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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이름 : 

(2010-03-08 21:37:58, 4405회 읽음)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1
김 성 수

《연구논문》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20세기 한국의 씨알의 소리 그리고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함석헌(1901-1989)은 세계사에서는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 안에서는 그의 생애를 일컬어 "한국의 간디",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등으로 묘사해 왔다. 이러한 그의 별명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는 때로는 종교사상가였고, 때로는 구도자였고, 때로는 인권 운동가였고, 또 때로는 역사, 정치, 종교, 사회문제 등을 주제로 다방면의 글을 쓰는 이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는 한번도 공식적으로 "종교학자","언론인", "역사가" 혹은 "정치가"의 세속적 위치를 가질 수가 없었다. 분류적으로 그는 퀘이커 교도이며 기독교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삶의 방식은 세계와 한반도의 역사적 변이에 따라 끊임없이 포괄적으로 변해왔다. 그러므로 그를 다 성취한 사람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항시 추구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듯 하다.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연구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방법론을 사용했다. 첫째로 그가 남긴 방대한 저서를 1차 자료로서 철저히 꼼꼼히 분석했다. 이것은 {함석헌전집} 20권 (한길사판)과 그가 한국내와 그리고 미국과 영국 퀘이커들에게 쓴 여러 종류의 글도 포함한다. 둘째로 나는 그가 영향을 주고받은 다양한 사람들과 특히 국내의 학계, 언론계, 정치계, 종교계와 더불어 그의 친인척들과도 폭넓은 개별면담을 가졌다. 이 논문에 수록된 자료들은 그러한 공식과 비공식 면담을 통해서 수집된 자료들이다.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함석헌에 관하여 쓰거나 제작한 세미나 테잎, 잡지, 신문, 논문 등도 참고자료로 추가했다.
이 논문은 세계에서 처음 연구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박사논문임을 밝힌다. 비록 국내 대학에서 5편의 석사논문과 영국의 에섹스 대학교에서 1편의 석사논문이 (본인에 의해서) 연구된 바 있지만 그 논문들은 부분적이고 어떤 특정범위 내에서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다루는데 그쳤다.
이 논문은 함석헌의 격동의 인생여정과 그의 사상변화를 총괄적으로 전개했다. 20세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운동의 기수로서의 그의 역할과 혁신적인 그의 종교적 포용관을 분석했다. 그는 개인의 영(靈)적 완성의 추구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상호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이상주의자로서 그는 인간의 가치를 도덕의 가치로 보았다. 더불어 그는 절대자 혹은 신을 우주 위의 초월적 존재 뿐 아니라 각개인의 양심 속과 자연의 어느 곳에나 내재해 있는 존재로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이 논문은 함석헌을 동양과 서양 그리고 역사의 패자와 승자 사이에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분석하고, 어떻게 그가 그 시대의 역사적 도전에 대응하고 그의 생각을 정립해 나갔는지 평가할 것이다.

내 용

머릿말
1. 역사가의 시각으로
2. 논문의 구성
3. 논문연구의 접근방법

첫번째 마당: 20세기 한국사의 배경
이 마당의 목적
1.1. 조선왕조의 유산: 유교와 권위주의
1.2.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1.3. 부패한 기독교 정권과 무능한 정부
1.4. 군부독재와 민주주의
1.5. 요약

두번째 마당: 함석헌의 청소년기 (1901-1923)
이 마당의 목적
2.1. 평안북도에서의 "젠틀(gentle)"한 어린시절 (1901-1919)
2.2. 삼일운동에 기독청년으로 (1919-1921)
2.3. 오산학교에서 (1921-1923)

세번째 마당: 식민지 지식인으로 (1923-1945)
이 마당의 목적
3.1. 일본에서의 생활 (1923-1928)
3.2. 역사교사 그리고 {성서조선} (1928-1938)
3.3. "민족주의자", "동양적(東洋的)", 농사꾼 (1938-1945)
        "감방대학"
        우찌무라로부터의 탈출
        제국주의 아래서 평화주의자

네번째 마당: "해방된" 조국에서
이 마당의 목적
4.1. 해방 그리고 문교부장으로 (1945-1947)
4.2. "해방된" 남한에서 "광야의 소리"로 (1947-1961)
        남한의 사회-정치적 상황
        남한의 함석헌
        "이단자"
        "실패자"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
        "죄인"이 되어

다섯번째 마당: 군부정권 아래서 (1961-1989)
이 마당의 목적
5.1. 군사정변과 퀘이커리즘 (1961-1970)
        나그네 함석헌
        "전환점"
5.2. 씨 의 소리와 "죽을때까지 이걸음으로" (1970-1989)
        "강(强)을 약(弱)으로 제(制)함"
        자유를 위한 행진
        민족과 가정 사이에서

여섯번째 마당: 함석헌이 남긴 것
이 마당의 목적
6.1. 김동길과 안병무
        김동길과 그 삶의 가락
        안병무와 민중신학
6.2. 한국의 민주주의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면의 회복자
        함석헌 민주화운동의 그 성서적 연관성
6.3. 함석헌의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융합
        한국인의 종교적 전통과 특성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접근방법
        서구 기독교의 동양적 해석
        종교적 다원주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문화적 종교
        휴머니스트 함석헌

마치는 말: 함석헌 - 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후기
참고문헌 및 자료

머리말

  1. 역사가의 시각으로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가장 도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다. 상징적으로 함석헌(1901-1989)은 그의 생애의 시작을 20세기의 시작과 같이 한다. 20세기는 한국역사를 통해서 가장 급격한 사회-정치적 변동을 가져온 시기이다. 20세기 한국사는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불안이 연속된 시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시대의 다변적인 도전에  함석헌은 그의 삶전체로 응전했다.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계에선 함석헌을 전통에 매이지 않는 자유 분방한 종교 사상가로 본 듯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성사에서 그는 눈여겨 볼만한 인물중의 하나다. 특히 그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인권운동은 과소평가 돼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 함석헌을 우리는 가장 뛰어났던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인권 운동가의 한사람으로 그 역사적 위치를 정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급진적 기독교 사상가로 자리매김을 할 것인가? 그의 사상의 폭과 활동범위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 넓고 다양했었다. 그래서 어떤 한국인은 그를 일컬어 "종교사상가" 또는 "한국의 양심"이라 한 반면, 또 다른 이들은 그를 "독설가", "선동가" 혹은 "종교적 이단자" 라고도 불렀다. 함석헌이 누구였는가의 질문에 그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딱잘라 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심지어 오늘의 젊은 세대들 중엔 그의 이름 석자가 전혀 생소하다는 친구들도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그보다 "유명한" 후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의 종교적 사상과 올바른 정치를 위한 제언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엔 별로 현실에 성공적으로 적용돼  본 적이 없지만, 그의 사상은 그의 후진들 중 좀더 실제적인 사회 개혁가나, 학자, 언론인 심지어 정치인들에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이름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김동길, 안병무, 장준하, 한완상, 김찬국, 송건호, 이태영, 계훈제, 김대중 등이다.


그러면 함석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한국인들의 눈엔 그는 성경과 동양철학을 독특하고 자유롭게 풀이해 주는 박식한 '강사' 혹은 다산의 '작가'로 보였다. 또 어떤 이들에게 그는 불의한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싸우는 평화주의자'로도 보였다. 분명히 그의 종교관은 진보적 개방적이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무소속 종교인'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내가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 했을 때 나는 막대한 심적부담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그가 말하지 않고 글쓰지 않은 그의 내적신념까지도 유추해서 다룰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간디의 생애를 놓고 이야기한 네루(Jawaharlal Neru:1889-1964)의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무도 간디의 생애와 사상에 관해 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이 간디만큼 위대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함석헌에 대해서 쓰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못났으면 못난대로 나는 그의 삶과 생각에 대해서 '냉정'하고 '공정'하게 쓰기로 했다. 추남이기에 미녀를 그리워하고 유한하고 약한 인간이기에 무한하고 강한 절대자를 그리워하는 것 아닐까 ---

