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무예 자료     사학 자료     이미지 자료     기사모음     박사논문

 [논문]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대한 고찰

 이름 : 

(2007-08-22 16:58:29, 6576회 읽음)

鄭汝立 謀叛事件에 대한 考察

                                 李 羲 權 (전북대강사-한국사)

鄭汝立 모반사건에 대한 고찰

宣祖 22년(1589)에 일어난 全州人 鄭汝立(?-1589)의 謀叛事件은 3년여에 걸친 獄事의 蔓延으로  무려 千餘名에 달하는 犧牲者를 낸 慘憺한 悲劇을 불러 왔고, 結果的으로는 全羅道를 叛逆鄕으로 전락시켜 平安道 咸鏡道地方과 함께 差待 받는 地方으로서의 설움을 겪게 하였다.

鄭汝立 謀叛事件의 告變經緯  

黃黃海道 觀察使 韓準(1542-1601)과 載寧郡守 朴忠侃(?-1601), 安岳郡守 李軸(1538-1614), 信川郡守 韓應寅(1554-1614)등이 前 弘文館修撰 鄭汝立의 모반을 告變한 것은 선조 22년 (1589) 기축 10월 2일의 일로서 宣祖修正實錄에 기록되어 있는 告變經緯는 大體로 다음과 같다.

海西의 九月山 僧侶 가운데 汝立의 역모에 가담한 자가 있었는데 僧 藏巖이 이를 探知하여 載寧郡守 朴忠侃에게 비밀리에 알렸으나 충간이 머뭇거리며 결정을 못하여 告變을 하지 않았다. 이 때 安岳郡守 李軸에게 南截이라는 族弟가 있었는데 그가 시골에 살면서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고 李軸에게 알렸으므로 축이 南截을 시켜 비밀리에 汝立의 逆相을 探知하게 했다.

이이에 南截은 校生 趙球가 汝立의 弟子라고 말하면서, 항상 많은 무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이 그 종적이 평소와 같지 않으므로 이 사실을 李軸에게 알렸다. 이에 李軸이 趙球를 잡아 問招하고 그의 집에서 汝立의 편지를 찾아내어 詰問하니 趙球가 숨길 수 없음을 알고 叛逆의 實相을 모두 告했다

李軸은 즉시 朴忠侃을 불러 상의 한 결과 信川郡守 韓應寅은 名士이므로 朝廷의 신망을 얻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 趙球를 韓應寅에게 보내어 連名으로 監司 韓準에게 報告하였다.

한한편 朴忠侃은 載寧으로 되돌아가 읍내에 사는 汝立의 당원 李綏(수)를 잡아서 문초하니 李綏의 自白도 趙球의 말과 같으므로, 전에 의암에게서 들었던 내용과 함께 소를 갖추어 그의 아들을 시켜 대궐에 나아가 上變하도록 했는데 이때 황해감사  韓準의 狀啓도 그 뒤를 따라 도착되었다.

그러나 위 告變經緯에 대하여 掛一錄에는 朴忠侃이 李軸을 찾아가 鄭汝立의 역모가 드러났으니 속히 도모해야겠다고 말하였으나 軸이 쉽게 응하지를 않았고 또 韓應寅의 협조를 구하려 했으나 韓應寅이 故意로 忌避하므로 충간이 李軸과 韓應寅을 협박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여 장계를 올리게 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고,(燃藜室記述 3) 己丑獄案에도 韓準의 告變狀啓가 汝立의 모반내용을 朴忠侃이  제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패림 5, p.701)

이상의 사료를 검토하면서 제기되는 의문은 왜 해서에서 고변이 이루어 졌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宣祖修正實錄에는 汝立이, 해서지방의 풍속이 頑惡하여 일찍이 林巨正의 난이 있었음을 알고, 자신이 황해도 都事가 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安岳人 邊崇福, 朴延齡, 海州人 池涵斗 등과 정을 맺고 海西에서 역모를 진행시켰던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汝立이 황해도에서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宣祖修正實錄에 보면 일찍이 汝立이 해서는 율곡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이곳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栗谷의 사주에 의한 것이며 公論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율곡을 詆斥하다가 西人들의 최대의 증오의 대상이 된 여립이 하필이면 율곡 문인들의 소굴인 해서에서 역모를  했을 리가 없으며, 또 모반의 산실이 전라도의 수도 全州이니 全羅道에서의 역모진행이 더욱 완연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全羅 觀察使나 全州府尹 및 各 官廳의 관헌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고 해서의 벽지에서 먼저 탐지되었다고 하는 것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海西에서 고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2. 逆謀의 斷定

