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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균 행장] 통제사 증좌찬성 원공 휘균 행장

 이름 : 

(2007-02-25 19:56:17, 6947회 읽음)

통제사 증좌찬성 원공 휘균 행장, 厚齋 김간(金榦) 撰 관련 인물사전  

http://blog.naver.com/hangiree/30013608287

이번에 원균의 행장 원본을 입수했다. 그동안 1959년에 원주원씨화수회(原州元氏花樹會)에서 발간한 『원릉군실기(原陵君實紀)』에 실린 것이 사료로 사용되어 왔는데, 1740년에 간행한 원주원씨족보인 前 경신보(庚申譜)에 실린 원본을 구한 것이다. 실기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잘못 판독한 글자【붉은색으로 표시했다】들이 약간 있었으며, 끝부분에 실린 자손록은 아예 삭제를 해버렸음을 볼 수 있다. 행장의 말미에는 항상 자손록을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왜 적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자손록 문제에 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 논한 적이 있었다. 【 http://blog.naver.com/hangiree/30007841539



公諱均, 字平仲, 姓元氏, 系出原州, 高麗太祖, 統合三韓功臣, 兵部令諱克猷, 卽公之鼻祖也, 高祖諱蒙, 贈軍資監正, 曾祖諱淑貞, 贈兵曹參議, 祖諱任, 贈戶曹參判, 考諱俊良, 贈領議政平原府院君, 守慶尙左兵使, 妣贈貞敬夫人, 南原梁氏諱希曾之女, 公以嘉靖庚子正月五日生, 少驍捷有膂力, 登武科, 由宣傳官, 出爲造山萬戶, 討藩胡有功, 超拜富寧府使, 俄移鐘城, 從兵使李鎰, 破時錢部落, 至壬辰, 拜慶尙右水使, 是年四月, 倭賊平秀吉, 傾國入寇, 釜山東萊次第皆陷, 時公手下只有四船, 知勢孤不能敵, 留虞侯禹應辰守本鎭, 與玉浦萬戶李雲龍, 永登萬戶禹致績, 南海縣監奇孝謹, 退保昆陽海口, 遣裨將李英男, 往見全羅左水使李舜臣, 請與合力禦敵, 舜臣辭以所守各有界限, 不聽, 往返至五六不已, 會光陽縣監魚泳潭, 順天府使權俊, 馳詣舜臣力贊下海之計, 泳潭又自請爲先鋒, 舜臣始許焉, 未至, 公已與賊數次合戰, 焚獲賊船十餘隻, 軍聲稍振, 至五月六日, 舜臣領戰艦二十四隻, 與右水使李億祺, 來會于巨濟洋中, 七日黎明, 三道舟師齊進玉浦前洋, 賊船擺列, 望若蟻屯, 公鳴鼓直前, 衝其中堅, 舜臣等, 一時奮擊, 乘銳崩之, 遂焚賊船百餘隻, 燒溺死者, 不可勝計, 所獲賊船中, 得金圓扇一柄, 扇面當中書曰, 六月八日秀吉, 右邊書羽柴筑前守五字, 疑是秀吉付筑前守之物, 而是日所斬賊將卽筑前守也, 公善於突擊, 能以少破衆, 是以所向無敵焉, 八日, 聞大駕去邠, 率諸將西向痛哭, 一軍感動, 公前已遣弟㙉, 獻俘于行朝, 至是, 與舜臣等, 又以捷報, 上大悅特加公嘉善, 㙉宣傳官, 下諭嘉獎, 二十一日, 倭船自唐浦來, 我師出迎海口, 則諸島群倭, 四面齊發時, 舜臣等已還本鎭, 公登陸以避其鋒, 更遣人請援于舜臣, 而移泊露梁, 未幾, 舜臣又以舟師來會, 破賊於昆陽境, 追至泗川洋中, 連戰皆破之, 六月前, 至唐浦, 賊船分泊海岸中, 有一大船, 上設三層樓, 外垂紅羅帳, 帳中一人, 金冠錦衣, 指揮諸賊, 諸將促櫓直衝, 順天府使權俊, 自下仰射, 一箭正中, 金冠者應弦而倒, 餘賊驚散, 自相投水死, 俄而賊船四十餘隻, 從後來襲, 我師回棹力戰, 自已至暮, 賊乘夜遁去, 是日, 全羅右水使李億祺又來到, 先是, 諸將常以孤軍深入爲憂, 至是見億祺至, 無不一倍增氣, 進到東島洋中, 鼓噪蹴戰, 獲賊五將同乘之船, 栗浦加德之戰, 又皆全捷, 公前後捕獲賊船五十五隻, 所斬一百三級, 事聞上, 下書褒諭略曰, 惟卿, 許國肝膽, 間世英豪, 治艨衝於漢水, 公孫畏吳督之威風, 擊舟楫於荊江, 羯胡挫士雅之意氣, 援枹而士卒踴躍, 誓江而日星晦濛, 唐項浦決數十戰, 頭顱塞江, 閑山島焚七十船, 鯨鯢授首, 臨危出奇, 古嘗聞, 其是語, 以少擊衆, 予獲見於今辰, 屹然千尋鐵壁, 儼若一代長城, 周室中興卽有尹吉甫之薄伐, 唐家再造實賴郭子儀之盡忠, 七月六日, 公與舜臣等又會于露梁, 焚賊船六十三艘, 到安骨浦前洋, 遇賊四十餘艘, 我師休番迭攻, 斬獲尤多, 賊不能支, 遁入巨濟釜山, 不復出, 是月二十三日, 有旨曰, 觀卿四次軍功狀啓, 其中尤異者, 爲先論賞, 以示予嘉悅之意, 其時在本職者, 今若超敍, 則遞易非便, 姑仍前職, 只陞其秩, 以爲他日之用, 小錄所付倭物, 卿其於所得人處分給, 以勸後人, 九月, 進資憲, 兼知中樞府事, 又有旨以褒之, 初賊分水陸兩路, 長驅西上, 以爲會于平壤, 侵犯上國之計, 賊將平行長投書恐喝, 有日本舟師十餘萬, 又從海路來, 不知大王龍馭自此何之之語, 至是, 公及舜臣遮遏海路, 不使一賊過去, 以此, 行長久留平壤, 不復西犯, 其後, 國家得保兩湖兩西, 終收匡復之功者, 專賴于此焉, 乙未冬, 除忠淸兵使, 丙申秋, 移拜全羅兵使, 陞辭之日, 上敎曰, 卿爲國盡力, 忠勇之誠, 古今罕比, 予嘗嘉焉, 顧無以報, 今當遠離, 欲相見送之, 適氣不平未果, 仍賜內廐良馬一匹, 時倭人屢敗於水戰, 行長患之, 使小倭要時羅, 往來于慶尙右兵使金應瑞陣, 詐爲致款, 及丁酉淸正之再出也, 時羅密言于應瑞曰, 兩國之和事不成, 專由於淸正, 故行長甚惡之, 今淸正以單舸渡海, 若要諸海中, 可以生擒縛來, 愼勿失機也, 應瑞上其事, 朝廷信之, 遣慰諭使黃愼, 密報于統制使李舜臣, 