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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사] 장용영의 무예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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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2 21:08:15, 7810회 읽음)

- 장용영의 무예 훈련

                                                                                      * 글 : 무예24기연구소장 최형국

장용영에 군사로 뽑힌 사람들은 오직 실력으로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는 장용영이라는 부대가 정조의 온 정성이 담긴 부대였기에 그만큼 새 세상에 대한 의지를 장용영에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의 오군영 군사들이 훈련받았던 것 몇 배 이상의 혹독한 훈련이 계속되었고, 강철은 두드려 맞으면 더 강해진다는 원리처럼 장용영 군사들은 특수부대로써 그 위용을 갖춰나갔다. 장용영 군사들이 익혔던 기본 무예는 원기(元技)라 하여 화포, 조총, 활쏘기였으며 이외에 별기(別技)인 창검무예를 따로 익혔다. 또한 선기대라는 장용영 정예기병의 경우는 좌초와 우초로 나눠 좌초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며 적을 기만하는 마상재를 훈련하였고, 우초는 별기인 기창, 마상쌍검, 마상월도 등 실전에서 적의 예봉을 꺽는 기예를 훈련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대부분 정조의 어명으로 편찬된 개인 전투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기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특히 한자를 모르는 군사들을 위하여 언해본을 따로 만들어 보급했기에 당시 누구나 <무예도보통지>를 옆구리에 끼고 수련했을 정도였다.

이중 보군은 능기군(能技軍)과 십팔기군(十八技軍)으로 구분하였는데, 일년에 4번 시험을 봐서 실력이 떨어지고 게으른 군사들은 십팔기군으로 강등시키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능기군으로 뽑아서 무예 실력에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번직을 줄여 주고, 급료를 높여주는 등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 장용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당시 그들의 훈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 매일같이 군사훈련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월 한 차례 단체 진법 훈련을 하였고, 3일마다 12명 단위인 대(隊)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활, 조총, 창검무예를 익혀야 했다. 또한 부대를 지휘하는 초관급 이상의 장관들은 단체로 모여 한 달에 3번씩 활쏘기 시험을 보아야 했으며, 장교인 지구관이나 교련관은 한달에 두 번씩 진법을 강론하게 하였다.  

역사적 상상력을 조금 보태어 무예시험을 봤던 정조시대 어느 날로 돌아가 보자. 1788(정조12)년 9월 3일에도 무예시험이 펼쳐졌다. 이날은 보통 춘당대에서 시험을 봤던 것을 정조가 특별히 외국 사신들을 모시는 모화관으로 옮겨 서총대 시사라는 이름으로 시험을 보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날 최고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은 바로 장용영 선기장(선기대의 대장) 박성적이었다. 그는 이날 바람처럼 말을 달리며 마상쌍검을 펼쳐 상중(上中)이라는 성적을 받고 무명 1필과 베 1필을 상으로 받았다. 그날 아침 여러 장교들과 시험 준비를 하던 박성적은 ‘장용(將勇)’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수기를 허리에 차고 군사들에게 시험에 앞서 정신무장을 시키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군사훈련에 임하느라 군사들에게 특별히 전할 것이 없었지만, 황색의 수기를 번쩍 들어 올리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장관들만 서울에 시험을 보러가지만, 너희들도 열심히 수련해서 무예실력을 키워나간다면 곧 나와 함께 상께서 계시는 서총대에서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따르던 군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박성적은 장용영 군사들의 가슴에 새겨진 이름표 하나 하나를 눈에 그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군사들의 사열이 끝날 즈음 한 군사의 이름표가 고된 훈련에 반 즈음 찢겨 나간 것을 보고 그는 가차 없이 그 군사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장용영의 군사가 되어 자신의 복장을 확인하는 기본이다”라고 하며 군사를 꾸짖었다. 그가 신었던 신발은 목화로 전투 시에 발을 보호하도록 신발바닥이 나무로 되어있어 그 발에 걷어차이면 고통이 요즘 군화 못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장용영의 규율은 요즘의 해병대나 공수부대를 능가 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특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근무 후에도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거나, 도적질을 할 경우에는 정3품의 당상관이라 할지라도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도 요즘 군대처럼 행동강령이 있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군사 기밀을 절대 노출하지 말 것, 함부로 백성들에게 곡물이나 돈을 수탈하지 말 것, 서로 간에 절대 싸우지 말 것, 남의 군장을 빌려 사용하지 말 것, 거리에서 술 주정하지 말 것 등 장용영 군사로써 품위를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선기장 박성적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내 박성적은 발로 걷어찬 병사를 일으켜 세우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라고 어깨를 다독 거렸다. 이때 그 군사는 “3사(司) 5초(哨) 4기(旗) 2대(隊) 군사 김막돌,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디 좋은 성적 거두십시오”라고 하며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이후 박성적은 이런 사기를 뒤로 하고 박성적은 말에 올라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모화관에 당도한 후 그는 아침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최고의 성적인 상상(上上)에서 한 개가 모자란 상중이라는 성적으로 시험을 마쳤다.