20세기의 한반도는 격렬한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불안 상태의 연속이었다. 금세기의 한국인들은 엄청난 사회-정치적 변화를 단시간 안에 체험해야했다. 한국인들에게 외부로부터 가해진 목조르기와 내부로부터 발생한 혼란과 몸부림은 다음과 같이 열거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압시대 (1910-45), 한국전쟁 (1950-53), 4월 혁명과 제 1 공화국 붕괴(1960), 군사정변과 군부독재 (1961-87). 일제의 가혹한 식민정책은 한국인들의 정신적 정체성을 파괴하는데 아주 '효율적'으로 적용됐다. 일제가 식민지 한국을 탄압한 예는 대영제국이 그 식민지를 탄압한 경우와는 그 잔학성이 하늘과 땅 차이다. 일제는 한국인의 언어 말살은 물론 한국인의 문화적 뿌리를 송두리째 뽑고자 창씨개명, 한국사 왜곡 작업등을 단행했다. 영국인 정치학자 데이빗 손더스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대영제국의 인도식민통치에 대한 간디의 시민 불복종운동은 1940-1년의 제 2차 세계 대전 중엔 잠잠한 편이었다. 인도 민족지도자들은 버마에 주둔해있는 일본이 대영제국을 대신해서 인도를 점령통치할 가능성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전면 중지했다."1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은 남한을 냉전시대 소련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극동지역의 '완충기' 정도로 여겼다. 첫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John R.Hodge: 1893-1963)가 남한에 처음 도착 했을때 발표한 성명서에 보면 그는 한국인을 "일본인과 비슷한 혈통의 고양이" 정도로 생각하며 정복당한 적(conquered enemies)으로 취급할 것이라고 밝혔다.2 실제로 미군정은 한국인들을 동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정복당한 적으로 다루었다. 이런 면에서 미군정은 남한에 '해방자'라기 보다는 `정복자'로서 들어왔다.3 더우기 미군정 요원과 친일파 한국인은 해방 후에도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며 남한사회 전반의 주도권을 장악해갔다. 함석헌이 한국역사를 일컬어 "등뼈가 부러진 역사" 라고 표현 한 것은 이러한 한반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적인 영향을 살펴보면 유교는 14세기이래 오늘날까지 압도적으로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좌우해 왔다. 그밖에도 샤머니즘, 불교, 도교, 기독교 등도 현재 한국인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14세기이래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시각이나, 심원하게 변했다는 관점이나 둘 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색안경으로 한국 문화사를 보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것은 19세기 이래로 한국인들은 서구기독교를 열광적으로 받아 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럼 서구기독교는 유교적 한국인들의 의식구조를 얼마나 탈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았을까?
내자신의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경험(1979-81)과 기독교 잡지 편집자로서의 경험(1985-87)에 비추어 볼 때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의 기본적인 성격은 전통적인 한국유교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다른 말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은 유교의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가치개념과 체제를 그대로 한국교회에 접목 시켰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나 소위 성직자라는 이들은 그 교회 교인들에게 가부장적 태도를 취하고 그 자신의 권위에 복종과 충성할 것을 요구함으로서 평신도들을 동등한 동료라기보다는 종속적인 하급자로 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서구 선교사의 시각엔 한국의 가족 및 가계(家系)중심주의의 유교가 교회 및 교단 중심주의의 기독교로 대치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례로 같은 지역의 같은 교단의 교회끼리도 회원확보를 위해선 격렬한 경쟁자로 변한다.4 한국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나 정치의 부정불의의 문제점에 대해선 냉담한 반면 그 교회 교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관심이 필요 이상으로 가열돼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과연 한국의 기독교인은 집단적 이기주의의 성향이나 강한 자기중심적 시야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이 필요하다고 본다.

함석헌의 한 개인의 생애와 사상은 20세기의 한국인이 정치, 사회, 문화, 종교적 혼돈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면서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어떻게 내적인 영(靈)의 세계를 꿋꿋하게 추구해 나갔는가 하는 것을 반영해준다. 다변적인 시대의 고민에 응답하기 위해서 때로 그는 시인, 역사가, 언론인의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또 때로 그는 교육가, 사회 운동가, 다산(多産)의 작가 심지어는  민주주의를 위한 재야 인권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자신을 발견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외적 혼란 중에서도 내적으로 그는 동양의 도교, 유교, 불교, 힌두교, 무교회 운동뿐 아니라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퀘이커리즘, 과학주의, 합리주의 등과도 사상적으로 친숙해 지려고 노력했다.
만약 함석헌이 혼미한 20세기의 한반도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저 "조용한 정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가 난초 가꾸기를 끔찍이도 좋아한 것을 보면 그리 놀랄만한 술회도 아니라 생각한다. 고요함과 평화스러움은 그의 삶의 최고의 가치였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이야기했듯이 "그저 조용히 집에 홀로 앉아 꽃만 기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5 그러나 불의와 부조리가 사회전반에 부패한 정치권력을 업고 판칠 때, 그래서 개인이 조용히 평화롭게 일상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소망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을 때, 한 개인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 사회의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은 위대한 "민족의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히려 평범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난세의 풍파가 그를 민족지도자의 위치로 밀어 버렸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니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함석헌은 급박한 사회와 사상의 대변동의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조국의 운명을 놓고 깊이 생각하고 고뇌해야 했다. 또한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위해서만 아니라, 사회에서 눌리고 억압된 소수의 권익을 위해서 그 자신의 자유를 희생당해야 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는 아홉 번이나 "감방대학"의 경험을 했다. 그의 잦은 투옥과 연금은 일제식민지 하에서 뿐 아니라  북한의 소련군정 하에서도 계속됐고 심지어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같은 동포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정권에 의해 계속 되었다. 그뿐 아니라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 함석헌은 그의 부모의 운명까지 지켜보지 못하게 된다. 그의 부친은 그가 일제에 의하여 옥살이를 할때 그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했고, 그가 소련군의 총부리를 피해서 북한에서 월남한 이래 그의 모친의 생사는 전혀 알 길이 없게 된다.

함석헌은 조국의 자유와 인간애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불의에 대항해서 그의 전 삶으로 저항해야 했다. 그는 그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마치 소년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차듯이 이날 껏 나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오는 사람' 입니다. 내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고 몰아진 삶입니다."6 다시 말하면 함석헌의 생애는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삶이라는 고백이 아닐까. 인간이 역사의 산물인한 한 인간의 생애와 사상은 그가 처한 사회-정치적 상황과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확신한다.
위에 지적한 요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 논문은 나의 함석헌 개인의 삶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그의 삶과의 연관성 속에서 나의 종교관(근본적으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과 한국사관을 반영한다. 전반적으로 이 논문은 크게 3가지 주제를 다룰 것이다: 첫째로 함석헌이 살면서 고민한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 (1901-89); 둘째로 함석헌의 전 생애를 통하여 특별히 그가 영향받은 인물과 사상,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어떻게 그가 그의 사상적 독창성을 창조해 나갔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셋째로 함석헌이 현대 동서의 종교와 철학을 위하여 어떤 사상적, 문헌적 공헌을 남겼는가를 진단 할 것이다. 이럼으로써 국내외 학계에서의 함석헌 연구에 관한 의욕을 불러 일으켰으면 한다. 함석헌이 타계한지 10년이 가까워오도록 그에 대한 박사논문이 한편도 발표되지 않은 것에 대한 본인의 '위기의식'도 이 논문을 발표 하게된 동기중의 하나이다.

이 논문은 또한 한국 현대사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사이의 밀접한 상호 관련성도 평가 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일제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면이 있을 뿐 아니라 좌우익 '냉전논리'와 30년 가까운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굴절된 부분도 많다. 반면에 민족사관에 의해선 "반만년 역사 위에 찬란하다 우리문화"로 과장되게 찬양 된 면도 있다. 과연 한국사가 찬란한 역사일까? 대답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어쨌든 한국 현대사는 "뜨거운 감자" 처럼 다루기 곤란한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한반도에 "정녕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를 재평가, 재검토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 확신한다. 역사가 카(E.H.Carr)가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역사적 재검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처럼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끝나지 않는 대화"이기 때문이다.7
이 논문은 또한 함석헌에 관한 역사적 문헌을 더해주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이 종교적 다원주의를 위해 공헌한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쓰여졌다. 나는 이 논문이 국제관계, 세계평화, 한반도, 동아시아, 기독교 보편 구제설(인류는 결국 전부 구제 받는다는 설)의 발달과정, 퀘이커의 기독교에 대한 해석, 한 인간 함석헌의 영적(靈的)발달 과정에 흥미를 갖고있는 사람들을 위해 공헌되기를 소망한다. 이 논문은 또한 한반도에서 특정한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 어떻게 세계인들의 일반적 삶의 상황과도 상호 연결돼 있는가를 증언한다. 한국에 관한 문외한을 위해서 개략적인 한국의 역사, 정치, 문화, 종교에 관한 정보도 삽입했음을 밝힌다. 전체적인 함석헌의 삶을 평가하기 위해서 나는 그의 공헌뿐 아니라 그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줄 것이다.

