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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朝鮮太宗의王權强化策에대한考察

 이름 : 

(2007-04-22 17:57:57, 5925회 읽음)

朝鮮太宗의王權强化策에대한考察



- 目   次 -

Ⅰ. 序 論



Ⅱ. 軍權掌握과 私兵革罷

1. 軍權掌握과 侍衛軍의 强化

2. 軍令機關의 改編



Ⅲ. 國王中心 政治體制로의 整備

1. 議政府의 權限縮小

2. 六曹直啓制의 定立



Ⅳ. 功臣과 外戚勢力의 除去

1. 功臣勢力의 除去

  1) 李居易·李佇勢力의 除去

  2) 李茂의 除去

2. 外戚勢力의 除去

  1) 閔氏兄弟의 除去

  2) 沈溫의 除去



Ⅴ. 世子廢位와 讓位



Ⅵ. 結 論







Ⅰ. 序 論



우리나라 역대 임금 중 가장 '聖君'으로 알려진 임금은 朝鮮의 世宗이다. 세종의 빛나는 업적에는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礎石을 다진 太宗의 비중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에 태종이 실시한 여러 정책과 체제 정비의 과정을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靖安君 李芳遠은 太祖 李成桂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高麗末에 鄭夢周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추대하는데 앞장서는 등 朝鮮王朝 개창에 큰 貢獻을 하였지만, 太祖妃 康氏와 鄭道傳·南誾 등의 배척으로 개국 후의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후 康妃는 태조 5년에 死去하고, 태조는 王 7년 7월부터 8월까지 病中에 있었다. 이때를 기하여 이방원은 정도전 등의 독주에 불평을 품고 있던 開國功臣을 규합하고 독자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정도전·남은·沈孝生 등을 제거하면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定宗이 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기는 하나 定宗朝에 실권을 장악한 것은 왕자의 난을 주도한 이방원과 그를 추종한 定社功臣들이었다. 이방원은 정종 즉위년 9월로부터 兼判尙瑞司事가 되어 河崙·李居易·趙英茂 등과 함께 國事를 처리하였고, 정종 2년 1월에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王世子가 되면서  軍國重事를 총관하였다. 또 정안군 이방원은 私兵 및 都評議使司를 혁파하면서 왕권강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를 볼 때 태종은 즉위 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태종은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하고 즉위한 만큼 명분상 脆弱性을 탈피하지 못하였고, 이에서 이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태종의 이러한 조선왕조의 개창 및 왕권강화와 관련되어 이를 다룬 많은 연구가 있었다. 왕자난의 발생원인과 성격, 開國·定社·佐命功臣들의 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혜택 등이 여러 관점에서 검토되었다. 이방원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사병혁파와 이에 따른 軍制改編이 연구되었다. 태종정권의 성격에 관한 검토가 행해졌고, 태종 왕위의 취약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에 대해서도 연구되었다.

또 태종 즉위 전이나 즉위 이후의 제도정비와 왕권강화책에 대하여도 많은 연구가 행해졌다. 도평의사사의 의정부로의 개편이나 의정부와 육조의 권한관계, 승정원과 육조속아문 등에 대해서도 검토되었다. 왕권강화와 관련된 공신과 외척세력의 제거도 연구가 있었고, 功臣田을 下三道로 移給하는 문제도 검토되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에 걸친 연구성과를 수렴하면서 태종의 왕권강화 도모를 위한 諸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태종의 군권장악과 사병혁파를 살펴보고자 한다. 두 번째, 국왕 중심 정치체제의 정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세 번째, 태종의 왕권강화의 일환 인 공신세력과 외척세력의 제거에 대해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태종이 世子를 廢하고 왕권강화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第 3子 忠寧大君을 세자에 책봉하여, 讓位 후에도 上王으로서 정치를 주도하였음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태종이 어떻게 왕권을 강화해 나갔으며, 國王을 중심으로 한 국정체계의 운영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Ⅱ. 軍權掌握과 私兵革罷



1. 軍權掌握과 侍衛軍의 强化

태조 7년과 정종 1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왕자난을 계기로 靖安君 이방원의 정치세력이 확립되고, 정종 2년에 이방원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새로운 안정지향의 노력과 더불어 사병의 혁파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조선왕조의 개창으로부터 사병이 혁파된 정종 2년까지의 군사기구와 그 운영을 보면, 태조 2년에 중앙군을 지휘하는 義興三軍府가 설립되었고 지방의 군사는 각 절도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태조 3년 1월경 이후에는 당시의 정치를 주도한 정도전이 判事가 되어 군정을 총관하였다. 태조는 태조 3년 2월에 정도전의 병제개혁안에 따라 十衛와 諸道를 삼군에 분속시켰다. 또한 태조 4년 2월에는 十衛의 명칭을 4侍衛司와 6巡衛司로 개칭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의흥삼군부는 京外의 문반·군사를 동원·지휘·감독하는 군령기능, 궁궐순찰, 도성경비, 진법훈련, 군제개편 등을 주관하였고, 무반인사에 간여하는 등 광범위한 군정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건국 초에는 왕권과 통치질서가 확립되지 못하였고 각 道에서 번상한 侍衛牌를 私的으로 지휘한 도절제사가 독자적으로 존재하여 의흥삼군부가 발휘한 군령기능은 그렇게 강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의흥삼군부의 운영에 있어서 그 운영이 공적인 것 이라기 보다는 판사 등 개인을 위하여 운영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태조 5년에 이르러 정도전이 지은 외교문서로 인해 명과 表箋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朝明관계가 약화되었다. 이에 정도전의 주도로 요동정벌을 위한 진법훈련이 강화되는 등에 따라 의흥삼군부의 군령기능과 군정기능이 강화되었다.

진법훈련이 종친 이하 모든 경외의 전 현직 문무반을 망라하면서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훈련 그 자체도 중요하였지만, 태조가 이 훈련을 주도한 의흥삼군부와 정도전(의흥삼군부판사)·남은(우군절제사)을 통해 道節制使가 私的으로 거느린 侍衛牌를 강력히 통제함으로써 병권을 집중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병권의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重臣들의 독자적인 軍統帥權을 없애고 그들에 속해 있는 사병인 侍衛牌를 公兵化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이러한 의도는 사적으로 시위패를 거느렸던 이방원 등 왕자와 趙英茂·趙溫·李天祐 등 무장의 반발을 야기했고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남은 등이 살해되면서 일단 좌절되었다.

重臣들이 거느린 私兵으로 혼란이 야기되었음은 두 차례의 왕자난이 발생함으로써 확인된 바 있다. 兵權의 집중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서 정종 2년(1400) 4월에 세자 정안군의 주도하에 王 및 世子殿의 侍衛를 제외한 일체의 私兵을 혁파하였다. 이때에 李居易·李佇·조영무·조온·이천우는 반발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典兵者들은 즉시 병권을 반납하면서 순탄히 병권의 집중이 달성되었다.

