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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봉수군으로 차출된 백동수 - 정말 이리똥을 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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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4 12:38:28, 6171회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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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봉수대. 조선시대 봉수대는 다섯 개의 커다란 굴뚝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평상시에는 한 개, 적이 국경 밖에 출몰하면 두 개, 방어선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넘어오면 네 개, 마지막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개의 봉수를 올려 신속하게 근처의 군영과 중앙에 현장의 상황을 알렸다. 그런데 여기에는 4개?... 헉~>

<사진 2> 17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 남산을 중심으로 다섯 개 봉수로의 직간선 봉수대와 더불어 도로와 하천, 산맥, 성곽, 역참 등을 상세히 그려놓았다.


<봉수군으로 차출된 백동수 - 정말 이리똥을 태웠을까?>

-【봉수(烽燧)】 전통시대 최고의 통신망, 봉수

지금의 정보 전달 속도는 빛의 속도라 할 정도로 빠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상대방과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은 이젠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인터넷, 인공위성 등 정보를 전달하는 다양한 수단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는 우리가 숨 쉬는 공간을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통신수단이 없던 옛날에는 어떤 방법으로 전쟁 등의 위급한 소식을 신속하게 알렸을까? 이럴 때 사용한 것이 바로 ‘봉수(烽燧)’이다. 봉수는 산꼭대기에 봉수대(烽燧臺)를 두고 밤에는 봉(烽, 횃불)으로, 낮에는 수(燧, 연기)로 변방을 비롯해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 곳에서 중앙과 각 지방의 군영에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군사통신 체제이다. 그래서 횃불만을 말하는 봉화(烽火)보다는 횃불과 연기를 모두 포함하는 봉수(烽燧)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물론 봉수 이외에도 말을 이용한 파발(擺撥)이 있었다. 그러나 파발은 그 유지비용이 많이 들고 양반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사회적 물의도 일으켰다. 이에 반해 봉수는 오직 군사 통신으로만 사용했으며, 그 전달 속도 또한 그리 느린 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봉수는 삼국시대 이래 변방의 상황을 알려주는 좋은 통신수단이었다.



- 봉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봉수는 기록상 기원전 1050년 세워진 중국 주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봉수에 대한 이야기는 미인 때문에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다는 중국의 유명한 고사인 ‘홍안화수(紅顔禍水)’에 등장한다. 주나라 유왕(幽王, ?~BC771, 재위 BC782~BC771)이 애첩 포사(褒姒)가 웃는 모습을 보려고 거짓 봉화를 피워 올려 지방의 제후들이 급히 불러들였다는 내용인데, 이것을 보면 그 당시에 봉수제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삼국시대에 봉수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살펴보면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531, 재위 519~531) 때에 봉화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왜구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던 고려 정부가 봉수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들에 대처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의 봉수를 보면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피우는데, 평시에는 한 개, 이급(二急, 경계 태세)이면 두 개, 삼급(三急, 교전 준비)이면 세 개, 마지막으로 사급(四急)인 네 개의 봉수가 오르면 전투 시작을 알리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고려의 봉수제도는 조선으로 이어졌는데,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지금의 남산(당시 목멱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봉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의 기본적인 기틀을 확립하려고 애쓴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에 이르러 거화법(擧火法)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봉수 체제가 수립되었다. 당시 새롭게 정비된 내용을 보면, 평시에는 한 개,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개(再擧), 적이 해안 가까이 밀고 들어오면 세 개(三擧), 우리 전투선과 교전하면 네 개(四擧), 마지막으로 적이 육지에 상륙하면 다섯 개(五擧)의 순으로 고려보다 좀더 세밀하게 봉수가 올려졌다. 이는 해안 지방을 괴롭히던 왜구를 상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북방의 야인들에 대비한 경우는 적이 국경 밖에 출몰하면 두 개, 수비선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넘어오면 네 개, 마지막으로 우리 군사와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개의 봉수를 올려 신속하게 근처의 군영과 중앙에 현장의 상황을 알렸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핵심 봉수대인 직봉(직선봉수, 直線烽燧)과 보조 봉수인 간봉(간선봉수, 間線烽燧)으로 구성됐으며 전국에 다섯 개의 봉수로를 두었다. 최종 도착지인 남산에서는 봉수가 올라오는 방향과 상태를 분별해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고 임금에게 변방의 상황을 알렸다. 특히 밤중에 봉수가 여러 개 올라오면, 병조에서는 그 즉시 숙직하는 승정원 관리에게 보고하고 잠든 임금을 깨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만큼 봉수는 국가 위급 사태를 알리는 최고의 통신 체계였다.