2. 논문의 구성

함석헌의 사상은 인도주의적인 면과 더불어 상식적인 혹은 실용주의적인 면을 결합했다. 그는 실용적인 감각이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믿음의 한 형태로 여겼다. 그러므로 비록 종교의 세계는 '실용'이상의 세계이지만, 그는 종교가 실용적인 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이런 면을 고려해서 나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함석헌의 삶과 인물비평 그리고 그의 다면체적인 사상을 고찰할 것이다.

첫번째 마당에서는,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철학적 배경 특히 조선조의 신유교(성리학)의 이념적 성격을 개관할 것이다. 이와 함께 구한말부터 (1850년 이후) 제 6공화국 (1988) 초기까지의 정치-사회적 환경을 검토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환경의 산물이냐 아니면 인간의 생각이 환경을 창조하느냐의 논점은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상호보완적일 것이다. 그래서 한사람의 인생행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살던 사회 환경도 뚜렷하게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두번째 마당에서는, 함석헌의 북한에서의 어린 시절을 소개한다. 그의 가족 상황과 더불어 청소년 함석헌이 누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세번째 마당에서는, 성인기의 함석헌의 삶을 탐구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가 그 전성기를 누릴 때 함석헌의 일본 유학생시절과 모교 오산학교의 역사교사시절, 그리고 동아시아의 사상가로서 어떻게 그가 일제하에서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특별히 이 마당에서는 함석헌의 독특한 철학적 성취와 공헌, 즉 "세계사 속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 재발견", 을 엄밀하게 관찰한다. 일제는 그 식민정책을 통해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탄압하고 일본 중심적인 사관을 한국사에 강요하므로서 한국인의 주체의식과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에 대항해서 함석헌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전력을 다했다. 이것은 함석헌에게 있어서 한국의 미래운명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기독교 사상가로서 함석헌은 한국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무작정 감추고 싶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한국사를 인정했고 한국사의 위치를 세계사의 '하수도'로 정의했다. 그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함석헌은 한국사를 마치 인류를 위한 "수난의 여왕"처럼 서사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한 한국의 고난을 그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고난과 동등시했다. 한국사의 성서적 해석을 통해서 그는 절망속에 침체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 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한국인들이 일제의 폭압통치하에서도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사속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깨닫게 해주는데 있었다. 한국사를 통해서 어떤 이도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함석헌처럼 독특하게 파악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과 생애자체를 20세기 한반도에 있어서 중요한 한국인의 정체성 중의 한부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번째 마당에서는, 해방직후 북한 공산정권 아래서의 함석헌과 남한의 자유당정권 아래서의 그의 삶과 생각의 변화를 전망한다. 이시기에 함석헌은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같은 동포의 손에 의해서, 북한에서는 물론이고 남한에서조차 투옥생활을 경험했다.

다섯번째 마당에서는, 함석헌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다룰 것이다. 이시기에 그는 두번의 군사정변을 맨몸으로 체험하고 사상적으로는 서구 퀘이커리즘 그리고 동양의 노장(老莊)사상과 더욱 친숙하게 된다. 함석헌사상의 주요특질은 노장사상 그리고 퀘이커리즘과 많은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역사를 통하여 노장사상은 중국에서 그리고 퀘이키리즘은 영국에서 둘다  "이단자" 취급을 받은적이 있음을 명심하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도가사상은 유가(儒家)에 의해서 박해받았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통치이념과 학자의 종교였던 반면 도교는 상민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으며, 이러한 상민의 종교 도교는 유교 지도층에 의해서 "이단" 취급을 받았다.8 특히 신유교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유가에서는 공식적으로 도교를 이교(異敎)로 낙인찍었다.9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장사상이 늙은이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반란자들, 비밀결사회등 탄압받는 이들에게 "피난처" 역할을 해주고 저항력을 공급해준 것은 주목할 만하다.10 퀘이커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17세기 영국에서 그들은 비국교도(영국 국교인 성공회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 중 가장 극심한 고난을 받았다.11 1662년에는 퀘이커법령(The Quaker Act)도 공포되었는데 이 법령은 특별히 퀘이커들의 제도적 박해를 권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안이었다.12

여섯째 마당에서는, 과연 함석헌이 한국과 세계를 위해 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를 살펴본다. 특별히 민중신학, 남한의 민주화 과정, 그리고 한국인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의 관계를 그의 사상과 결부시켜서 탐구해 본다. 정치인이 아닌 하나의 씨 로서의 함석헌이 그의 인권운동을 통해 한반도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한 점도 재조명 할 것이다. 또한 어떻게 그가 동양철학과 서구기독교를 재해석하여 불의의 정권이 난무하는 시대에 영적(靈的)으로 현실에 적용해 나갔는지 검토해 볼 것이다. 함석헌은 동서사상의 내관적(內觀的) 수렴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재창조함과 동시에 동양과 서양간의 내재적인 갈등을 해소해 나간다.

마지막장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함석헌의 그 사상적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그가 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추구했나를 검증한다.13

3. 논문연구의 접근방법

함석헌은 동시대의 대부분의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식자들과는 다르게 이해하기 쉬운 표현의 말과 글로 대중 앞에 자신의 생각을 내놓았다. 이런 면에서 그는 대중의 처지와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 즉 씨 의 소리였다.
그의 삶의 규모와 스타일이 검소하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심지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기에 서민들은 그로부터 큰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면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런 그를 '민족중흥의 영웅'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그저 '동네 할아버지'나 '시골풍나는 노인네'처럼 그들 중의 한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비록 함석헌자신은 그를 항상 민족이나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리더쉽이 없는 부족한 사람"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배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그를 인권운동의 지도자 혹은 민족의 지도자가 되도록 '떠밀었다'. 때로는 그가 "글쎄요" 하면서 이러한 '떠밈'을 거부 하기도 했다. 그는 때로 씨 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씨 이라고 역설을 하며, "믿을 것은 씨 밖에 없다"고 강조를 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이런 씨 을 전적으로 믿지도 않았고 또 그 씨 의 손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지도 않았다.14 함석헌의 추종자들은 또한 그의 외적인 수줍어함과 내적인 불호령 같은 용기가 독특하게 교착된 것에 당황했었고, 이런 그의 모습은 한때 그를 마치 "모순의 사람"처럼 보이게도 했다. 함석헌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용기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회고해 보면 그는 확실히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서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힘썼고, 맹자의 말처럼 그의 내적힘을 존심양성하여 용기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는 부지런히 자기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의 지식과 잠재력을 정교하게 정련해 나갔다.
비록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의 무조건적 평화주의에 매혹되었지만 그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때로 자기방어의 윤리를 순진한 절대 평화주의 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로 믿었다.15 평화주의자들도 그의 가족이나 그가 속한 민족이 불의의 세력에 의해 공격받았을 때, 그 가족이나 민족을 방어하고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함석헌은 사회정의없이 평화스런 사회는 이룰 수 없다고 믿었기에 융통성있는 평화주의자였던 것 같다. 예수의 경우도 유사하지 않았을까. 그가 별다른 대안이 없었을 때 그는 완력을 통해서 고리대금업자들을 성전으로부터 내쫓아버렸다. 물론 예수는 폭력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악에 대항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땐 그런 예수조차 완력을 쓰기도 했다.

