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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본] 고려도경-高麗圖經

 이름 : 

(2009-10-25 20:07:46, 5251회 읽음)

번역본 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  


선화봉사고려도경서 宣和奉使高麗圖經序


  천자가 정월 초하루에 큰 조회(朝會)를 갖는데, 뜰에다 사해(四海)의 도적(圖籍)을 다 늘어놓아 왕․공․후․백(王公侯伯)이 만국에서 모여들어도 그들을 다 헤아려 알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사(有司 도적을 관장하는 채임을 맡은 관원)가 그것들을 수장함이 특히 엄격하고 신중하며, 사신의 직책 중에서도 더욱이 이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옛날 주(周) 나라의 직방씨(職方氏)는 천하의 그림을 맡아 가지고 천하의 땅을 장리(掌理)하여 그 나라의 도비(都鄙 되회지의 변두리)와 사이(四夷)․팔만(八蠻)․칠민(七민)․구맥(九貊)․오융(五戎)․ 육적(六狄)의 인민을 분간하고 그 이해(利害)를 두루 알았던 것으로, 행인(行人)의 관권들이 도로에 연달아 있었다. 경축과 군대의 위문, 재앙의 불제(불除) 같은 따위의 행사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일치고 처리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안락과 재액․빈곤 같은 따위의 경우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분간치고 참고할 책이 없는 것이 없어, 그것들을 가지고 왕에게 복명하여 천하의 일을 두루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외사(外史)는 그 일들을 써서 사방의 지(志 관계기록)를 만들었고, 사도(司徒)는 그것들을 모아 토지의 그림을 만들고 송훈(誦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살필 일을 일러 주고 토훈(土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토지의 일을 일러 주었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존귀함으로 구중궁궐에 깊숙이 있어 높이 팔짱끼고 지내면서도 사방 만리의 먼 곳을 손바닥 가리키듯이 환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패공(沛公 후의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처은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갔을 떄 소하(蕭何)는 혼자서 진(秦) 나라의 도서(圖書)를 거둬들였는데, 천하가 평정되기에 이르러 한(漢)에서 그 요해지와 호구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소 하의 공로였다. 수(隋) 나라의 장손 성(長孫晟)이 돌궐(突厥)에 가서는 사냥 나갈 때마다 그 국토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하곤 하였고, 돌아와 문제(文帝)에게 표문(表文)을 올리고서는 입으로는 그 형세를 말하고 손으로는 그 산천을 그리곤 하다가 마침내 그 일로 후일의 보람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니 유헌(유軒 천자의 사자가 타는 수레)을 타고 다른 나라에 사신가는 자로서는 도적(圖籍)<의 수집 제작>이란 본래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하물며 고려는 요동(遼東)에 있어서,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와서 바칠 수 있는 후전근복(候甸近服 가까이 있는 복속 지역) 같지 않기 때문에 도적의 작성은 더욱 어렵다. 황제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으로 만국을 다 내조(來朝)하게하여 고려가 예우를 받도록 돌보았거니와, 신령하신 선왕께서는 더욱 따르게 만드시어 인재를 뽑아 조정에 있게하여 위무(慰撫)와 하사(下賜)의 어명을 받들게 하시었으니, 은혜의 융숭함과 예의 후함이 전례가 없었다.

이제 급사중(給事中) 신 윤적(允迪)은 경전에 통달한 재주와 세상에 뛰어난 문장으로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오랜 명망이 드러나 있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신 묵경(墨卿)은 학문의 훌륭함이 행실에 나타나 충효를 근엄하게 지키고 일에 임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사명을 받들고 가게 되었으니, 이들은 비단 부절(符節)을 가지고 전대(專對 타국에 사신가서 제대로 전달 하는 것)하는 것이 옛날의 선량한 사신에 못지않을 뿐더러, 풍채와 명망도 조정의 위엄을 드높이고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임명을 받고서 아직 떠나기 전에 마침 왕 우(王우)가 훙거하였음을 알게 되어 드디어 전제(典祭) 조위(弔慰)하는 예를 겸임하고 갔다.


나는 우매한데도 외람되이 결원에 충당되어 사신의 속관 말석에 끼게 되었다. 큰 일이야 물론 그 장(長)의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만, 단독으로 처리 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은 또 조정에서 자격에 따라 시킨 일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하다. 물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실하게 찾아서 묻고 의논하라’고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 일을 두루 묻는 것은 정사(正使)된 사람의 직책일 것이다. 그래서 삼가 이목이 미치는 데 따라 널리 여러 설을 채택하여, 중국과 같은 것은 뽑아 버리고 중국과 다른 것들을 취하니 도합 3백여 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그리고 일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하였다.

신이 숭녕(崇寧 송 휘종 (송휘종)의 연호. 1102∼1106)연간에 왕 운(王雲)이 찬술한 「계림지」(鷄林志)를 본 적이 있느데, 처음에는 그 설(說)을 해설하였으나 그 형상은 그렇지 않았다. 근자에 사신 행차 때 그것을 가져다 참고하였는데 도움이 이미 많았다. 이제 신이 저술한 「도경」은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고 하면 먼 이역땅이 다 앞에 모이게 되는데, 이는 옛날  쌀을 모아 지세의 모형을 만들던 유제(遺制)이다. 그렇기는 하나 옛날 한 대(漢代)의 장 건(張騫)이 월지(月지)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경우 월여를 머물렀을 뿐이요, 숙소가 정해진 귀에는 파수병이 지켜 문밖을 나가 본 것이 5~6 차례에 불과 하였다. 따라서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에 이목이 미쳐 간 것은 13년 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건국(建國)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대충 터득할 수 잇어서, 그것들을 그림과 기록에서 빠지지 않게 하였다. 감히 박식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들을 모아서 조정에 복명하여 명령받은 책임을 나소나마 면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어부(御府)에 바치라는 조명(詔命)이 있어 삼가 그 대강의 경위를 추려서 서문을 지었다.


선화 6년8월 6일


봉의랑(奉議郞) 충봉사고려국신소제할인선예물(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 사비어대(賜緋魚袋) 신(臣) 서 긍 근서(謹序)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 권


건   국  建國


이적(夷狄)의 군장(君長) 등은 거개 속임수와 폭력으로 스스로를 높이되, 이름이나 호(號)를 별나고 괴상하게 하여 ‘선우’(單于)니 ‘가한’(可汗)이니 하나, 족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오직 고려(高麗 우리나라의 범칭)는 기자(箕子)가 봉(封)해졌을 때부터 덕(德)으로 후(侯)가 되었는데 후대에 점점 쇠약했으며 타성 (他姓 기자 이후의 여러 왕조를 뜻한다) 역시 한(漢)나라 작(爵)을 써서 갈음하여 그 자리를 차지아었으니, 위로는 떳떳한 높임이 있고 아래로는 차등이 있다. 그러모로 나라를 이어받고 재를 전하여 감에 있어 자못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이제 모든 사적을 고찰하고 그 억대의 왕을 서차(序次)하여 이 건국기(建國記)를 짓는다.



시   봉  始封


고려의 선조는 대개 주 무왕(周武王)이 조선(朝鮮)에 봉한 기자(箕子)서여 (胥餘 기자의 이름)이니, 성은 자(子)이다. 주(周)․진(秦)을 지나 한 고조(漢高祖) 12년(箕準(기준)26,B.C.195)에 이르러 연(燕) 나라 사람 위 만(衛滿)이 망명(亡命)할 때에 당(黨)을 모아 추결(椎結 상투를 가리킨다)하고 와서 오랑캐를 복속시켜 차차 조선 땅을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자성(子姓)이 나라를 차지한 지 8백여 년 만에 위씨(衛氏)의 나라가되었고 윘가 나라를 차지함이 80여 년이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에 비추임을 받아 감응되어 임신하였으며 알(卵)로 낳았다.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세속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위 출생이 이상했던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이 두려워서 도망하다가 큰 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매 활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랐다. 그리하여 타고 건너가 흘승골성(紇升骨城 만주 흔강(흔江) 유역의 환인(桓仁)지방으로 비정(批定)된다.)에 이르러 살면서 그 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고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모두 5 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가 이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縣도郡)에 소속시키고, 그 군장(君長)에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주었다. 고려는 늘 현도군에 가서 조복(朝服)․의복․책(책 머리에 쓰는 건의 하나)을 받아왔고, 현령(縣令)이 명적(名籍 장부)을 맡아 보았다.