舜臣知賊有謀, 遲疑屢日, 廷議, 以舜臣逗留不進, 致誤軍機, 拿致于朝, 是年二月, 使公代領其任, 公揣審賊以計誑, 我力陳釜洋不可入討之意, 朝廷不聽, 又啓曰, 不已, 則安骨浦留屯之賊, 先以陸兵驅出後, 方可入戰, 朝廷又不聽, 體相李元翼遣從事官南以恭, 促其戰, 七月初, 行長又使要時羅詒應瑞曰, 倭船方連絡渡海, 乘其無備, 以舟師邀擊, 猶可獲利, 都元帥權慄尤信其說, 督戰益急, 公遂至熊川前洋, 遇賊大戰破之, 時賊兵再動, 軍勢甚盛, 公因其勝退師, 請益援兵以爲更進之計, 權慄以公爲逡巡失幾, 拿杖轅門, 公知事必不可濟, 而旣受罪元帥府, 不得已統率舟師, 直趨釜洋, 賊示弱以誘之, 我師乘勢進薄, 銳意急追, 不覺深入賊境, 舟人告以已踰水嶺, 公大驚急回船退歸, 則全羅右水使船已漂向東海而去, 賊見我師失勢, 盡發新舊兵船, 飛騰亂逐, 又潛遣輕船伏于永登浦島中, 我師退至永登, 爭下船急取薪水, 忽然一聲砲響, 賊兵四起, 揮長劍左右亂斫, 我師奪港以走, 退至溫羅島, 西日已沈海, 天昏暝, 追賊蔽海, 軍心益危, 公聚諸將議曰, 事已至此, 天不助順, 今日之計, 惟有一心殉國而已, 是夜, 賊密令小哨舠, 穿入我船之間, 又以兵船潛遶于外, 而軍中未之知也, 至天明, 火發我船, 公急擊鼓鳴鑼以報變, 忽見賊船四面衝突, 飛丸如雨, 喊聲震天, 勢如崩山捲海, 莫可抵遏, 慶尙右水使裵楔擧碇先走, 我師遂潰, 公棄船登岸, 賊追及斬首以去, 是丁酉七月十六日也, 得年五十八, 賊退收屍歸葬于振威余佐洞, 朝家祭賻如禮, 逮辛丑間, 領相李德馨以體察使南下, 上引見曰, 元均敗死後, 謗言至今未已, 予則以爲寃矣, 我國之俗, 見人能一事, 則例以爲賢, 敗一事, 則例以爲非, 此敗豈渠之所爲乎, 觀其時書狀, 則安骨浦賊陣爲先驅出後, 欲爲入討, 而朝廷督戰, 元帥決棍, 非均之自敗, 卽朝廷使之敗也, 德馨對曰, 大槪當初與舜臣相換爲非矣, 上曰, 朝廷使之速戰, 雖不易將, 亦敗矣, 又曰, 兵法云, 亡大將者, 斬副將, 亡副將者, 斬領將, 均旣敗死, 則其管下雖末能盡誅, 査出誅之可也, 癸卯六月, 錄宣武功, 李德馨李恒福等啓曰, 元均初以無軍之將, 參於海上大戰, 而其後有敗衄舟師之失, 難可與李舜臣權慄竝列, 故降錄於二等矣, 上敎曰, 當賊變之初, 均請援于舜臣, 非舜臣自赴, 及其討賊, 均以死自許, 每爲前鋒, 奮勇先登, 捷獲之功, 與舜臣一體, 其所獲賊魁樓船, 反爲舜臣所奪, 及代舜臣, 再三陳啓, 力言釜山前洋不可入討之意, 備局督之, 元帥杖之, 於是, 均明知其必敗, 而離鎭擊賊, 全軍覆沒, 以身殉之, 是均不但勇冠三軍, 智亦至矣, 昔哥舒翰撫膺出潼關爲賊所敗, 楊無敵爲潘美所脅揮淚出戰遂殲於賊, 何以異於此, 古今人物, 不可以成敗論, 憐其命與時乖, 功虧事敗, 心跡不明, 前者, 領相之南下也, 略見均可愍之意, 今日論功之際, 反置於二等, 豈不寃哉, 元均之目, 且不瞑於地下矣, 遂策勳一等第三人, 甲辰四月, 賜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之號, 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 明年正月, 遣禮部郞柳惺, 致祭於家, 其後, 李學士選爲之立傳, 發揮公始終事, 甚詳且明, 其略曰, 均所率舟師, 其數甚少, 其勢甚弱, 所以請援於舜臣, 然舜臣未來之前, 已焚破賊船, 以此贈秩, 及與舜臣合勢也, 又必自爲先鋒, 直進搏戰, 所向皆捷, 雖其戰敗之時, 猶破賊十船, 則其忠義功烈亦自卓然, 足爲一世之虎臣, 而後來爲舜臣, 揄揚文字者, 偏攻均無餘地, 均之於舜臣, 成敗之跡小殊, 而死國之節無異, 何其抑揚之太懸耶, 其下逐條卞白, 殆無遺欠, 尤齋先生曰, 崇禎己亥春, 朝廷立忠武公李舜臣碑於露梁廟, 屬筆於余, 其文有元統制均, 軍敗走死語, 盖澤堂李公之所撰諡狀也, 其後乙丑五月, 統制之曾孫舜格, 持統制錄勳敎文及賜祭文來示余, 大與諡狀所記不同, 余謂澤堂世所稱良史, 其立言也必審, 然敎書祭文俱是王言, 當時代言之臣, 亦豈敢一毫虛張哉, 聖朝又何妊諸帶礪之券哉, 其子孫之稱寃宜矣, 嗚呼, 公以忠樸質直之姿【鰲漢稱公之言】, 懷爲國死綏之志, 始自討胡立功, 颺聲朔野, 及當海寇衝突, 列鎭瓦解之日, 奮不顧身, 激勵將士, 要與舜臣同心戮力, 必以勦殪凶徒, 廓淸海氛爲期, 其焚獲捕斬之功, 無讓於舜臣, 迨丁酉再搶, 朝廷爲倭賊所欺, 遂使公終至於喪師殞命, 而身後謗言又不勝其紛紜, 公之心事幾乎掩而不著矣, 惟我宣祖大王深察其寃狀, 前後聖諭不啻丁寧, 而其錄勳之敎, 尤爲明白懇惻, 至引哥舒翰楊無敵之事以比之, 大哉, 王言足爲百世公案, 若使公魂而有知, 想必感泣於泉下矣, 至若李學士之傳, 尤齋先生之說, 又可以取信於當時, 考徵於來世, 昔張巡許遠同守睢陽, 及至城陷又同死於國, 而其時爲巡地者, 亦有貶遠之語, 韓文公爲之作傳, 後敍以明其不然, 而後是非始定, 今公遭謗, 實與遠相類, 而尤齋先生諸人之說, 比諸後敍, 殆有光焉, 則公之毁言, 自此其亦可以止息, 至於聖祖之褒揚伸卞, 又遠之所未得者, 噫, 公於是, 無復有一毫遺憾矣, 夫人坡平尹氏, 進士贈參判彦成之女, 自宣廟朝, 有廩養之擧, 而光海廢之, 仁廟改玉復命給料, 生於嘉靖丁未, 卒於崇禎壬午, 壽九十六, 至是遷公墓改窆, 夫人實祔焉, 無子有一女縣監韓嶷, 側出一男二女, 男士雄, 武科襲封原城君, 女同知李新春, 義信君備, 縣監四男二女, 男碩望, 碩振, 碩臣, 碩良武科防禦使副摠管, 女學生兪楨, 參判南老星, 原城二男, 珌, 琰, 同知一女, 尹安之, 義信六男, 原平令珀, 原溪令瓊, 原興令琚, 原昌令玖, 原陽守珽, 原仁令珞, 珌一男, 舜格, 方主公之尸兒, 舜格有男, 曰震瑞, 以其親意, 來請公狀甚勤, 榦屢辭非其人, 而終不得, 玆敢謹就聖敎及先輩可據文字, 略加點綴, 以歸之庶幾立言君子之財察焉, 司憲府大司憲金榦撰。