여기에 소개된 작은 에피소드는 그저 모든 것이 역사적 상상물이 아니라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정조시대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복장이나 군기 등을 소재삼아 글을 전개시켰다. 이처럼 계급이 낮은 군사들뿐만 아니라 군사들을 지도하는 장관이상의 지휘관들도 실제 무예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곳이 바로 장용영이다.

또한 이러한 군사 개개인 무예훈련 뿐만 아니라 단체로 펼치는 진법 훈련 또한 장용영은 최고의 실력을 나타내었다. 특히 정조는 당시 중앙군영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과 장용영 군을 한꺼번에 합동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는데, 각 군영 대장이 다른 군영을 지휘해보도록 해서 장용영 군사들의 능력을 다른 군영대장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켜줬다. 보통 진법은 넓은 공간이 필요했는데, 한강가의 노량진을 비롯한 모래사장은 최고의 군사 훈련터로 손색이 없었다. 노량진에 모인 장용영 군사들은 장관의 수기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예진, 곡진, 방진, 직진, 봉둔진 등 다양한 진법을 정조 앞에서 펼쳐 보였다. 또한 기마병인 선기대의 경우는 특별히 학익진(鶴翼陣)과 봉둔진(蜂屯陣)을 중심으로 훈련하였으며 보병과의 연합진법인 오행진(五行陣), 현무진(玄武陣) 그리고 가장 화려한 육화진(六花陣) 등을 익혔다. 이런 대규모 연합진을 정조시대에는 의무적으로 매월 10일마다 익혔으니 그들의 전술감각은 당대 최고였을 것이다.

<정조실록>에 실린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용영의 기병 1초(哨)와 초군 7초를 좌우로 나누어 춘당대 아래 배치하고 장용위(壯勇衛)는 어가의 전후에 시위하고 깃대와 북을 벌여놓았다. 어가가 나아갈 때 포성을 울리고 천아성(天鵝聲)을 불며 배치된 군사는 다 같이 3번 탄환을 쏘았는데, 포성이 3번 나자 요란하게 취타(吹打)를 울렸다. 어가가 작문(作門)으로 나가자 포를 쏘고 천아성을 불며 배치된 군사는 깃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함치기를 모두 세 차례 하였다. ...(중략)... 장용위(壯勇衛)와 무예청(武藝廳)의 군사가 사면에서 충돌하다가 철수한 다음, 경군(京軍) 3초는 중앙에서 육화진(六花陣)을 치고 향군(鄕軍) 2초는 좌측에서 예진(銳陣)을 치고 아병(牙兵)은 우측에서 원진(圓陣)을 쳤다. 좌측 대열 장용위는 예진을 추격하고 우측 대열 장용위는 원진을 추격하며 무예청은 육화진과 충돌하다가 철수한 다음, 병방(兵房)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1초를 거느리고 단 앞에 나아가 방진(方陣)을 치게 하고, 장용위와 난후군(攔後軍)으로 앞길을 막고 구원의 길을 끊었다. 무예청은 충돌하면서 단 아래에 가서 각 진의 구원병과 앞길을 막는 장용위와 서로 추격한 후 각각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군영이 철수하여 자기의 위치로 돌아간 후 훈련을 마쳤다는 인사를 하고 해산하였다. 깃발을 내렸다.”

이렇듯 정조의 눈앞에서 신세계를 건설할 군사들이 정교한 군사훈련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정조는 아마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특히 수원 화성을 완성하고 아버지 사도세자(훗날 장조로 추존)의 묘소에 참배하러 와서 펼친 야간군사훈련은 그 자체로 척신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눈물도 잠시, 정조는 1800년 5월 30일, 강력해진 장용영의 군세를 믿고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취지의 ‘오회연교(五晦筵敎)’ 발언을 하고 불과 한 달이 못 되어 급서한다. 이 발언은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노론의 나라가 아닌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정조는 한스럽게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는 간다라는 소리도 남기지 못하고 그해 6월 28일 어린 순조만을 세상에 남기고 덧없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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