뒤에는 점점 교만하여져 다시 군(郡)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군에서 동쪽경계에 자그마한 성을 쌓고 세시(歲時)에 받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그 성을 ‘책구루’(책溝루)라고 이름하였는데, 고려 말로 성을 ‘구루’라 한다. 그리고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왕 망(王莽)이 고려 군사를 출동시켜 흉노(匈奴)를 치려고 했으나 가지 아니하매 왕을 낮추어 후(侯)로 삼으니, 이 때문에 고려 사람들이 더욱 그의 국경을 침범했다.


광무(光武 동한 (東漢)의 시조 유수(劉秀))가 중흥하여 변방에 관원 보내는 것을 폐지하매, 건무(建武 광무의 연호) 8년(32)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朝會)하러 갔다. 따라서 왕호(王號)를 복구시켜 주고 외번(外藩)의 반열(班列)에 끼위 주었다.


안제(安帝 후한 제6대 임금) 이후에는 5부(部)의 민중이 번성하여 비록 다소 초포(초暴)함이 있었으나, 곧 되돌아서 빈복(賓服)하였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 출신이 왕이 되었었는데 쇠약하여지매, 계루부(桂婁部)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 궁(宮)에까지 이르렀는데,궁(宮)은 태어나서 바로 눈을 뜨고 능히 봤으므로 나라 삶들이 미워했다. 궁은 장성하여 매우 건장하고 용맹스러워, 화제(和帝 동한 제 5대 임금) 때에 자주 요동(遼東)을 침략했다. 그리하여 백고(伯固)왕까지 전하여 갔고 백고가 죽자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인 발기(拔奇)는 불초(不肖)했기 때문에 동생인 이이모(伊夷模)를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한(漢) 나라 말기에 공손 강(公孫康 요동태수 공소 도(公孫道)의 아들)이 이이모를 그 나라 환도산(丸都山) 아래에서 격파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위궁(位宮)을 세웠는데, 위궁 또한 용력(勇力)이 잇어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의 선조(先祖) 궁(宮)이 출생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보았는데, 지금 왕도 역시 그러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위(魏) 나라 장수 관구검(관구儉)이 쳐들어와 무찌르고 숙신(肅愼 여진․말갈족의 전신)에까지 추격해 가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하고 돌아갔다.

위궁의 5대손 유(劉)가 진(晉) 나라 영가 (永嘉 회제(懷帝)의 연호 307~321)연간에 요서(遼西)의 선비족(鮮卑族)인 모용 외(慕容외 전연(前燕)의 무선제(武宣帝))와 이웃하였었는데, 모용 외도 억제하지 못하였다. 강제(康帝)건원(建元)초에 모용 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煌)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가 크게 격파시켯는데, 귀에 백제에게 멸망되었다.

그 뒤에 모용 보(慕容寶)가 고구려 왕 고 안 (高安)으로 평주목(平州牧)을 삼았다. 안의 손자 연(璉)이 의회(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연호. 405~418) 연간에 장사(長史) 손익(孫翼)을 보내어 자백마(자백馬)을 바치니, 영주목 고려왕 낙랑군공(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을 삼았다.


연(璉)의 7대손 원(元)이, 수 문제(隨文帝) 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침범했고, 당 태종(唐太宗) 때에는 동부(東部 순노부 順奴部)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하고 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정벌하여 위엄이 요동에 떨쳤다.


고종(高宗 당 나라 제3대 임금)이 또한 이 적(李勣)을 명하여 가서 평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 고 장(高藏)을 사로잡고 그 땅을 갈라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며,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지켰다.


뒤에 무후(武后)가 장수를 보내어 그 왕 걸곤우(乞昆羽)를 죽이고 걸중상(乞仲象)을 왕으로 세웠으나 또한 병으로 죽으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 대조영(大祚榮))이 즉위하였고 따라서 그민중 40 만을 차지하여 읍루(挹婁)에 웅거하여 당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중종(中宗 당 나라 제4대 임금)때에 와서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고 종영으로 도독 발해군왕(都督渤海郡王)을 삼으니, 그 뒤부터 드디어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처음에 고 장(高藏)이 사로잡혔을 적에, 그 추장(酋長)에 검모잠(劍牟岑)이라는 자가 있어 고 장의 외손자 순(舜)을 왕으로 세우니, 또 고 간(高간)을 시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미 누차 옮겨져 옛성이 신라(新羅)로 들어간 것이 많게 되매, 유민들이 돌궐(突厥)‧말갈(靺鞨)에 분산되었다.




고씨(高氏)가 이미 멸망되었으나 오랜 뒤에는 점차 회복되어, 당 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 노릇 하였고 후당(後唐) 동광(同光 장종(莊宗)의 연호) 원년(923)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었는데, 국왕(國王)의 성씨(姓氏)를 사관이 빠뜨리고 기재하지 않았다.




장흥(長興 후당 명종의 연호) 2년(931)에 왕 건(王建)이 나라 일을 권지(權知)하여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드디어 작위(爵位)을 받아 나라를 차지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권







세   차  世次




사가(史家)의 방법이, 시대가 먼 것을 전하기는 간략하게 하고 가까운 것은 상세하게 한다고 한다. 고려(高麗)의 역대 임금은 이미 앞에 대략 서술하였거니와, 지금 왕씨(王氏)가 나라를 세워 여러 세대 동안 본조(本朝송나라말한다 )를 존대하여 섬겼고 왕 우(王우)와 지금 왕 해(楷)에 이르러서는 또한 대접하는 예(亨禮)를 더 후하게 하였으니, 조목조목 드러내지 않을 수 없기에, 그 세차(世次)와 종계(宗系)를 적은 다음에 이어서 해(楷)의 행적을 기록한다,







왕   씨  王氏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君長)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명종(明宗)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하니, 곧 왕건에게 원도주 도독(元도州都督)을 제수(除授)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여 고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진(晉)나라 개운(開運)2년에 왕건이 죽고 아들 무(武)가 즉위하였으며, 한(漢) 나라 건우(乾우) 말년에 무가 죽고 아들 소(昭)가 즉위하였다.




황조(皇朝) 건륭(建隆) 3년에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등극(登極)하여 만국(萬國)을 다 차지하매 소(昭)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으므로, 공신(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이어 식읍(食邑)을 주었다.




개보(開寶) 9년에 소가 죽고 아들 주(주)가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봉작(封爵)을 청하므로 고려 국왕으로 봉하였고, 태종 황제(太宗 皇帝)가 즉위하여 대순군사(大順軍使)로 고쳐 봉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에 주가 죽으매, 아우 치(治)가 글을 올려 계승하여 봉작 받기를 원하므로 조칙(詔勅)을 내려 허락하였다. 순화(淳化) 6년에 글안(契丹)이 공격하자 치가 나약하여 지키지 못하고 북로(北虜)를 신하로 섬기면서 드디어 조공(朝貢)을 하지 않았다.




치가 죽고 아우 송(誦)이 즉위하였다. 함평(咸平) 3년에 그의 신하 주 인소(朱仁紹)가 조회하러 들어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황제의 덕화(德化)를 사모하나, 강한 오랑캐에게 핍박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포상하고 효유(曉諭)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에 송이 죽고 아우 순(순)이 나라일을 권지(權知)하여 글안을 크게 깨뜨리고 다시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존호(尊號)를 내릴 것과 정삭(正朔)의 반사(頒賜)를 바랐고, 또한 봉책(封冊)을 청하였다. 진종 황제(眞宗皇帝)는 처음에 그대로 따르려고 하다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따라서 조서만 내렸다.




천성(天聖) 연간에 사신이 여려 번 여진(女眞)과 함께 와서 방물(方物)을 조공하므로, 천자가 은혜를 내려 보답하는 예(禮)를 특별히 두텁게 하였다.




순이 죽고 아들 융(隆)이 즉위했는데,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로(北虜)를 꺼리다가 드디어 다시 신하로 그들을 섬겼다. 그리하여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융이 죽으매, 정(正)이라고 사시(私諡)하였다.




아들 덕왕(德王) 흠(欽)과 흠의 아우 목왕(穆王) 형(亨)도 모두 조공하러 오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사신 보내는 것을 폐지했다.




형의 아우 휘(徽)가 희령(熙寧) 4년에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방물(方物)을 조공하였고 7년과 9년에 사신이 거듭 왔으므로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원풍(元豊) 원년(元年)에 좌 간의대부(左諫儀大夫) 안도(安燾)로 국신사(國信使)를 삼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건너갔었다.