정안군 이방원은 사병혁파에 반발한 이들이 거느리고 있던 私兵은 三軍府에 편입시켰다. 정안군 이방원은 이를 계기로 더 한층 정치·군사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사병의 혁파는 조선초기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새로운 軍制를 이루어 나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태종은 즉위와 함께 정안군때에나 세자때에 추진하고 이룩하였던 사병혁파의 토대위에 시위군을 강화하면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아울러 甲士兵種이 태종대에 확립되었다.

태종 9년 10월에 十司의 임무분담에 변화가 나타났다. 十司는 9侍衛司 1巡衛司로 바뀌어져서 9司가 왕궁내의 시위임무를 담당하고, 단지 1司만이 순찰임무를 담당하였다.

十司가 侍衛에 거의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은 義勇巡禁司가 그 체제를 갖추고 巡察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점과도 연관이 있다. 태조 즉위 직후의 兩班官制에 나타나는 都府外는 치안부대로서 左·右 2領의 규모를 갖는 것으로, 高麗의 巡軍萬戶府를 잇는 기관이었다.

태종 1년(1401) 7월경에 都府外의 규모는 500명이었다. 그런데 都府外를 관장하는 巡軍府는 태종 2년(1402) 6월에 巡衛府, 그리고 다음 해에는 義勇巡察司로 개칭되어 巡察의 임무를 계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태종 9년(1409) 十司의 개혁에서도 忠武巡禁司가 義勇巡禁司와 함께 서로 교대하면서 「巡察·監巡」의 일을 맡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十司는 태종 18년(1418)에 태종이 세종에게 讓位하면서 上王(태종)과 主上(세종)의 兩王을 분담 시위하기 위해서 十二司로 확대되었다. 태종이 薨逝한 다음 해인 세종 5년(1423) 12월에는 증설된 二司가 폐지하면서 다시 十司제도로 환원하였다. 또한 태종은 즉위초 이후 治世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甲士·別侍衛·內禁衛·內侍衛 등을 설치하거나 그 수를 늘리면서 왕권강화를 위한 군사기반을 강화하였다.

別侍衛는 王의 측근에서 시위에 종사하는 侍衛兵인데, 태종 즉위년(1400) 12월에 司楯·司衣 등 고려말 이래의 成衆愛馬를 혁파하면서 별시위가 설치되었다. 그 수는 세종 1년(1419) 12월 당시 4番 각 50人, 모두 200人임을 확인할 수 있다. 別侍衛는 兩班子弟, 閑散人 가운데 試取된 者로써 充差되었다.

內禁衛는 王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近侍의 임무를 띠었다. 내금위는 태종 7년 10월에 당시까지 王의 측근에서 시위를  담당하던 內上直을 개편하면서 성립되었다. 내금위는 당초 60人으로부터 90人에 이르는 소수인원으로써 설치하였고, 상당한 武才를 필요로 하였던 만큼 소수의 정예부대로 王의 대표적인 侍衛軍이라 할 수 있다. 태종은 그의 私兵的 기반을 그대로 내금위에 移屬시켰으며, 초기 내금위 임용에 있어 어떠한 규정보다도 태종의 特指로서 임용하였다. 따라서 태종의 侍衛軍 가운데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내금위는 內禁衛 節制使에 의해서 통솔되었다. 내금위가 갖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番次에 의해 교대근무를 하지 않는 長番軍士로서의 지위를 계속하여 지녔다는 점이다.

內侍衛는 궐내에서 侍衛를 담당하였는데 태종 9년(1409) 6월에 설치되었다. 내시위는 左·中·右의 3番으로 나누어졌으며, 모두 120人의 員數를 갖고 王의 侍衛를 담당하였다. 내시위는 內禁衛·別侍衛처럼 양반신분 출신으로서 試取에 의해 충당되었으며 그 職任도 비슷하였다. 내시위는 세종 6년(1424) 5월에 이르러 내금위에 병합되었다.

태종대에는 그 외에도 近仗이 설치되어 侍衛에 종사하였으나 설치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근장의 규모는 200人 정도였고, 二軍에 分屬되어 있었다. 일반 庶人들이 分屬되었던 것 같고, 또 甲士取才에 응할 자격을 가졌다.

이처럼 태종은 재위기간을 통해 別侍衛·內禁衛·內侍衛·近仗 등을 차례로 설치하여 王의 侍衛를 담당하게 하였고, 이들 측근 군사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태종이 왕권강화와 권력집중을 위한 일환으로써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2. 軍令機關의 改編

태종은 즉위와 함께 군령기관을 개편하고 侍衛軍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재위기간을 통해 군령기관과 군정기관을 적절히 분리하거나 통합하는 등의 군권을 철저히 장악하면서 王權을 强化하였다.

태종은 元年(1401) 7월에 官制를 크게 개혁하면서 그 일환으로 義興三軍府를 承樞府로 개편하였다. 承樞府의 최고 책임자인 判承樞府事는 의정부 宰臣 가운데서 복수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定宗代에 中樞院을 三軍府로 개혁한 것과는 달리 의정부 관료가 승추부를 통하여 군 지휘에 간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都承旨가 承樞府知申事가 됨으로써 王이 승추부에 대하여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왕명출납 임무와 軍機 기능이 승추부에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三軍의 摠制는 태종 2년 6월에 三軍都摠制 이하 官을 설치하고, 매 一軍마다 都摠制 1人, 摠制 2人, 同知摠制 2人을 두었다. 十司를 나누어 그에 속하게 하고 모두 甲士라고 불렀다. 라고 하였음과 같이 三軍의 각 軍마다 도총제·총제·동지총제 등을 두고 그들로 하여금 十司의 군사와 甲士를 장악하도록 하였다.

태종 3년 6월에 이르러서는 쓸데없는 官을 없애고 官制를 고쳤다. …… 三軍에 각각 都摠制府를 설치하고, 都摠制 1, 摠制 2, 同知摠制 2, 僉摠制 2人을 두었다. 전에는 承樞府 謀軍摠制라고 정하였는데, 지금은 각각 府를 세워 승추부에 매이지 않도록 하였다. 軍務는 전과 같이 통솔하였다."

라고 하였음과 같이 三軍都摠制府가 承樞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독자적인 기관이 되었다. 태종 즉위 초에는 승추부라는 기관을 통해 군사 전반을 장악하게 하여 병권을 확보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차츰 태종의 집권이 안정되어 가면서 특정한 기관을 통한 병권의 집중은 오히려 체제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태종은 승추부는 軍機를, 도총제부는 軍令을 나누어 장악하도록 하였다.

三軍都摠制府가 설립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새로운 軍令體系上의 최고기관은 承樞府였다. 軍機에 대한 사항은 議政府의 개입을 받지 않은 채 王命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人的 구성 면에서는 의정부의 최고직을 갖는 자가 承樞府의 요직을 兼掌함으로써 우위에 서 있었다.

한편 三軍都摠制府의 각 군 도총제는 承樞府에서 합의하면서 移命을 받고, 다시 각 軍別로 분속되어 있는 十司의 각각에 傳令한다. 그런데 承樞府가 軍機를 장악하고 군령상의 최고의 우위에 서 있기는 했지만, 그 직접적인 군사장악과는 거리가 있었으므로 全軍(中央軍)을 통일적으로 장악 통솔하는 지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三軍都摠制府를 각 군별로 설치한 것도 군사의 장악 단계에서 비대한 兵權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兵權의 分散 뿐만 아니라 상호규제를 위한 배려도 아울러 취하여지고 있었다.