宣祖修正實錄의 기록을 보면 고변이 있었던 10월 2일 밤, 선조는 便殿에 나아가 三相과 六承旨 및 義禁府堂上을 모이게 하고 汝立의 甥姪인 檢閱 李震吉만을 제외하고 宿直에 들어와 있는 都摠管과 弘文館 上下番을 모두 入侍케 한 뒤 汝立의 爲人에 대하여 대신들의 소견을 묻고는 告變書를 내어놓았다. 이때 領相 柳㙉(1531-1589)과 左相 李山海(1539-1591)는 汝立의 위인을 알 수 없다고 했고, 右相 鄭彦信(1527-1591)은 그가 독서하는 사람이라고 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宣傳官과 義禁莩事를 黃海道와 全羅道에 각각 파견하였으나 , 이 보다 앞서 邊崇福(一名 涘[사])이 趙球가 告變했다는 말을 듣고 安岳으로 부터 4일만에 金溝에 到着하여 汝立에게 고변 사실을 알려 주어서, 汝立이 朴延齡의 아들 朴春龍과 자기 아들 玉男이와 함께 집안 사람들도 모르게 밤을 틈타 달아났었음으로, 다음 날에 義禁莩事 柳湛이 金溝와 全州에 있는 汝立의 兩家를 掩襲했으나 汝立을 잡지 못했다. 이 때 汝立은 鎭安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는데  縣監 閔仁伯(1552-1626)이 밭 두덕에 쌓아둔 풀 더미에서 찾아내어 군대로 포위하고 생포하기 위해서 왕명을 받들고 나아가 自辨하라고 회유했으나 여립이 듣지 않고 변숭복을 죽이고 옥남이를 죽이려다 실패한 뒤 자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玉男이와 春龍이 잡혀오고 海西의 역도들이 잡혀오게 되어 선조가 臨席한 가운데 庭鞫이 실시되었는데, 옥남은 吉三峰이 謀主이고 海西人 金世謙, 朴延齡, 李箕, 李光秀, 朴杙(익), 朴文長, 邊崇福 등이 때때로 왕래했으며 중 義衍과 都事 池涵斗가 서당에 머물면서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역도들이 곧 잡혀와서 문초를 받았는데 李光秀, 朴延齡, 池涵斗, 등의 供招가 趙球의 말과 대체로 같았으며 鄭弘 方義信, 黃彦倫, 義衍등이 伏誅되고  李震吉, 鄭汝復 兄弟, 韓憬, 宋侃, 趙惟直, 辛汝成 등은 不服하고 杖殺되었다.

결국 여립의 자살과 역도들의 자백으로 鄭汝立의 역모는 하나의 부정못할 엄연한 사실로 단정되고 말았다. 적어도 汝立의 자결이전까지는 朝臣들의 대부분이 汝立의 모반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었다. 고변 초의 朝廷의 동정에 대하여 松江年譜에는 李山海, 李潑, 白惟讓 등이 汝立을 斗護하여  告變이 李珥 門人들의 捏造라고 했으며 특히 鄭彦信은 汝立이 逆賊이 될 수가 있느냐면서  고변자를 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掛一錄에는 宣祖 자신도 汝立이 어찌 역적질이야 했겠느냐고  半信半疑했으며 , 西人들까지도 汝立이 반역할 리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雲巖雜錄에도 宣祖가 半信半疑 하다가 여립이 자결했다는 말을 듣고 獄事를 시작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문제는 汝立의 자결이다.  모반이 사실이라면 단 한번의 항거도 없이 도주하여 자결했을 리가 없으며 모반을 계획하지 않았다면 자결학 리가 더더구나 없다. 여립의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역모의 산실인 전라도 역도들은 한결같이(玉男除外) 역모사실은 부인했는데 海西에서 역도라고 지목되어온 해서 愚氓들은 모두 역모 사실을 시인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전라도에 관계없이 해서에서 사건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3. 鄭汝立 謀叛事件의 全貌

宣祖修正實錄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汝立의 逆狀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3. 1 逆謀의 動機  

汝立이 자주 宣祖의 꾸지람을 당하고 벼슬을 버리고 歸鄕햐여 全州와 金溝 鎭安 別庄 사이를 내왕하며 소일하고 있었음으로 조정에서 이를 애석히 여겨 서로 뒤를 이어 汝立을 淸望의 자리에 천거했으나 宣祖가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본래부터 跋扈의 뜻이 있던 汝立이 이처럼 좌절과 억제가 심하게 되자 모반을 계획하고는 講學을 假託하고 無賴漢들을 불러모았는데 그 중에는 武士와 僧徒들도 끼여 있었다. 당시 나라는 軍政이 문란하고 財力이 쇠진한 데다가 매년 흉년까지 들어 도적들이 횡행하고,  백성들은 군정의 紊亂으로 괴로워했으며, 北界刷民으로 인해 동요마저 있었음으로 汝立은 백성들에게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음을 알고 그의 무리들과 모반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의 사료가 제시한 모반동기는 결코 汝立의 모반사실을 단정해 줄 자료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반동기는 이런 것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鄭汝立 자신뿐인데 실은 汝立이 말 한 마디 없이 죽었다. 따라서 위 기록은 汝立의 모반사건이 단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것이 모반동기였을 것이다>라는 하나의 추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 2 謀叛嫌疑

  3. 21 讒說의 流布

* .고래로 구전되어 오던  木子亡奠邑興이라는 讒說을 汝立이 妖僧 義衍과 모의하여 이를 玉版에 새겨 智異山 石窟에 숨겨 두고 , 義衍이 道潛, 雪淸 등과 산놀이를 빙자하고 智異山에 가서 石窟의 방향에 寶氣가 있다고 말하여 동행인을 시켜 玉版을 찾아 汝立에게 가지고 가서 비밀리에 黨人들에게 보이면서 이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 . 義衍이 명산을 두루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遼東에 있을 때 王氣가 朝鮮에 있음을 보고, 와서 살펴보니 왕기가 全州 東門 밖에 있더라고 꾸며대어 全州王氣說을 퍼뜨렸다.  

