光美), 대장군 김유신(金愈信), 권연(權衍) 등을 죽였다.

  上將軍 吉仁은 동료들이 최충헌에게 붙잡혀 처형되었음을 듣고, 장군 유광과 박공습 등이 함께 무기창고의 병기를 금군∙환신∙노예들 천여명에게 지급하였다(①). 이들 상장군, 장군들은 경군에 소속한 장교들이었다고 보이는데, 모두 이의민을 추종하던 자들이었다. 이들의 반기에 대해 최충헌은 명종의 허락을 받아 이의민의 잔여세력을 남김없이 제거하였다. 국왕의 권위를 받들어 발병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때 자신의 집권에 동조하지 않는 경군의 최고 지휘관급들인 상․대장군들을 제거하였다(②). 국왕의 통수체계를 약화시키려 했던 면도 아울러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 당시 왕의 주변상황에 대해 고려사 권 129열전 최충헌에는 “왕의 좌우가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오직 小君 및 宮奴 몇 사람만이 모시고 울뿐이었다”고 하였다.

  최충헌의 병권행사는 일인전권체제를 세우면서 또 한 차례 있었다. 동생 최충수를 제거하면서였다. 최충수의 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었다. 사병세력을 배후에 두고있던 이들 형제의 세력은 점차 무력충돌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형제는 어떠한 이유로 충돌하였으며, 이때 최충헌은 어떠한 방식으로 병권을 행사하였을까. 아래의 사료가 이들 형제가 충돌하게 된 전모를 알려준다.

①又告忠獻忠獻泣謂其衆曰:“忠粹欲以女配東宮者無他欲以圖不軌也明朝欲掃吾徒事已急矣計將安出?”衆曰:“請與朴晉材謀.”忠獻卽召晉材及躍珍碩崇告之晉材曰: “公兄弟均吾舅也有何厚薄! 然國家安危係此一擧與其助弟而爲逆孰若右兄而從順! 且大義滅親我當與躍珍碩崇等率衆助之.” 忠獻大悅
②夜三鼓忠獻率兵千餘由高達坂至廣化門告門者曰: “忠粹明朝欲作亂吾將衛社稷亟以此達王所!” 門者以聞王大驚卽命開門納之使屯於毬庭又發武庫兵仗授禁軍以備諸衛將軍亦率兵爭赴
③忠粹聞之懼謂其衆曰: “以弟攻兄是謂悖德吾欲奉母入毬庭見兄乞罪汝等宜各遁去.” 將軍吳淑庇俊存深朴挺夫等曰: “僕等所以遊公之門者以公有盖世之氣今反怯懦如此是族僕等也請一戰以決雌雄.” 忠粹許之 (≪고려사≫ 129 열전 최충헌)
[해석]
①또 최충헌에게 고하니 최충헌은 그 부하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최충수가 자기 딸로 동궁의 배필을 삼으려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임금자리를 엿보려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우리 사람을 모조리 없애려 하니 사태가 급박한데 그 대책을 어떻게 취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박진재를 청해서 토의하자고 말하였으므로 최충헌은 즉시 박진재, 김약진, 노석숭들을 불러다가 일의 경위를 고하니 박진재가 말하기를  “당신의 형제는 다 같이 나의 외숙인데 무슨 정리상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국가의 운명이 이번 일에 달렸으니 아우를 도와 주고 역적이 되는 것이 어찌 형을 도와 육순(六順)의 도리를 지키는 것만 하겠는가! 그리고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 하였으니 나는 마땅히 김약진, 노석숭 등과 함께 군사를 인솔하고 조력하겠다”라고 하였으므로 최충헌은 크게 기뻐했다.  ② 밤 3경에 최충헌은 1천여 명의 병정을 거느리고 고달고개(高達坡)를 경유하여 광화문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고하기를  “내일 아침에 최충수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므로 내가 사직(社稷)을 보위코자 하니 속히 왕 앞에 전달하라!”라고 하였다. 문지기가 보고하니 왕은 대경하여 즉시 문을 열어 맞아들여 구정(毬庭)에 주둔시키게 하였으며 또 무기고의 병장기를 금군에게 주어 경비하게 하였다. 각 위(衛) 장군들도 군사를 영솔하고 앞을 다투어서 달아 나왔다.