태종 5년(1405) 정월에 承樞府의 군기관장 기능을 그대로 兵曹에 이양하였다. 이때의 軍制改革으로 ① 兵曹는 正二品의 장관을 갖는 官署로 승격되었다. ② 兵曹는 武班에 대한 人事權을 장악하게 되었다. 尙瑞司가 행사하던 관리의 인사권을 이때의 개혁으로 文·武의 인사행정이 吏曹와 兵曹로 分屬되었던 것이다. ③ 承樞府가 병조에 합병되었다. 이 변화는 六曹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조직을 형성하려는 근본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태종 5년 3월에 육조의 國政掌握과 함께 취하여진 屬衛門制의 운영은 中軍·左軍·右軍과 十司 訓練觀 司僕寺 軍器監 義勇巡禁司 忠順扈衛司 別侍衛 鷹揚衛 引駕房 各殿行首牽龍이 병조에 귀속되었다. 이후의 군령계통은 中·左·右의 각군도총제부가 병조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屬御門制度에서 三軍이 병조에 귀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삼군은 三軍都摠制府를 가리킨다. 병조는 군령·군정을 관장하는 단일기관이 된 것이다.

각군도총제부가 십사와 연결되는 형식은 이전과 같았다. 그러나 承樞府의 병조합병과 같은 시기에 三軍都摠制府에서는 經歷과 都事가 설치됨으로써 기구상 보강되고 있었다. 이 조처는 十司別 구분보다 三軍別 구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各軍 別로 몇 명의 兼軍摠制가 있어서 軍 別을 단위로 파악한 것이었다. 특히 태종 7년 12월부터 8년 7월까지 채택되었던 兼上護軍制는 各軍 별로 每衛에 해당 인원이 나누어 정해져 衛를 단위로 파악한 것이었는데 처음으로 十司兼上護軍을 두고, 각 군 兼摠制를 없앴다. 그리고 三軍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매 一衛마다 甲士 150人을 통할하게 하였다.

라고 하였음과 같이 「掌軍摠制」의 체제로 복구되면서 經歷과 都事를 각군도총제에 설치되어 기구상의 강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병조가 최고의 군령기관으로 되었으며, 中·左·右의 三軍都摠制府가 병조로부터 受命하여 十司의 말단에까지 傳令하도록 계통이 잡히게 된 것이다.

병조에 의한 단일적인 군령체계가 수립된 지 2년이 지난 태종 7년 12월에 禮曹가 王旨에 의하여 만든 「十司兼上護軍統屬及號令所出」에서는 兼上護軍處라는 指揮官會所가 나타나며 병조의 군령은 이곳에 보고·시행하도록 규정되고 있다.

또한 태종 8년 2월에 領三軍事가 主宰하는 領三軍處라는 군령상의 합의기관이 존재하였다. 왕명에 의하여 禮曹가 작성하여 최종적으로 왕의 재가를 받은「領三軍事體統禮度」에는

"무릇 모든 軍令은 兵曹가 장악하여 三軍都摠制와 十司에 이행하는데 이때 三軍護軍, 十司鎭撫와 各道節制使道色掌은 즉시 領三軍事處에 나아가 보고하고 시행한다. 십사의 甲士 각 1員과 各道 軍官 각 1員은 매일 領三軍事處에 나아가 伺候聽令한다. 春秋講武나 王의 京外行辛時에는 위의 護軍 鎭撫 色掌 등은 모두 領三軍處의 號令을 듣는다."



라고 하였듯이 三軍都摠制府와 십사가 병조로 부터 군령을 하달받아 領三軍事處에 알리고 시행하였다. 그리고 갑사와 各道의 군관이 매일 그곳에서 명령을 하달 받았다. 領三軍事에는 병조의 병권확대와 의정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정승을 역임한 조영무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종합하면 領三軍事處라는 회의체는 병조에 의한 군령관의 독단을 막고 군사운용의 실제에서 상호협조할 수 있도록 한 조처였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태종은 태종 9년 (1409) 8월에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세자에게 讓位를 선언하면서 三軍鎭撫所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군령체계는

         "三軍鎭撫所를 두었다. 이 때에 兵曹에서 軍政을 摠管하였는데, 王은 세자에게 전위한 뒤에 군정을 맡고자 하여 말하기를, "兵曹를 儒臣들로만 뽑아 채우니 군사를 指 하기에 마땅치 않다"하면서 贊成事 李天祐로 道鎭撫都摠制로 삼고 朴子靑을 上鎭撫로 삼고 豊山君 沈龜齡을 副鎭撫로 삼고 上護軍 車指南 등 27人을 鎭撫로 삼았다."

라고 하였음과 같이 삼군진무소를 설치하여 병조에 의한 군령·군정총관의 독단을 시정하고 軍政을 직접 관장하고자 하였다.

태종의 병권장악의 의지는 삼군진무소를 설치하고 난 며칠 후에

"지금 三軍鎭撫所를 설치한 것은 대개 예전에 병권이 한곳에 속하지 않은 뜻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태조대에는 三軍府가 병권을 다 장악하였으나, 諸道의 軍兵의 진퇴는 모두 중추원의 지휘를 따랐었다. 그러므로 병권이 兩分되었으니 이를 혁파하여 承樞府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軍務가 모두 병조에 귀속되도록 한 것은 그 법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 현재 삼군을 출동하려면 먼저 領三軍에게 보고하고, 다음으로는 三軍摠制에게 보고해야 되는데, 이는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라고 하였듯이 병조에 귀속된 병권을 삼군진무소에 분산시키고 자신이 직접 장악하고자 한 것이다. 곧이어 삼군진무소를 義興府로 개칭하는 조처를 취하여 무관의 인사권과 그 밖의 儀典的인 사항들은 병조에게 맡기고, 軍機·侍衛·巡察 등 군령기능은 의흥부에 맡겨 병권을 양분하였다. 그리하여 의흥부에서는 군사를 살피게 하고 병조가 이를 다시 고찰토록 하였던 것이다. 삼군진무소를 만들 때에는 병조에 귀속된 병권의 핵심을 이곳으로 이관하여 자신이 직접 관장하려고 하였던 데 비하여 이 때에는 의흥부와 삼군진무소의 역할을 더욱 명확하게 규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개혁은 의흥부 지휘관들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병조가 이를 고찰토록 하려는 의도였다.