이때 휘(徽)는 풍병(風病)으로 마비되어 겨우 명령을 받았고, 또한 의약(醫藥)을 청하므로 상께서는 그가 아뢴것을 보고 그대로 따랐다. 3년과 4년에도 계속 사신이 와서 조회했다. 6년에 휘가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 무릇 38년이었고 시호를 ‘문(文)’이라고 했다.




세자(世子) 훈(勳)은 즉위한 지 백일 만에 죽고 아우 국원공(國原公) 운(運)이 즉위했는데, 이때에 좌 간의대부 양 경략(楊景略)을 제전사(祭奠使)로, 예빈사(禮賓使) 왕 순봉(王舜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우 간의 대부(右諫議大夫) 전협(錢협)을 조위사(弔慰使)로, 서상합문 부사(西上閤門副使) 주구(朱球)를 부사로 임명하여, 7년 7월에 밀수(密水) 판교(板橋)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8년에 철종 황제(哲宗皇帝)가 즉위하매, 위문하는 사신과 하례하는 사신을 함께 보내왔다.




운(運)이 즉위한지 4년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宣)’이라고 했다. 아들 요(堯)는 즉위한 지 1 년도 못되어 병으로 폐위(廢位)되매, 나라 사람들이 그의 숙부(叔父) 희(熙)에게 섭정(攝政)하기를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요가 죽으니, 시호를 ‘회(懷)’라고 했다. ]




희가 곧 왕위를 승습하여, 원우(元우) 5년에서 원부(元符) 원년까지에 공사(貢使)가 두번이나 왔다. 그래서 3년에 무마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은 원풍(元豊)때의 고사에 따른 것이다.




황제(皇帝)가 왕위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이루고 거룩하게 선조들의 업적을 계승하매, 사해(四海)의 안팎이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덕이 번복(藩服)에 덮이고 은혜가 사해에 퍼졌다.




그리하여 숭녕(崇寧) 원년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식)을 명하여 절(節)을 가지고 사신가도록 하되, 예물(禮物)을 풍성하게 하고 은륜(恩綸)이 분명하였다. 이는 고려에 은덕을 내리어 상주어 신임하고 무마함으로써 신고(神考)의 뜻을 더욱 거룩하고 훌륭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2년 5월에 명주도(明州道) 매잠(梅岑)에서 바다를 건너갔는데, 이때 희(熙)가 글안(글안) 왕의 이름을 혐명(嫌名)하여 희(熙)를 고쳐 옹(옹)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고(神考) 때부터 시작하여 힘써 먼 나라 사람들을 오도록 하매, 하늘이 슬기로운 계책을 도와 주어 고려 임금 휘(徽)가 봉작(封爵)을 승습하고 그 뜻을 이어 받드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휘는 충순(忠順)하여 사리를 따르며 중국을 높일 줄 알고, 사신을 대접하는 예와 뜻이 근간하고 후하였으며 장사치를 대접하는 데 있어서도 역시 체모가 있었고 정사는 인자와 용서를 숭상하니, 나라를 장구하게 누림이 당연하다. 숭녕(崇寧) 2년에 옹(옹)이 죽으니 나이 50세였고, 세자 오(우)가 즉위하였다.




장흥(長興) 3년 임진(任辰)으로부터 금상(今上) 선화(宣化) 6년 갑진(甲辰)까지 왕씨가 나라를 차지한지 9세(世)인데, 무릇 17인으로서 합하면 1백 93년이다.







세계  世系




건(建)󰠏󰠏 무(武)󰠏󰠏󰠏 소(昭)󰠏󰠇󰠏 주




                        󰠉󰠏 치(治)




                        󰠉󰠏 송(誦)




                        󰠌󰠏 순(詢) 󰠏󰠏 융(隆)󰠏󰠇󰠏 흠(欽)




                                           󰠉󰠏 형(亨)




                                           󰠌󰠏 휘(徽) 󰠏󰠇󰠏󰠏 훈(勳)




                                                     󰠉󰠏   운 (運) 󰠏󰠏󰠏󰠏 요(堯)




                                                     󰠌󰠏󰠏  옹  󰠏󰠏󰠏󰠏 우  󰠏󰠏󰠏󰠏 해(楷)







고려국왕  왕  해  高麗國王王楷




해(楷)는 왕 우(王우)의 세자이다. 임인 봄 3월에 우가 병이 위독하매 이 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 일을 의논했었는데, 4월에 우가 죽자 이 자겸 등이 곧 해를 세워 왕을 삼았다.




해는 용모가 준수하고 몸집은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뼈보다 많다. 성격이 지혜로와 배운 것이 많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며, 동궁(東宮)에 있을때 관속(官屬)들이 과오를 범하면 반드시 꾸짖음을 당했고 즉위하여서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 관원들이 자못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번에 신사(信使)가 가매, 그가 조서(詔書)와 표문(表文)을 받고 연향(燕饗)하는 예를 거행하는데,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감이 여유가 있어 성인(成人)의 풍토가 있으니, 역시 동이(東夷)의 어진 왕이 됨직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성   읍  城邑




사이(四夷)의 군장(君長)들이 흔히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다니기를 편리하게 여겼으므로, 원래부터 나라에 도읍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역(西域)의 거사(居師)․선선(선善) 등 나라가 겨우 담장을 쌓아 거성(居城)으로 만들 줄 알았으므로, 사가(史家)들이 그것을 가리켜 ‘성곽 제국(城郭諸國)’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읍(邑)에는 가옥(家屋)을 만들고 주(州)에는 마을문을 세웠고, 높은 성첩(城堞)을 둘러 쌓아 중화(中華)를 모방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封爵)받은 옛땅이라서 중화의 전해 오는 풍속과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정에서 간간히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경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이제 그 나라를 세운 형세를 모두 파악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봉   경  封境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소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글안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희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는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내州)․빈주(濱州)․체주(체州)와 서로 바라다보인다.




원풍(元豊) 이후부터 매양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려면, 언제나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출항(出航)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배 운행은 모두 하지(夏至)뒤에 남풍(南風)의 바람 편을 이용하는데, 5일이 못되어 곧 해안(海岸)에 닿는다.




옛적에는 봉경(封境)이 동서는 2천여 리, 남북은 1천 5백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글안(契丹)과 연속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글안에 소속되었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케 민중이 이미 멸망되었고, 금(金) 나라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黃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이 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가신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찌기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형   세  形勢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계책을 할 수 있는 곳인 연후에 자리잡는다.




한(漢) 나라 말엽(末葉)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옮겼고, 후위(後魏)부터 당 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平壤)에 있다가, 이 적(李勣)이 그 곳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도망하여 점점 동쪽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 곳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당 나라 말엽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곧 지금 도읍한 곳에 해당되는데, 대개 전에 개주(開州)이던 곳으로, 지금도 오히려 개성부(開城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城)은 북쪽으로 숭산(崧山)에 의지했는데,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내려오다가 산 등성이에 이르러서는 점차 나뉘어 두 줄기가 되어 다시 서로 감고 돌았으니, 음양가들이 말하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줄기이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商)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게 보이면 흥하는데, 건(乾)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卦)이다. 뻗어내린 등성이가 해방(亥方)으로 나갔는데,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정남(正南)으로 돌아나와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형상이 동이를 엎어놓은 것 같고, 따라서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밖에 또 안산 하나가 있어 그 높이가 배나 되는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丙)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壬)에 있다. 물은 숭산(崧山) 뒤에서 발원(發源)하여 북쪽으로 곧게 북쪽(子位)으로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랑)에 이르러 꾸불꾸불하게 성으로 들어와 광화문(廣化門)에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金)이 되고 금의 장생방(長生方)은 동남쪽(巳方)에 있는 것이니,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시냇물을 마시는 푸른 용’과 같으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역년(歷年)을 오래도록 보유하면서, 항시 성조의 속국이 됨직하였다.