공의 휘(諱)는 균(均)이요, 자(字)는 평중(平仲)이다. 성씨는 원씨(元氏)이니 그 계파는 원주(原州)에서 나왔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 휘 극유(克猷)가 곧 공의 비조(鼻祖)가 되신다. 고조(高祖) 휘 몽(蒙)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증직(贈職)되었고, 증조(曾祖) 휘 숙정(淑貞)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임(任)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친은 휘 준량(俊良)으로 영의정(領議政)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증직되었으며, 수경상좌병사(守慶尙左兵使)를 지냈다. 모친은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고, 남원 양씨(梁氏)로 휘 희증(希曾)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경자년(庚子年, 1540) 정월 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날래고 힘이 셌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어 번호(藩胡)를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부령부사(富寧府使)로 차례를 뛰어 제수되었다. 얼마 후에 종성부사(鐘城府使)로 옮겨 병사(兵使)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였다.

임진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에 제수되었는데, 이 해 4월에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온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왔다. 부산(釜山)·동래(東萊)가 차례로 모두 함락되었고, 공의 수하에는 다만 4척의 전선뿐이라 형세가 고약(孤弱)하여 맞설 수 없음을 알고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을 남겨 본진(本鎭)을 지키게 하고,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남해현감(南海縣監 → 縣令) 기효근(奇孝謹)과 함께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물러나 지키면서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을 가서 보고 함께 힘을 합쳐 적을 막을 것을 요청하였다. 순신이 각자 지키는 지역의 한계가 있다 하여 사양하고 들어주지 않아서 갔다가 돌아오기를 5·6차례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순천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을 만나 순신에게 달려가 뵙고 바다로 내려갈(즉 출전할) 계책에 힘써 찬성하고, 또 어영담이 자신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니 순신이 비로소 (출전할 것을) 허락하였다. (순신이) 이르기 전에 공이 이미 왜적과 수 차례나 접전하여 적선 10여 척을 잡아 불태워 군대의 명성이 조금 진작되었다.

5월 6일에 이르러 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와서 거제도 바다에서 만났다. 7일 여명(黎明)에 삼도의 주사(舟師)가 일제히 옥포 앞바다로 나가니 적선이 죽 벌여 섰는데 바라보니 개미가 모여있는 듯하였다. 공이 북을 울리며 곧바로 앞으로 나서 그 중견(中堅)을 공격하니 순신 등이 일시에 힘껏 공격하여 예기(銳氣)를 타고서 무찔러 마침내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다 계산할 수 없었다. 적선 안에서 빼앗은 것으로 금칠이 된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부채 한쪽 면의 한가운데 쓰기를, 「6월 8일 수길(秀吉)」이라 하였고, 우측에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 일본음으로 하시바 지쿠젠노카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예전 성과 관직명을 이충무공이 잘못 추측한 것인데 그대로 인용해서 쓴 것이다. 이 부채는 히데요시가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에게 주었던 것으로 제2차 출전 중 당포해전에서 노획한 것이다.) 다섯 자를 썼으니 아마도 수길이가 축전수에게 준 물건인 것 같으니 이 날에 벤 적장이 곧 축전수였다. 공은 돌격(突擊)을 잘해서 소수로 많은 적을 격파하는 것에 능하여 이로써 향하는 곳마다 막을 자가 없었다.