* . <뽕나무에 말(馬)갈기가 나면 그 집주인이 왕이 된다>는 동요가 있었는데 汝立이 義衍과 몰래 汝立의 집 정원에 있는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갈기를 끼워 두었다가 뽕나무 껍질이 서로 붙게 되자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國初以來로 鷄龍山 開泰寺址가 李氏王朝의 뒤를 이을 鄭氏王朝의 도읍지라는 讒說이 있었는데 汝立이 鷄龍山 廢寺의 벽에 <戊己年間에 亨運이 열릴 것>이라는 詩를 써 붙였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위에서 열거한 혐의들은 모두가 汝立이 민간에 전해오던 讒說을  자기의 野心에 영합 날조하여 민심을 眩亂케 했다는 것이거나, 荒說을 조작했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汝立이 奸凶한 일면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에 학식이 뛰어나고 말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도 사실인데, 그러한 汝立이 精神錯亂症患者나 誇大妄想狂의 愚行으로 집권을 망상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며 , 만일 위 혐의들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도리어 汝立이 정권탈취와 같은 豪膽하고 雄大한 일을 감행할 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반증이 된다.




   3 . 22 武力養成

汝立이 壬辰年에 變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이 때를 틈타서 일어나고자 武士와 公私賤隸들을 모아 大同契라는 불법단체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활쏘기를 익혔으며, 丁亥倭變 때에는 全州府尹 南彦經의 요청을 받고 一號令間에 부대를 편성하여 倭軍을 물리쳤으며 부대를 해산할 때 자기의 親密武士인 將領들에게 후일 만일 변고가 있으면 즉시 소속부대를 이끌고 오라고 명령하고 軍簿를 한 벌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大同契의 조직이 모반을 위한 무력을 양성한 것이라는 혐의는 지나친 비약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一號令間에 倭寇를  격퇴할 만한 부대를 동원할 수 있을 만큼 명령체계가 치밀하게 조직화된  세력의 기반을 가진 汝立이 왜 한번의 항거도 없이 죽었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해답이다. 거사할  기회가 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宣祖修正實錄을 보면 己丑年 8월 말경 李潑의 동생 李洁이 서울로 가는 도중에 金溝에서 汝立을 만나 여러 날 놀다가 작별할 때 汝立이 佶에게 모종의 암시를 했다. 李洁이 놀라서 이러나 상경을 재촉하여 恩津縣舍에 들려 현감에게 부탁하여 민병의 호위를 받으며 상경하는데 汝立이 武士 수인을 보내어 佶의 뒤를 쫓았으나 佶이 민병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므로 감히 범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놀라서 달아나는 佶의 행동에서 汝立은 불안을 느꼈을 것이고, 佶을 뒤  쫓게 했던 자기의 수하 무사들로부터 佶이 무장한 민병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적어도 위기를 의식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告變까지에는 상당한 기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모반을 위해 세력의 기반을 형성해 두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왜 이 때에 거사를 서두르지 않았느냐는 것이며, 告變이 있은 뒤에도 邊崇福이 告變 사실을 汝立에게 알린 뒤로부터 도사 柳湛이 汝立의 집을 엄습하기까지에는 1일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왜 성패간에 거서가 없었느냐는 것이다. 세력의 기반이 구축되어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거사하지 않았다면 모반계획이 없었던 것이며, 모반계획이 수립되어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거사하지 않았다면 거사할 만한 세력의 기반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鄭汝立의 모반사실은 부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汝立은 도주해야 할 필요도 자결해야 할 이유도 없게 되어 汝立의 죽음은 自決이 아니고 他殺일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大同契란 어떤 것인가? 大同契는 모반을 위한 무력 집단이 아니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실의에 차 있는 汝立이 不滿을 달래며 시골의 불평무사나 선배들과 어울려서 활쏘기를 겨루며 술을 마시고 놀던 鄕村의 친목계에 불과한  것이었을 것이다.

3.23 擧兵說의 傳播와 兵器準備  

汝立이 池涵斗를 시켜 吉三峰과 三山 兄弟가  神兵을 거느리고 때로는 智異山에 들어갔다고 하고, 때로는 鷄龍山에 들어갔다고 했으며 鄭八龍(汝立의 幻號)이란 神勇人이 鷄龍山에 都邑하기 위해 곧 擧兵할 것이라는 말을 해서지방에 퍼뜨렸고, 汝立의 도당들이 변란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兵器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汝立이 擧兵說을 의도적으로 전파했다는 말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역모를 양성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식이하의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기록은 <역모가 사전에 발각될까봐 변란을 일으킬 결심을 했다>는 宣祖修正實錄의 기록(다음에 소개됨)과도 상호 모순이 된다.