국   성  國城




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 낙랑군(樂浪郡)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려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밖에 참호(塹壕)와 여장(女墻)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장(兵仗)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게 되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 있어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열 두 외문(外門)에 각각 표시한 이름이 있었느데, 옛 기록에는 겨우 그 중 7곳을 말했으나 지금은 다 알 수 있다. 정동(正東)에는 선인(宣仁) 숭인(崇仁) 안정(安定)이 있고, 동남에는 장패(長覇)가 있고, 정남에는 선화(宣華) 회빈(會濱) 태안(泰安)이 있고, 서남에는 광덕(光德)이 있고, 정서에는 선의(宣義), 산예(산猊)가 있고, 정북에는 북창(北昌)이 있고, 동북에는 선기(宣祺)가 있다.




서남 모퉁이에는 왕부(王府), 궁실(宮室)이 있고, 그 동북 모퉁이에 있는 것이 곧 순천관(順天館)인데 매우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으며, 서문(西門)도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니, 대개 중국에서 사신 오는 사람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경시사(京市司)에서 흥국사(興國寺) 다리까지와, 광화문(廣化門)에서 봉선고(奉先庫)까지에 긴 행랑집 수백 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민중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질서가 없고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리워 사람들에게 그 누추함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남쪽의 문은, 대개 시냇물이 동남쪽(巳方)으로 흐르니 모든 물이 모이게 되는 곳이요, 그 나머지 모든 문과 관부(官府), 궁사(宮祠), 도관(道觀), 승사(僧寺), 별궁(別宮), 객관(客館)도 모두 지형에 따라 여러 곳에 별처럼 널려 있다.




백성들의 주거는 열 두어 집씩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고, 정읍(井邑)과 시가(市街)에는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상으로 건국(建國)의 대략을 총괄하여 그렸고, 그 나머지는 딴 편(篇)에 간간이 나와 있다.







누   관  樓觀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이 상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만들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양쪽과 국상(國相),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집 가량에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각이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것은 ‘박제(搏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각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눌러 올 때면 그 안의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민   거  民居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어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전에는 전하기를 ‘창우(倡優)들이 사는 집은 긴 장대를 세워 양가(良家)와 구별한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지나치게 귀신을 받들고, 또한 기양(祈禳)하는 기구를 더없이 좋게 하는 것뿐이었다.







방   시  坊市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리웠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孫)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가구(街구)나 시정(市井)은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 뿐이다.







무   역  貿易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오게 되면 사람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物貨)를 나열하느데, 붉고 검은 비단은 모두 화려하고 좋도고 힘쓰고, 금과 은으로 만든 기용(器用)은 모두 왕부(王府)의 것을 때에 맞추어 진열하나, 실제로 그 풍속이 그런 것은 아니다. 숭녕(崇寧)이나 대관(大觀) 때의 사자는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거사(居肆)는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 노소, 관리, 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천화(泉貨)를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 은병(銀甁)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치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군   읍  郡邑




주현(州懸)의 설치는 명칭이 맞지 않고, 취락(聚落)이 번성한 곳일 뿐이다. 나라의 서북(西北)으로부터 글안(글안), 대금(大金)의 접경(接境)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보루(堡壘)와 참호가 있고, 그 동남쪽은 해변에 닿았는데 섬에도 설치한 것이 있다.




오직 서경(西京)이 가장 번성하여 성과 시가가 대략 왕성(王城)과 같다. 또한 3경(京), 4부(府), 8목(牧)이 있고, 또 방어하는 군(郡) 1백 18과 현진(縣鎭) 3백 90과, 주도(洲島) 3천 7백을 설치하고 모두 수령(守令), 감관(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그런데 목(牧), 수(守), 도호(都護)의 공해(公해)만은 여러 간이고, 영장(令長)은 소재에 따라 거주하는 백성들의 집에 거처한다.




고려의 정사는 조부(組賦)이외의 송사는 없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공전(公田)으로 비용을 충당할 수 없으면, 부유한 백성에게서 공급받게 된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 권







문   궐  門闕




황제(黃帝 중국 전설상의 제왕


)와 요․순(堯舜)은 예방하기를 숭항하여 겹문을 설치하고 딱다기를 쳐서 폭객(暴客 도적)을 대비했고, 후세의 성인들은 또 존비(尊卑)를 나누어 등급을 만드었기 때문에, 천자(天子)의 문(門)은 고문(皐門)․고문(庫門)․치문(雉門)․응문(應門)․노문(路門)이라하여 모두 다섯문이고, 제후(諸侯)들은 이 중 두문을 없애고 고문․치문․노문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노(魯)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손으로서도 치문(雉門)에 새로 두 누관(樓觀)을 지었다가 「춘추」(春秋)의 꾸지람을 면하지 못하였기거든, 더구나 그 나머지 제후들이겠는가?




고려의 궐문(闕文) 제도는 자못 옛 제후의 예(禮)를 따랐다. 비록 그들이 누차 상국에 빙문다니며 본떠다가 모방한 것이나, 재목이 모자라고 기술이재목이 모자라고 기술이 졸렬하여 결국 투박하고 누추했다고 한다.







선의문 宣義門




선의문은 곧 왕성의 정서쪽 문인데, 서(西)는 금방(金方)으로서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에선 의(義)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하게 된 것이다. 정문은 이중으로 되었고, 그 위에 누관이 있는데, 합쳐 옹성(瓮城 큰 성문 밖 작은 성)이 되어 있고, 남․북 양편에 따로 문을 내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각각 무부(武夫)가 수위하고 있다.




중문(中門)은 늘 열어놓지 않고 오직 왕이나 사자가 출입할 떄만 열고 나머지는 모두 편문(偏門)으로 다닌다.




벽란정(碧蘭亭)에서 서교(西郊)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문을 지나야 관(館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왕성의 문으로는 오직 이 문이 가장 크고도 화려하다. 그런데 이 문은 국조(國朝 송나라 조정)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외문 外門




왕성의 모든 문은 거개 초창기(草創期)에 만든 것인데, 선의문(宣義門)은 사자(使者)가 출입하는 곳이고, 북창문(北昌門)은 사자가 회정(回程 돌아가는 길)하거나, 사묘(祠廟)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아주 엄숙하게 꾸며져 다른 문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회빈문(會賓門)․장패문(長覇門) 등부터는 그 제도가 대략 같은데, 오직 그 한가운데에 쌍문을 만들어 존비(尊卑)에 구애없이 모두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성은 모두 양쪽을 나무로 받치고 철통(鐵筩)으로 보호하였으며, 위에는 작은 행랑집을 지었는데 산 지형의 높고 낮은 대로 쌓았다.




아래서 숭산(菘山) 등성이를 바라보면, 성의 담장을 빙 두른 것이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과 같다.




장패문은 안동부(安東府)로 통하고, 광덕문(光德門)은 정주(正州)로 통하고, 선인문(宣仁門)은 양주(楊州)․전주(全州)․나주(羅州) 등 3주로 통하고 숭인문(崇仁門)은 일본으로 통하고, 안정문(安定門)은 경주(慶州)․광주(廣州)․청주(淸州) 등 3주로 통하고, 선기문(宣祺門)은 대금국(大金國)으로 통하고, 북창문은 삼각산(三角山)으로 통하는데, 신탄(薪炭 땔나무와 숯)․잣[松子]․포백(布帛)이 나는 지방이다.







광화문 廣化門




광화문은 왕부(王府)의 편문(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선의문과 같은데, 유독 옹성(瓮城)이 없고, 문채나게 꾸민 공력은 더했다.




역시 3문을 냈는데, 남쪽 편문에는 의제령(儀制令) 4가지 일을 방시(榜示)했고, 북쪽 문에는 건괘(乾卦)의 요사(繇辭) 5글자 건(乾)․원(元)․형(亨)․이(利)․정(貞)을 방시했으며, 또한 춘첩자(春帖字 입춘날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가 있는데,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렸도다.                  袞龍布上瑞光浮




라고 했다.







승평문 昇平門




승평문은 곧 왕궁(王宮)의 정남문이다. 위에는 겹으로 누각을 만들고 곁에 두 누관을 세웠으며, 3문을 죽 늘어세워 제도가 더욱 굉장하고 웅대한데, 문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화주(銅火珠 문짝에 붙이는 장식)로 장식이 되어 있다.




문 안에서부터 좌우로 나누어 두 개의 정자를 만들고 모두 ‘동락정’(同樂亭)이라고 했다. 작은 담장 몇 백이 서로 연속되어 신봉문(神鳳門)까지 이르렀는데,  문의 제도는 승평문보다도 웅장하고 컸다. 동쪽 문에는 ‘춘덕’(春德)이라고 편액했는데 세자궁(世子宮)으로 통하고, 서쪽 문은 ‘태초’(太初)라고 했는데, 왕이 거처하는 비좌(備坐)와 통한다.