8일에 대가(大駕)가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장(諸將)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전군(全軍)이 감동하였다. 공은 전에 이미 아우인 전(㙉)을 보내서 행조(行朝)에 포로를 바쳤는데, 이 때에 이르러 순신 등이 또 승첩을 보고하니 상께서 크게 기뻐하여 특별히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하고 전을 선전관에 제수하여 가상히 여겨 포상한다고 하유(下諭)하였다.

21일에 왜선(倭船)이 당포로부터 나오기에 우리 수군이 바다 어귀로 나가 맞으니 여러 섬에 있던 왜적의 무리가 사방에서 일제히 나오는지라, 순신 등은 이미 본진으로 돌아갔기에 공은 육지에 올라서 그들의 칼날을 피하고, 다시 사람을 보내 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노량(露梁)으로 옮겨 정박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신이 또 주사를 이끌고 와서 모여 곤양(昆陽) 땅에서 적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사천(泗川) 바다에 이르러 연달아 싸워 모두 부수었다.

6월 전에 당포에 이르니 적선이 해안가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다. 대선(大船) 한 척은 선상에 3층의 누각(樓閣)을 설치했는데 바깥에는 홍라장(紅羅帳)을 드리웠고, 그 장막 가운데 한 명이 금관(金冠)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서 여러 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제장(諸將)들이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달려들어 순천부사 권준이 아래서 화살을 올려 쏴 한번에 명중시키자 금관을 쓴 자가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니 나머지 적들은 놀라 흩어져 서로 물에 뛰어들어 죽는데, 갑자기 적선 40여 척이 뒤따라 와서 습격하니 우리 수군도 배를 돌려 힘껏 싸워 저녁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적들은 밤을 틈타 도망갔다. 이 날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제장들이 항상 외로운 군사로 깊숙히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억기가 이른 것을 보고서는 기운이 배가 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아가 동도(東島) 바다에 이르러 시끄럽게 북을 치며 싸워 적의 다섯 장수가 함께 탄 배를 붙잡았다. 율포(栗浦)·가덕(加德)의 싸움에서도 모두 온전한 승리를 거두어 공이 전후로 붙잡은 적선이 55척이요, 목을 벤 것이 103급이었다. 이것을 위에 아뢰니 포상하고 하유하는 글을 내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오직 경(卿)이 나라에 마음을 바친 세상에 드문 영웅호걸(英雄豪傑)이라 한수(漢水)에서 수군[朦衝]을 다스림에 공손술(公孫述)을 두렵게 한 오한(吳漢, 후한(後漢)의 명장으로 공손술과 싸워 팔전팔첩(八戰八捷)을 거두었다)의 위풍(威風)을 보였으며, 형강(荊江)에서 주즙(舟楫)을 공격함에 갈호(羯胡)를 꺾은 사아(士雅, 진(晉)나라의 명장 조적(祖逖)의 자(字)이다)의 의기(意氣)를 나타냈도다. 북채를 쥐니 사졸들이 용약(踴躍)하고, 강에 맹세하니 해와 별이 어두워졌노라. 당항포에서 수십 차례 결전에 수급이 강물을 막았고, 한산도에서 70척을 불태우니 고래가 목을 내놓았도다. 위급한 시기에 기이한 계책을 냈다함을 일찍이 옛이야기로만 들었더니 적은 수로 대군을 무찌름을 내가 지금에서야 보았도다. 우뚝하다 천 길의 철벽이요, 엄연하다 일대의 장성(長城)이로다. 주(周)나라 왕실의 중흥은 윤길보(尹吉甫)가 (오랑캐를) 정벌한 것에서 나왔고, 당(唐)나라 황실의 재건은 곽자의(郭子儀)가 충성을 다함에 의뢰했도다.



7월 6일에 공은 순신 등과 함께 또 노량(露梁)에서 모여 적선 63척을 불태우고, 안골포(安骨浦) 앞바다에 도착하여 적선 40여 척을 만나 우리 수군이 번을 갈라 교대로 공격하니 참획(斬獲)한 것이 더욱 많아 왜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거제(巨濟)·부산(釜山)으로 달아났다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이 달 23일에 유지(有旨)가 내려왔는데, 다음과 같다.



경(卿)의 4차에 걸친 군공 장계(狀啓)를 보니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은 우선 논상(論賞)하여 내가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는 뜻을 보이노라. 당시 본직(本職)에 있던 이를 지금 만약 품계를 뛰어 서용한다면[超敍], 자리를 바꾸고 갈아야하는 불편이 있으니 잠시 그대로 전직(前職)에 두고, 다만 그 등급만을 올려 후일의 쓰임이 되도록 한다. 소록(小錄)에 첨부한 왜물(倭物)은 경(卿)이 그것을 빼앗은 자에게 나누어 주어 후인(後人)들에게 권장(勸奬)이 되게 하라.

→ 이 유지는 시기적으로 날짜가 맞지 않다. 문중에서 내놓지 않는 것을 봐서 지금은 전하지 않는 것 같은데, 행장에 인용한 것을 보면 그 당시까지는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그 유지에 분명 날짜가 적혔을 것인데, 왜 7월 23일로 기록되었을까? 기록을 검토해보면 원균의 옥포해전 장계는 이충(李冲)이 가지고 갔는데, 6월 21일에 행재소에 도착했고, 두 번째 장계는 성수경(成守慶)이 가지고 갔는데, 7월 18일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7월 23일자로 된 이런 유지가 내려왔을 리 없다.