그리고 변란대비를 빙자하고 병기를 준비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一國의 관헌들이 모두 허수아비라면 모르거니와 정부가 태연한데 백성들이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관헌들의 눈을 糊塗하고 병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 3 擧兵計劃

道潛과 雪淸이 汝立의 謀叛狀을 알고 도주하자 거사가 사전에 발각될까봐 두려워하여 변란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비밀리에 副署를 정하고 己丑年末을 기하여 湖南과 海西가 동시에 擧兵하여 서울로 쳐들어가 武器庫를 불사르고 江倉을 빼앗고 심복을 서울 都城   안에 보내어 기회를 보아 內應토록 작전계획을 수립해 놓고, 사전에 刺客을 보내어 대장 申砬(1546-1592)과 兵曹判書를 죽이고 王命을 거짓 꾸며 兵使, 水使, 方伯을 죽이고 臺官에 부탁해서 全羅監司와 全州府尹을 論劾하여 罷職 시킨 뒤에 틈을 타서 擧兵키로 했다

위의 거병계획이 事實이라면 역모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擧兵計劃이 누구에 의해서 밝혀졌느냐 하는 것이 하나의 문제다, 汝立은 말없이 죽었고 역도들이 謀主라고 지적했던 崔永慶도 역모사실을 일체 부인  했으며  海西의 愚氓들 외에는 謀叛事實을 자백한 사람들이 없었으니 해서우민들 중 누군가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己丑獄案을 보면 韓準의 告變狀啓에 역적이 장차 錦江을 건너 漢江에 이르러 烽燧와 驛人을 단절한 뒤 대궐을 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문헌상으로 볼 때 이 告變書가 趙球와 李綏의 자백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 擧兵計劃도 이 두 사람의 진술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趙球나 李綏가 擧兵計劃을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은 최소한 丁亥倭變 때 倭寇를 물리친 將領들이 아니었는데, 당시의 將領이었던 汝立의 親密武士들도 모르는 작전계획을 이들 졸병이 알 까닭이 없으며 도 거사 직전이라면 작전계획을 隷下 장병들에게 주지시켰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하겠지만 거사 2개월여 전에 그런 無謀한 행동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擧兵計劃은 告變者나 배후 조종자에 의해서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조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게  된다.




4. 獄事의 蔓延

鄭汝立의 자살과 역도들의 自服으로 역모가 사실화한 이상 조정이 조용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열세에 놓여 있던 西人들은 축배를 들게 되었고, 집권당이었던 東人들은 일대 곤욕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西人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앞을 다투어 汝立과 아는 사이거나 親戚이거나 東人이면  마구 죄를 얽어 誣告했음으로 옥사는 그칠 줄을 모르고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4.1. 李潑(1544-1589)의 獄事

東人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맨먼저 동인공격의 砲門을 연 사람은 湖南出身의 生員 梁千會였다. 그는 宣祖 22년(1589)11월3일에 上疏를 올려 李潑 李洁 金宇顒(1540-1603) 白惟讓 鄭彦信 등이 汝立과 密交를 했다고 논척했다. 뒤를 이어 11월 4일에는 禮曹正郞 白惟咸이 疏를 올려 같은 내용으로 論罪했으며 11월 12일에는 汝立의 조카 鄭緝이 鄭彦信, 鄭彦智, 洪宗祿, 鄭昌衍 李潑 등이 逆謀에 關與하였다고 供招하여 이발은 宣政殿에서 宣祖의 親鞫을 받고 鍾城으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樂安校生 宣弘福이 李潑의 모반 참여를 진술했고 鄭汝立의 집에서 潑의 편지가 많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편지에서 時事를 거리낌없이 通論했던 事實이 밝혀져서 귀양길에서 다시 불려 들어와 온몸에  살이 온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발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으며 오히려 龍洲撰相彦信碑에 보면 鄭緝이 처형될 때 크게 울부짖기를 <公卿과 士大夫를 많이 끌어들이면 살려주겠다고 말하더니 왜 나를 죽이느냐?>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宣祖實錄에 보면 宣弘福의 집에서 발견됐다던 李潑과 汝立 간에 내왕된 문서도 실은 鄭澈등이 꾸며낸 것이며 또 李潑 李洁 白惟讓등을 모반사건에 이끌어 넣은 것도 그렇게 하면 살려주겠다고 교사했던 때문이라고 宣弘福이 실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掛一錄에는 宣弘福이 處刑에 임하여 <내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나  (趙)永宣의 말을 믿고 無辜한 사람을 죄에 빠뜨렸으니 부끄럽고 한스러움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통탄했는데 이것은 鄭澈이 醫員 趙永宣을 시켜 비밀리에  弘福이를 교사한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西人인 尹宣擧(110-1669)도 魯西集이서 李潑이 逆獄에 중하게 걸려 있으나 뚜렸한 죄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부의 의논이 그를 가엾게 여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鄭澈(1536-1593)을 수령으로 한 西人들의 모함과 죄상의 날조로 무고한 李潑이 희생의 祭物이 되었던 것이다.