태종 9년 10월에 의흥부와 병조와의 분장관계를 다시 정하였는데, 이전의 것과 거의 비슷하였다. 이것은「軍政多門」, 태종이 軍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는 점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Ⅲ. 國王中心 政治體制로의 整備



1. 議政府의 權限縮小

조선 개국 초에는 공신이 중심이 된 宰樞가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정치는 물론 경제·군사에 이르는 全 國事를 총괄하였다. 따라서 도평의사사의 운영은 왕권을 위축시키면서 국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고, 동시에 政務의 번잡과 官紀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태조 7년 4월에 諫官 박은 등이 도평의사사에 대한 시정책을 시도하였고 그에 따른 減員조처로 40여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도평의사사는 여전히 人事가 문란하였고 이는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이방원의 정치·군사력이 정종의 왕권을 뒷받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평의사사에 대한 어떤 조처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안군 이방원이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왕세자에 封하여져서는 정치안정과 중앙집권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도평의사사를 약화시키고 병권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방원이 비록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의 일부를 제거하였지만 그것은 장차의 왕권강화를 위한 준비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방원이 得勢한 후에 정도전이 주장한 宰相 중심의 정치나 병권집중책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도 명백히 드러난다. 그리하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종 1년 11월에는 종친·공신의 典兵을 크게 축소하였고, 이어 정종 2년 4월에 大司憲 權近 등이 상소한 것을 계기로 일체의 사병을 혁파하여 의흥삼군부에 집중한 것이다.

정종 2년 4월에

"都評議使司를 고쳐 議政府로 만들고 中樞院을 고쳐 三軍府로 만들면서 삼군부의 직책을 맡은 사람은 전문적으로 삼군부의 일만 보게 하고 의정부에는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左僕射와 右僕使도 左使와 右使로 고쳤다. 다시 文藝館에 太學士 1명, 學士 2명을 두었다. 中樞院 承旨를 承政院 承旨로 고치고 都評議使司 錄事를 議政府 錄事로 고치고, 中樞院 堂後를 承政院 堂後로 고치었다."

라고 하였음과 같이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고 종래까지 정치·군사를 통령하던 도평의사사 대신 의정부는 정치만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이 개혁으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및 職制가 완전히 분리되어 의정부는 구태여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태종은 元年7월에 하륜 등의 상소에 따라 門下府를 혁파하면서 門下左·右政丞을 議政府左·右政丞으로, 門下侍郞贊成事를 議政府贊成事로, 參贊門下府事를 參贊議政府事로 고치면서 이들만이 의정부에 참여하게 하였다. 동시에 門下府郎舍는 司諫院으로, 三司는 司評府로, 義興三軍府는 承樞府로, 藝文春秋館은 藝文館과 春秋館으로 분리시켰다. 이 변혁으로 관직이 門下府적인 명칭에서 議政府적인 것으로 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잡다한 인원이 제거되면서 의정부 관원으로만 구성되게 되었다.

즉, 고려말의 도평의사사는 門下府·三司·中樞院의 2品 이상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서도 門下府職制가 정종 2년 4월에 성립된 의정부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태종은 즉위 직후 문하부마저 없앰으로써 도평의사사와 중추원에 이어 고려제도의 가장 핵심적인 기구들을 혁파하였던 것이다. 이 개혁으로 조선왕조는 10여년을 넘기면서 보다 본격적인 新王朝의 통치체계를 구축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의정부가 이후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

各司에서 時務策을 건의하였을 때에도 이를 議政府, 司平府, 承樞府에서 의논하여 시행할만한 것을 가려 王에게 보고하도록 조처하였다. 태종 원년의 개혁 이후에도 의정부를 위시하여 사평부·승추부 소속의 재상들이 마치 도평의사사 체제에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구체적인 행정실무에 있어서도 의정부가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의정부는 문하부의 혁파로 인한 정치적인 권력의 공백을 대신하고 있었으며, 태종 원년의 개혁 이후 의정부 중심의 정치체제가 굳어지면서 의정부 체제가 결국은 태조대의 도평의사사 체제와 다를 바 없이 운영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적어도 태종 원년의 개혁만으로는 당시의 정국을 효과적으로 운영해 갈 수는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전의 제도가 명칭 상으로는 모두 바뀌었지만 정치의 실질적인 운영방식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 이상 권력을 분산하여 왕에게 집중시키고자 하는 개혁의 근본의도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태종 5년 1월에 이러한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하고 王의 국정통령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육조의 지위를 높이고, 이것을 正二品의 判書로 승격시켜서, 하급의 집행기관으로부터 중추적인 정무기관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육조에는 각각 3개의 司를 설치하여 그 업무를 분담케 하였다. 또한 司平府가 戶曹에 병합되어 錢穀의 관장이 호조로 돌아갔고, 지금까지 尙瑞司에서 관장하던 관리의 人事업무를 吏曹와 兵曹에서 나누어 장악하였다. 이 때 承樞府를 廢하여 軍機의 군무는 병조로 돌아가고, 王命出納은 承政院에서 장악하도록 되었다.

승정원은 정종 2년 4월에 성립되었다.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전담하는 독립관아가 되면서 승지와 당후관의 명칭이 代言과 注書로 각각 개칭되었다. 아울러 同副代言이 더 두게 되면서 六代言이 각각 六曹事를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서 승정원이 명실상부한 왕명출납 관아가 되면서 강력한 왕권을 발휘하는 토대가 구축되었다. 결국 태종 5년의 개혁을 계기로 하여 의정부의 약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육조와 代言司의 기능과 직제를 정비·강화하여 점진적인 왕권의 강화와 이에 관련된 육조지위의 강화 및 六曹庶務의 논의 등으로 육조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태종 5년의 개혁이후에 六曹庶務가 이행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의정부가 대소사를 처리하였다. 예컨대 戶曹에 이관된 三司의 기능을 의정부가 장악하였고, 東西班의 銓注權이 다시 의정부에 귀속하는가 하면, 吏曹와 刑曹가 의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또한 文武官의 進言을 의정부가 채택하여 보고하였고, 의정부의 위치가 오히려 중시되어 朝房을 새로 세우고 舍人은 겸직에서 벗어나 의정부사무에 전념하였다.

그후 태종 13년 12월에 의정부의 全權獨斷과 天變의 발생을 기회로 臺諫은 수차에 걸쳐 의정부를 탄핵하면서 의정부 권한을 삭감하고 六曹庶務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육조서무를 생각하면서도 의정부서무를 혁파하겠다는 분명한 언지는 없었다.



2. 六曹直啓制의 定立

六曹는 조선 개국 초에 조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政務와 軍務의 최고권력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에서 議定해 준대로 집행만 하던 단순한 중앙행정기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宰相分權化 내지는 臣權弱化政策에 따른 태종 5년의 개혁을 계기로 하여 육조가 王을 直啓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承樞府(중추원의 기능수행)와 司平府(삼사) 各曹에 넘어왔고 인사권마저 宰相府에서 吏·兵曹로 넘어왔다. 뿐만 아니라 육조의 장관을 격상하였고 각 官?를 육조에 분속 시켰던 것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태종 5년의 개혁으로 육조의 기능이 대폭 강화되기는 하였지만 육조와 의정부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되지는 않았다. 태종은 즉위 이후 權臣들의 과도한 권력을 억압·제약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왔었다. 그런데 이 때에 육조의 권한이 이처럼 강화된다거나 아니면 여전히 의정부의 지시 감독권이 지나치게 강화될 염려가 있다는 것은 태종의 의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태종 8년 정월에 좌정승 성석린이