함석헌은 몇몇 그의 추종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솔직하게 거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만도 아니었다. 그가 민족의 자유와 민주화운동을 위해 활동하다가 형사나 경찰들에게 "죄인"으로 체포 구금 되었을 때, 그는 항의나 불평으로 그들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을 지킨 경우가 많다. 형사나 경찰이 그의 "범죄행위"에 대한 물적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함석헌은 그가 한 행위를 잡아떼거나 부인하기도 했다.16 이런 면을 고려하면 그는 순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였고, 동시에 이런 자기행위를 부인하는 그의 모습은 그도 두려움을 느끼는 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삼 상기시켜 준다.
70년대를 통해서 함석헌은 서구의 뉴스 매체에 "한국의 간디"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범국민적인 인권운동을 조직하고 동원하는데 간디만큼 적극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소극적'으로 인권운동에 참가한 인상이고 때로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힘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함석헌이 그의 삶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을 그의 적극적인 결의보다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라고 표현 한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함석헌은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민주화를 위해 일했을까?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그의 겸손함과 수줍음 때문이었으리라. 함석헌은 자신을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엔 부적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수많은 인권운동을 그런 '부적합한' 자신이 이끌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함석헌의 말과 글이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대열의 선봉에 지도자로 강력히 밀어세웠던 것이다. 결국 한 인간이 겸손하다는 의미는 그가 독재자가 아닌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이 아닐까?

그의 미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묵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뿐 아니라, 서구의 민권운동가들에게 "이상적 평화주의자" 심지어는 "한국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의 민주주의를 위한 몸부림에 있어서 이상주의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주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함석헌이 경찰이나 군부에 의해서 심문조사를 받을 때 그들의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서 좀처럼 저항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결코 신뢰하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엔 함석헌은 그의 정치관이 그를 심문조사하는 이들과 결코 일치될 수 없다고 확신하기도 했다.17 냉혹하고 무자비한 현실로부터 생존하기 위해서 아마도 함석헌은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예수의 교훈을 너무도 잘 이해했던 듯 싶다. 이러한 함석헌의 독특하게 애매모호한 성격은 오히려 그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또한 함석헌의 추종자들은 그의 확실치 않은 "글쎄요"의 처세에 끊임없이 끌리고 매혹되는 듯하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 뿐아니라 세계인들에게 큰 중요성과 의미가 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도덕 혹은 영의 가치로서 정의함으로서 20세기에 횡행하는 물질경제만능주의의 풍조에 대항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하는 방편으로 인권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서 온몸으로 일했다. 20세기의 세계가 특별히 물질경제만능주의 위주로 흘러가는 점을 고려할 때, 도덕의 가치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해야 된다는 함석헌의 주장은 '인간성의 회복'을 희망하는 현대인에게 의미심장한 경종이 된다.
더욱이 함석헌은 서로 다른 각 종교들간에 서로 관대하게 포용해 줄 것을 강조했다. 한국인이 불교, 유교, 도교, 샤마니즘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혼합수용해가며 오늘을 살아가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함석헌의 종교적 관용성의 강조는 한반도의 사회문화적 풍토에 아주 적절하다 할 수 있다.
함석헌의 말과 글의 스타일이 비체계적이고 역설적인 면이 많았기에 이 논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본인이 상당한 곤혹을 치뤘음을 또한 고백한다. 노자의 글처럼 함석헌의 글은 논리적, 이론적, 학문적, 방법론적이라기보다는 검증되지 않은 직관적, 통찰적이다. 함석헌의 전 생애가 서사적이었던 것처럼 그의 글도 서사시적, 비탄적, 감탄적, 호소적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함석헌은 학자나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사상가 혹은 행동하는 사상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이 독서를 많이한 사람 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사상이 연구실이나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은 삶의 실존적 현장, 역사적 사건들과 그 자신이 몸소 피땀 흘려 뒹굴어 가면서 창조됐고 다져졌다.
함석헌은 동아시아의 모순역설의 사람, 혜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골치 아픈 사람'의 생각을 서구대학의 연구실과 도서관에서 학문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분석해야했다. "어떻게 한 인간의 통찰력을 합리적으로 이론화, 학문화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지난 8년간의 영국유학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어온 질문이다. 점차적으로 나는 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은 "모든 것이 단어나 논리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인류의 진화론과 창조론도 논리로만 설명될 수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그것은 직관적이어야 하리라. 그래도 나는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졌다. 그래서 때로는 "이 논문을 끝마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라고 느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함석헌의 종교철학관과 인물 비평을 하기 위해서 나는 두 가지 주요자료를 사용했다. 첫째로 일차자료로서 {함석헌전집} 1권부터 20권을 몇 번에 걸쳐 철저히 독파했고, 그가 쓴 다양한 여러 종류의 글도 수없이 읽었다. 두번째로는, 함석헌의 추종자, 친인척을 포함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학자, 재야인권운동가,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 언론인, 사회개혁가등과 광범위하게 단독면담을 실시했다. 이 논문에 정리된 자료들은 그러한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 면담을 통해서 모아진 정보들이다. 이밖에도 함석헌에 대해 발표됐던 세미나 테이프, 잡지, 신문, 기사, 논문 등도 보충자료로 사용했다. 함석헌의 말과 글의 영어번역은 본인이 직접 했음을 또한 밝힌다.


  두 번째 마당 : 함석헌의 청소년기 (1901-1923)
  
이 마당에서는 함석헌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1901-1923)를 검토할 것이다. 이 시기는 평안북도에서의 그의 청소년시절과 1919년 3.1 운동중의 그의 활동, 그리고 오산학교에서 기독청년으로 그가 어떤 삶의 행로를 걸었는가를 말한다. 이 시기를 거쳐서 함석헌은 직접 혹은 문헌을 통해서 당대의 뛰어난 많은 인물들과 접할 귀한 기회를 가진다. 그들 중엔 한국의 애국지도자, 국내외의 종교사상가 및 민족운동가 등이 있다. 특별히 함석헌이 그의 사상의 선배들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받은 영향을 통해서 어떻게 그 시대의 고민과 위기에 대응하고 극복해 나갔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2.1.평안북도에서의 “젠틀(gentle)”한 어린시절(1901-1919)
      
함석헌은 1901년 황해바다가 가까운 서북지방끝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일명 사자섬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부라면은 아주 조그마한 마을로 세계의 큰 사건과는 별 상관이 없는듯, 몇 백년간을 이렇다할 큰변화없이 흘러왔다. 그의 가족 중에서 함석헌은 장남으로 위로 누님 한 분과 아래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셋이 있었다.
함석헌의 부친 함형택은 명망있는 한의사로 많은 환자들이 평안도 뿐아니라 서울, 만주는 물론 심지어 일본으로부터까지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비록 함석헌의 가족이 살던 마을은 가난한 곳이었지만 그 가족의 생활수준은 같은 마을사람들과 비교해서 볼 때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1920년대 말에 함석헌의 부친이 그 마을에 장로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장로가 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생활수준이 그래도 시골에서는 중상층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함석헌은 예술에 대한 그의 감각과 합리적 사고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평등사상과 열린 마음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함석헌이 네명의 누이들과 함께 성장했다는 것은 생각컨대 그가 여성의 특질인 '부드러운 섬세한 힘'의 묘미에 익숙했고, 또한 자연스럽게 그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가 나중에 부드러움의 철학인 노장사상의 장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을 통해서 함석헌은 내성적인 겁많고 부끄럼 많이 타는 아이였고 그 또래의 사내아이들과 싸움이나 다툼을 해본 일이 별로 없었다.
그 당시 한반도는 외세 앞에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고 정치, 사회, 경제형편 또한 붕괴직전 이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조선왕조의 경제는 빈곤의 극치에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세계무대에서 "은둔자의 왕국"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천만인구는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전세계로부터 거의 분리된 상태에 있었다.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 불교, 샤마니즘은 침체에 있던 씨 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거나 새로운 방향제시를 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엄격한 의식(儀式)이나 정체된 계율만을 제공해 주었다.
함석헌은 이런 암담하고 어두운 정치-사회적 시대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뛰놀던 시골마을 사자섬이나 크게는 북한지역전체는 한반도의 수도인 서울에 비해 평화롭고 조용한 편이었고,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영향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편이었다. 함석헌이 4살 되던 해인 1905년 조선왕조는 실제적으로 그 주권을 일본에 의해 박탈당하고, 함석헌이 9살이 되던 1910년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이후에 한반도에 오직 하나의 조직만이 근근이 외국(특히 서방세계)과의 연결관계도 가지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신교교회였다.