또 10여 보(步)쯤 가면 창합문(閶闔門)이 있는데, 이는 왕이 조서(詔書)를 받는 곳이다. 좌우 양쪽에 승천문(昇天門)이 있고, 여기서부터 위로는 산세가 점차 급하고 뜰이 좁고, 회경전 문과의 거리가 두어 장(丈)에 지나지 않는다.




승평․신봉․창합 3문의 제도와 채색은 대개 서로 비슷한데, 신봉문이 으뜸이다. 제방(題榜)의 글씨는 붉은색 바탕에 금자(金字)로 씌여 있는데, 구 솔경(歐率更)의 글씨체이다. 대개 고려 사람들은 거개 옛 체를 법받았고, 감히 억설(臆說)이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망령되어 속체(俗體)를 쓰지 않는다.







동덕문 同德門




동덕문은 좌우로 두 문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것이 곧 승평문이다. 모양과 제도는 대략 전문(殿門)과 같아 매우 높으나, 대관(臺觀)이 없다.




창덕(昌德)․회빈(會賓)․춘궁(春宮)․승휴문(承休門)은 그 제도가 동덕과 다르지 않은데, 특히 합문(閤門)․승천(承天) 두 문이 조금 좁을 뿐이다.







전문 殿門




회경전(會慶殿)의 문은 산 중턱에 있고 돌사닥다리 높이가 5장(丈) 가량인데, 이것이 정전(正殿)의 문이다. 3문을 나란히 세웠는데, 중간 문은 오직 조서를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왕과 사신은 좌우로 나누어 통행한다.




문밖에 창 24자루를 늘어 세웠고, 갑주(甲冑)를 입은 군사가 의위(儀衛)를 담당하고 수위병이 매우 많아서, 다른 문보다도 특히 엄중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5 권







궁   전 1  宮殿一




신종황제(神宗皇帝)가 크게 문교(文敎)를 펴 먼 나라까지 미치매, 보물을 바치고 알현(謁見)하려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답지하였다.




그 가운데 고려에게만 더욱 예우(禮遇)하여 주고, 따라서 근시(近侍)를 사신으로 보내어 무마하였으며, 일찍이 예지(睿旨 황제의 분부)를 내렸다.




무릇 접견하는 궁전 이름과, 대마루 끝 기와에 솔개 꼬리 장식하기를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오랑캐를 작은 일을 가지고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하동(夏童)이나 북로(北虜)들은 털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가지고 사철 물과 풀이 있는 온화하고 시원한 곳을 따라 옮겨다니고, 처음부터 일정한 도읍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전대(前代)의 역사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데,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농지가 작아 힘써 지어도 자급(自給)할 수 없으며 그 풍속은 음식을 절제하고 궁실(宮室)을 수축(修築)하기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대마루는 웃긋불긋 문채나게 꾸며져 바라보면 담담(潭潭 깊고 넓은 모양)한 듯하고, 숭산(崇山) 등성이에 의지하여 있어서 길이 울퉁불퉁하고 걷기 어려우며, 고목(古木)이 무성하게 얽히어 자못 악사(嶽祠)․산사(山寺)와 같다.




지금 그 형상과 제도를 그리고, 그 명칭은 그대로 써 둔다.







왕부 王府




왕부에는 내성(內城)이 둘려 있고, 열 세 군데의 문에는 각각 편액(扁額)이 걸렸는데, 방향에 다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광화문(廣化門)이 정동(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고, 전문(殿門)은 15개인데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




내부(內部)는 16부인데 상서성(尙書城)이 우두머리가 된다. 아홉 궁전은 모양이 같지 않은데 회경전(會慶殿)이 정침(正寢)이고, 세 각(閣)이 대치해서 있는데, 청연각(淸燕閣)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또 작은 전(殿)이 있어 연거(燕居 한가로이 거처하는 곳)하는 곳으로 쓴다.




날마다 편좌(便坐)에서 정사(政事)를 보는데, 오직 인욕(茵褥)을 탑(榻)위에 깔았다. 국관(國官)이나 친시(親侍)들이 그 곁에 꿇고 늘어 앉아 왕의 분부를 받아 차례로 전달한다.




대신은 5일에 한 번씩 알현(謁見)하는데 따로 정사를 의논하는 당(堂)이 있고, 나머지 관원들은 매달 1일과 15일 이외에 4차례 왕에게 알현하여 분부를 받는다. 분부 받을 일이 있으면 상주관(上奏官)이 문에 서서 받는데, 섬돌에 올라갔다 자리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신을 벗고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가며, 궁정(宮廷)에서 추창(趨蹌 예도에 맞도로 허리 굽혀 빨리 걷는 것)할 때에는 반드시 왕을 향하여 절을 하니, 그 조심함이 이와 같다.




나머지 옥우(屋宇)에 있어서는 모두 초창(草創)한 것으로서 이름이 실재보다 과하여 상세히 기록할 것이 못되므로 가려서 그렸는데, 여타의 편(篇)에 섞여 보이기도 한다.







회경전 會慶殿




회경전은 창합문(閶閤門) 안에 있는데, 따로 전문(殿門)이 있고,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터의 높이는 5장(丈)이 넘고, 동․서 양쪽의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동화(銅花 구리로 꽃무늬를 만든 것)로 꾸몄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여 모든 전(殿) 중에 제일이다.




양쪽 행랑은 모두 30간이고, 뜰안은 벽돌로 깔았는데 견고하지 못하여 다니면 소리가 난다.




상례(常禮 보통의 예법) 때에는 감히 거처하지 않고 오직 사신(使臣)이 오게 되면 뜰아래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표문(表門)도 받는다. 연회(燕會) 때에는 정사와 부사의 자리를 전(殿)의 서영(西楹)에 동으로 향하여 차리고, 상절(上節)들은 동서(東序), 중절(中節)은 서서(西序), 하절은 문의 양쪽 행랑에 자리하여 북으로 향한다.




나머지 예식(禮式)은 딴 전(殿)에서하여 구별한다.







건덕전 乾德殿




건덕전은 회경전의 서북쪽에 있는데, 따로 전문(殿門)이 있고, 그 제도는 5간으로 되어 회경전과 비하여 조금 작다.




예전에는 사신이 거기에 가면, 제3차 연회 때에 왕의 예(禮)가 더욱 근간하여 특별히 궁녀를 불러 모시도록 하고 그 속에서 잔치를 하였다 한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해(楷 인종의 이름)가 의복제도에 구애되어 시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회경전에서와 같이 수작(酬酌)하고 그쳤다.




만약 중국에서 보낸 자이면, 조정에서 보낸 사신이 아니고 군리(郡吏)로서의 사신이 통첩(通牒)을 가지고 가 명령을 전하더라도 역시 이 전에서 잔치하나, 다만 예의 절차에 차등이 있을 뿐이다.







장화전 長和殿




장화전은 회경전 뒤 북으로 뻗은 하나의 멧부리에 있는데,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모양과 제도가 더욱 좁아 건덕전만 못하다.




양쪽 행랑은 모두 탕장(帑藏 왕실의 창고)인데, 동쪽 행랑에는 성조(聖朝 송나라를 말한다)에서 내린 내부(內府)의 보물을 저장하고, 서쪽 행랑에는 그 나라의 금백(金帛) 따위를 저장한다. 경비하는 병졸이 다른 곳보다 더 많다.







원덕전 元德殿




원덕전은 장화전 뒤에 있다. 지형이 더욱 높고 만듦새가 초라하다. 듣건대, 그 왕이 늘 거처하지 않고, 오직 이웃나라가 침범하거나 변방이 시끄러우면, 거기로 나아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키게 하고 만약 중요한 인사(人士)를 죽이려면 친밀한 근신(近臣) 1~2인과 여기에서 의결(議決)한다고 한다.







만령전 萬齡殿




만령전은 건덕전 뒤에 있는데, 터와 구조가 조금 작으나 문채나게 꾸며 화려하니, 이것이 침실이다. 비빈(妃嬪)과 시녀들이 양편 행랑에 방을 잇대어 빙 둘러 거처하는데, 숭산(菘山) 중턱에서 그 방안을 내려다보니 또한 그다지 넓지 않았다. 생각건대, 그 궁녀가 시녀의 수도 역시 그 방의 수와 같은 듯 싶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6 권







궁   전 2   宮殿二







장령전 長齡殿




장령전은 건덕전 동쪽 자문(紫門) 안에 있고 그 제도는 3간인데, 비록 화려함은 만령전(萬齡殿)만 못하나 규모는 크다.