③최충수가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느끼며 그의 도당들에게 말하기를  “아우로서 형을 공격하는 것은 도덕에 어그러지는 일이다. 내가 모친을 모시고 구정으로 들어가서 형 앞에서 사죄하겠으니 너희들은 각각 도망쳐 떠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더니 장군 오숙비(吳淑庇), 준존심(俊存深), 박정부(朴挺夫)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평소에 당신의 문객으로 지내 온 것은 당신의 영용한 기개(氣慨)를 사모한 까닭인데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이처럼 비겁하니 이렇게 되면 우리들을 멸족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한 번 싸워 보고 승부를 다투기로 해주시오”라고 하니 충수도 승낙하였다.

  최충헌이 그의 동생 충수를 제거하게 된 계기는, 충수가 딸을 동궁의 배필로 삼으려 한 데에 있었다. 그런데 충수의 이러한 행위를 충헌은 불궤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최충헌은 충수가 내일 아침 곧 자신의 무리를 제거하기 위해 들이닥칠 것이라고 하여 계책을 논의하였다. 먼저 박진재 및 김약진과 오석숭 등을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합의하였다(①). 이들은 모두 최씨형제들이 이의민과 그 추종세력들을 제거할 때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인물들이다. 특히 박진재는 휘하에 많은 문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박진재도 최충수보다는 최충헌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좋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여겨진다.

최충헌의 충수를 제거하기 위한 군사행동은 야간에 감행되었다. 이때 그는 박진재를 비롯한 族人集團을 동원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국왕의 병권을 이용하여 경군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즉 국왕에게 발명권을 행사하게끔 하고 자신은‘居中摠制’의 위치에서 발병권을 행사한 것이다. 최충헌이 이처럼 국왕을 통하여 경군을 동원하였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군사적인 면에서 절대적인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최충수와 그 추종 세력들을 제거하는데 대한 정당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료 ②에 보이듯이, 최충헌이 광화문에 이르러 먼저 감문위 소속의 군사에게 사태의 성격과 급박함을 국왕에게 알리게 한 것도 결국 국왕의 병권을 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국왕의 경군소집령이 발동됨에 따라 먼저 무기고에서 병기를 금군에게 지급하였고, 이를 위임받은 최충헌이 발명권을 행사하여 제위의 장군들도 군사를 거느리고 다투어 왔던 것이다(②). 그러니까 재상의(국왕의 명을 받아 발동함) 발명권 → 거중총제(여기서는 최충헌)의 발병권 → 제위장군의 장병권이 군통수체계에 따라 행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최충헌은 통수체계를 벗어나지 않고 병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최충수의 군사력은 문객뿐이었다. 사료 ③을 볼 때, 최충수는 세력의 열세를 실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충수가 최충헌에게 잘못을 빌겠다는 뜻을 그의 무리들에게 알리고, 또 도망가라고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충수의 문객인 장군 오숙비, 준존심, 박정부 등이 일전을 하자고 함으로써, 두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전투의 결과는 최충헌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자신의 사병뿐 아니라 박진재와 그의 문객들과 정부군인 경군을 동원한 최충헌의 군사력은 최충수와 그 문객들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최충헌은 집권과 일인독재정치로의 구축과정에서 군사적 기반의 강화를 실감하였던 것 같다. 사병세력을 보다 정예화시킬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병세력의 정예화는 결국 경군의 약체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실제 최씨집정무인들이 경군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지 알아보자.


①忠獻嘗自謂國富兵强每有邊報輒罵曰: “何以小事煩驛騎驚朝廷!” 輒流告者邊將解体曰: “必待敵兵陷兩三城然後乃可飛報.” 至是契丹兵入寇京城無備人情恟懼皆怨忠獻. (≪고려사≫ 129 열전 최충헌)
②時遣將禦契丹兵驍勇者皆忠獻父子門客官軍羸弱不可用 (≪고려사≫ 129 열전 최충헌)
③忠獻閱家兵自左梗里至右梗里作隊數重連亘二三里槍竿懸銀甁或三或四誇示國人以募兵  (≪고려사≫ 129 열전 최충헌)