개신교의 한반도 선교는 1884년을 기점으로 하는데 그때는 미국 장로교선교사가 한반도의 선교화 사명을 갖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도착하던 때다.  선교사들은 종종 한국인들의 눈엔 서구의 계몽주의자로 보였고 가난과 억압에 찌든 씨 들은 교회의 보호아래서 순간적이나마 자기들의 고통이 경감되는듯한 경험도 했다. 그때부터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는 한반도의 정치와 교육현대화 운동에 큰 영향을 발휘하게 됐다. 많은 씨 들은 오직 교회의 한글 성경교육을 통해서 비로서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급진적인 기독교인들이나 사회참여가 활발한 기독교인들이 때로는 일본식민정권에게 두통거리가 되기도 하고 사회불안을 야기시키기도 하지만, 일본은 이런 기독교인들을 선뜻 쉽사리 탄압할 수만은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미국 선교사들과 견고한 유대관계로 결속돼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런 기독교인들을 잘못 건드림으로서 미국과의 관계를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본으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일본식 교육대신 미국식 교육을 교회조직을 통해서나마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을 주었다.
어떤 한국인들은 교회의 교육이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위해 일함으로서 일본정권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주권을 행사하는 특전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일본식민지정권과의 격렬한 갈등관계는 불가피했고 동시에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서구적 교육을 간절히 열망했다.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많은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은 한국교육의 현대화를 위해 결정적 공헌을 했다. 1883년부터 1909년 사이에 한반도에는 (만주 간도에 문화회관을 포함) 29개의 사립교육기관이 세워졌다.  이러한 사립학교들은 서양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되었거나, 아니면 그들로부터 직접 영향받은 한국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사회적 지위나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입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양반의 자손들은 이런 사립학교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함석헌이 양반의 자손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1906년 그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입학한다.
비록 함석헌이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그래도 그 마을에서는 지적으로 계몽된 편이었고, 경제적 형편도 상대적으로 유복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그의 어린시절을 "잘 사는 편"이었다고 회상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청소년시절을 통해서 함석헌은 그의 숙부인 함일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함일형은 열렬한 기독교지성인이었고 왕성한 활동가였다. 마을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나 농민들이 불만이 있을 때 많은 경우에 함일형은 그들을 위해서 대변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종종 그는 관가에 끌려가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그의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함일형은 계몽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일찌기 그는 그의 장남 함석규를 서울에 있는 배제학당으로 보낸 바있는데, 이곳은 청년 이승만이 한때 공부하던 곳이기도 하다. 함석규는 함석헌의 동네에 첫 장로교 목사가 되는데 그 마을에 새 종교인 기독교교회를 세우고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함일형의 둘째 아들인 함석은은 일찌기 동경유학을 갔고 귀국해선 민족지도자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그의 전 정열을 바쳤다. 함석헌은 친척인 함일형, 함석규, 함석은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데 특별히 기독교의 교훈, 애국심, 독립운동, 국제정세등에 관해 배우게 된다. 기독교의 영향이 어린 함석헌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나를 살펴보자면, 한번은 그가 일요일날 교회예배를 불가피하게 결석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 걱정, 죄책감, 불안이 여러 해를 두고 없어지지 않았다고 상기한다.
한편 1909년,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기치아래 복음주의적인 전도운동이 성공적으로 시작됨으로 많은 한국인을 기독교로 귀의시켰다. 다음해인 1910년에 이르러 한국인의 1%는 이미 개신교인이 되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개신교회는 더욱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므로 한국의 기독교인들 교회안에서의 일뿐 아니라 민족전체의 일에 대해서도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일례로 1912년의 "105인 사건"을 통해서 124명의 한국민족지도자가 일본총독 데라우찌 마사타깨 (1852-1919)의 살해혐의로 체포되는데, 이중에 남강 이승훈 (1864-1930)을 포함한 98명이 개신교인 이었다는 것은 개신교의 사회-정치적 영향이 얼마나 컸나를 반증한다. 일본식민정권 또한 한국 개신교인을 식민정책을 저해하고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단체로 인식했다. 일본이 국제적인 여론과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에 서양선교사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동시에 선교사들은 종종 한국인의 입장을 솔직히 국제사회에 대변해 주었고, 이런 상관관계를 통해 개신교는 한국민족주의운동의 선봉에 나설 수 있었다.
교회는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자유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국의 종교적 지도자 뿐아니라 사회개혁가 교육가등을 배출했고 이들은 한국의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추진세력이 되었다. 20세기 초에 한국의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적 믿음으로만 한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고, 사회-정치적 계몽운동, 훌륭한 문화의 본보기, 민족발전의 상징 등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의 교회는 실제로 낙관주의의 상징이었고 상심에 젖은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자들은 한국인들이 기독교로 귀의하는 것에 비판적 태도를 취했는데, 그들의 시각엔 한국이 같은 동양권인 일본의 영향권에 속하는 것이 서양권의 영향에 드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일형은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기독교를 독립정신과 자유의식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원천으로 보았다.
물론 서구사상은 기독교를 통해 한반도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특별히 개신교는 사회정의의 의미와 함께 식민지 한국인들에게 서구의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소개해 주었다. 한편 함일형은 그의 동네에 서양 스타일의 장로교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함석헌은 전통적인 유교식 학교인 서당에 들어가지 않고 대신에 함일형이 창설한 신식 기독교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어린시절부터 새종교인 기독교와 민주주의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이 함석헌이 그 자신을 "타고난 민주주의자"라고 부르는 근본적 이유이다.