매양 중국에서 사자가 고려에 가려면, 기일에 앞서 반드시 먼저 보내는 소개서(紹介書) 가 있는데, 그 연락이 오면 여기에서 받는다. 고인(賈人)이 국경에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맞아 위로하고, 사관(舍館)이 결정된 뒤에 장령전에서 그가 바치는 것을 받고서 그 값어치를  계산하여 방물(方物)로 두 배쯤 되게 보상한다.







장경전 長慶殿




장경․중광(重光)․선정(宣政) 3 전(殿)은 옛 기록에 비록 그 이름이 실려있으나 지금 듣건대, 중광전․장경전을 중수하여 딴 전(殿)으로 바꾸었다 하니, 아마도 지금 전각(殿閣)을 세운 곳이 선정전으로서 곧 외조(外朝 군왕이 국정을 듣는 곳)인 것 같고, 이곳에서 세시 (歲時)에 그 신하들과 모여서 연회를 베푼다. 왕의 탄일(誕日)에도 명절 이름을 붙였으니, 왕 우(王俁)가 8월 17일 출생했으므로, 그 날을 ‘함녕절’(咸寧節)이라고 부른다.




그 날은 공족(公族)․귀신(貴臣)․근시(近侍)들을 장경전에 크게 모으고, 중국 고인(賈人)으로 사관에 있는 사람에게도 역시 관원을 보내어 자리를 마련하되, 화․이(華夷 중국과 고려) 두 가지 음악을 쓰며 또한 치어(致語 임금에게 올리는 송덕문(頌德文))가 있다.




그들이 노래 부른 것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궁궐 숲에 서기 비치어                                    宮時端色照宮林




무르녹은 화기에 쌓인 음기 걷히었네                            和氣濃濃破積陰




집집마다 향불 피워 국운을 빌고                                香火千家祈國壽




두 나라 음악에 손인 마음 즐거우리                            笙歌二部樂賓心




취기 돌자 햇살 주렴에 옮겼고,                                 興酣日影移珠箔




춤을 끝낸 기생 머리 옥비녀가 삐딱.                             舞罷花枝倒玉簪




부디 좋은 때 실컷 즐겨야 하니                                須盡淸歡酬美景




술잔 크다 말고 조용히 드세.                                    慫容莫訴酒杯深







연영전각 延英殿閣




연영전각은 장령전(長齡殿) 북쪽에 있다. 제도와 대소(大小)는 대략 건덕전(乾德殿)과 같은데, 왕이 여기에서 진사(進士)들을 친히 시험 보인다. 그 북쪽의 것을 또 자화전(慈和殿)이라고 하는데, 역시 연회하는 곳이다.




앞에 3각(閣)을 세웠는데 ‘보문각’(寶文閣)이라고 하는 곳에는 열성(列聖 중국의 여러 임금들)이 내린 조서(詔書)를 간직했고, 서쪽 것은 ‘청연각’(淸燕閣)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사기와 자․집(子集 제자(諸子)와 백가(百家)의 문집)을 간수했다. 일찌기 그 청연각의 기문(記文 문체의 하나로서 그 건물의 사적이나 경치를 적은 글)을 구득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개국후 식읍일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候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 신(臣) 김 연(金緣)은 봉교(奉敎)하여 찬(撰)하고, 통봉대부 보문각학사 좌산기상시 상호군 당성군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通奉大夫 寶文閣學士 左散騎常侍 上護軍 唐城郡開國男 食邑三百戶 賜紫金魚袋) 신(臣) 홍 관(洪灌)은 봉교하여 비문(碑文)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했다.




왕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실하고 빛난 덕으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 중화풍속)을 흠모하기 때문에, 대내(大內)의 옆과 연영서전(延英書殿)의 북쪽과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청연 두 각(閣)을 지어 송(宋)나라 황제(皇帝)의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조칙(詔勅)․서화(書畵)를 모셔 놓고, 계시하여 훈칙으로 삼았으며 반드시 용의(容儀)를 엄숙하게 한 뒤에 절하고 우러러보았다.




한결같이 주공(周公)․공자․맹자․양웅(揚雄)이래의 고금 서적을 모아놓고 날마다 노사(老師)․숙유(宿儒)들과 선왕(先王)의 도를 토론하여 부연하며 배우고 닦고 익히니, 집[堂] 밖을 나갈 것도 없이 삼강(三綱)․오상(五常)의 교화와 성명(性命)․도덕의 이치가 사방에 흘러 퍼졌다.




그리하여 금년(고려 예종12 1117) 여름 4월 갑술일에 특별히 수태부 상서령 대방공(守太傅尙書令帶方公) 신(臣) 보(俌), 수태부 상서공 태원공(守太傅尙書公太原公) 신 효(효), 수태보 제안후(守太保 齊安候) 신 서(서), 수태부 통의후(守太傅通義候) 신 교(僑), 수태보 낙랑후(守太傅樂浪候) 신 경용(景庸)․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위(偉), 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자겸(資謙)․신 연(緣), 중서시랑(中書侍郞) 신 중장(仲璋), 참지정사(參知政事) 신 준(晙), 수사공(守司空) 신 지화(至和), 추밀원사(樞密院使) 신 궤(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使) 신 자지(字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신 안인(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성대한 모임을 차리고서 조용히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덕이 부족한 몸인데 하늘이 내린 태평을 힘입어 종묘와 사직에 복이 쌓이고 3면의 변방에 병란(兵亂)이 일지 않고, 글과 법이 중하(中夏)와 같게 되었다. 무릇 정책을 세워 일을 하여감과 대소간(大小間)의 행사를 중국에 자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숭녕(崇寧 송나라 휘종의 연호)․대관(大觀 송나라 휘종의 연호) 이래로 시행하고 주조(注措)하는 방법과 보문각(寶文閣) 경연(經筵)에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선화(宣化 송나라 휘종의 연호) 때 제도를 따른 것이요, 깊숙한 궁궐 조용한 자리에 재상들을 인견(引見)함은 태청(太淸 양무제(梁武帝)의 연호)의 연회를 법받은 것이니, 비록 예(禮)는 차등이 있다 하더라도,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높이는 뜻은 한가지다.




지금 입조(入朝 송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것)했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이, 계향(桂香)․어주(御酒)․용봉(龍鳳)․명단(茗團 송나라 차[茶])․진과(珍菓) 보명(寶皿)을 가지고 돌아왔기로, 아름답게 여겨 경들과 함께 이 훌륭하고도 아름다움을 즐기고자 하노라.“




하니, 신하들이 모두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섬돌에 몰려가 엎드리며,




“고루(固陋)한 몸이라 감히 훌륭한 예에 참여할 수 없읍니다.”




하고 사양하니, 왕이 곧 도로가 앉도록 하고, 온화한 안색으로 대접하며 각가지 음식을 갖추어 먹였는데, 거기에 차려놓은 그릇과 잔이나 접시에 담긴 음식과 각가지 과일은, 육상(六尙)의 이름난 진품과 사방의 맛좋은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상국(上國)의 파리(玻璃 유리)․마노(瑪瑙 보석)․비취(翡翠)․서시(犀兕 무소의 뿔이나 가족을 말한다)와 기괴하여 애완(愛玩)스러운 물건들을 상 위에 진열하여 놓고 훈(壎)․지(篪)․강(椌)․갈(楬)․금슬(琴瑟)․종(鍾)․경(磬)의 즐겁고 단아한 곡조로 당(堂) 아래서 합주(合奏)하도록 하고, 왕이 잔을 들고서 근신(近臣)을 시켜 권하며 이르기를,




“군신의 사이는 오직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니, 각기 양대로 사양하지 말고 마셔라.”




하니, 좌우 신하들이 재배(再拜)하면서 감사함을 아뢰고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잔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받기도 하여 화락한 즐거움이 매우 흡족하였다.