9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겸했으며, 또 유지(有旨)를 내려 포상하였다. 처음에 왜적이 수륙(水陸) 두 길로 나눠 멀리 서쪽으로 올라와 평양(平壤)에서 만나 상국(上國)을 침범할 계책으로 적장(賊將) 평행장(平行長)이 서신을 보내서 공갈(恐喝)하기를, 「일본의 수군[舟師] 10여 만이 또 바닷길을 따라 올 것이니 대왕(大王)의 어가[龍馭]은 여기서 어디로 갈 것인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공과 순신이 바닷길을 막아 한 명의 왜적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행장이 평양에 오래 머무르게 되어 다시는 서쪽을 침범하지 못하였고, 그 후에 나라가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와 양서(兩西, 해서와 관서) 지방을 보전하고 결국에는 광복(匡復)의 공을 거두게 된 것은 오로지 이에 의뢰한 것이었다.

을미년 겨울에 충청병사(忠淸兵使)를 제수받았고, 병신년 가을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옮겨 임명되어 배사(拜辭, 하직)하는 날에 상께서 (이렇게) 하교(下敎)하셨다.



경이 나라를 위하여 진력(盡力)해서 충용(忠勇)하는 지성은 고금에 비할 이가 드물기에 내가 일찍이 가상하게 여겼으나, 돌아보건대 아무 것도 보답한 것이 없기에 오늘 멀리 떠나게 되어 서로 접견하고 전송하려 하였다. 하필 기운이 편치 못하여 그러지 못하니 좋은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하사하노라.



이 때 왜인들이 누차 수전(水戰)에 패하여 행장이 이를 근심하여 졸개 요시라(要時羅)를 보내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진영에 왕래하며 거짓으로 정성을 다하는 척했다. 정유년에 이르러 청정(淸正)이 다시 나오게 되자, (요)시라가 몰래 응서에게 말하기를,

「두 나라의 화의(和議)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청정에게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행장이 그를 매우 싫어합니다. 지금 청정이 한 척의 배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만약 바다 가운데서 잠복하여 노린다면 산 채로 사로잡아 포박해 올 수 있으니 삼가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라고 하니, 응서가 그 일을 상서하니 조정에서 믿었다. 위유사(慰諭使) 황신(黃愼)을 보내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비밀히 통보하니 순신은 적에게 모계(謀計)가 있음을 알고서 여러 날을 머뭇거렸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순신이 두류(逗留)하여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군기(軍機)를 그르치게 되었다고 하여 조정으로 잡아오게 했다. 이 해 2월에 공으로 하여금 대신하여 통제사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공은 적이 거짓말로 속임을 미루어 살피고서 아군의 힘으로는 부산 바다로 들어가 토벌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조정에서 듣지 않자, 또 아뢰기를,

「그렇다면 안골포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먼저 육군으로써 몰아낸 이후에야 들어가 싸울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또 듣지 않았으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을 보내서 전투를 재촉하였다.

7월 초에 행장이 또 요시라로 하여금 응서를 속여 말하기를,

「왜선(倭船)이 지금 연이어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주사(舟師)로 요격한다면 오히려 이득을 취할 것이오.」

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더욱 그 말을 믿어 더 한층 급하게 독전(督戰)하니 공은 마침내 웅천(熊川) 앞바다에 이르러 적을 만나 크게 싸워 격파했다.

이 때 적병이 다시 움직이게 되어 군세(軍勢)가 매우 강성하였다. 공은 승전에 힘입어 군대를 물리고 원병(援兵)을 더하여 다시 진격할 계책을 청하였으나, 권율은 공이 머뭇거려 기회를 놓쳤다고 하여 잡아다 원문(轅門)에서 곤장을 쳤다. 공은 일이 필시 성취될 수 없음을 알았으나 이미 원수부(元帥府)에 죄를 받았기에 부득이 주사를 통솔하여 곧장 부산 앞바다로 달려갔다. 적이 약한 모습을 보이며 유인하는데, 우리 군대는 형세를 타고 육박하여 날카로운 기세로 급하게 추격하다가 적진 깊숙이 들어간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뱃사람들이 이미 수령(水嶺)을 넘었노라고 고하니 공은 크게 놀라 급히 배를 돌려 물러나 돌아오는데, 전라우수사의 전선은 이미 표류하여 동해 쪽으로 떠내려 가버렸다. 적이 우리 군대가 기세를 잃어버렸음을 보고서 신구(新舊)의 병선을 모두 내보내 나는 듯이 어지럽게 닥쳐오고, 또 몰래 가벼운 배을 보내 영등포(永登浦)의 섬에 숨겨놓았다. 아군이 물러나 영등포에 이르러 다투어 하선(下船)하여 급히 땔감과 물을 구하는데, 홀연히 한 차례 포성이 울리며 적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장검을 휘두르며 좌우로 어지럽게 베니 아군은 출구를 빼앗아 달아났다. 물러나 온라도(溫羅島)에 이르니 서쪽 해는 이미 바다 밑으로 져서 하늘은 어두운데, 추격하는 적은 바다를 덮고 있어 군정(軍情)은 더욱 위태로우니 공이 제장(諸將)들을 모아 의논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소.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않으니 오늘의 계책으로는 다만 한 마음으로 순국(殉國)하는 것이 있을 뿐이오.」

라고 하였다.

이 날 밤에 왜적이 비밀히 작은 초탐선(哨探船)을 보내 아군 선단의 사이로 몰래 잠입하였고, 또 병선으로 몰래 밖을 포위하였으나 군중(軍中)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우리 전선에 불이 나기에 공이 급히 북을 치고 바라를 불어 변고를 알렸는데, 문득 보니 적선이 사방에서 충돌해 오며 탄환을 비처럼 쏘고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 바다를 말아올리는 듯하여 막을 수가 없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닻을 올리고 먼저 달아나니 아군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공은 전선을 버리고 해안으로 올랐는데 적이 추격하여 목을 베어 가버렸으니, 이 날이 정유년 7월 16일로 공의 나이 58세였다.

적이 물러간 후에 시신을 거두어 진위(振威) 여좌동(余佐洞)에 장사지냈다. 조정에서는 예법에 따라 제사(祭祀)를 지내고 부의(賻儀)를 내렸다.