①최충헌은 일찍이 나라가 부유하고 병력이 강대하다고 자인하고 변방에서 적의 침입을 급보할 때마다 꾸짖어 말하기를  “무슨 사소한 사건을 가지고 역마를 괴롭히고 조정을 놀라게 하느냐!”하면서 보고하러 온 사람을 귀양 보냈으므로 변방에서 경비하는 장수들의 마음이 모두 이반하여 말하기를  “그럴진대 적병이 2∼3곳의 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기다려서 급보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②  그런데 이때에 와서 거란의 군사가 침공해 오니 서울에는 아무런 방비가 없어서 인심이 흉흉해졌으며 모두 최충헌을 원망했다
③그때 장수들을 파견하여 거란병의 침략을 방어하였는데 용맹하고 쓸 만한 사람들은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이었으며 관군이란 약질로 쓸모가 없었다. 그때 최충헌은 가병(家兵)을 열병하였는데 좌경리(左梗里)로부터 우경리(右梗里)에 이르는 어건에 몇 겹으로 대열을 편성했는바 그 길이가 2∼3리나 되었다. 그리고 창대에다가 은병을 3개, 혹은 4개씩 달아 매어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보이면서 병정을 모집했다.

사료 ①은 최충헌이 거란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은 일로 역마를 번거롭게 하고 조정을 놀라게 한다고 하여 귀양하였다는 것이다. 최충헌의 조치는 변방 장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근무자세를 이완시켰다고 보여진다. 그 결과 거란병이 침입하였는데 경성을 방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①). 휘하에 정예화된 사병으로써 세력을 구축하는데 주력하는 일에 대부분의 일반군졸을 차출하여 썼기 때문이었다. 그 군졸은 다름아닌 경군에 속한 군졸이었던 것이다.
경군 가운데 특히 힘있고 용감한 군사들만 최충헌의 사병으로 차출되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사료 ②에 보이듯이, 거란병의 침입을 방어하려 했을 때 효용자, 즉 힘있고 용감한 자는 모두 충헌의 문객이고 관군은 파리하고 약해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 말은 최충헌의 사병확보방식과 경군의 약체화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최충헌은 군사적 경험이 있는 경군에서 뿐만 아니라, 모병을 통해서도 사적 군사력을 넓혀 나갔다(③).

최충헌이 이처럼 사병을 강화시키면서 경군을 축소시켜 나간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경군을 축소화시켜 국왕에게 있는 발명권마저 자신에 귀속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한마디로 최충헌 정권은 집권과 독재구축에 국왕과 경군을 이용한 후,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그 가운데서 정예화 된 병력으로써 사병세력을 확충해 나갔던 것이다. 그 결과 국가방위에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몽고가 침략한 고종 18년에는, 집권무신 최이는 건재하였지만, 수도 개경은 무방비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최이도 집권초기부터 경군의 병력충원을 원천적으로 막았던 인물이다. 국가방위보다는 자신의 정권연명을 보다 강구했다는 점에서 최충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음의 기사가 이러한 사정을 전해준다.

28쪽 한문
怡兵自選地橋至崇仁門用旗鼔習戰門客有請從官軍者卽流遠島 (≪고려사≫ 129 열전 최충헌 부 이)
최이의 가병은 선지교(選地橋)에서 숭인문(崇仁門)까지의 사이에서 깃발과 북을 가지고 전투 연습을 했다. 그리고 문객 중에서 관군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즉석에서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최충헌 부자는 문객 가운데 관군에 종군하기를 청한 자가 있으면 즉시 원도로 귀양보냈다는 것이다. 힘있고 용감한 자를 문객으로 확보하였던 그들이 다시 관군으로의 편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객관리는 최충헌에 이어 최이대에도 계속되었다.
이렇듯 최씨가의 병권에 대한 입장은 가능한 한 그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충헌에 이어 집권한 최우는 병권을 거의 독점 행사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는 고종 8년 남방 주군의 보승․정용군을 징발하여 요해처에 성을 쌓도록 하는 한편 삼군을 내어 몽병을 막도록 하였던 것이다.
병권을 독점하기 시작한 최우는 삼별초라는 또다른 공병 아닌 공병을 설치하여 조직화시켜 나갔다. 별초군의 창설과 그 성격을 알려주는 아래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崔瑀憂國中多盜 聚勇士 每夜巡行 禁暴 因名夜別抄. 及盜起諸道 分遣別抄以捕之其軍 甚衆遂分爲左右. 又以國人自 蒙古逃還者爲一部號神義 是爲三別抄. 權臣執柄 以爲爪牙 厚其俸祿 或施私惠又籍罪人之財而給之故 權臣頤指氣使爭先効力. 金浚之誅崔竩林衍之誅金浚松禮之誅惟茂皆籍其力 (≪고려사≫ 81 병지 1 원종 11년 5월)
[해석]
최우가 나라에 도적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밤 순찰을 돌며 폭도를 막게 하였으니 이름하여 ‘야별초’였다.
도적이 여러도에서 일어나 야별초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니 군대의 수가 많아저 좌우로 나누었다(좌별초, 우별초)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고 부르니 삼별초가 되었다.
권신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신의 앞잡이(조과-손톱과 이빨같은 신하)로 만들기 위해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풀었으며 또한 죄인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나누어주기도 했다.
김준이 최의를, 임연이 김준을, 송송례가 임유무를 제거하는데 모두 그 힘을 빌렸다.