술잔이 9번 돌게 되자, 잠시 물러가 쉬도록 하였다가, 이어서 궁중 귀인(貴人)들로 습의(襲衣)와 보대(寶帶)를 가져다가 내리도록 하여, 그 후의(厚意)를 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불러 자리에 앉기를 재촉하고, 음식 먹고 행동하기를 각기 편리한 대로 하도록 하므로, 더러는 마음을 터놓고 담소하기도 하고 더러는 눈망울을 굴려 관람하기도 하였다. 난간 밖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뜰가에는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었는데, 오만 가지로 우뚝우뚝한 산과 사방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은 동정호(洞定湖)와 오(吳)나라 회계산(會稽山) 같은 그윽한 흥취를 불러일으키니, 잔치가 끝나도록 더위를 잊고 취하도록 몹시 마시다가 밤이 깊어 파했다.




이에 진신(搢神)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흔연(欣然)하게 기쁜 기색을 띠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는 인자와 검소를 보배로 삼고 넘치는 행동이 없으며, 옷은 문수(文繡)를 입지 않고 그릇은 조각한 것을 쓰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곳을 얻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 하여, 날마다 소의간식(宵衣旰食)30)하는 중에도 노심 초사하여 가엾게 여기고, 반대로 군신(群臣)과 귀한 손님에게 잔치 대접함에 있어서는, 내부(內附)에 간수했던 진귀한 것과 상국(上國)에서 특별히 은사(恩賜)한 것까지 다 털어, 하루가 다 가도록 놀고 밤에까지 계속하고도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어진이를 존대하고 예를 중하게 여기며 선(善)을 좋아하고 권세를 망각하는 마음이, 실로 역대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듣건대, 옛날 노(魯)나라 임금이 천자의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반궁(泮宮)에서 선생(先生)과 군자(君子)가 같이 즐겼는데, 그 시(詩)에 이르기를 ‘노후가 와서 반궁에서 술을 마시누나!  이미 좋은 술 마셨으니 길이 장수하리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고, 노침(路寢 임금이나 제후가 정사를 보던 곳)에서 잔치하면서는 대부(大夫)와 서사(庶士)가 같이 서로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잔치차려 기뻐하니 대부와 서사도 즐거워하는구나! 나라를 가지고 있으니 이미 많은 복을 받음이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다 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도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은의(恩意)를 받들어, 신하들을 총애로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천보시(天保詩)와 같이 임금에게 보답할 뜻을 갖고, 언어(言語 왕의 측근 관리)․법종(法從)은 ‘아유가빈’(我有嘉賓)의 시(詩)를 부(賦 노래부름)하고, 고사(瞽史) ․ 가공(歌工)은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음악을 연주하여, 환희(歡喜)가 서로 교환되고 예의가 법도에 맞게 되었다.




이때에 있어, 사람과 신령의 화락함, 천지의 아름다운 감응, 상하가 베풀어 주고 보답하는 것,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모두 화락하게 음식을 들며 담소(談笑)하는 속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어찌 길이 늙지 않고 많은 복을 받는 다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억만년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며,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대양(對揚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칭양하는 것)할 것이다.




신은 우매하고 졸렬한데도 만행(萬幸)한 때를 만나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재부(宰府)를 맡고 있는데, 신을 못났다 아니하고 특별히 글을 지으라는 명령이 잇기에 사양했으나 허락하여 주지 않으므로 삼가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억지로 ‘기’(記)를 짓는다.







임천각 臨川閣




임천각은 회경전(會慶殿)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다. 집은 네 기둥으로 되었고 창문이 툭 트였으나 밖이 겹처마로 되어 있지 않아 자못 대문(臺門)과 같은데, 연회하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책 수만 권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장경궁 長慶宮




장경궁은 왕부(王府) 서남쪽 유암산 등성이에 있다. 두 개의 조그만 길이 있는데 북으로는 왕부와 통하고 동으로는 선의문(宣義門)과 통하며 긴 거리에는 낡은집 몇 채가 있다. 왕옹(王顒)의 여러 자매가 그 속에서 살았는데, 뒤에 시집가고 드디어 그 곳을 비워 두었으므로 황폐가 더욱 심했다. 왕우(王俁)가 병이 위독하여 거기에 가 치료했는데, 마침내 치유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따라서 제사 모시는 사당으로 삼았다. 왕 우를 모시던 궁녀와 그 의 옛 관속 수십 인이 지킨다.







좌춘궁 左春宮




좌춘궁은 회경전의 동쪽 춘덕문(春德門)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처음으로 책봉(冊封)되면 세자(世子)라 하고, 관례(冠禮 성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난 뒤에는 여기에 거처하는데, 옥우(屋宇)의 제도는 왕궁(王宮)만 못하다.




대문의 편액은 ‘대화’(大和)라고 했고, 다음은 ‘원인’(元仁), 그 다음은 ‘육덕’(育德)이라고 했다.




일 보는 집은 편액이 없고, 들보와 기둥은 길고 크며, 병풍 위에는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이 씌어져 있었다. 또한 관속(官屬) 십수 인을 두었다.




우춘궁(右春宮)은 승평문(昇平門) 밖 어사대(御史臺) 서쪽에 있는데, 왕의 자매와 여러 여인이 거처한다.







별궁 別宮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궁(宮)과 전토(田土)를 받으며, 탕목(湯沐)도 받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




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拊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조선(朝鮮)․상안(常安 타본에는 장안(長安))․낙랑(樂浪)․변한(卞韓) 등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왕의 계모(繼母)가 거처하는 궁을 적경궁(積慶宮)이라 한다.




지금 공족(公族)으로는 현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별궁은 10채에 9채는 비어 있다. 그 전토를 과거는 수창궁(壽昌宮)에서 관할했는데, 지금은 모두 왕부에 소속되었고 또한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7 권







관복 冠服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문신하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고 한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밭갈이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사(漢史)에, 그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주부(主簿)는 책(幘)을 쓰는데 관(冠)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변(弁)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상(商 중국 고대 은나라의 처음 이름)이나 주(周)의 관(冠)과 변(弁)의 제도를 모방해서 그렇겠는가? 당(唐) 나라 초에 차츰 오채(五采)의 옷을 입어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더니, 우리 송 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신사(信使)를 보내므로 자주 왕이 옷을 내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고, 천자의 총애를 입어 의복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지고 우리 송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으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덜었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혹, 우리 송의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이를 들어 관복도(冠服圖)를 그린다.







왕복 王服




고려왕은 상복(常服)에는 높은 오사모(烏紗帽)에 소매가 좁은 상포(緗袍 담황색(淡黃色) 포)를 입고, 자라(紫羅)로 만든 넓은 허리띠[勒巾]를 띠고 이 허리띠는 사이사이에 금실과 푸른 실로 수를 놓았다. 나라의 관원(官員)과 사민(士民)이 모여 조회(朝會)할 때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며,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옥규(玉圭)를 든다. 다만, 중국의 사신이 가면 자라(紫羅)의 공복(公服)을 입고,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을 들고 옥대(玉帶)를 띠고, 행례의 범절이 아주 신절(臣節)에 조심한다. 혹 평상시 쉴 때에는 검은 건[烏巾]에 흰 모시[白紵]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 한다.







영관복 令官服




고려의 관제는 당(唐)나라 무덕(武德 당(唐) 고조(高祖)의 연호) 연간에 아홉 등급[九等]이 있었다. 첫째는 대대로(大對盧)인데 나라 일을 총괄하고, 다음이 태대형(太大兄), 다음이 울절(鬱折), 다음이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다음이 의두대형(衣頭大兄)으로 기밀을 맡고 정사(政事)를 논의하여 병마를 보내는 일과 관작(官爵)을 주는 일을 맡았고, 다음이 대사자(大使者), 다음이 대형(大兄), 다음이 사자(使者), 다음이 상위사자(上位使者), 다음이 소형(小兄), 다음이 제과절(諸過節), 다음이 선인(先人)이며, 또 빈객(賓客)을 맡는 이가 있어 중국의 홍로경(鴻矑卿)에 비할 수 있으니, 대부사자(大夫使者)로써 그 관리를 삼고, 또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 정 7품벼슬), 통사사인(通事舍人 각문(閣門)의 정 7품벼슬) 전서객(典書客)이 있는데, 다 소형(小兄) 이상으로 관리를 삼는다. 또 여러 큰 성에는 욕살(傉薩)을 두었는데, 중국의 여러 독부(督府)에 비할 수 있으며, 여러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었는데, 이는 중국의 자사(刺史)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도사(道使)라고도 이르고 무관(武官)에는 대모달(大摸達)이 있는데 이는 위장군(衛將軍)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조의 두대형(皀衣頭大兄) 이상이라야 될 수 있으며, 다음은 말객(末客)인데 중랑장(中郞將)에 비교되는 것으로 대형(大兄) 이상으로 그를 삼고, 그 다음은 영천인(領千人)인데 이하 각기 등차(等差)가 있다. 이제 그 관(官)의 이름이나 공훈[勳秩]의 품계가 혹 중국을 모방하고 있으니, 누가 그 사유를 물으면 곧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고사(故事)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 의관(衣冠)에 있어서도 또한 혹 비슷한 것이 있다. 전세(前世) 고구려의 신하의 복식이 청라(靑羅)로 관을 하고 강라(袶羅 붉은 나)로 이(珥 원래는 귀걸이이지만, 여기서는 귀를 싸는 장식)를 하고 새깃[鳥羽]으로 장식하더니, 요즈음은 나라의 관원들이 거의 다 자주 무늬가 있는 엷은 나의 포[紫文羅袍]를 입고 비치는 깁으로 만든 복두(복두)를 쓰며, 허리에는 옥띠[玉帶]를 띠고, 금어(金魚)를 차되, 관이 태사(太師)․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인 자가 입는다.