4 . 2 鄭彦信(1527-1591)의 獄事  

고변초 右相으로서 역도들을 治罪하는 委官이 되어 옥사를 담당하던 彦信이 역모 혐의를 받게 된 것은 역시 己丑년 11월 3일의 梁千會의 上疏에 의해서였다. 梁千會가 彦信에 대한 論斥의 신호를 올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이어 동 7일에는 兩司가 彦信이 역적 鄭汝立과 친절하다는 이유로 右相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論劾했고 다음 날에는 그들의 요구대로 彦信이 파직되고 말았다. 뒤를 이은 鄭緝의 供招에 의하여 宣政殿에서 이발과 함께 선조의 친국을 받고 中途付處되었으나 이때 彦信의 아들 慄이 자기 아버지와 汝立이 親厚하지 않음을 변명하는 彦信의 自明疏를 대신 써서 올렸는데 뒤에 여립의 집에서 언신의 편지가 나오게 되자 彦信이 人君을 欺罔했다는 이유로 다시 義禁府에 넘겨지게 되었다.

12월 4일에는 다시 사헌부에서 들고일어나 彦信이 告變 초에 역적을  斗護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위관이 되어서는 告變者를 推鞫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옥사를 지연시켰다고 밝히면서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 이리하여 언신은 남해로 유배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한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庚寅년 5월 16일에는 湖南人 梁詗(형), 梁千頃 등이 鄭彦信이 委官으로 있을 때 고변자 십여인을 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소를 올려 언신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에 선조는 대로하여 이 발언이 사실인가를 鞫廳에 참여했던 朝臣들한테 확인했다. 이때 兪泓 洪聖民 등은 彦信이 韓準의 고변서가 載寧郡守 朴忠侃을 告變者로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런 중대사는 마땅히 누가 누구의 진술에 의하여 고변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내용을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朴忠侃의 말이라고만 되어 있으니 이런 無根한 말을 만일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어지러움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같은 무근한 말을 하는 사람 十餘人만 참하면 허튼 소문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증언했으며 己丑錄에도 대체로 같은 기사가 보이며 宣祖實錄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언신의 위 발언은 아마도 사실이었던 것 같다.

위 발언이 문제가 되어 庚寅 7월 5일에는 彦信이 南海로부터 다시 잡혀왔는데 이번에는 언신을 어떻게 처벌하느냐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政院의 대신을 推鞫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 朝臣들의 지배적인 여론이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선조의 단안을 요청하게 되자 7월 18일에  賜死의 命이 내렸으나 대신들의 상소로 감형되어 7월 21일에 甲山으로 流配되었다가 선조 24년(신묘)10월에 謫所에서 죽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彦信의 경우도 鄭緝의 진술이 날조라는 것이 판명된 이상 모반에 가담했다는 흔적은 전혀 없으며 彦信의 자명소가 문제되었었지만 역시 彦信에게는 역모에 가담해야 할 하등의 객관적인 이유가 없었다. 당시 우상이었던 그에게 바램이었다면 좌상이나 영상의 자리였겠는데 그 한두 계급의 승진을 위해서 실패할 경우의 滅門의 患을 감수할 만큼 그렇게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彦信이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告變者를  참해야 한다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을 한 경위를 보면 명확한 제시가 없는  無根之說로 잘못하면 국가를 소란케 할 것이라는 염려에서  취해진 하나의 강경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발언은 汝立이 결코 역모할  리가 없다는 확신의 표현이요, 서인들이 捏造했을 가능성에 대한 시사며, 동시에 彦信자신이 동사건과 관계없음을  반증해 주는 웅변이었다. 彦信이 만일 汝立에 관한 모종의 혐의라도 알고 있었다면 汝立을 斗護하는 결과가 될 무모한 발언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4 . 3 崔永慶(1529-1590)의 獄事




永慶의 字는 孝元, 號는 守愚이며 曺植의 門人으로 벼슬이 持平에 이르렀으나 辭退하고 山林에 隱居하던 處士였다. 宣祖修正實錄을 보면 逆變이 일어났던 초기에 역도들이 모두 三峰으로 上將을 삼았다 함으로 三峰이 있는 곳을  探聞하여 혐의가 있을 만한 사람을 많이 잡아 들였으나 모두 변명을 하고 풀려났다. 이 때 역적의 도당인 李箕, 李光秀 등이 말하기를 三峰은 나이 60쯤에 몸이 비대하다 했고 어떤 이는 三峰은 나이 30쯤에 귀가  크고 얼굴이 수척하다고 했으며, 어떤 자는 삼봉은 나이 50쯤에 수염이 길고 키가 크다고 했다. ‘