  "의정부는 세세한 실무를 모두 육조에 위임하고, 육조에서는 의정부에 보고토록 하며, 의정부에서는 이를 검토하여 輕重을 가린 다음 王께 보고드릴 것은 보고하고, 하부기관에 명하여 실행에 옮기도록 할 것은 그렇게 하도록 하소서. 육조에서 하는 일이 잘못되거나 지체되면 의정부에서 그 잘잘못과 태만함 등을 고찰하여 시비를 가리도록 하소서. 그러면 상급기관과 하급기관의 관계가 유지될 것이며, 번거로운 일과 간단한 일이 잘 조정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음과 같이 의정부가 세세한 일에까지 관여해서는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즉, 성석린의 건의는 의정부의 권한과 실무를 크게 축소하고 육조의 실질적인 기능을 더욱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육조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육조에서는 의정부에 그 업무를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의정부가 육조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조처로 의정부의 실질적인 권한은 더욱 축소되었고 상대적으로 육조의 권한은 확대되었다. 그렇지만 의정부의 육조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여 서로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 그 핵심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태종 14년(1414) 4월에 이르러 태종은 그간에 걸친 육조서무로의 이행노력과 병권의 단일화, 정치세력제거 등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六曹直啓制를 실시하였다. 의정부의 政務를 所任에 따라 육조에 속하게 하고 王을 중심으로 한 국정체계를 마무리지었다. 이 육조직계제의 실시로 의정부는 庶務의 권한을 잃고 크게 약화되면서 事大文書와 重囚에 대한 覆按의 기능만을 가지게 되었고, 國政은 육조가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의 六曹直啓는 의정부의 權重의 폐단을 개혁하기는 하나 태종 자신의 지적과 같이 왕에게 정무가 갑자기 늘어나 신체를 수고로이 하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또한 권력을 육조에 나눔으로써 統一性이 결여되고 정무를 적시에 해결하지 못하여 일이 막히고 지체되는 폐단을 야기하였다. 후에 世宗代에 議政府署事가 부활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크게 연유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때에 이르러 조선의 집권적 정치체제는 일단 정비되는 셈이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정비는 정치권력의 안정을 뜻하며, 사회·경제체제의 재편과 더불어 15세기초의 조선사회에 큰 발전을 가져오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세종대의 문화적 전반은 이러한 태종의 정치적·사회적 안정과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 下에 힘입은 것이었다.

Ⅳ. 功臣과 外戚勢力의 除去



1. 功臣勢力의 除去

조선 개국 초에는 開國功臣·定社功臣·佐命功臣의 功臣冊封이 있었다. 開國功臣은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원년 7월에 51명이, 定社功臣은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인 태조 7년 10월에 26명이, 그리고 佐命功臣은 태조의 즉위와 더불어 46명이 封하여졌다.

개국공신은 都評議使司를 중심으로 모든 國政을 논의하고 결정하여 육조를 지휘하면서 國政을 통령하였다. 아울러 개국공신은 막대한 양의 功臣田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새로운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정사공신·좌명공신의 경우에도 많은 功臣田을 소유하였다.

따라서 건국 직후에는 都堂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운영되었고 王權은 강력하지 못하였다. 이에 태조는 寵臣하는 정도전을 앞세워 사병의 혁파와 더불어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도평의사사 체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조와 정도전의 정치개혁안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정도전 일파의 실각과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 자신도 왕위에서 물러나게 됨으로써 일단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두차례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정안군 이방원은 도평의사사의 해체와 의흥삼군부의 장악을 시도하여 정치세력을 억제시키고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아울러 태종은 공신세력이 왕권을 위협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게끔 공신세력을 견제·억압하고 제거하였다.



1) 李居易·李佇勢力의 除去

李居易는 고려말에 參贊門下府事를 역임하였고,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右散騎常時, 평안도 병마절제사, 參知門下府事, 參贊門下府事, 判漢城府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거이는 태종의 집권과 즉위에 크게 기여하여 정사·좌명 1등공신에 책록되었고, 그 자신은 領司平府事를 역임하였다. 또 아들 佇는 좌명 1등공신으로 태조의 부마이고, 佇의 아우인 伯剛이 태종의 부마가 됨에 따라 태종 초에는 有力한 外戚家門이 되었다.

그러나 이거이부자는 정종 2년에 실시한 사병혁파에 반발하여 한달 동안이나 병권을 반환하지 않는 등의 행적으로 태종의 의구심을 자아내었고, 급기야 공신세력을 염려한 태종의 왕권강화정책이 일환으로 정치권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태종 4년 10월에 조영무가

"臣이 이거이의 집에 가니, 이거이가 臣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부귀한 것이 이미 지극하나 終始 보전하기는 예로부터 어려우니, 마땅히 일찍이 도모해야 한다. 上王은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今上은 아들들이 많지만 어찌 다 우리들을 憐悼하겠는가? 마땅히 이를 베어 없애고 上王을 섬기는 것이 가하다'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음과 같이 이거이부자가 태종과 왕자들을 제거하고 上王(定宗)을 다시 세우려는 謀逆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태종은 이거이부자의 공신책록과 직첩을 거두어 庶人을 삼았다. 이들의 옥사는 外方에 안치하는 것에 그치고 생명은 보전하였다. 그후 이거이는 태종 2년 8월에 鎭州貶所에서 死去하고 그의 諸子는 이보다 앞서 모두 복직하게 되어 이 獄은 예상외로 파란을 면하였다. 이거이부자의 옥사는 태종이 왕실과 연혼 관계에 있는 공신세력의 정치권력을 빼앗음으로서 다른 공신들을 근신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2) 李茂의 除去

李茂는 태조 7년(1498)에 義興三軍府 左軍節制使로서 정안군 이방원의 우익이 되어 그 해 연말에 정도전 일파의 제거에 참여하고 定社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다시 정종 2년(1400)에는 判三軍府事로서 이방원을 도와 제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기여하고 佐命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이무는 개인적인 능력으로 右政丞·領承樞府事에까지 오르면서 당시의 정치·군사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하륜·민무구형제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태종 7년에 민무구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평소 이무와 사이가 악화되었던 李叔蕃의 개입으로 옥사는 확대되었다.

이무의 옥사가 일어나게 된 계기는 태종 7년 9월에 尹穆, 李之誠 등과 같이 세자의 朝見隨行員으로 明에 使行한 일이 있었는데, 使行도중 윤목, 이지성이 무구형제의 무죄를 논한 것이 귀국 후 일 여년이 지나서 밝혀진 때문이었다. 당시 이무는 左政丞으로 있으면서 처음에는 이지성의 品資를 超遷시킨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로써 이무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이지성은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심문하는 과정에서 연루자가 속출하게 된다. 망언의 주동자는 이무의 族姪 윤목이었는데 심문하는 도중에 이무를 망언사건에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무는 태종이 집권한 후에도 承樞府 議政府 官僚로서 군사적인 사항에 깊이 간여하였다. 이무가 평소에 민씨형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그를 정계에서 제거할 이유는 표면상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보아 이무가 평소에 태종이 兵曹를 중심으로 추구하여 온 군지휘체계에 반대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즉, 이무가 오랫동안 병권을 잡아 여러 사람이 복종하니 그가 난을 일으킨다면 국가가 근심이 될 것이라고 태종이 우려하는데 에서도 알 수 있다.

