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깨비?

|

무예24기

|

마상무예

|

무예 수련

|

동영상

|

자료실

|

게시판


 [사극] 일본의 사극 전투장면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름 : 

(2007-07-02 22:24:54, 8036회 읽음)

 파일 1 : ga3.jpg (325.8 KB, 145회 전송됨)

 파일 2 : ga1.jpg (263.2 KB, 129회 전송됨)





오마이뉴스를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에 우리나라 사극의 고증 및 국방부 전통의장대의 고증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변명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TV 드라마에서 뭘 그런 것까지...,  의장대니까... 우리는 그저 공연하는 의장대니까..."

눈이 있으면 중국이나 일본의 사극과 그들 전통의장대의 모습을 살펴 보시길, 고증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나라 전통의 힘이 무엇인지...

일본과 중국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뒤 돌아 봅시다.

-푸른깨비-

* 아마도 이 정도 장면을 찍으려면 작금의 현실을 볼때 우리나라는 10년후, 아니 영영 못 찍을 수도 있겠습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1541년 21살의 나이로 가신들의 추대를 받아 아버지인 노부토라를 추방하고 영주의 자리에 올랐다. 신겐은 그가 불교에 귀의 하고 얻은 이름이었고, 이시기에는 하루노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루노부는 영주가 된 직후부터 시나노평정을 시도, 1542년부터 1552년까지 시나노의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하루노부에게 밀려나 시나노에서 추방당한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비롯한 시나노의 호족들은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이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에게 원조를 요청하였고, 가게토라는 이를 받아들여 하루노부에게 시나노에서의 퇴거를 요구하게 된다. 하루노부는 이를 거부 양자는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들의 전투는 서로의 영토간의 거리등을 고려하여 요충지인 가와나카지마(川中島)를 중심으로 잇달아 벌어졌다.

1553년 4월, 겐신은 5,000명의 군을 이끌고 가와나카지마에 진출해 온다.(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하루노부도 겐신도 미지의 상대를 대상으로 군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양자는 특별한 전투를 치루지 않고 5월에 함께 철퇴하게 된다.

같은해 8월 겐신의 지원을 받은 다케다의 오오이 오부히로가 모반을 일으키지만, 하루노부는 즉각 진압했다.

1554년 봄 하루노부는 겐신을 무력화시키고 시나노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슨푸성의 이마가와 요시토모, 오다와라성의 호조 우지야스와 삼자 동맹을 맺었고, 후방의 위협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1555년 4월, 다시금 다케다군과 나가오군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다.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전과 없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양국은 10월에 화친하고 철퇴한다. 하루노부는 나가오군이 에치고로 철퇴하자마자, 군을 돌려 기소씨를 공격했고, 기소씨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시나노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1556년에는 시나노 북부로 진출한다.

1557년 우에스기 겐신이 가와나카지마로 진출해 옴에 따라, 재차 다케다군과 나가오군이 대치하기 시작한다.(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양군 모두 전과 없이. 더욱이 겐신이 없는 사이에 가가, 엣츄에서 일향종의 일규가 일어났기 때문에 우에스기군은 철퇴한다.

1559년 하루노부는 불가에 귀의 이름을 신겐으로 개칭하였고, 1561년 4월 겐신은 관동관령이던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우에스기 마사토라로 개칭하고 관동관령직을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8월 1만8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가와나카지마로 진출했다. 이에 호응하여 신겐또한 2만의 병력으로 대응 양군이 다시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게 되고 5차례의 전투가운데 가장 격렬했던 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건 신겐이었다. 신겐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요충지인 가이즈산성에 3천명의 병력을 주둔시켜 두고 있었고, 이 성을 이용해 우에스기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본군과 협공을 할수도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점은 우에스기군도 알고 있었고, 겐신의 부하들은 겐신에게 이점을 지적했으나 겐신은 어쩐 일인지 그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전군 부동(不動)"을 명령했다. 그는 후방이 차단되어 가스가야마 성으로의 퇴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는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걱정마라. 만약 신겐이 가스가야마 성을 친다면, 우리는 고슈를 칠 것이다." 이에 겐신측의 동요는 수습되었다.

이렇게 되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건 신겐쪽이었다. 신겐은 겐신보다 병력이 더 많았고 본국에서 병량을 보급 받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에 있어서 우에스기군보다 더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로인해 장기전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투를 단기전으로 끝내기 위해 겐신쪽이 먼저 공격을 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겐신은 병력을 대기시킨체 움직이지 않았고, 더욱이 전군 1만 8천가운데 5천을 선광사주변에 배치하고 있었고 1만 3천만으로 2만의 다케다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신겐은 이 5천의 움직임이 신경쓰여 겐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겨울철이 다가옴에 따라 퇴로가 차단됨에도 겐신이 움직이지 않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다케다군의 병참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자 선제공격에 나서기로 결정을 하였다.