당시의 5대 핵심 봉수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로는 함경도 경흥(서수라)에서 시작해 강원도를 거쳐 남산으로 오는 것이고, 제2로는 경상도 동래(다대포)에서 충청도를 거쳐서, 제3로는 평안도 강계(만포진)에서 황해도를 거쳐서, 제4로는 평안도 의주(고정주)에서 황해안을 거쳐서, 마지막 제5로는 전라도 순천(돌산도)에서 시작해 충청도를 거쳐서 남산으로 올라오는 방식이었다. 전국에 설치된 봉수대는 많은 경우 703개나 되어 웬만큼 높은 산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봉수대 가운데 제주도에만 63개가 배치되었다.



- 봉수군으로 끌려가면 얼어 죽는다



보통 봉수대에는 봉수군(烽燧軍)과 오장(伍長)이 배치되었다. 봉수군은 밤낮으로 망을 보고 봉수대에 불을 올리는 일을 직접 담당했고, 오장은 봉수대에서 봉수군과 함께 지내면서 봉수군을 감시하고 해당 고을 수령에게 이를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들 중 봉수군은 비록 양인의 신분이었지만 천인이 하는 일을 해 사회적으로 천시받던 신량역천(身良役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한때 시대를 풍미하다가 유배 보내진 끈 떨어진 양반이 이 일을 함께했으니 봉수군의 일이 얼마나 천시받고 힘들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반 군역은 60세가 넘으면 끝났지만, 봉수군은 인원이 부족하면 군역이 연장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환갑을 넘긴 노인네가 산꼭대기까지 오르락내리락하기 일쑤였다. 또한 봉수대에는 제대로 살 수 있는 집을 지어 놓은 것이 아니라 대충 거적때기를 걸쳐 놓은 것 같은 막사만 덩그러니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지내야 하는 봉수군에게는 이런 막사 생활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그나마 바람이라도 시원해서 견딜 만했지만 찬바람과 눈발이 몰아치는 겨울이면 그들은 동태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식량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 했다.

당시 봉수군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중종 때 지중추부사였던 안윤덕(安潤德, 1457~1535) 등 14명의 무신이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을 임금에게 전하는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양계(兩界, 평안도와 함경도)의 군민(軍民)은 넉넉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그중에도 연대군(烟臺軍, 봉수군)은 가장 가난한데도 요역(徭役)은 무겁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구분하지 않고 항상 베옷을 입고 언제나 연대(봉수대)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생이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됩니다. 심지어 성 위에서 얼어 죽는 사람도 많으니, 실로 이는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서울 안의 형벌을 주관하는 각 관사(官司)에서 속전(贖錢)으로 징수하는 면포를 해마다 적당한 양을 수입(輸入)하여 골고루 나누어주어서, 망보는 척후(斥候)를 충실히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중종실록(中宗實錄)』 21권, 중종 9년 10월 임인



봉수군들은 10일 맞교대로 근무했는데, 엄동설한에 10일을 찬바람 쌩쌩 부는 산꼭대기에서 거적 하나 걸친 행색이니 건장한 청년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겨울이 되면 임금의 명으로 봉수군들에게 방한복이 지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달콤한 유혹을 그냥 두고만 봤겠는가. 중간 관리들의 농간으로 안에 들어갈 솜은 작년에 튼 솜에다 들어갈 양도 확 줄여, 대충 겉모습만 방한복을 만들어 지급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정조는 이러한 악습을 막고자 일종의 감사관 격인 적간관(摘奸官)을 현장에 보내 봉수군이 입고 있는 방한복을 저울로 달아보거나, 속을 뜯어 솜이 햇솜인지 묵은 솜인지를 확인해 만약 비리가 포착되면 지방 수령을 파직하고 엄벌에 처하기도 했다.



- 봉수 때문에 실패한 이괄의 쿠데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며 대의명분이 아닌 실리추구의 외교 정책을 구사한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또 다른 쿠데타의 조짐을 포착하게 된다. 1624년, 인조를 도와 광해군 정권을 뒤엎는 데 강력한 무력을 지원한 반정 공신 이괄(李适, 1587~1624)이 수도를 점령한 것이다. 다급해진 인조는 공주까지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이괄은 반정에 성공하고 나서 논공행상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게다가 변방으로 발령받아 후금과 언제 전쟁을 치를지 모를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아들이 반란을 준비한다느니, 자신도 잡아들여 수사해야 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이괄은 더는 충신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임금의 특명을 받고 자신의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 일행을 몰살시키고 북방의 야인들을 향해 겨누던 칼을 돌려 서울로 향한 것이다.