신축년(辛丑年, 1601)간에 이르러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체찰사(體察使)로서 남쪽으로 내려갈 때, 상께서 불러보시고 이르기를,

「원균이 패하여 죽은 이후에 비방하는 말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지만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습속은 누가 한 가지 일을 잘하면 의례히 현명하다고 하고, 한 가지 일을 실패하면 의례히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패전이 어찌 그가 한 일이겠는가? 그 당시의 서장(書狀)을 보면 안골포의 적진을 먼저 몰아낸 후에 들어가 토벌하려 하였는데, 조정에서 독전(督戰)하고, 원수는 곤장을 때렸으니 (이는) 원균이 스스로 패한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 그로 하여금 패하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덕형이 대답하기를,

「대개 당초에 순신과 서로 바꾼 것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조정에서 급하게 싸우도록 하였으니 비록 장수를 바꾸지 않았다고 해도 패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대장(大將)이 죽으면 부장(副將)을 참하고, 부장이 죽으면 영장(領將)을 참한다.〉고 하였는데, 균이 이미 패하여 죽었는데도 비록 그 관하(管下)의 장수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겠지만 조사해서 골라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603) 6월에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녹훈할 때에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이 아뢰기를,

「원균은 애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 해상의 대전(大戰)에 참여하였고, 그 후에 주사(舟師)를 패몰시킨 과실이 있으므로 이순신·권율과 같은 반열에 둘 수 없기 때문에 2등으로 내려 녹훈했던 것입니다.」

라고 하니, 상께서 전교(傳敎)하기를,

「적변이 일어났던 초기에 균(均)이 순신(舜臣)에게 구원을 청한 것이지 순신이 스스로 출전한 것이 아니었다. 적을 토벌할 때도 균이 몸소 죽음을 무릅쓰고 매번 선봉이 되어 용맹을 떨쳐 앞장서 올라 승리를 거두고 노획한 공은 순신과 매 한가지인데, 그가 빼앗은 적의 수급과 누선(樓船)을 도리어 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순신을 대신하게 되어서는 재삼 계본(啓本)을 올려 부산 앞바다로 들어가서 토벌할 수 없다는 뜻을 힘써 말했었다. 비변사에서 독전하고 원수가 곤장을 치니 이에 균은 반드시 패할 것을 잘 알면서도 진을 떠나 적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복몰(覆沒)되었으며, 자신도 죽었으니 원균은 비단 용맹이 삼군의 으뜸일 뿐만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옛적에 가서한(哥舒翰, 당나라의 장수로 안록산의 난에 동관을 지키고 있었는데 양국충이 낙양을 탈환하라고 명령하여 동관을 나섰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으로 출전하여 적에게 패하게 되었으며, 양무적(楊無敵, 무적장군이라 불리웠던 북송의 명장 양업(楊業)으로 요나라와의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다 이를 시기한 반미로 인해 적에게 포위되어 죽었다)이 반미(潘美)에게 협박을 당하여 눈물을 뿌리며 출전했다가 결국 적에게 섬멸되었으니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 고금의 인물을 성패(成敗)만 가지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련하게도 그의 운명이 때에 맞지 않아 공을 이루지 못하고 일은 실패하여 그의 역량[心跡]도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전에 영상(領相)이 남쪽으로 내려갈 적에 (내가) 균을 가엾게 보는 뜻을 대략 보였는데도 오늘날 논공(論功)할 때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마침내 1등공신의 세 번째로 녹훈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04) 4월에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功臣)의 호칭을 하사하고,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원릉군을 증직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 예부랑(禮部郞) 유성(柳惺)을 보내서 가묘(家墓)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학사(學士) 이선(李選)이 공을 위해 전(傳)을 지었는데, 공의 시종(始終)의 일을 밝힌 것이 매우 상세하고 명확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균(均)이 거느린 주사는 그 수가 매우 적고, 세력도 매우 약하여 순신(舜臣)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순신이 오기도 전에 적선을 격파하여 불태웠으며, 이로써 품계가 올랐다. 순신과 합세하였을 적에는 또 반드시 몸소 선봉이 되어 곧바로 돌진하여 싸웠으니 가는 곳마다 모두 승첩하였다. 비록 그가 패전하던 때에도 오히려 적선 10척을 격파하였으니 그의 충의(忠義)와 공열(功烈)도 자연 탁월하여 족히 한 시대의 호신(虎臣)이었다. 후에 와서 순신을 위하여 문자를 찬양하는 이들이 균을 편벽되게 여지없이 공격하지만 균은 순신에 비하여 성패의 자취는 조금 다를지언정 나라를 위해 죽은 절의는 다를 바 없는데 어찌하여 그 억누르고 찬양함이 큰 차이가 나는가?



○ 아래 기록은 『난중잡록』의 칠천량해전 뒷부분에 추가로 기록된 부분이다. 이것이 조경남이 나중에 정리하면서 달천몽유록에서의 원균에 대한 서술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선(李選)이 썼다고 하는 「원균전」 중에서 행장에 소개된 위 기록과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이것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均雖敗死, 似非不忠不義之徒, 而後來譏之者, 甚衆, 達川之錄, 擯不齒列, 愚不敢知, 錄中之員, 果皆盡忠盡義之人, 而均之不能彷彿其萬一者耶, 何其取舍之, 不公也, 當時, 爲將者, 超邁元均者, 有幾人哉, 其後論功, 均亦與於宣武元勛之列, 嗚呼, 此可見王法之公矣, 以均爲不忠而罪其死賊之狀, 則彼觀望退走偸生苟活者, 將何罪以加之。

-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 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달천몽유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이지만, 원균이 그들의 만분의 일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고, 당시에 장수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가.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원균도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아! 왕법의 공정한 것을 볼 수 있도다.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저 관망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꼬.



라고 하였고, 그 아래에 조목조목 해명하니 이에 이르러 빠진 것이 없었다.