賊黨 金世謙은 三峰의 姓이 吉가이고 晋州에 산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三峰은 羅州士族이라 했으며 朴文長은 三峰의 성이 최가이며 진주 私奴라고 하여 드디어는 三峰이 崔永慶이라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梁千頃이 만들어낸 말로 永慶을 해치려는 계책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李恒福(1556-1618)역시 白沙集에서 逆徒들이 供述한 말이 서로 다른데, 공술 가운데 永慶과 유사한 몇 말만 모아서, 한 역도의 공술에 따라 모두 三峰이 바로 崔永慶이라 하니 이것은 막연히 외부에 떠도는 말이 아니고 틀림없이 鞫獄이 진행되어 가는 내용을 소상하게 아는 자가 永慶을 三峰으로 만들려고 뜬소문을 퍼뜨려 사람의 귀에 익게한 것이라고 하여 三峰則 永慶說이 捏造임을 指摘하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서 날조된 三峰則永慶說은 汝立의 妻族으로 평소에 汝立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金溝 儒生 金克寬에 의해서 諸元察訪 趙騏에게 傳해졌고 趙騏는 다시 監司 洪汝諄에게 알렸다. 이에 汝諄이 한편으로 狀啓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慶尙右兵使 梁士瑩에게 편지해서 永慶을 잡아 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永慶을 推鞫해도 모반의 흔적이 나타나지를 않았고 또 永慶이 三峰이라는 설도 無根한 말이었음이 判明되어 結局 釋放이 허용되었다. 이때 諫院에서 永慶이 汝立과 상종했다고 주장하면서 永慶을 다시 推鞫할 것을 청하자 선조가 그 말을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正言 具宬이 대답하기를 慶尙道事 許昕이 監司  金晬한테서 들은 말이라 했으므로 永慶이 재차 투옥되었다. 再鞫에서도 永慶은 汝立과의 相從說을 부인하므로 許昕을 잡아다 물으니 許昕은 金晬에세서 들었다 했고, 晬는 姜景禧에게서 들었다 했으며 景禧는 晋州判官 洪廷瑞에게서 들었다했고 洪廷瑞는  晋州品官 鄭弘祚에게서 들었다 하여 弘祚를 잡아다 問招했지만 끝내 不服했고 이렇게 獄事가 지연되는 동안에  永慶은 獄에서 病으로 죽고 말았다.

永慶의 죽음에 대하여는 病死냐 自殺이냐 아니면 他殺이냐 등등의 많은 의문이 있다. 金尙憲의 石室語錄에는 鄭弘祚가 잡혀오게 되자 永慶이 汝立과의 相從했던 사실이 탄로될까봐 겁이 나서 죽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의심했다고 기록되어있다.(연여실 기술 3)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鄭弘祚가 相從說의 발설을  부인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대하여 “桐巢漫錄”에는 무근한 말을 만들어낸 洪廷瑞가 鞫廳에 잡혀가게 되자 겁이 나서 監官 鄭弘祚에게 <너한테 들은 말이니 숨기지 말라, 다른 말 말고 나 하라는 대로해서 患亂도 富貴도 함께 누리자>고 말하여 그렇게 못하겠다는 홍조를 半懷柔 半脅迫으로 發說者를 만들어 놓고, 鞫廳에 나아가 弘祚한테서 들었다고 供述하여  弘祚가 鞫廳에 끌려갔으나 6차나 刑을 받으면서도 끝내 발설을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廷瑞가 무근한 말을 만들어 놓고 지적할 사람이 없으므로 자기를 증거로 삼으려 하나 비록 무상한  사람이지만 어떻게 永慶 같은 어진 분을 모함에 빠뜨릴 수가 있느냐고 실토했다. 이에 反坐律로 처벌될 것을 두려워한 廷瑞가 獄卒을 매수하여 병으로 하루에 한두 잔의 술밖에는 식음을 거의 전폐하고 있는 永慶을 독주로써 殺害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宣祖도 <내가 이 무렵의 일을 알 수 없고 또한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永慶이 毒物로 살해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永慶이 독살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혐의도 없는 處士를 죽게 한 것만은 부정 못할 사실이며 또 하나 분명한 것은 永慶이 三峰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三峰을 謀主로  계획되었다던 汝立의 모반사건도 근본적으로 회의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4 . 4 . 그  밖의 獄事




  위의 논술한 세 경우 외에도 白惟讓 鄭介淸 曺大中의 죽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公論의 대표적인 경우이며 東人이라는 이유로, 汝立의 친족이라는 명목으로, 汝立과 아는 사이라는 죄목으로 己丑年에서 辛卯年에 이르는 3년 동안에 죽고 귀양가고 투옥된 자가 무려 천여명에 달했다 하니 그 참상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5.  鄭汝立 모반사건의 진상




위에서 고찰한 모반사건의 전모와는 전연 다른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사료들을 검토하고 지금까지에 밝혀진 분명한 사실과 문제점을 綜合分析하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보려 한다.