국상복 國相服




국상(國相)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둥근 문양이 있는 금띠[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시중(侍中), 태위(太尉), 사도(司徒), 상서(尙書)・중서문하시랑(中書門下侍郞 정2품)・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정당문학(政堂文學)・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추밀사(樞密使 종3품)・동지원주사(同知院奏事) 등의 관원들도 모두 이를 입는 것을 허락해 준다.







근시복 近侍服




근신[近侍]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구문금대(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좌우상시(左右常侍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벼슬)・어사대부(御使大夫), 좌・우승(左右丞), 육상서(六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 정3품 벼슬)․승지학사(한림원의 학사승지(學士承旨), 정3품 벼슬) 이상 및 지대국조사명 접반관(祗待國朝使命接伴官)과 관반관(館伴官) 등이 다 입는다.







종관복 從官服




종관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어선금대(御仙金帶)를 띠니, 어사중승(御史中丞 어사대(御史臺)의 중승, 종4품)․간관(諫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좌․우 간의대부, 정4품)․급사(給事 종4품)․시랑(侍郞 육부(六部)의 정4품 벼슬), 주(州)․목(牧)의 유수(留守)와 사(使)․부사(副使)․합문집찬(閤門執贊 합문의 집찬벼슬, 종4품)․육상직관(六尙直官)․도지병마(都知兵馬)․사부호사(四部護使) 등과 특별한 은수(恩數 훈공에 의하여 왕의 특별한 은영(恩榮)을 입는것)를 입은 자가 다 입으며, 왕의 세자(世子) 및 왕의 형제도 또한 그러하다.







경감복 卿監服




경감의 복색은 비문나포(緋文羅袍)에 붉은 가죽 바탕의 무소 뿔의 띠[紅鞓犀帶]를 하고, 이에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육시경이4(六寺卿貳)․성부승랑(省部丞郞 상서도성(尙書都省)과 육부(部)의 승과 낭(郎))․국자유관(國子儒官 국자감(國子監)의 유관이 사업(司業))․비서전직(秘書典職 비서성(秘書省)의 감(監)․소감(少監) 등)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조관복 朝官服




조관의 복색은 비문나포를 입고 흑정각대(黑鞓角臺)를 띠고,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사업박사(司業博士 국자감(國子監)의 종4품 벼슬․사업(司業))와 사관교서(史館校書 직사관(直士館)(정9품)벼슬), 태의(太醫)․사천(司天)의 두 성(省)의 녹사(綠事 정9품)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그 계(階)나 관(官)은 또한 햇수를 따지며, 반드시 그 계나 관을 옮긴 뒤에야 갈아 입는다. 관반(館伴 사신의 접대관)이 중국의 사신을 관(館)에서 뵐 때에는 각기 두 사람의 비포(紕袍)를 입은 자를 두어 앞을 인도하게 하는데, 다만 어대(魚袋)를 차지 않으니, 마땅히 이것은 중국의 주의쌍인(朱衣雙引 향도(嚮導)하는 관원은 붉은 옷을 입었으므로 주의리(朱衣吏)라고도 한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서관복 庶官服




서관(庶官 6품(六品) 이하의 하급관원)의 복색은, 녹의(綠衣 서관의 옷은 포(袍)라 하지 않고 의(衣)라 하였다)에 목홀(木笏)을 들고, 복두(幞頭)를 쓰고, 검은 가죽띠[烏鞓]를 띠니, 진사(進士)로 입관(入官)한 때로부터 성조(省曹)의 보리(補吏)나 주현(州縣)의 영위(令尉)․주부(主簿 각 관아의 종7품 종8품의 주부(注簿) 벼슬인 듯함.)․사재(司宰 사재감(司宰鑑)의 벼슬인듯함.) 등이 다 이를 입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   물  人物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人材)가 가장 왕성하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신(貴臣)이 되며 족망(族望)으로 서로 겨루고, 나머지는 혹 진사(進士)를 하여 뽑히거나 혹 재물을 바치고 되기도 하는데, 세록(世祿) 받는 이직(吏職)까지도 등급이 있으니, 그러므로 직(職)이 있고 계(階)가 있고 훈(勳)이 있고 사(賜)가 있고 검교(檢校)가 있고 공신(功臣)이 있고 여러 위(衛)가 있다.




이것은 본조(本朝)의 괸제를 고찰하여 본받되 개원(開元 당 나라 현종(玄宗)의 연호)의 예(禮)를 참작하여 한 것이다. 그러나 명실(名實)이 맞지 않고 청탁(淸濁)이 혼동되어 한갓 형식에 불과하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 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 약이(洪若伊)․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 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 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 승중(朴昇中),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 약온(金若溫),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 홍재(崔洪宰),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 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 준경(拓俊京)․이 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왕부(王府)에서의 4차례 연회를 제한 외에는 이들과 같이 잔치하며 담소하였는데 화락한 분위기였다.




사적(私적 사사로이 임금과 만나는 것)과 송유(送遺 선사)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양 인(梁鱗)과 김 유간(金惟揀), 형부시랑(刑部侍郞) 임 경청(林景淸), 공부시랑 노 영거(盧令거), 중시대부(中侍大夫) 황 군상(黃君裳), 공부낭중(工部郎中) 정 준(鄭俊), 좌사낭중(左司郎中) 이 지보(李之甫), 전전승지(殿前承旨) 임 총신(林寵臣), 조산랑 비서승(朝散郞秘書承) 김 단(金端), 합문사(閤門使) 김 보신(金輔臣),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이 영지(李潁之)와 조 기(曹祺), 내전숭반(內殿崇班) 호 인영(胡仁潁), 인진사(引進使) 왕 의(王儀), 합문지후(閤門祗候) 고 당유(高唐愈)와 민 중형(閔仲衡), 통사사인(通事舍人) 이 점(李漸)과 양 문구(梁文矩), 중위랑(中衛郞) 유 급(劉及), 중량랑(中亮郞) 팽 경(彭京), 충훈랑(忠訓郞) 왕 승(王承), 성충랑(成忠郞) 이 준기(李俊琦)와 김 세안(金世安), 보의랑(保義郞) 이 준이(李俊異), 승절랑(承節郞) 허 의(許宜)․하 경(何景)․진 언경(陣彦卿)이 맡았으며, 전명(傳命)하고 찬도(찬導 안내)함은, 정의대부 예부상서(正議大夫禮部尙書) 김 부일(金富佾), 통의대부 전중감(通議大夫殿中監) 정 담(鄭覃), 상서(尙書) 이 도(李도), 중량대부 지합문사(中亮大夫知閤門事) 심 안지(沈安之), 중량대부 합문부사(中亮大夫閤門副使) 유 문지(劉文志),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김 의원(金義元),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심 기(沈起)․왕 수(王 洙)․김 택(金澤)․이 예재(李銳材)․김 순정(金純正)․황 관(黃觀)․이 숙(李淑)․진 적(陳迪), 합문지후(閤門祗候) 윤 인용(尹仁勇)․박 승(朴承)․정택(鄭擇)․진 칭(陳칭), 통사사인(通事舍人) 이 덕승(李德承)․오 자여(吳子璵)․탁 안(卓安)이 하였는데, 모두 재능(才能)과 언변과 박식으로 뽑혀 이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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