신겐은 군사인 야마모토 간스케의 조언에 따라 탁목조 전법을 채용하였다. 결전 전날 신겐은 고사카 마사노부와 사나다 유키타카가 지휘하는 1만2천의 별동대가 밤중에 출발하여 동이 트기 직전에 겐신의 본진을 기습하기로 하였고, 신겐 자신은 8천의 본군을 통솔하여 우에스기군의 퇴각로상에 위치한 하치만바라에 대기 퇴각하는 우에스기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미 다케다군의 군영 주변에 첩자들을 풀어놓은 겐신은 평소보다 많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다케다군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는 결론을 내리자마자 즉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다케다군보다 앞서 군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텅빈 본영에는 100명의 무사들을 남겨두어 병력이 남아있는것 처럼 위장을 했고, 작전이 실패했음을 알고 본진으로 돌아오는 별동대가 강을 건너야 하는 도하지점에 1천명의 별동대를 남겨두어 별동대의 본진합류를 지연시키게 하였다.  

때마침 생겨난 짙은 안개는 우에스기군의 움직임을 감춰주었고 겐신은 가와나카지마 주변에 있는 다케다군의 밀정을 모조리 잡아 죽임으로써 전투직전까지 자신들의 의도를 다케다군이 알지 못하게 했다.

안개가 겉힘과 동시에 우에스기군 1만 2천은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8천의 다케다군을 공격(차현)했고, 2만의 병력을 겐신을 포위섬멸하려던 신겐의 작전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전군이 각개격파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허를 찔린 신겐은 황급히 공격형인 어린진을 바꾸어 학익진으로 전환. 겐신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 순식간에 방어진이 뚫리고 신겐의 동생이자 유능한 장수였던 노부시게. 신겐의 곁에서 전략을 보좌했던 군사 간스케등이 겐신의 공격을 막다 전사했다. 신겐은 죽음직전까지의 위기에 몰렸으나 다행히도 그들의 희생으로 시간을 벌어 별동대가 도착하여 우에스기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상황은 역전하여 우에스기군이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우에스기군은 신겐의 바로 앞까지 진출해있었고, 겐신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신겐을 목전에 두고 퇴각을 했다. (이 때 겐신이 신겐의 진영에 단기로 돌입. 신겐과 1 대 1 결투를 벌이고 신겐은 부채로 막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겐신은 다케다군의 추격을 막으며 주력을 가와나카지마에서 퇴각시켰고, 전국시대 최고의 명승부라고 불리는 가와나카지마전투가 종결되었다.

이전투에서 양군합쳐 6천여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양군의 병력손실은 80%에 육박했다. 다케다군은 다수의 중신들을 잃었으나 시나노장악에 성공함으로써 목표달성에 성공하였다.

이전투 이후 다시금 양군은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였으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우에스기군이 시나노에서 완전히 철퇴함으로써 신겐이 상락도중에 죽을때까지 대규모전투는 가와나카지마에서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그림  : 가와나카시마전투 병풍도 -다케다 신켄군의 진형-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읽음

77

  [조선의 화약무기] 조선 병졸은 추풍낙엽? 엉터리 사극은 그만

2006/09/13

8918

76

  [마상무예] 잃어버린 대륙을 향하여... -마상무예 전지훈련을 마치며-

2006/09/17

6002

75

  [야조] 조선시대 야간군사훈련이 펼쳐진다.

2006/10/10

8317

74

  [기사-마상궁술] 사거리 문제

2006/10/20

7082

73

  [무예사 고증] <주몽>, 칼로 말 궁둥이 계속 때릴래?

2006/11/22

8245

72

  [전쟁사 고증] <주몽> 야철대장님, 투구 좀 만들어 주세요

2007/02/19

7574

71

  [경기저널] 조선의 마상무예가 부활한다!

kg1_s.jpg

2007/03/29

6694

70

  [국방부 전통의장대] 미니스커트보다 짧은 조선시대 갑옷?

2007/06/20

10078

  [사극] 일본의 사극 전투장면 -가와나카지마 전투-

ga3.jpg

2007/07/02

8036

68

  [답글]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조선의 군사력

2007/07/31

7614

67

  [야조] 2007 조선시대 야간 군사 훈련 야조가 펼쳐진다.

2007/10/09

7503

66

  [답글] 국궁 방식중 온깍지와 반깍지

2007/11/29

9168

65

  [무예사] 조선후기 왜검교전 변화 연구 -역사민속 25호- 최형국

yak.jpg

2007/12/07

7150

64

  [연구] 한/일 차세대학술포럼 국제학술포럼 참가자의 연구소개

cha.jpg

2008/03/03

6397

63

  [수련] 자게 1887번의 답글 -수련의 철학?-

2008/03/23

6075

62

  [무과] 조선 시대 무과 시험은 어땠을까

2008/04/22

9862

61

  [군사사] 朝鮮後期 軍事 信號體系 硏究 -육사박물관 학예지 15호-

army.jpg

2008/11/26

5650

60

  [무예사 연구] 화성의 군사제도

2009/02/13

5696

 

 

[1][2][3][4] 5 [6][7][8][9]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랄라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