이괄은 말 그대로 구름같이 기병대를 이끌고 순식간에 서울로 진격했다. 당시 실전에서 단련된 최정예 기병을 1만 명 넘게 보유한 그에게 인조는 그저 타도해야 할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결전의 의지를 불태우던 이괄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아주 쉽게 수도 서울을 접수하자 그의 마음속에는 적을 얕잡아 보는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을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낼 때에도 그리 쉽지 않은 결행이었지만, 이렇게 서울에 당당히 재입성한 것이 그 자신도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괄의 장밋빛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주로 도망간 인조에게도 지략이 풍부한 장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원수 장만(張晩, 1566~1629)을 비롯한 부원수 이수일(李守一, 1554~1632)과 남이흥(南以興, 1540~1627), 정충신(鄭忠信, 1576~1636) 등 명장들이 인조의 휘하에 있었다. 그중 이괄의 난에 결정적인 승부수를 띄운 사람은 정충신이었다.

정충신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민심이 반란군에게 기울 것을 우려해, 즉시 도성을 압박할 안현(鞍峴,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안산(길마재))을 접수하자고 주장했다. 선발대를 이끌고 안현에 도착한 정충신은 가장 먼저 근처의 봉수대를 접수했다. 그리고 이괄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한 개의 봉수를 올렸다. 만약 이때 다른 수의 봉수가 올랐다면 인조 또한 패주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정충신의 작전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밤새 관군들이 안현에 집결했으나 이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이괄은 안현의 소식을 들었지만 토벌군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는 “이것들을 쳐부수고 나서 아침밥을 먹자!”라고 하며 무사 안일하게 전투에 나갔다. 물론 이괄에게는 정예의 기병대와 임진왜란 때 실제 전투를 경험한 한명련(韓明璉, ?~1624) 휘하의 항왜군(降倭軍, 임진왜란에서 투항한 왜군으로 이루어진 부대) 포수 부대가 있어서 그들의 군세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기운과 함께하는 것이다. 허명심에 찬 반란군들은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기운이란 곧 날씨와 지형지물의 배치를 말한다. 안현 전투 당시 이괄이 이끄는 반군은 처음에는 바람을 등지는 유리한 상황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싸움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반군이 바람을 마주하면서 싸워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반군은 휘날리는 먼지와 모래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후 급작스럽게 공격 방향을 바꾸려던 이괄의 대장기가 흔들리자, 이를 퇴각 신호로 오해한 반군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병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도망가던 반군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결국 이괄은 목 없는 귀신이 되고 역사에서도 반역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만 봉수 때문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것은 아니다. 조선 최대의 굴욕 사건인 병자호란 당시 늦어도 24시간 안에 도착해야 할 봉수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판단 착오 때문에 중간에 끊겨버렸다. 제때 피신하지 못한 인조 또한 청 태종(太宗, 1592~1643, 재위 1626~1643)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던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이처럼 봉수는 전통시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호 체제였다.



- 봉수군들은 죽지 않기 위해 뛰었다


이렇게 중요한 군사신호 체제였던 봉수도 분명히 한계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와 안개였다. 보통 봉수대의 불은 화력이 좋은 이리 똥이 최고이나 구하기 어려워 쇠똥이나 말똥을 이용했다. 그러나 악천후가 계속되면 봉수는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었다. 큰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몰아치면 불을 피울 수 없었고, 안개가 잔뜩 낄 때면 연기든 불이든 아예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봉수군에게 이런 날은 죽음의 날로 기억되었다. 왜냐하면 봉수가 무용지물이 되면, 그 임무를 봉수군이 직접 했다. ‘오직 믿는 것은 두 발뿐’이라는 마라토너처럼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렸다. 이것을 치고(馳告)라고 하는데, 요즘의 산악 마라톤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달리다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해 보고 시간이 지체되면 봉수군에게는 가차없이 곤장 세례가 가해졌다. 봉수군들은 말 그대로 숨이 턱에 차 초주검이 될 때까지 쉼 없이 달려야 했다. 물론 그냥 맨몸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봉수군 표식인 부신(符信) 반 조각을 들고 다음 봉수대에 도착해서 퍼즐처럼 두 개를 맞춰서 그 진위를 가렸다.