우재(尤齋, 송시열) 선생이 말하기를,

「숭정(崇禎) 기해년(己亥年, 1659) 봄에 조정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비석을 노량의 사당에 세우는데 나에게 글을 짓게 했다. 그 글에 통제사 원균이 군대가 패하여 달아나다 죽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대개 택당(澤堂) 이공(李公, 李植)이 찬(撰)한 시장(諡狀)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에 을축년(乙丑年, 1685) 5월에 통제사의 증손인 순격(舜格)이 통제사의 녹훈교서(錄勳敎書)와 사제문(賜祭文)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시장과는 기록한 것이 크게 달랐다. 내가 말하기를, 〈택당은 세상에서 훌륭한 사가(史家)라고 일컬으니 그가 쓴 글은 필시 살폈을 것이나 교서와 제문의 문구도 왕의 말씀이시니 당시에 왕명을 대신하는 신하들도 어찌 감히 일호라도 허위와 과장이 있었겠는가? 또한 성조(聖朝)에서도 어찌 대려지권(帶礪之券, 한고조 유방(劉邦)에게서 유래한 말로 공신의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겠다는 맹세가 적힌 녹권 즉, 공신녹권을 말한다)에 올렸겠는가? 그 자손들이 원통하다고 할만하다.〉」

고 하였다.



○ 송시열의 이 말은 그의 문집인 『송자대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있는 민정중(閔鼎重)에게 보내는 서간도 함께 덧붙인다.



○ 書贈元統制曾孫舜格
崇禎己亥春, 朝廷將立忠武公李舜臣碑於露梁廟, 屬筆於余, 旣而上徵草本, 特賜睿覽, 其文有元統制均軍敗走死語, 蓋本澤堂李公所撰諡狀也, 其後乙丑五月, 統制之曾孫舜格持統制錄勳敎文及賜祭文來示余, 大與諡狀所記不同, 余謂澤堂世所稱良史, 其考實也必詳, 立言也必審, 不於此徵信而誰徵哉, 然敎書祭文俱是王言, 當時代言之臣, 亦豈敢一毫虛張哉, 聖朝又何妊諸帶礪之券哉, 宜乎子孫之稱寃也, 舜格又言嘗以此再擊登聞, 而俱爲朝議所[門+亥]而不伸云, 此則必有其說, 而非草野賤子所敢知也, 姑書所疑, 以示孫兒疇錫, 蓋渠才經史官, 早晩倘受考史之命, 而得當時實蹟, 則庶免朝議之左右佩劍矣。 『宋子大全』卷一百三十五

- 숭정(崇禎) 기해년[1659] 봄에 조정에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비를 노량(露梁)의 사당[충렬사]에 세우려고 하였는데, 나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그 뒤에 상께서 초본(草本)을 가져 오라 하시어 특별히 열람하시고 내려주셨다. 그 글에 통제사 원균(元均)이 군대가 패하여 달아나다 죽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대개 택당(澤堂) 이공(李公, 이식)이 지은 시장(諡狀)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후 을축년[1685] 5월에 통제사의 증손(曾孫)되는 순격(舜格)이 통제사의 녹훈교서(錄勳敎書)와 사제문(賜祭文)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시장에 기록된 것과는 크게 달랐다. 내가 이르기를, 「택당은 세상에서 훌륭한 사가(史家)라고 하는 사람이니 그 사실을 헤아리는 것이 필시 상세하였을 것이고, 입언(立言)함에 필시 살폈을 것인데 이것을 증거로 삼아 믿지 않고 누구에게 근거하겠는가? 그렇긴 하나 교서와 제문도 모두 왕의 말씀이니 당시에 왕명을 대신하는 신하들도 또한 어찌 감히 일호(一毫)라도 허위와 과장이 있었겠으며, 성조(聖朝)에서도 또한 어떻게 대려지권(帶礪之券, 공신의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겠다는 맹세가 적힌 녹권 즉, 공신녹권)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겠는가? 마땅히 그 자손들이 원통하다고 이를만하다.」고 하였다.

순격이 또한 말하기를, 일찍이 이 일로써 두 번이나 등문고(登聞鼓, 신문고)를 두드렸으나 두 번 모두 조정의 의논에 막혀 원통함을 풀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는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초야에 묻혀있는 비천한 내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기에, 잠시 그 의심스러운 바를 적어두었다가, 손자인 주석(疇錫)에게 보여주려 한다. (손자 주석은) 대개 재주와 경륜을 갖춘 사관(史官)으로 조만간 아마도 사서(史書)를 살피는 명을 받을 것인데, 당시의 실적(實蹟)을 알게 된다면 조정의 의논을 막는 좌우의 칼을 찬[佩劍] 이를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이다.



○ 與閔大受 甲子[1684] 八月二日, 대수(大受)는 민정중의 자(字)
酒食恩例, 猥蒙周旋, 極荷眷私, 第有辭少受多之嫌, 故因答驪陽書, 略露腎腸, 冀以轉達矣, 未知果然否, 玆者故元統制曾孫舜格再來, 示以統制錄勳敎書, 而以此漢所撰露梁碑所謂軍敗走死等語, 寃訟甚切, 當初陋撰, 悉本於澤堂所記, 而白沙承命所撰, 亦曰代斲血指, 則與敎書不翅逕庭, 蓋撰露碑也, 亦奉孝廟明命, 而實執事先發之也, 考覈必詳, 故曾語以詣門請命矣, 今以下敎來傳, 而未詳盛意所在, 伏未知, 如何則可以解彼之寃, 而亦不戾於二老之文耶, 精神昏耄, 莫知攸處, 更爲明敎切仰。 『宋子大全』卷六十
- 술과 음식을 은례(恩例)로 외람되이 주선(周旋)해 주시니 권애[眷私]를 입은 것이 지극합니다. 다만 사양한 바는 적고 받은 것은 많은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여양(驪陽 민유중)에게 보내는 답서에 저의 진심을 약간 드러내어 전달(轉達)해 달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자에 고(故) 통제사 원균(元均)의 증손인 순격(舜格)이 다시 와서 통제사의 녹훈교서(錄勳敎書)를 보이며 이 사람이 지었던 노량비문(露梁碑文)에 소위 군대가 패하여 달아나다 죽었다는 등의 말이 있다 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이 심히 절박했습니다. 당초에 제가 지은 비문은 모두 택당(澤堂, 이식)이 기록한 바에 근거한 것이며, 백사(白沙, 이항복)가 임금의 명을 받아 지었던 것에도 또한 이르기를, 서투른 자로 대신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교서(敎書)와 더불어 큰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노량비문을 지은 것도 또한 효종(孝宗) 대왕의 밝으신 명을 받들어 실지로 먼저 발간된 일들을 모아서 상세하게 조사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합문(閤門)에 뵙고서 명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하교(下敎)를 와서 전하는데 (주상의) 훌륭한 뜻[盛意]의 소재를 자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어떻게 해야 가히 그의 원통함을 풀 수 있고 또한 두 어른의 글도 어그러뜨리지 않을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신이 혼미하여 처리할 바를 모르겠으니 다시 한번 밝은 가르침을 간절히 바랍니다.