태종이 讓位를 내세우면서 취한 일련의 조처는 이무 등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민무구형제 등을 官界에서 축출한 이후 병조의 권한을 강화하여 온 태종은 다시 이무 등 의정부 관료와 일부 三軍 지휘자의 반발로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다시금 양위파동을 일으켰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무를 하옥한 며칠 후 태종은 정부대신과 三功臣을 御前에 불러서 이무의 不忠之罪를 열거하고 정식으로 그의 불충을 질책하였다. 그리하여 이무는 투옥된 지 7일 후에 하륜의 구명이 있었음에도 昌寧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竹山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絞殺당하였다.

이무는 그와 관계되는 사람을 민무구일파로 몰아 제거한 것도 태종이 어느 정도 명분을 축적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즉 이무가 민무구형제와 결탁하였다는 점을 빌미로 삼아 그를 제거하였으나 거기에는 병권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에 반발한 세력을 없애야 겠다는 태종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었다.



2. 外戚勢力의 除去



1) 閔氏兄弟의 除去

閔氏兄弟는 太宗 妃인 閔氏(靜妃)의 동생들을 통칭하는 명칭인데, 그들에는 閔無咎·閔無疾·閔無恤·閔無悔가 있었다. 이 가운데 민무구·민무질형제는 제 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당시 제 2차 왕자의 난에도 공을 세우고 좌명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민무구는 閔霽의 제 1子로 中軍摠制·參知承樞府事 등을 역임하였고, 민무질은 민제의 제 2子로 驪城君에 封爵을 받고, 左軍摠制·左軍都摠制 등을 역임하였고 사은사로 明에 다녀왔다.

閔無恤은 閔霽의 제 3子이고, 閔無悔는 제 4子이다. 민무회는 일찍이 태종 2년에 生員試에 합격한 기록이 보이나, 민무휼은 蔭功으로 태종 3년 11월에 驢原君의 封爵을 받고 官이 恭安府尹에 이르렀다. 민무회는 태종 7년 4월에 利城君의 봉작을 받고 官이 恭安府尹에 이르렀다. 따라서 민씨형제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즉위 이후에도 태종의 통치권 확립에 기여한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민씨형제는 태종의 집권·즉위에 기여한 공로로 외척으로 또는 공신으로 당대 굴지의 가문이 되었으면서도 權謀에 능하여 나중에는 정권에 집착하였다. 결국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민무구·민무질 두 형제는 태종 10년 3월에  賜死당하였고, 민무휼·민무회는 태종 16년 정월에 역시 賜死당하였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定宗 2년 7월에 趙浚의 제거를 도모하여 물의를 야기했다. 민무구형제가 조준에게 승진을 청탁했으나 거절당하자 대간을 속여 조준을 하옥시켰다. 조준이 이거이부자를 회유하여 사병반환을 거부하도록 했다는 것이나 무죄임이 밝혀져 조준은 방면되었다.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이숙번과 不和하면서 정치주도권을 장악하였고, 태종이 兵曹 중심의 군령체계를 확립하자 三軍總制 가운데 左軍摠制를 겸임하고 있던 민무질이 사임하였다. 이에 민무질 휘하의 군사가 태종에게 허락하지 말도록 상소하였고, 이후 민무질은 항상 불만을 터뜨려 태종이 대사헌에 임명하여 회유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태종비 민씨가 태종이 宮嬪을 많이 相從하는데 대해 심하게 투기하고, 태종이 자신의 동생들을 홀대한다 하여 노골적으로 불평을 토로한 것이 廢妃를 논할 만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태종 6년 8월에 일어난 태종의 讓位소동에서 민무구형제의 옥사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때 百官의 반대로 9일만에 양위표명을 무효화하였으나, 여기에 세자의 혼인문제가 관련되어 민무구형제의 옥사가 발단하게 되었다.

국가 중대사를 사사로이 논의하는데 대한 태종의 불만이 자아낸 사건이었고 明의 왕실과 세자와의 혼인을 찬성한 이들 가운데 민제·하륜·민무구·민무질만이 투옥을 면하였다. 민제는 中宮의 至親이었고, 하륜은 功臣首相이었으며, 민무구·민무질도 功臣이었기 때문이다. 세자혼인사건은 明室과 혼인하여 자기세력을 공고히 하려던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의도가 내포된 사건이었고, 태종은 이 사실을 감지하여 결국 태종 7년 7월에 이들의 옥사가 벌어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태종 9년 10일에 민무구형제의 옥사에 연루된 李茂의 被誅와 동시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태종 10년 3월에 趙瑚의 亂言이 發露함으로써 사건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조호는 민제·하륜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고, 그의 子 希閔은 정사 3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조희민이 제 1차 讓位소동 당시 민무구형제에 의해 內宰樞에 내정되었던 것과 조호의 민씨 일가와의 친분 때문에 민씨의 黨與라하여 민무구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그후 희민은 配所에서 絞殺당하였고, 조호는 다음해 태종 10년 3월에 이무가 왕의 자질이 있다고 망언이 밝혀져서 陵遲處死를 당하였다.

결국 민무구형제와 관련된 정치파동은 태종 10년 3월 민무구형제가 사사될 때까지 거의 3년을 끌었고, 趙瑚·趙希閔·李茂·李之誠·尹穆·李彬·柳沂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민무휼·민무회의 두 형제는 민무구·민무질 두 兄의 옥사가 격렬한 정치파장을 일으키는 가운데서도 두 형이 舅家의 사사로운 정으로 끝내 국문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형이 賜死당하고 5년이 지나 끝내 賜死당하였다.



2) 沈溫의 除去

  沈溫은 靑城伯 沈德符의 아들로서 11세에 고려의 監試에 합격하고 국초에 병조와 공조의 議郞을 역임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龍武司大護軍에 제수되고, 神武司大護軍에 옮겼다가, 태종 초에 大護軍兼知閣門事가 되고, 大護軍兼幹辨內侍茶房事, 龍 司 上護軍, 判通禮門事를 역임하였다.

태종 7년(1407)에 承政院 同副代言에 발탁되었고 1년 후인 王 8년 2월에 딸 심씨가 태종의 제 3자 忠寧과 혼인하였다. 이후 左副代言, 左軍同知摠制, 豊海道道觀察使, 參知議政府事, 사헌부 대사헌, 刑曹判書, 戶曹判書, 漢城判尹, 議政府 參贊, 左軍 都摠制, 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國舅로서 靑城府院君에 책봉되고,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이처럼 심온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세종 즉위년(1418) 9월 8일에 세종의 즉위로 사신이 되어 明으로 출사하였는데, 그 출발일에 전송하는 사람들로 길이 가득할 정도가 되었다 하여 태종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세종 즉위 직후에 姜尙仁의 獄事가 일어나고, 이에 심온의 동생 심정이 연루되면서 그 화가 심온에게도 미치게 된 것이다.