함일형이 그 조카 함석헌에게 불어넣던 애정은 또한 각별했다. 함일형은 함석헌의 아버지 함형택 대신 함석헌이 태어났을 때 '함석헌'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동시에 함석헌은 그 어린시절에 숙부 함일형의 살아있는 애국심과 열성적 기독교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어린 함석헌은 함일형이 세운 기독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와 애국심을 융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민족애와 기독교신앙이 넘쳐흐르는 함일형은 3.1 독립운동후에 일본경찰에 의해 수감된다. 함석헌은 이러한 숙부 함일형을 "내게 맨 처음으로 정신적 스승이 된 이" 라고 기억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함일형을 통해서 기독교와 민족애를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로소 갖추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한편 양반중심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씨 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고 평등을 부르짖는 새 종교인 개신교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양반계층은 그 당시 경제력은 물론 사회-정치력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비양반계 지식층,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양반중심의 사회아래서 많은 어려움과 착취를 당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함석헌의 고향이 평안도였다는 것은 주목할만한데, 그곳은 상업활동이 활발한 지역으로 유교와 양반의 영향이 서울에 비해 아주 약했다.
평양에는 개신교인들이 집중돼있었고 반면에 양반의 숫자는 아주 적었다. 1938년에 이르러 한반도에서 약75%의 개신교인은 평양에 집중돼 있었고 그 숫자는 60만명 정도였다.  2차대전 종전직전인 1945년까지는 약80%의 개신교인은 평양에 집중해 있었다. 이로서 평양시는 아시아에서 최대다수의 개신교인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게 된다.
일제하에서 평안도에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것은 그곳에 독립운동활동이 활발했다는 것과도 부분적으로는 상관관계가 있다. 유교의 세력과 영향이 남한과 비교해서 약했다는 것도 개신교 교회가 평안도에 왕성하게 존재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유교의 영향권이 약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의 현상유지나 기득권 지키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평안도 사람들이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조를 통해서 이북지방은 이남의 서울이나 충청도의 양반계층으로부터 많은 차별 대우을 받아왔다. 1811년의 홍경래(1780-1812)의 난은 이남, 특히 서울의 양반층이 이북의 지식층을 어떻게 차별정책으로 대했나를 반영하는 일례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왜 어떻게 개신교가 이남보다 그의 고향인 이북평안도에 더 인기가 있었는지 회상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첨부터 활발한 새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때문인데, 내가 났던 평안도에 기독교가 막 들어왔습니다. 본래 평안도는 한국의 '이방 갈릴리'여서 여러 백 년 두고 '상놈'이라 차별대우를 받아왔습니다. 이상하게도 버림을 받고 천대받아온 곳인데 그 중에서도 내가 났던 마을은 더 심했습니다. 그야말로 '스불론, 납달리' 같아서 '바닷가 감탕물 먹는 놈들'이라 해서 머리도 못 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밑바닥이니 만큼 그 심한 정치적 혼란의 망국 시기에 있어서도 거기는 탐낼 것이 없는 곳이니 평화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 만큼 새로워지는 데는 앞장을 섰습니다. 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속에 일찍부터 '큰 빛'이 들어왔습니다.”
분명히 개신교는 유교중심의 정치-사회질서체제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사상적 대체물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개신교가 급속하게 확산됨과 더불어 사회개혁성향이 강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을 교회의 영향권 안으로 흡수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성향은 엄격하고 청교도적이었는데 함석헌은 이러한 장로교의 교육 스타일을 그 당시에 꼭 필요했던 것으로 본다: "그 교회는 장로파였으므로 거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조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 썩어진 망국 시기에 있어서 그러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적 양심은 완전히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 시기에 단순한 기독청년 이었다.
더욱이 서양선교사들은 각분야에 걸쳐 현대과학과 의학기술 등을 가져옴으로서 한국의 고립정책으로 생긴 여러 분야의 과학기술적 공백을 채워주었다. 새로운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은 한국이 장차 독립을 쟁취하고 현대화 과정를 밟기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선교사들 또한 한국인의 민족주의운동에 대해서 동정적이었다.  선교사들이 기독교 교육분야에 많이 관여했기에, 젊고 지성적인 한국의 미래 민족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도산 안창호 (1878-1938), 뛰어난 웅변가. 이동휘 (1873-1935), 1920년에 한국의 최초의 공산당인 고려공산당을 창설. 남강 이승훈 (1864-1930), 함석헌의 스승이며 오산학교를 설립함.
이 시기에 비록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식민지정권은 한국교회를 반일운동의 주요 본거지로 여겼다.
일제식민정권과 한국 개신교인이 갈등의 와중에 있을 무렵인 1916년, 함석헌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고보에 입학했다. 평양고보는 일제에 의해 세워진 관립학교이며 일류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청소년 함석헌은 비록 신동은 아니었지만 충실하게 노력하는 지성적인 젊은이었던 것 같다.
평양고보 졸업자들은 자신들이 일본식민지정권에 대해 고분고분하기만 하면, 일본인 밑에서 초급관료 노릇을 하며 그래도 일제하에서는 상대적으로 평탄한 삶과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 한국인들과 비교해서 평양고보 졸업자들이 상대적으로 장래를 '편안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일제하에서도 되도록이면 사회-정치적 현상유지 상태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들에겐 일제하에서 식민정권을 위한 관료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꿈이었던 것 같다. 청년 함석헌도 한때는 이 부류의 젊은층들과 별다른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이 평양고보를 입학했을 때 그의 꿈은 아버지 뒤를 이어 의사가 되는 것이었고, 의사라는 직업은 그래도 일제하에서는 어느 정도 편안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함석헌의 아버지 또한 그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랬고 그것은 식민지 상황아래서도 자주권을 좀 행사할 수 있는 괜찮은 직업이었다. 평양고보를 다니면서 함석헌은 그의 순수함과 깨끗했던 신앙심이 서서히 쇠퇴해 가는 것을 느낀 것 같다. 평양고보의 교육과 그 환경을 통해서 함석헌은 그의 어릴 적 경건함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함석헌이 평양고보에서 한창 '빛나는 장래를 위해'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는 부모의 중매로 황득순(1902-1978)이란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된다. 1917년 당시 한반도의 거의 모든 신랑들처럼 함석헌은 결혼 전에 그의 신부될 사람의 성격이나 외모등에 관해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식을 치룬다. 그리고 1917년 당시의 대부분의 신부들처럼 함석헌의 아내는 문맹자였다. 물론 그 시절의 결혼은 당사자들의 의사보다는 그 양가부모의 주선으로 결혼이 성사됐다. 함석헌은 그가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고 있을 10대의 나이에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의 표현처럼 "순종 온순파"의 청소년으로 부모의 간절한 염원에 불복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신혼의 단꿈"에서 함석헌은 아마도 평탄대로의 편안한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1 운동과 함께 거친 인생의 여정이 그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2.2. 삼일운동에 기독청년으로(1919-1921)
        
1919년의 3.1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함석헌 그 자신이 회상했듯이 만약에 3.1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그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함석헌은 18살의 젊은 나이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함일형의 둘째아들이며 함석헌의 사촌형이던 함석은은 순탄할 수도 있었던 함석헌의 삶을 격동의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 함석은은 열성적 개신교인 학교 선생으로 평양지역 3.1 운동 준비조직위원회의 총책임자였다. 이 당시에 오직 개신교만이 전국적으로 활성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래 모든 정치-사회 조직은 강제해체 되거나 일본의 손아귀아래 들어갔다. 한국인의 상업분야는 걸음마 단계를 넘지 못했고 그러므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계층도 전무했다.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고 있는 기관은 종교적 성격뿐이었다. 실제적으로 개신교회의 전조직망과 시설은 성공적 3.1운동을 위해 총동원되었다.
함석은은 평안도 지역 3.1 운동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그 사촌동생인 함석헌에게 운동의 기초작업을 위해 도움을 구한다. 함석은은 일찌기 함석헌에게 국제정세와 당시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 바있었다.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1919년 3.1 운동 후 함석은은 일본경찰의 수사를 피해 만주로 망명을 가서 그곳에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킬 목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잡지를 발간했다. 1920년 5월 그는 일본군에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다. 그후 만주에서 그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3년간 수감되었다.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범적인 훌륭한 본보기로서 함석은은 1963년 사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 받았다. 함석은이 언제 어떻게 운명했는지에 대해선 자료로서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6.25 동란 중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함석은의 지도아래서 함석헌은 직접적으로 3.1운동의 준비과정에 관여하게 된다. 평양지역의 3.1운동을 준비하면서 함석헌은 자신이 직접 만든 목판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찍어내고 또한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다른 많은 동포들에게 나누어 준다. 3.1.운동날 당시 함석헌은 다른 기독청년들과 함께 열렬히 만세운동에 참가한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함석헌은 자신이 직접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평양시내를 행진했다. 감격에 부풀어오른 청년 함석헌은 일본경찰과 맨몸으로 충돌하면서도 온힘을 다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심지어 평양경찰서 앞에서 자신이 손수 만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사본을 길을 메운 동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훗날 함석헌은 3.1운동당시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 와서는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상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 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1919년 당시의 한반도의 학생 수는 133,557 명이었고 그중 약 10%인 11,333 명이 3.1운동에 직접 참가했는데 청년 함석헌도 그 중의 하나였다. 3.1 운동이 끝난 직후 일제는 강압적으로 한반도의 모든 학교를 몇 주 동안 폐교조치 했다. 715개의 주택, 47개의 교회 그리고 2개의 기독교계학교들은 일본헌병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다. 일제는 한국 개신교인을 분명한 3.1운동의 "주동자"로 간주했다. 일제하에서의 한국개신교인의 사회참여는 3.1운동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일본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참가로 검거된 한국인들의 종교적 구성을 보면 3,373명이 기독교인 2,283명이 천도교인 346명은 유교인 229명은 불교인이었다.  33인의 민족지도자중 남강 이승훈을 포함 16명은 기독교인, 의암 손병희를 포함 15명은 천도교인, 그리고 만해 한용운을 포함 2명은 불교인이었다.  일본경찰에 의해 구금된 한국인들 중에서 21.89%가 개신교인으로 (장로교인 15.91%, 감리교인 4.83%) 다른 종교인들과 비교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3.1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대규모로 일어났던 곳은 평양이었다. 평안도가 서울로부터 차별받던 지역으로 반일감정이 강했고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새 교육의 중심지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평양의 새로운 지식층들은 일반적으로 서울의 지식층보다는 더 진보적이었고 혁신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평양의 씨 들이 3.1 운동을 통해서 가장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평양지역의 개신교 목회자 5명중 4명은 체포 후 기소되었고 나머지 1명도 연금된 후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야 석방되었다. 일제는 3.1 운동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에 의해 주도 확산되었다고 간주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발적 반란성격의 3.1 운동을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이끌어 간 것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 대한 일제의 적개심은 가혹했다.