5 . 1  異說의 檢討    

宋翼弼이 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날조했다고 주장하는 기록으로서 翼弼이 사건을 날조하게 된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安塘(1460-1521)의 아버지 司藝 安敦厚가 늙어서 喪妻하고 그의 형 寬厚의 婢인 重今으로 하여금 가사를 돌보게 했는데 重今에게는 甘丁이란 딸이 있었다. 甘丁은 白川의 甲士 宋者斤金(송자근쇠)의 아들 宋璘에게 出嫁하여 祀連을 낳았다. 安敦厚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塘과 璁 兄弟와 金相 應箕의 부인을 모두 重今이 길렀으므로  安氏家에서는 重今을 마치 庶母처럼 생각했으며 중금의 外孫인 祀連에 대해서도 安氏家의 친 식구처럼 대접했고 집안의 모든 일을 祀連에게 맡겼다.

그런데 辛巳년(1521) 겨울에 祀連이 그의 妻甥 鄭瑚와 謀議하여 安塘 부인 殯葬時의 弔客錄과 役人名簿를 훔쳐내어 이것을 증거로 安塘의 아들 處謙(?-1521)이 無賴들과 大臣 죽일 謀議를 했다고 上變하여 獄事(辛巳誣獄)가 이우러져서 安塘의 집안이 滅族되고 그의 家産과 田民은 모두 祀連이 소유하게 되었다.(桐巢漫錄)   그리고 上變한 공로로  祀連은 堂上官이 되어 中宗에서 宣祖에 이르는 四朝를 대대로 섬겼으며 벼슬이 侍衛扈從大將에 이르렀는데  祀連이 바로 翼弼의 아버지다.  宋翼弼(1534-1599)은 賤人 出身으로 學問과 文章이 뛰어나서 李珥(1536-1593), 鄭澈(1536-1593), 成渾(1535-1598)등과 親分이 두터웠으므로 權力이 대단했다..

安氏家가 滅族될 때 處謙의 아우 處謹에게 賤妾이 있었는데 姙娠한 몸으로 避亂하여 아들 玧(一名 廷蘭)을 낳았다. 玧이 장성하여 明宗朝에 상소하여 安塘이 復官되었고 宣祖 때 塘에게 貞愍이란 諡號가 내려졌다. 宋祀連의 上變이 誣告였음이 밝혀진 뒤 玧은 宋家가 원래 安氏家의 婢의 一族으로 아직도 贖身 從良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安氏家에 부속되어야 한다고 掌隷院에 訴訟을 제기하여 권력이 대단한 송가를 判決事 丁胤禧의 機智로 패소케 했다. 패소로 인해서 안씨가의 노복으로 전락하게 된 翼弼 翰弼兄弟는 멀리 도망하여 성명을 바꾸고 海西에 숨어살면서 東人에 대한 復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桐巢漫錄]

기회를 노리고 있던 翼弼이 때마침 汝立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大同契를 만들어 鄕射禮를 빙자하고 無賴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연백지방을 드나들면서 시골 사람들에게 讖文을 보이며 李氏王朝가 망하고 鄭氏王朝가 설 때가 바로 이 때라고 속이고, 또 湖南에 王氣가 왕성하니 너희는 빨리 가서 鄭姓 가진 사람을 찾아 이 讖文을 보이고 함께 거사하면 부귀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궁벽한 시골의 무식한 무리들이 호남에 달려가니 鄭汝立의 명성이 자자하고 道內의 많은 인사들이 汝立의 집에 드나든다는 말을 듣고 이들도 汝立과 인연을 맺고 자주 드나들더니 술자리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점차로 퍼져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桐巢漫錄]

宋翼弼의 도피 경위에 대하여 ‘黨議通略’에는 봇둑 싸움으로 刑官에게 쫓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宣祖實錄”과 “掛一錄”을 보면 安氏家와의 爭訟에서 패한 것이 도피의 원인이었던 것 같으며  東人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汝立의 모반사건을 翼弼이 捏造했다는 위 주장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汝立이 일시적인 실의로 역모를 했을 가능성보다는 翼弼이 直接的으로 죄에서 탈피하고 東人에 대한 설욕을 위해서 사건을 날조했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며, 翼弼이 날조한 사건으로 보는 경우에  海西告變이나 海西逆徒들만의 逆謀自白도 쉽게 理解되기 때문이다.




5 . 2  眞相의 推定




이상의 검토에서 발견된 허다한 의혹과 모반사실을 단정함에 있어서의 모순과 모반혐의의 날조의 가능성과 분석과정에서의 분명해진 사실들을 종합하여 모반사건의 진상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본다.

죄를 지어 숨어살아야 하는 宋翼弼이  免罪할 길을 백방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표적이 떠올랐다. 그가 바로 鄭汝立이었다. 汝立은  博學多才하여 李珥와 친교가 두터웠으므로 일찍이 李珥의 천거를 받아 벼슬이 弘文館修撰에까지 이르렀으나 栗谷이 죽은 뒤에 공공연하게 그를 詆斥함으로 인해서 徐益과 李景震등의 論斥을 받는 등 西人들의 집중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宣祖도 汝立을 邢恕같이 번복무쌍한 사람이라고 미워했으므로 汝立은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있었다.