세종 즉위년 8월에 태종은 不忠罪를 들어 병조참판 강상인과 佐郞 蔡知止를 의금부에 가두라고 命하였다. 당시 병조에서는 태종과 세종에게 각각 兵務를 품달하는 번거로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대궐을 수비하는 禁軍의 배치마저도 매일 세종의 藏義洞 本宮과 상왕전에 보고해야 할 정도가 되자, 병조참판 강상인은 同知摠制 심정과 의논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에게 알리지 않고 먼저 세종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분노하였다. 태종은 병조판서 박습, 參議 李慤, 正郞 金自溫·李安柔·梁汝恭, 佐郞 宋乙開·李叔福을 의금부에 가두어 심문케하였다. 이후 태종은 박습과 강상인은 原從功臣이라고 면죄하여 강상인은 고향으로 내쫓았으며 이각·채지지 등은 贖杖에 처했다.    

태종은 강상인에 대한 관대한 처분으로 탄핵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형조판서 김여지·대사헌 허지·좌사간 최개 등이 합동으로 강상인의 죄를 청하였으나 태종은 허락하지 않다가, 박습과 강상인이 비록 상왕 태종의 원종공신이라 할 지라도 벌을 내려야 國法이 평형을 이룰 수 있다는 대간과 兩司(사헌부·사간원)의 연이은 상소에 따라 강상인은 경상남도 端川의 官奴에 붙이고, 박습은 경상남도 端川, 이각은 茂長, 김자온은 梁山, 양여공은 咸安, 이안유는 慶山, 채지지는 古阜, 송을개는 漆原, 이숙복은 江東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형조와 대간에서 박습을 강상인의 예와 같이 죄주자고 청하였으나 태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강상인을 다시 불러 문초하니 자기들의 생각이 서로 옳다 여기고 상왕에게는 아뢰지 않은 불충죄가 드러나게 되어 강상인은 뜻밖에 靑城府院君 심온·長川君 李從茂·우의정 이원 등을 거론하였다.

태종은 강상인이 열거한 이들을 철저히 심문하도록 명하였다. 이원과 이종무는 상인과 對質審問한 결과 고문을 이기지 못한 상인이 誣告한 것임이 밝혀졌으나, 심온은 연경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해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태종은 우의정 이원을 석방하도록 명하고, 이종무는 심문하지는 말도록 하였으나 이관과 심정은 압슬형으로 국문할 것을 傳旨하였다. 심정에게 두차례 압슬형을 가하자 형 심온이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명령이 나와야 된다'라고 하였고, 자신도 동조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이에 태종은 심온을 주모자로 단정하고 그의 黨 상인과 이관 등을 극형에 처하여 경계로 삼고자 하기에 이른다.

태종은 심정과 박습은 심온이 돌아온 다음 대질하도록 살려두고자 하였으나 박은은

"대질시키고자 하신다면 상인과 남겨두고 세 사람은 형벌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심온의 범한 죄는 사실의 증거가 명백하니, 어찌 대질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겨 두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반역을 함께 모의한 자는 수모자와 종범자를 분간하지 않는 법이오니, 어찌 差等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심온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하였다.

태종은 강상인은 형률대로 시행하고, 박습과 이관·심정은 모두 斬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각·채지지·성달생은 赦免하려 하였으나 의금부의 반대로 외방에 부처하도록 하였다. 연경에서 돌아온 심온을 自盡하도록 명하였다. 이때가 세종 즉위년(1418)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외척을 起用함으로써 오는 폐단을 방지하는 길은 외척세력의 싹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태종은 믿고 있었다. 世宗의 장인인 심온과 이에 黨附한 세력에 대한 제거는 그의 의지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결국 태종은 자신의 처남인 민씨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심온과 그의 동조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얻었던 것이다.



Ⅴ. 世子廢位와 讓位



太宗은 세자책봉의 무질서로 초래되는 정치적 혼란과 비극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또한 새 왕조의 창업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태조 이성계에 女眞族의 血이 흐르고 있어 여진과 같은 유목민들이 末子로 상속하는 관례를 따른다는 謀略에서도 태종은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태종이 왕 2년에 서둘러 9세의  를 元子로 삼고, 왕  4년에 11살에 王世子로 삼은 것은 그와 같은 분란을 막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또한 세자폐위에 따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태종은 세자를 폐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長子로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태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 다시 세자를 폐하고, 제 3자 충녕대군을 새 왕자로 세우는 일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世子  는 1394년(태조 3년)에 靖安君 芳遠(태종)의 제 1자로 태어났다. 제의 나이 9세가 되던 태종 2년(1402) 4월에 9세에 元子로 책봉되었고 태종 4년 8월에 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이후 세자 제는 태종이 政事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文昭殿 朔祭의 攝行, 朝啓참석, 明使의 접대, 講武 등의 정치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세자 제는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學業을 소홀히 하였다. 또 無節制한 言動으로 태종의 걱정을 샀다. 즉, 세자는 매와 개 등 玩物을 좋아하였다. 따라서 세자에게 잘 보이려는 자들은 선물로 매를 바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태종 13년 정월에 右議政 趙英茂·李良祐·李天祐·李和英·趙涓·閔無恤·張思靖⌒知摠制 柳殷之·文宗孝·僉摠制 李和美 등이 몰래 세자에게 매를 바친 사실을 태종도 알고 있었다.

즉위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된 세자(20세)에게 大臣·功臣·宗親 등 有力者들이 몰래 매를 보낸 것에 대하여 태종으로서는 유력자들이 자신 몰래 세자에게 환심작전을 쓰는 데 대하여 배신감과 王位에 대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점차 태종은 이들을 反王勢力으로 규정하고 경계하기에 충분했으며, 뒤에 세자의 非行이 들춰지고 친세자세력을 억제 내지는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제압하는 효과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태종 15년 정월에는 世子殿에 몰래 출입하는 無賴·工匠을 규찰하지 않았다 하여 敬承府의 관원들을 좌천·파직시키고 서연관들도 문책하였다. 태종의 세자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태종 16년 9월에는 繕工副正 具宗秀와 樂工 李五方이 담장을 넘고 宮에 들어가 縱酒·作戱하거나 혹은 밤에 세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女色과 매를 바친 것이 발각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구종수는 杖 100에 鏡城으로 유배하였고, 이오방은 杖 100에 公州官奴로 환속시켰으나, 後에 구종수의 3형제와 이오방은 處刑되었다.

태종 17년 2월에는 태종이 비밀리에 보관하라고 당부하면서 준 王親錄을 세자는 宿衛司 李叔畝를 시켜 열어보았다. 王親錄은 桓祖의 嫡妾事實을 기록한 王室의 비밀한 계보로서, 세자가 명을 어기고 열어본 사실에 태종은 크게 노하였다.

