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이상한 놈이 눈에 띄었다...
조롱박은 보통 늦여름에 꽃을 피워 입추가 지나면 열매를 맺는다는데... 이놈은 입추가 지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꽃을 피웠다. 늦깎이도 한참 늦깎이인 셈이다. 한번 피기 시작하더니 매일 밤마다 한송이씩, 가끔씩은 두송이씩 피운다. 밤에 피는 야화라니... 누가 찾아볼까 두려워서일까. 밤에는 제법 쌀쌀해진 지금까지도 계속 꽃을 피운다. 매일 밤마다 꽃놀음이다. 베란다 창을 밤에는 꼭꼭 닫아두니 그리 춥지 않아서인지...
조롱박은 유성생식이라 암꽃과 숫꽃이 따로 피고, 숫꽃의 꽃가루가 벌과 나비에 의해 암꽃의 암술에 옮겨묻어야 수정이 된다고 하는데...
아파트 15층 꼭대기에, 그것도 이미 싸늘해진 가을날 밤에 벌과 나비는 찾아들지도 않고... 그래서 인공수정을 시도해 봤다. 세필붓(미술용 #00호로 무척 비싼거다!)으로 밤마다 꽃술을 간지럽히고... 숫꽃과 암꽃이 구분이 안가 일단 술을 간지럽힌 뒤 꽃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붓을 고이 모셔두었다가 다음날 핀 꽃에 다시 간지럽혀주고... 이렇게 인공섹스, 아니 인공수정을 시도하기를 몇차례...
그러나 조롱박은 열리지 않았다.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도록 밤이 되면 꽃은 피고 아침이 되면 시들기만 했다. 꽃이 진 뒤에 조롱박은 커녕 시들고 말라 쭈그렁밤탱이가 된 꽃잎사귀만 앙상하게 남았다. 이젠 지쳤다. 에라 모르겠다. 내 팔자에 무슨 조롱박이냐. 붓을 팽개쳐두고 꽃이나 감상하자. 근데 이것도 한달 가까이 되니 꽃도 이젠 새롭지가 않다. 매일 밤마다 똑같이 피는 꽃이 뭐 새로운 게 있어야 말이지.
근데 어제부터 새로 솟아오른 꽃송이 하나가 심상치 않다. 지금까지 본 놈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다른 놈과 다르게 꽃받침의 아래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다. "아하!" 순간 직감했다. 바로 이놈이 암꽃이다. 암꽃이 바로 이렇게 조롱박 씨를 품어서 볼록한 부분이 있다던데. 그럼 지금까지 핀 것들은 모두 숫놈이었단 말인가.
밤을 기다렸다. 팽개쳤던 세필붓을 다시 주워들었다. 꽃의 안쪽을 살펴보니 역시 암술의 모양이 지금까지 본 숫꽃의 모양과 다르다. 숫꽃의 꽃가루를 조심스럽게 붓에 뭍혀 이놈, 아니 이년(!)의 거시기에 털어넣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나. 배신감도 이런 배신감이 없다. 지금까지 피고 진 꽃의 수를 세어보았다. 한번 피고진 꽃은 시들어 말라비틀어졌어도 그자리에 매달려있다. 세어보니 무려 33개! 이럴수가! 숫총각 33명이 피고 질 때까지 여태 기다려 이제야 처녀 한 명이 나왔단 말인가!
그동안 스러진 숫총각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할 것인가. 또 이 암꽃은 얼마나 콧대가 높은가. 상상해보라. 33명이 구애를 했는데 모두 거절당하고 마지막에 한 명을 간택한....
과연 조롱박이 열릴까? 아마 그 조롱박은 무척 맛이 짤 것 같다. 이렇게나 도도한 꽃이니...
랄라~ 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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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깨비는
조롱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