낙향해 있는 동안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존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汝立은 실의와 불만을 달래며 모여든 무사 선비들과 大同契를 만들어 매월 15일미면 활도 쏘고 술도 마시며 놀았다. 이 소식을 들은 趙憲(1544-1592)은 汝立이 꼭 역적을 圖謀할 것이라고 酷評을 했다. 이와 같은 汝立에 대한 西人들의 증오와 宣祖의 철저한 불신과 趙憲의 毒舌이 翼弼로 하여금 안심하고 汝立을 모함의 대상으로 택하게 한 동기였다.

그리하여 翼弼은 汝立을 역적으로 몰 심산으로 三峰과 汝立을 결부시켜 浪說을 퍼뜨리고, 구월산 중 義岩을 시켜 민간에 讖說을 유포시켰으며 해서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사주하여 汝立과 통하게 하여 汝立의 동정과 결부시켜 허다한 혐의를 만들어 놓은 다음 擧兵計劃까지 事前에 造作해 놓고서 義岩으로 하여금  載寧郡守 朴忠侃에게 밀고케 했던 것이며  한편 李綏, 趙球 등을 시켜 自服케 했다. 이렇게 날조된 사건이었으므로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鎭安 竹島에서 놀고 있던 汝立을 成渾의 門人인 閔仁伯을 시켜 때려죽이고는 自殺이라고 퍼뜨렸고  玉男이와 逆徒로 지목된 海西의 愚氓들을 위협과 誑誘와 酷刑으로 自服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           렇게 해서 鄭汝立의 謀叛事件은 부인 못할 엄연한 事實로 되어 버렸고 東人들은 受難을 당해야만 했으며 반면에 李綏. 趙球, 南截, 閔仁伯 등은 平難二等功臣의 勳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謀主라고 지적해 놓은 三峰이란 가공의 인물이 문제였다. 사건의 드라마는 翼弼이 만들었고 연출하는 현장에서 골치를 앓게 된 것은 정철이었다. 三峰을 입증하는 과정에서의 무리가 結局 三峰의 존재를 부정케 했고, 三峰의 부정이 모반사건의 날조의 가능성을 시사하게 되었다.




6 . 結語




이상의 서술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鄭汝立의 모반사건은 누구에 의해서건 날조된 사건이었다. 李珥가 죽은 뒤 宣祖의 李珥에 대한 禮遇가 엷어지면서 東人들은 매일같이 西人들을 彈劾함으로서 甲申年(1584)이래 西人들은 완전히 敗勢에 몰리게 되었고 朝廷은 東人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 때 이래 5-6년을 不運하게 지내던 西人들이 劣勢를 挽回하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이 鄭汝立의 謀叛事件이었다.

서인들은 이러한 날조된 사건을 바탕으로 己丑鞫獄이라는 당쟁 초유의 참담한 옥사를 일으켰고, 東人들은 이 옥사에 연루되어 허다하게 투옥되고 처형되어 갔다. 그러나 옥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東人 名士들의 組織이 모두 鄭澈을 求心點으로 한 西人들의 모함과 무고였음이 폭로되었고, 다음 단계에는 西人의 領袖였던 鄭澈이 東人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실각했으며 鄭澈의 실각으로 옥사는 반전되어 이번에는 東人들이 걸었던 流配의 길을 西人들이 걸어야 했다. 이처럼 謀叛事件과 己丑鞫獄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당초부터 계획된 黨爭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모든 史記들이 己丑鞫獄이 黨爭의 産物임은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鄭汝立의 謀叛事件만은 黨爭과 無關한 엄연한 하나의 旣存事實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汝立의 모반사건도 당쟁과 유리된 旣存事實이 아니고, 東人打倒를 목적으로 날조된 하나의 黨爭의 산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읽음

18

  [발해사] 발해사 관련 원문

발해사.hwp

2005/11/08

6617

17

  [발해] 사료를 중심으로 알아보는 발해건국

2009/09/06

5516

16

  [몸] '몸'의 기호학적 고찰

2008/10/24

5253

15

  [링크] 일본 고지도

2011/11/18

4055

14

  [논문] 朝鮮太宗의王權强化策에대한考察

2007/04/22

5926

13

  [논문]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2010/03/08

4559

  [논문]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대한 고찰

2007/08/22

6576

11

  [국역] 일성록 중 영화당 기사

2010/12/07

4700

10

  [국역] 실록 - 정조대 경장대고 관련

2010/12/08

5247

9

  [고려] 군역제

고려전기_군역제.hwp

2005/09/21

4553

8

  [고려] 과거제도

고려시대_과거제.hwp

2005/09/21

4448

7

  [고려] 고려 무신집권기 사병세력과 병권의 관계

2009/09/06

4525

6

  [고려] 경군

고려경군.hwp

2005/09/21

4280

5

  [고대사] 단군신화...

2009/09/06

4462

4

  [고대] 한반도 철제무기

한반도_철제무기.hwp

2005/09/21

4983

3

  [고대] 신화연구

단군신화_연구.hwp

2005/09/23

4680

2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 원문 발표문

광개토대왕비문_발표문.hwp

2005/11/09

5770

1

  [고구려] 고구려벽화무덤에 나타난 깃발(旗)연구

고구려_깃발.hwp

2006/09/04

5861

 

 

[1][2][3] 4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랄라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