태종은 이숙무에게 그 내용을 누설하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고 왕친록을 다시 大內로 거둬들였다. 이 일도 태종의 세자에 대한 불신을 더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어 그 10일 후에는 세자가 前中樞 郭璇의 첩 於里를 취하여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과 관련된 判官 李昇·前小尹 權保·樂工 李江華·宦子 金奇 등은 의금부에 하옥되었고, 세자의 獵色行脚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議政府·六曹·臺諫 등은 이 사건과 관련된 자들에 대하여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은 세자에게 改過遷善의 기회를 줄 것을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世子不能改者也"라고 傳旨하고 있으니, 세자를 불신한 것은 물론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후에도 세자는 태종의 엄명을 어기고 애첩 어리를 세자궁에 출입하게 하였고, 또 이일이 발각된 후 어리를 내쫓고 세자와 통하지 못하도록 하였음에도 김한로의 집에서 어리를 만나 태종의 진노를 샀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옥사가 일어났고, 김한로와 세자의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끊게 하기도 하였다.

태종 18년 5월에 세자는 태종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원망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이에 격분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충녕대군의 浮上은 세자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학문적으로나 자질 면에 있어서 事理판단능력이 세자보다 충녕대군이 우세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를 두고 세자는 자신이 궁지에 처한 것은 충녕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게까지 되었다.

충녕은 학문적 우위·인품·자질·형제간의 우애 등에서 세자의 非行과 品位失墜에 맞물려 상대적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나아가 세자로 지목되는 계기가 되었다. 태종에게 있어서, 세자  를 폐하고 제 3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어떤 면에서는 名分과 正統이 결여된 그의 왕위에 일정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효과가 있다. 非行을 거듭하고 품위를 손상한 세자 제와 不肖한 효령대군을 제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 名分에 큰 하자가 없다면, 그가 異腹동생과 형들을 제치고 즉위한 것도 정당하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자를 논함에 있어, 태종 15년을 전후하여 세자의 비행이 거듭되면서 세자를 폐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었을 때에는 분명히 代立할 왕자가 생각하였을 것인데, 그 왕자는 충녕이었을 것이다. 세자 제를 폐하고 새 세자를 정할 때에도 태종은 그의 의지와는 달리 제의 아들을 내세우기도 하고, '卜定'으로 변경했다가 결국 '擇賢'으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충녕대군의 이름을 전혀 비추지 않았다. 만약 그가 주저 없이 '擇賢'으로 기준을 확정하고 곧바로 충녕대군을 지명했다면, 일찍이 충녕을 마음에 두고 세자 제를 폐하였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까지 충녕을 감추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극적으로 충녕을 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수법은 1차 왕자의 난 이후 그에게 돌아올 세자의 자리를 일단 형 芳果에게 양보함으로써 그에게로 향한 혐의를 벗으로 한 것과도 통하는 것이다.

世宗은 태종 18년 6월에 양녕대군의 폐세자와 함께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그 2개월 후인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갑작스런 讓位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세종 4년까지는 세종이 寶位에 있기는 하나 (태종이 병조를 거느리고 군정과 인사들을 총관하였기 때문에 병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양위를 하면서 박은 등에게

"主上이 壯年이 되기 전에는 군사는 내가 친히 聽斷할 것이다. 또한 나라에서 결단하기에 어려운 일은 의정부·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여 각각 可否를 陳達하게 하여 시행하게 하고, 나도 마땅히 可否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可하다."

라고 傳敎하였음과 같이 즉, 세종은 매일 壽康宮으로 問安을 한 후 軍國重事를 모두 上王에게 아뢰어서 처리하였고, 태종은 직접 兵權을 장악하면서 세종의 國舅인 심온을 賜死하고 대마도 정벌을 주도하였다. 그후 세종은 4년 5월의 太宗薨逝와 함께 태종과의 불편한 관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정치·군사 등을 주도하였다.

Ⅵ. 結 論

이상으로 太宗의 王權强化를 위한 여러 政策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들을 요약하면서 결론을 지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은 軍權掌握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私兵革罷의 단행은 조선왕조에 정치적 안정과 새로운 軍制를 이루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태종은 군사적·정치적 권한들을 분리하여 王權 下에 놓이도록 시도하였다.

태종대에 甲士兵種이 확립되었다. 갑사를 기간병력으로 하는 十司는 조선 초의 十衛가 개편된 것으로, 수도의 치안유지가 주임무였다. 그러나 태종 9년에 이전까지의 巡察중심에서 侍衛중심으로 임무가 바뀌었다.

태종은 王측근의 군사를 더욱 늘려 왕권강화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즉, 別侍衛·內禁衛·內侍衛 등 王의 侍衛軍들이 잇달아 설치되었다.

태종은 군권장악을 위해 軍權을 軍政과 軍令으로 나누어 兵曹와 三軍府로 하여금 분장하거나, 병조로 하여금 군정·군령권을 장악하게 하는 등으로 군권을 강력히 지배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태종은 王 3년 7월에 독자적인 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여, 承樞府는 軍機를 도총제부는 軍令을 나누어 장악하도록 하였다. 태종 5년 정월에 승추부를 兵曹에 합병시켜 병조를 軍令·軍政을 총괄하는 단일기구로 삼았다.

태종 9년 8월에는 다시 세자에게 讓位를 선언하면서 三軍鎭撫所를 설치하고, 곧이어 삼군진무소를 義興府로 개칭하고 軍政은 병조에, 軍令權은 의흥부에 두었다. 태종 12년에 또다시 의흥부를 혁파하여 병조로 하여금 군령권도 관장시켰다.  

이처럼 태종대에는 군령통수체계에 대한 개편조처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한 기관에 병권이 집중되어 왕권을 제약하는 현상을 방지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태종은 병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여 조정 내에서 왕권의 위치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위해 功臣과 外戚세력을 제거하였다. 定社·佐命功臣 가운데서 王室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李居易父子와 정사·좌명공신인 李茂 등의 제거는 공신의 정치세력화를 억제하려는 태종의 의도가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신이면서 태종의 처남인 閔無咎·閔無疾·閔無恤·閔無悔의 민씨형제와 태종의 사돈인 沈溫의 제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종은 즉위 이전에 都評議使司를 議政府로 개편하여 宰樞의 기능약화를 도모하였고, 즉위와 함께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하고 六曹의 지위와 기능을 강화하여 친히 육조를 장악하면서 國政을 주도하였다.

태종은 王 5년 1월에 육조를 正二品御門으로 승격시키고, 司平府를 戶曹에, 尙瑞司의 인사권을 吏·兵曹에 각각 귀속시킴으로써 육조가 서정을 분장하고 直啓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육조의 기능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킨 후 王 14년 4월에 六曹直啓制를 定立하였다. 이로써 육조가 사실상 국정운영의 중심관서가 되고, 국왕은 육조를 친히 장악하면서 국정을 주도함은 물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태종은 王 18년(1418)에 世子를 廢位하고 第 3子 忠寧大君을 새 세자로 책봉하여 곧이어 양위하였다. 上王이 된 태종은 세종 4년 薨逝할 때까지 정치·군사를 주도하여 대마도정벌 및 심온 등의 제거를 지휘하였다.

세자폐위와 태종의 讓位는 태종정권의 名分과 正統의 취약성을 어느 정도 무마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또한 다음 代의 주역을 태종 자신이 직접 선택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바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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