원종 11년 5월에 삼별초(三別抄)를 해산시켰다. 이전에 최우(崔瑀)가 국내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서 밤마다 순행시켜 폭행을 금지하였는데 이것을 “야별초(夜別抄)”라 불렀다. 그 후에 도적이 각 도에서 일어나자 별초군(別抄)을 각지에 나누어 보내 이를 잡게 하였는데 이 별초군의 수가 매우 많아져서 나중에는 좌우 별초로 나누게 되었다. 또 고려 사람으로서 몽고에서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을 모아 한 개 부대를 조직하여 신의군(神義軍)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삼별초(三別抄)라고 하였다. 권세 있는 신하들이 정권을 잡자 그들을 자기들의 조아(爪牙-호위자)로 만들고 그들에게 봉급을 후하게 하였거나 사사로 혜택을 주고 또 죄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누어 주었으므로 그들은 권력있는 신하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그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앞을 다투어 힘써 일하였다. 김준(金浚)이 최의를 죽인 것과 임연(林衍)이 김준(金浚)을 죽인 것이거나 (송) 송례(‘宋’松禮)가 유무(惟茂)를 죽인 것들이 모두 이 삼별초의 힘을 빌어서 한 것이다.



삼별초의 창설은 최우가 나라 안에 盜가 많음을 걱정하여 용사를 모아 대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야별초는 국가의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도를 소탕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면에서 분명 공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권신의 사병으로 운용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별초가 점차 많아져서 좌∙우별초 삼아 삼별초가 되었다는 위의 기록도 다시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기록대로라면, 야별초가 매우 많아진 것은 盜가 더욱 극성을 부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도둑을 소탕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야별초의 창설이 몽고의 침략이 있음 고종 19년 (1232)에서 크게 앞서지 않은 시기에 있었다면, 이러한 현상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쟁시기에 공병적인 군대가 도를 잡아들일 목적으로 부대의 규모가 좌∙우별초로 나누어야 할 만큼 커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인 것이다.

야별초의 창설은 도가 많았던 시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의 증가는 분명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씨 정권이 야별초를 공적인 성격을 띤 직업군으로 관리한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야별초에게는 봉록을 후하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은혜까지 베풀어 준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에게서 몰수한 재산까지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삼별초의 처우방식은, 봉록 이외에는 최씨가의 사사로운 조치로 이루어지는 것이 있었다. 사사로운 조치는 제도적으로 법제화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최우는 삼별초를 봉록을 지급받는 ‘전문적인 급료병’에 편제시켜 놓고 사적으로는 이를 이용하였다. 야별초의 지휘관들이 최씨 정권과 밀착된 인물이었다는 사실도 야별초의 증강이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별초군은 최이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항몽을 수행하는 주력군으로서 활용되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최충헌의 병권행사는 국왕과의 현실적인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발병권을 행사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왕의 발명권을 받들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최충헌은 고려의 군통수체계인 재상(국왕의 명을 받아서 발동함)의 발명권, 거중총제(필자 주 ; 최충헌이 행사함)의 발병권, 제장의 장병권을 무너뜨리지 않고 병권을 행사하였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이러한 병권행사방식은 최우대에 와서 깨어졌다. 최우는 대내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면서 병권의 모든 것을 장악하여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5. 맺 음 말

이제까지 무신란 후 사병세력의 대두와 병권의 향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얻어진 내용을 요악하여 맺음말로 삼을까 한다.