많은 경우에 교회는 일본헌병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고, 특별히 수원의 제암리교회에선 여자,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를 포함한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불살라 학살했다. 서양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러한 일본의 잔악성을 그들의 모국 선교기관에 알렸고 서양의 선교기관들은 그들의 정부에 일제의 잔인성을 비판해줄 것을 탄원했다. 그러므로 대부분 아시아 다른 나라의 개신교와는 달리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서구제국주의의 앞잡이로 한반도에 들어오기보다는 한국민족주의 운동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19세기 후반에 개신교가 처음 한반도에 소개되었을 때 개신교의 신앙은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개신교에 대한 핍박이 가혹해짐에 따라 한국교회에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3.1운동의 대외적 실패와 관련이 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3.1 운동 뒤에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로 서서히 식민지 한국인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이에 상응하여 어떤 부류의 한국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은 일제의 통치전략에 적극적 타협과 협조를 통해서 친일파로 둔갑하기도 한다.
3.1 운동 뒤 개신교는 진보적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파와 보수적 인사를 중심으로 순전히 종교적인 일에만 집중하자는 파로 양극화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선 보수적인 개신교파들이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비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도 좌우익 두 파로 양극화되었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팽창주의 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일제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정당화했다. 그때부터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을 가거나 지하로 잠적해서 교육운동에 힘쓴다.
한편 3.1 운동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청년 함석헌은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참여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명문이라는 관립 평양고보의 교육가치에 큰 회의감을 갖게된다. 일제가 식민지 초기부터 관립학교의 식민사관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주의를 말살하고 그들의 위치를 강화하려고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함석헌이 관립학교의 교육가치에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리라.
더구나 3.1운동 후에 평양고보를 포함한 관립학교로 복학하고자하는 학생은 일본인선생에게 사죄를 하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가 참여한 3.1운동에 대해서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관립 평양고보는 식민지초기에 한인들을 일본식민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의도 하에 일제에 의해 설립됐고, 이학교의 졸업자들은 자신들이 식민정권에 복종하고 타협하는 한 비교적 편안한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평양고보로 복학할 것을 거부하고 결국 그의 고향 사자섬으로 돌아왔다. 3.1운동을 통한 직접적인 역사현장에서의 산 경험이 그의 나머지 생애와 사상을 형성하고 강화하는데 결정적 전환점이 되기 시작했다. 실로 3.1운동을 통해서 함석헌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은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다. 40년이 지난 후에도 함석헌은 3.1운동이 그의 삶의 행로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한다:

"나는 삼일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그것은 내 일생에 큰 돌아서는 점이 됐다. 만일 삼일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입학할 때의 생각 그대로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을 것이요.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요, 의사가 됐다면 나도 지금쯤은 큼직한 병원이나 경영했을는지 모르고 잘하면 나도 누구들처럼 국회의원에 출마도 했을는지 모르고 누구보다 못지 않은 자유당 중요 간부쯤도 됐을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관립학교출신들이 일제하에서 일본식민정권의 꼭두각시 노릇 한 것을 되새겨 본다면 함석헌의 술회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이 3.1운동을 통해서 한반도가 일제의 발아래서 식민지로 신음하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강한 애국심을 느꼈다는 점이다.
일제의 기상이 동아시아에서 하늘로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청년 함석헌은 앞길은 불확실하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온 함석헌은 그의 장래를 향해 뚜렷한 계획이나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우울과 실망 그리고 엄습하는 불안 속에서 세월을 흘려 보냈다. 이런 함석헌의 불안의 세월은 1921년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이 당시 다른 많은 한국인들도 3.1운동의 외형적인 실패로 인해 실의가운데 빠져있었다. 우울과 내적방황 가운데에서도 함석헌은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직되고 공허한 교회예배는 고뇌에 찬 함석헌에게 내적평화나 위로를 전혀 줄 수 없었다.
1919년 이후에 점점 더 많은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은 정치적 불간섭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들은 가급적 일제의 정책에 대항하기보다는 순응하고 협조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탈정치화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좌익계의 민족지도자들은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을 서구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했다. 좌익의 시각에선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통치에 대해 너무 굴종적이고 온건적이므로서 한국인의 일본통치에 대한 독립정신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또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세계관이 결핍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식민지정권의 분열정책은 결론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일제는 한편으로는 우익계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하는 듯하면서 좌익계나 좌경화조짐은 단호없이 처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민족진영의 좌우익분열은 불가피했다.
함석헌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1919년 3.1운동 전까지의 자신을 그저 "장로교회 안에서의 단순한 기독교인"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3.1운동 후에 한국교회의 일제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변화를 경험하면서 그는 그가 속한 한국장로교회를 향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교회에 대한 내적 의구심이 더해갈수록 그의 내적 고민도 깊어가고 악화되어갔다.
3.1운동후 한국교회에 대해 실망과 의구심을 심하게 느낀 한국인은 함석헌만이 아니었다. 그들 중 눈여겨볼만한 몇몇 민족지도자들은 무력한 한국기독교에 대한 대안으로 좀더 강한 사회주의나 심지어 공산주의 노선을 택했다. 1920년에 한국최초의 좌익정당이던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이동휘 (1873-1935)나 나중에 좌익계 근로인민당을 설립한 여운형(1885-1947)은 둘 다 한때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었고 전도사일까지 했었다. 그러나 1919년 후 이들은  둘 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교회측에선 좌익계 지식층의 비판을 포용하기보다는 강한 반공 반사회주의 노선을 통해 철저히 이들을 배척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기독교와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가운데 복잡한 내적 갈등을 느낀다: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한데 든 것은 첨에는 좋은 듯했으나 나중에 그 폐단이 차차 나타났습니다. 독립의 희망이 있을 때 그것은 놀라운 형세로 올라갔지만 일본의 통치가 아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굳어지면서 겉으로 보기에 어느 정도 부드러운 문화정책을 쓰게 되자 지난날의 지사라던 사람들이 많이 변절 타협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는 반면 종교는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 오는 세상주의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젊은이도 많이 그랬지만 나는 그것이 싫어서 교회에 차차 가기가 싫었고 점점 비판적이 되어갔습니다."

함석헌은 가속되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감과 정치적 문제감각의 결핍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다. 1921년 함석헌이 한참 내적고민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있을 무렵 그는 그의 사촌형인 함석규목사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내려왔다. 함석규목사는 어린 사촌동생 함석헌에게 여러가지 도움말을 주며 오산학교에 가서 한번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관립평양고보와 비교에서 물질적인 면에서는 형편없이 뒤져있던 사립오산학교는 그 당시 한국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져 있었다.
만약 인간이란 존재가 환경의 산물이라면 분명히 함석헌의 주변환경은 그의 사고와 후에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크게 보면 함석헌은 그가 자라 나온 시대환경 즉 기독교와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흐름의 산물이다.
옳고자하는 결단력이 없이는 한 인생은 그 온화함의 덕목을 갖출 수 없다고 믿는다. 함석헌은 그의 어린시절의 본성이 온순한 (gentle) 아이였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온순함 속에서도 그는 그의 뜨거운 저항정신을 연마해 나갔다. 끓어오르는 용기와 저항정신이 없이 어떻게 한 인생이 유연함과 옳고자하는 자세를 꿋꿋이 유지할 수 있을까? 1921년 봄 그의 따뜻한 마음과 뜨거운 용기를 한 몸에 담고 함석헌은 그가 자라온 시골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발길은 이제 한국민족주의 운동의 메카로 알려진 오산학교로 향했다.

2.3. 오산학교에서(1921-1923)