아아! 공은 충성스럽고 꾸밈이 없으며 곧은 마음가짐으로【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공을 일컬어 한 말이다.】 나라를 위하여 죽겠다는 뜻을 품고 오랑캐를 토벌하여 공을 세우던 때로부터 시작하여 북방[朔野]에 명성을 떨치더니 바다에서 왜구가 충돌(衝突)해오는 때에 있어서는 열진(列鎭)이 와해되는 날에 떨쳐 일어나 제 몸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장사(將士)들을 격려하고 순신에게 요청하여 한마음으로 힘을 다해 반드시 흉도(凶徒)들을 초멸하여 바다의 요기(妖氣)를 깨끗이 소탕하기로 기약하였으며, 공이 붙잡아 불태우고 사로잡아 벤 공도 순신에게 뒤질 바 없었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날뛰자, 조정에서는 왜적에게 속아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끝내 군대를 잃고 그 운명을 다하게 만들고서야 그쳤다. 죽고 난 후에도 또 비방하는 말이 분분하여 그 시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어 공의 역량[心事]이 거의 묻히고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선조대왕께서 공의 원통한 정상(情狀)을 깊이 살피시고 전후로 성유(聖諭)하심이 정녕할 뿐만 아니라 공을 녹훈하는 교서에는 더욱 명백하고 간절한 것이 가서한(哥舒翰)과 양무적(楊無敵)의 일을 인용하여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크시도다! 왕의 말씀이여! 백세(百世)의 공론[公案]이 되기에 족하도다. 만약 공의 영혼이 앎이 있다면 생각컨대 필시 지하에서 감읍(感泣)할 것이다. 이 학사의 전기와 우재 선생의 말씀에 이르러서는 또한 당시의 글로 취하여 믿을 수 있고, 후대에 고증[考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옛적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같이 수양성(瞍陽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이르러 또한 같이 나라를 위해 죽었으나 그 때에 장순을 지지하는 사람이 또한 허원을 폄하하는 말이 있었는데, 한 문공(韓文公, 한유)이 허원을 위해 전기를 짓고 후서(後敍)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명백히 하였기에 후에 시비(是非)가 비로소 정해지게 되었다. 지금 공이 연이어 비방을 받는 것도 실로 허원과 같은 부류이니 우재 선생과 여러 사람의 말이 (한유의) 후서에 비하여 더욱 빛나기에 공을 폄훼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역시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성조(聖祖)께서 신변(伸卞)하고 포장(褒奬)한 것에 이르러서는 허원도 얻지 못한 바이다. 아아! 이에 공은 다시는 일호의 유감(遺感)도 없도다.

부인은 파평 윤씨로 진사 증(贈) 참판 언성(彦成 → 彦誠)의 따님이다. 선묘조(宣廟朝)로부터 늠료(廩料)를 지급하여 봉양하는 거조(擧措)가 있었는데, 광해군 대에 폐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다시 명하여 급료를 지급하게 하였다. 가정(嘉靖) 정미년(丁未年, 1547)에 태어나 숭정(崇禎) 임오년(壬午年, 1642)에 돌아가셨으니 나이 96세였다. 이 때에 이르러 공의 묘를 옮겨 개장(改葬)하고 부인을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은 없고 딸이 하나 있는데, 현감 한억(韓嶷)에게 출가했다. 측실로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는데【족보상으로는 서녀가 넷인데 누락됐다. 각각 승지 조정견(趙廷堅)과 병사 정항(鄭沆)의 첩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사웅(士雄)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원성군(原城君)을 습봉(襲封)하였고, 딸은 동지(同知) 이신춘(李新春)과 의신군(義信君) 비(備)에게 출가했다. 현감(縣監, 한억)은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석망(碩望), 석진(碩振), 석신(碩臣), 석량(碩良)이다. 석량은 무과에 급제하여 방어사(防禦使),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딸은 학생(學生) 유정(兪楨), 참판(參判) 남로성(南老星)에게 출가하였다. 원성군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필(珌)과 염(琰)이다. 동지(同知, 이신춘)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윤안지(尹安之)에게 출가하였다. 의신군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원평령(原平令) 박(珀), 원계령(原溪令) 경(瓊), 원흥령(原興令) 거(琚), 원창령(原昌令) 구(玖), 원양수(原陽守) 정(珽), 원인령(原仁令) 락(珞)이다. 필(珌)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순격(舜格)으로 지금 공의 제사를 모시고 있는 이다.

순격에게 진서(震瑞)라는 아들이 있는데, 부친의 뜻으로 내게 와서 공의 행장(行狀)을 청하는 것이 매우 근실하였다. 나 간(榦)은 (행장을) 지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누차 사양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성교(聖敎)와 선현들의 근거할만한 글을 감히 취하여 대략 점철(點綴)을 더해 입언(立言)하여 군자(君子)들의 재량하여 살핌[財察]에 돌리고자 한다. 사헌부 대사헌 김간(金幹)은 찬(撰)하노라.  



* 김간이 대사헌에 제수된 것이 1725년 3월 28일이고, 1727년 3월 중에 사직했기 때문에 이 기간에 이 행장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집인 『후재집(厚齋集)』에는 이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원주원씨족보 중에 前경신보가 1740년에 인쇄되었고, 거기에 이 행장(行狀)이 실려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잘 맞는다.


옮김 : http://blog.naver.com/hangiree?Redirect=Log&logNo=3001233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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