첫 번째는 집권무신의 중방 장악과 발병권 확보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집권무신들은 한결같이 중방과 장악에 주력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병권을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이럴 목적으로 발병권, 즉 병력동원권을 중방에서 행사하도록 하였다. 중방은 상․대장군의 합좌체제로 운영된 기구였다. 중방에 발병권을 부여한 것은 집권무신이 일인독재체제로 끌고 가기는 어려운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집권무신은 중방에서 실세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집권무신들이 중방에서 실세로 커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휘하의 사병세력으로써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집권무신들은 이제 중방의 발병권을 한껏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운용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권의 최고통수의 위치에 있었던 국왕의 발명권까지는 잠식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국왕과 최충헌의 타협과 병권 분장을 살펴본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국왕은 최충헌과 갈등, 대립의 위치에 놓여 있으면서 현실적으로는 타협을 통해 존속해 나갔다. 국왕의 교체가 잦았던 최충헌 집권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른 국왕들은 그에게 발병권을 위임해 주었던 반면에 최충헌은 국왕에게 발명권을 주어 국왕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최충헌의 병력을 동원할 때면 반드시 국왕의 승인을 얻은 후 군사행동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충헌은 정적을 제거하는데 공식적으로 경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최충헌은 고려전기의 군통수체계인 발명권(국왕의 명을 받들어 재상이 발동함) → 발병권 → 장병권을 무너뜨리지 않고 병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중총제자에게 주어졌던 발병권을 최충헌이 독차지 했다는 점에서 일단 제도적 관행은 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왕과 집권무신간의 타협적 관계도 최씨 정권이 안정의 궤도에 들어서면서 점차 깨어져 갔다. 최우는 국왕에게 있던 발명권을 무시함으로써 일인전권체제를 굳혀 나갔다. 야별초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을 창설한 자가 바로 최우였던 점에서도 그의 병권행사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후 대몽전쟁이 격화되면서 국왕은 상실한 병권을 대외정세를 이용하여 회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말선초의 사병/ 전철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1999 석사논문

高麗武臣報權期의 私兵集團;都房과 馬別秒를 중심으로/ 이관배 高麗大 敎育大學院 1989 석사

武臣執政期 의 私兵集團 과 그 執權化 ./ 李龍植 경북대 대학원 1984 석사논문

麗末鮮初 軍事訓鍊體系의 改編 / 尹薰杓 2004 軍史. 제53호 (2004. 12), pp.181-217 國防部軍史編纂硏究所

高麗末 朝鮮初 私兵 硏究 / 유재리 1997 한국학연구 7('97.12) pp.173-222 숙명여자대학교한국학연구센터

高麗 武臣執權期 私兵의 성격 / 오영선 1996 軍史 33('96.12) pp.63-86 國防軍史硏究所

高麗 武人執權期 私兵勢力 擡頭와 兵權의 向方 / 金大中 1993 軍史 26('93.6) pp.1-34 國防軍史硏究所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읽음

72

  [고구려] 고구려벽화무덤에 나타난 깃발(旗)연구

고구려_깃발.hwp

2006/09/04

5918

71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 원문 발표문

광개토대왕비문_발표문.hwp

2005/11/09

5827

70

  [고대] 신화연구

단군신화_연구.hwp

2005/09/23

4729

69

  [고대] 한반도 철제무기

한반도_철제무기.hwp

2005/09/21

5033

68

  [고대사] 단군신화...

2009/09/06

4529

67

  [고려] 경군

고려경군.hwp

2005/09/21

4335

  [고려] 고려 무신집권기 사병세력과 병권의 관계

2009/09/06

4590

65

  [고려] 과거제도

고려시대_과거제.hwp

2005/09/21

4494

64

  [고려] 군역제

고려전기_군역제.hwp

2005/09/21

4599

63

  [국역] 실록 - 정조대 경장대고 관련

2010/12/08

5315

62

  [국역] 일성록 중 영화당 기사

2010/12/07

4769

61

  [논문]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대한 고찰

2007/08/22

6636

60

  [논문]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2010/03/08

4618

59

  [논문] 朝鮮太宗의王權强化策에대한考察

2007/04/22

5989

58

  [링크] 일본 고지도

2011/11/18

4124

57

  [몸] '몸'의 기호학적 고찰

2008/10/24

5316

56

  [발해] 사료를 중심으로 알아보는 발해건국

2009/09/06

5590

55

  [발해사] 발해사 관련 원문

발해사.hwp

2005/11/08

6679

 

 

1 [2][3][4]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랄라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