그렇게 달려간 봉수대의 상황 또한 좋지 않으면 그곳의 봉수군도 똑같이 죽을힘을 다해 다음 봉수대로 달려야 했다. 문제는 봉수대와 봉수대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다는 것이었다. 국경 근처의 연변 봉수의 경우 가깝게는 3리(1리는 약 400미터)에서 멀게는 15리나 되었고, 그 중간에 있는 내지 봉수는 가까운 거리라고 해야 10리이고, 보통 30~50리, 멀게는 70리였다. 봉수군들은 그 먼 거리를 오로지 살기 위해 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짚신을 신고 말이다. 험난한 산길을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때로는 눈이나 비를 맞으면서 달려야 했던 봉수군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두 봉수대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고 구름이 조금 끼었을 때는 포를 쏘아 신호를 알리는 신포(信砲) 또는 나팔을 부는 천아성(天鵝聲)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봉수에는 또 하나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봉수군들의 관성이다. 전쟁이 어디 그렇게 자주 일어나고, 왜적들이 날마다 출몰했겠는가.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시기, 봉수군들은 봉수대를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냥 의례적으로 평화롭다는 한 개의 봉수를 올려버리기 일쑤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것처럼 누구도 봉수가 올라오는 시간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봉수군들은 알아서 그 시간을 대충 헤아려 봉수를 올리는 등 그 사태의 심각성은 도를 넘어설 지경이었다. 심지어 낮에는 대충 집에서 놀고 있다가 저물면 봉수대에 올라 의례적으로 봉수 하나를 올리는 일까지 생겼다. 조정에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봉수군에게는 강력한 처벌 규정이 따라다녔는데, 『속대전(續大典)』을 비롯한 몇몇 사료를 보면 봉수와 관련된 벌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만약 거짓된 내용을 봉화로 올린 자는 즉각 사형에 처하고, 둘째 평온무사할 때에도 점호에 결근한 자는 군관이든 봉수군이든 가리지 않고 곤장형에 처하고, 셋째 봉수대 근처에 의도적으로 불을 낸 자는 목을 베어 죄를 물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적이 출현했는데도 봉수를 올리지 않은 자는 곤장 80대를 맞고 해당 수령 또한 곤장 70대를 맞았으며, 적이 국경 근처에 나타났을 때 봉수를 올리지 않은 자는 곤장 100대, 적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 봉수를 올리지 않은 자는 즉각 목을 베어 죄를 세상에 알렸다. 보통 곤장 20대가 넘어가면 실신하고 엉덩이 살이 모두 뭉개지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니 곤장 70, 80대는 결코 가벼운 처벌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로 접어들어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면서 봉수대 관리가 소홀해졌다. 그래서 막상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시련이 닥쳤을 때 봉수는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1587년(선조 30) 2월 봉수 체제는 잠시 폐쇄하고 대신 말이나 사람이 달려서 소식을 전하는 파발을 이용했다. 그러나 파발은 비용 문제와 양반들이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폐단이 발생해, 숙종 때에 봉수 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파발과 함께 이용하도록 했다.



- 계곡 선생, 봉수대에 피어오른 봉화를 노래하다

어릴 적 저녁 무렵이면 고향 마을 굴뚝에서는 어김없이 긴 황소울음 같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연기가 붉은 노을에 걸릴 때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마치 봉수대에 오른 연기처럼 굴뚝의 연기를 보고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 됐구나 하며 지게를 짊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조선 중기 문단을 대표하는 계곡(鷄谷) 장유(張維, 1587~1638)는 봉수대에 피어오른 봉화를 보고 그의 문집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에 그윽한 시 한 수를 남겼다. 계곡의 시 한 수로 긴 봉수의 이야기의 마무리를 갈음해본다.



봉화(烽火)



눈 내린 저쪽 어둑한 일천 봉우리                 雪外千峯暝

구름 사이사이로 명멸하는 몇 점 불빛         雲間幾點明

멀고 먼 변방에서 봉화 올리어                      遙遙自關塞

밤마다 서울에 알리는 것이렷다                   夜夜報秦城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는 불                  風急偏難定

누가 더 밝은지 별빛도 다투려 하는구나      星疏乍欲爭

썩어빠진 유자(儒者)들 세상 난리 봉착하여腐儒逢世亂

이 불빛 보게 되면 가슴 철렁하리라             看此寸心驚



** [조선무사] , 최형국 저, 인물과사상사, 2009 중 일부  <【봉수(烽燧)】 전통시대 최고의 통신망, 봉수


-(사)무예24기보존회 무예24기연구소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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