1921년 한국교회의 경직화및 교조화에 2년여에 걸쳐 회의감을 느껴오던 함석헌은 마침내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기독교계 사립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오산학교는 재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는 아주 열악해서 그저 아사상태를 간신히 모면할 정도에 불과했다. 몇 백명의 학생들을 위해 오산학교에는 의자나 책상하나 없었고 학생들은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 천장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평양고보와 비교해서 오산학교는 실로 빈곤에 허덕였고 학교의 규모도 아주 보잘것 없었다. 더우기 평양과는 달리 오산(五山) 이라는 표현처럼, 오산학교는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벽촌에 자리잡고 있었기 대문에 물질적 생활조건도 아주 형편없는 지경이었다. 함석헌이 오산에 도착하자마자 또 목격하게된 것 중의 하나는, 오산학교의 학생과 선생들이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한 관계로 학교건물의 대부분이 일경에 의해서 방화되고 파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오산학교의 진취적 분위기는 미래를 위해 청년 함석헌이 그의 이상과 꿈을 가꾸어 나가는데 큰영향을 미쳤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교육이념을 이렇게 요약한다: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산 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교육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이자 기업가인 남강 이승훈에 의해서 창설된 이래로 항상 사회개혁과 독립운동활동에 주도해 왔다. 그러므로 3.1운동 당시 오산학교의 많은 학생들과 선생들은 일제에 의해 체포나 구금되었고 학교건물은 일경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빈곤함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산학교의 학생과 선생들은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취적 기상과 낙관주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평양고보의 경우와 정반대였는데 평고는 그 물량적인 면에서는 오산보다 풍족했으나, 학생과 선생들의 사기는 높지 않았고 엄격한 규율로 그 질서가 유지되었다. 비로소 오산에서 함석헌의 의사가 되고자하는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그생애에 처음으로 청년 함석헌은 "조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그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함석헌은 조국이 일제의 손아귀 아래서 바람앞의 등불과 같이 휘청 거리는 것에 염려를 품기 시작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도착했을 당시 학교의 교장은 저명한 기독교인 민족지도자이던 고당 조만식(1882-c.1950)이 맡고 있었다. 함석헌은 오산에서 그의 초기 청년기의 두해를 보내게 되는데 이 곳에서 그는 개혁된 기독교 정신과 다이나믹한 애국심을 섭취하게 된다.
  3.1운동 이래로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인이 과학적 세계관의 인식이 부족하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산에 있는 동안 청년 함석헌은 과학적이고 보편적 사고와 친숙하도록 노력을 하는데, 그러면서 그는 많은 서구 사상가의 글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주로 웰즈(H.G.Wells: 1866-1946)의 {세계사}(The History of the World, 1920), 카알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의상 철학}(Sartor Resartus), 폭스(George Fox: 1624-1691)의 {일지}(Journal) 그리고 쉘리 (Percy B. Shelley: 1792-1822)의 {시 모음}(Collected Poems)등 이었다.
웰즈의 {세계사}가 함석헌에 남긴 영향은 현저하다. 웰즈는 과학에 대해 낭만적 개념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웰즈의 역사관에 영감(靈感)을 제공해 주는 원천이었다. 웰즈는 국제연맹의 이념을 확고하게 믿었고 세계평화를 위해 열성적으로 일했다. 웰즈의 저서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년 함석헌에게 평화주의의 필요성, 세계주의에 입각한 역사관및 종교관형성에 근본적 영향을 심어 주었다. 또한 웰즈의 {세계사}에 대한 감동 때문에 함석헌은 역사, 진화론, 과학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웰즈로 부터의 강한 영향 때문에 훗날 함석헌은 역사라는 학문을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게 되었고 자신이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카알라일은 그의 {의상철학}을 통해 사물의 본질적인 것과 외양적인 것과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카알라일은 사회제반기관, 종교조직 혹은 행정제도등을 인간이 입고있는 옷처럼 여겼다. 이러한 옷은 영(靈)적인 힘의 상징의 표현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쉴새없이 인간이 새옷으로 바꿔 입어야 하듯이 계속해서 새롭게 변해야 한다고 카알라일은 주장했다. 교회 또한 비록 초기에는 인류의 영원한 신앙심의 열망을 보여 주었지만, 카알라일의 이해로는 이제는 그 용도가 끝나서 버려야할 때가 왔다. 그러나 교회제도 저변에 흐르는 그 신성한 정신은 활발히 인식 되어야 하고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보존되어야 한다. 카알라일에게 있어서 현상이나 외양 뒤에 가리워진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는 일은 삶의 딜레마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의 추구이었다. 함석헌은 카알라일의 글을 통해서 진리와 제도에 관한 관계에 대해 가장 중요한 단서를 배웠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은 제정된 제도의 간섭없이도 인식적으로 현상계의 바닥에 있는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폭스의 {일지}(The Journal of George Fox)가 처음 출판된 것은 1694년으로 이책은 퀘이커(Quaker)신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인 면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폭스는 초창기 퀘이커운동의 지도자였고 그의 사상은 종교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설립에 근본적 영향을 가져 왔다. 그의 {일지}를 통해 폭스는 모든 사람은 개별적으로 목회자의 중재없이 하느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단언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생명, 속의 빛, 내적 그리스도, 하느님의 씨앗, 만인에게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신성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느님의 영(靈) 혹은 영감(靈感)과 교통할 수 있다. 이 속의 빛의 신앙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그 구절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있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받을 것이다."
폭스는 그의 글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속의 빛을 깨달아야 되고 또 그것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속의 빛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영적인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이 속의 빛을 가지고 있으므로 폭스는 개인 각자가 침묵예배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하심과 신성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 있는 속의 빛이 신앙의 근원이고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다. 속의 빛으로 방향 전환을 함으로서 모든 사람은 스스로가 절대진리를 자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그러므로 선악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폭스는 또한 그의 시대의 기성 제도교회(영국 성공회)를 비판하면서 참종교는 교회의 법규나 교리적으로 신성시화된 종교적 의식과는 별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폭스는 목사나 신부같은 제사장이나 사제 혹은 교리에 입각한 외면적인 성례전이 없이도 각 인간들이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한편 폭스의 {일지}를 통해서 청년 함석헌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기록된 자료가 없다. 단지 훗날 함석헌의 종교적 편력이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폭스가 주장한 속의 빛의 개념이 청년 함석헌의 마음에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되며, 동시에 함석헌이 기성교회의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격려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된다.

쉘리 (Percy B. Shelley) 역시 그의 삶이나 생각에 있어서 전적으로 과격한 비국교도였다. 영국의 명문 이튼 사립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다니던 쉘리는 그곳의 엄격하고 '비인간적인' 교육제도에 큰 회의와 반발을 느끼게 되었다. 전제적이고 '횡포적인' 이튼과 옥스포드의 교육 경험을 통해서 쉘리는 그의 전 삶을 불의와 억압에 대항해서 투쟁하기로 결단했다.
그후 옥스포드에서 추방된 쉘리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억눌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씨 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서 일했다. 그의 저서 {맵 여왕}(Queen Mab)을 통해 쉘리는 제도화된 종교를 비판했고 법전화된 도덕을 사회악의 뿌리로 보았다. 쉘리는 그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도록 힘썼으며 그의 시 또한 지속적으로 진리를 추구해가는 과정을 묘사했다. 그의 다양한 시들은 또한 생기발랄한 그의 직관과 신앙이 현학적 혹은 정주(定柱)성의 종교교리적으로 화석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단호한 그의 결의를 보여준다. 쉘리의 시는 또한 비범하고 폭넓은 그의 표현의 양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의 차분한 정열, 경건함, 영웅적 존엄성,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 그리고 계시적이고 예언적인 결론등이다.
쉘리의 활기에 넘친 시는 일제 식민지 정권 아래에서도 청년 함석헌에게 그의 조국에 장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적 마음을 심어 주었다. 특별히 함석헌은 쉘리의 시 {서풍에 부치는 노래}(Ode to the West Wind)중 마지막 줄에 강렬히 매혹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예언의 나팔소리! 오호 서풍이여,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또한 멀지 않았으리요?" 훗날 함석헌은 쉘리의 영향으로 {서풍의 노래}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고 {겨울이 만일 온다면}이란 제목으로 쉘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산학교에서의 왕성한 독서 이외에도 함석헌은 그의 다가오는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두 스승을 만나는데 그들은 남강 이승훈(1864-1930)과 다석 유영모(1890-1981)였다. 남강은 함석헌에게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다석은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동양의 고전 철학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젊은 함석헌의 인식변화와 세계관확립에 두드러진 영향을 남겼다.

남강은 어려서 고아로 자랐다. 그리고 11살 때부터는 공장에서 여러가지의 잡일을 배웠다. 그의 부지런한 열성과 끈질긴 인내심을 바탕으로 한 자수성가를 통해 남강은 스스로를 말단 공장 노동자의 신분으로부터, 일제하에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뛰어난 사업가의 신분으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러일전쟁 후 남강은 유교(儒敎)를 공부하기 위해 전통 서당에 다니게 되지만 지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1907년 남강은 우연히 젊은 도산 안창호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도산을 통해 남강은 기독교와 신교육, 애국심 앙양, 게으름 및 나태함 탈피 등의 중요성에 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남강은 도산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고 이 일은 남강이 사업가에서 교육가로 변신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 선교학자 알란(Allan D.Clark)이 지적했듯이 남강은 처음에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다음에 기독교로 전향했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는 상황을 깨달은 남강은 교육이 한민족이 생존을 위한 급선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08년 남강은 그의 민족애와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기독교학교인 오산고등학교를 창설했다. 그리고 그의 사업이익금으로 오산학교의 재정과 운영을 충당해 나갔다. 그후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남강은 그의 전 재산과 정열을 오산학교와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 결과 1911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남강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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